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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석의 조선 후기史 팩트추적(19)] 한여름에도 얼음을 사용했던 선조들의 지혜 

동빙고, 국가 제사 때 사용하는 얼음 저장소였다 

한강 변 산기슭에 지하 창고 만들어 보관… 얼음 채취·저장을 국가가 관장
성동구 옥수동에 ‘동빙고’ 위치, 용산 ‘서빙고’에는 관청에서 쓸 얼음 보관


▎서울 지역 아침 기온이 영하 9도를 기록한 지난 1월 20일 오전 서울 한강 광진교 일대가 얼음으로 덮여 있다. / 사진:연합뉴스
어렸을 때 여름이면 얼음 사 오는 심부름을 가곤 했다. 얼음값이 얼마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얼음집 주인이 커다란 얼음 덩어리에서 달라는 만큼 톱으로 잘라서 새끼로 묶어주면, 그 얼음을 손바닥으로 한 번씩 문지르면서 들고 오던 때의 시원함은 생각이 난다. 더운 여름날, 이렇게 사 온 얼음을 잘게 쪼개서 넣은 과일화채를 먹던 기억도 있다. 요즈음은 시원한 간식이 많아져서 그런지, 더운 여름에도 얼음을 띄운 화채가 맛있는 먹거리로 떠오르지는 않는다.

한국의 냉장고 보급률은 1965년에는 1%가 되지 않았고, 1975년에도 6.5%였다. 냉장고가 충분히 보급되기 전까지 많은 집에서 여전히 얼음을 사다 먹었다. 요즈음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1960년 대까지는 겨울에 한강에서 채취한 얼음을 보관해뒀다가 여름에 판매하는 일도 많았다. 얼음 관련 자료를 찾아보니, 1950년대 후반에는 이 천연빙과 구별하기 위해 제빙공장에서 만든 얼음에는 노란색 물감을 들여서 팔게 했다는 기록도 있다. 어려서 새끼줄로 묶어서 사 오던 얼음의 색깔은 흰색이었으니, 이 얼음은 공장에서 만든 얼음이 아니라 겨울에 채취해뒀던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음을 인공적으로 만드는 기술이 나오기 이전에는, 겨울에 얼음을 채취해 저장해뒀다가 여름철에 사용했다. [삼국사기]나 [고려사] 같은 한국 역사책에도 이런 기록이 많이 있고, 조선시대의 기록에는 더욱 많은 자료가 남아 있다. 특히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 소고기와 생선 소비가 늘어나면서, 얼음 수요가 매우 커졌다. 20세기 초에 얼음공장이 생기기 전에는 겨울에 채취해둔 천연빙으로 모든 얼음 수요를 해결했다.

조선 초기에는 얼음을 채취하고 저장하는 일을 국가에서 관장했다. 높은 벼슬을 하는 사람에게는 개인적으로 얼음을 보관하는 창고를 가질 수 있도록 허용했지만, 평민이 사적으로 얼음을 채취하고 보관하는 일은 금지했다. 이런 상황은 18세기 후반에 상당히 바뀌어서, 일반인도 여름에 얼음을 쓸 수 있게 된다.

서울 용산구에 있는 ‘서빙고동’은 조선시대 얼음을 저장하는 창고인 서빙고가 이곳에 있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얼음을 저장하는 창고를 빙고(氷庫)라고 하는데, 조선시대 이 지역에는 서빙고가 있었고, 현재 성동구 옥수동 지역에는 동빙고가 있었다. 동빙고에는 국가에서 지내는 제사 때 쓰는 얼음을 저장하고, 서빙고에는 나라에서 사용하거나 여러 관청과 높은 관료들에게 나눠주는 것을 저장했다. 내빙고라고 해 대궐에서 사용하는 얼음을 보관하는 얼음 창고도 따로 있었다.

서울에서 사용하는 얼음은 한강에서 채취하는데, 얼음의 두께가 12㎝ 정도 이상이 되면 채빙(採氷)을 시작한다. 낮에는 얼음이 녹을 염려가 있기 때문에 채빙 작업은 밤에 이뤄졌다. 밤에 강에서 잘라낸 얼음을 쌓아뒀다가 아침에 이를 일꾼들이 등에 지고 창고로 날랐다. 이 작업은 매우 고되고 위험해 얼어 죽는 인부가 생기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작업은 숙련된 인부가 아니면 해내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강변에서 이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이 있었다.

현재 남아 있는 빙고는 남한 몇 군데에 있는 석빙고인데, 조선시대 서울에서 얼음을 저장하던 동빙고나 서빙고는 이처럼 돌로 만든 것이 아니었다. 빙고를 어떻게 만들었는지는 정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몇몇 기록이나 그림을 통해 빙고를 만드는 과정과 빙고의 모양을 추정해볼 수 있다. 빙고를 설치하는 장소는 얼음을 채취하는 곳에서 멀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서울에서는 주로 한강 변의 산기슭에 만들어뒀다. 겨울에 채취한 얼음을 여름에 사용할 때까지 녹지 않도록 보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므로, 햇볕이 든다거나 물이 흘러들어가지 않는 장소를 골라서 빙고를 만들어야 했다.

음력 12월에 창고에 저장, 이듬해 춘분에 열어


▎일제강점기 얼음이 두껍게 언 겨울철 한강에서 채빙(採氷) 작업을 하는 광경을 담은 사진엽서. 왼쪽의 설명문에 ‘내지인(內地人, 일본인)에게는 진귀한 광경’이라는 구절이 있다. / 사진:서울역사아카이브
얼음을 보관하는 창고가 일반 건물과 다른 점은 지상이 아니라 지하에 짓는다는 것이다. 땅을 파서 지하 창고를 만든 것이 빙고다. 빙고 한 채는 여러 칸으로 나뉘어 있고, 매 칸마다 단열 효과를 높이기 위해 바닥과 천장 그리고 사방 벽에 갈대를 채워 넣었다. 각 칸에 얼음을 쌓는 방식은 일정한 규격에 맞춰 자른 얼음을 촘촘히 쟁여서 얼음의 틈 사이로 바람이 통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중요했다. 만약 바람이 통하게 되면 얼음이 녹거나 부서지기 때문이다.

매년 음력 12월에 얼음을 빙고에 저장하고, 이듬해 춘분에 빙고를 여는데, 때마다 모두 물을 다스리는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빙고에 저장한 얼음 가운데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양은 보관한 것의 3분의 1이고, 나머지 3분의 2는 저장하는 동안 녹아 없어졌다. 빙고 안은 언제나 습하고 물기가 있어 목재가 금방 상했고, 창고 안에 단열재로 쌓아놓은 갈대나 지붕을 덮은 짚은 화재에 취약해 불이 나기도 했다. 빙고를 끊임없이 새로 짓거나 보수했던 이유다.

얼음의 용도는 여러 가지다. 여름에 더위를 이길 수 있도록 시원한 음료를 만드는 데 직접 사용한 것이 대표적이다. 음식을 보관하는 데도 썼다. 왕족이나 높은 관료가 죽어 장사를 지낼 때, 시신의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 시신을 보관할 때도 얼음이 필요했다. 각 지방에서 궁중에 진상하는 특산물 가운데 생물이 상하지 않도록 수송할 때도 얼음이 필요했다. 이 기록도 쉽게 볼 수 있다.

[승정원일기] 인조 3년(1625) 8월의 기록을 보면, 황해도에서 대궐의 대왕대비 계신 곳에 진상한 대합조개와 참숭어가 상해 벌레가 생겼다. 이것은 운반하는 사람이 얼음을 제대로 채워 넣지 않은 탓이니, 담당자를 잡아 가둬야 한다고 보고한 것이 있다. 그리고 영조 36년(1760년) 5월에 충청도 예산에서 상급기관에 보고한 문서에는 서울의 대궐에 진상하는 생전복에 넣을 얼음을 구하기 어렵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이런 기록을 보면 서울뿐만 아니라 지방에도 얼음을 보관하는 빙고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왕실과 관청에 올릴 진상품에 주로 사용


▎무더위가 한창인 지난 7월 4일 경기도 부천시 대원냉동산업사에서 직원이 얼음을 옮기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조선 후기의 지방 지도 가운데는 빙고를 표시해놓은 것이 여러 개 있다. 평안도 중화의 지도규장각 소장본이 대표적이다. 이 그림 지도에서 빙고를 보면 다른 건물에 있는 기둥이 없고, 기와집이 아닌 초가집임을 알 수 있다. 빙고가 산 밑에 있었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황해도 장단의 지도에 나타나는 빙고를 따로 확대해 보면 중화의 빙고와 마찬가지로 기둥이 없고 초가지붕임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얼음의 용도는 이와 같이 주로 왕실과 관청에서 사용하는 것이었다. 조선 후기에는 민간에서도 얼음을 사용했고, 그 양이 관청에서 쓰는 것보다 많았다. 서울에 들여오는 생선의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 얼음을 사용하는 일이 많아졌고, 서울에 많이 생겨난 푸줏간에서도 얼음이 필요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정조의 총애를 받았고, 정조는 다산을 크게 믿었다는 점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정조는 그의 말년에 정약용을 황해도 곡산부사로 보냈다. 곡산은 대부분이 산이고, 인구도 적은 지역이다. 정조가 권력의 요직인 승정원의 동부승지 자리에 있는 다산을 황해도 곡산으로 발령을 낸 이유는 끊임없이 다산을 공격하는 무리들에서 다산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다고 한다. 잘 알려진 대로 정조가 승하한 후 다산은 18년이라는 오랜 기간 동안 유배 생활을 겪게 된다.

다산이 곡산부사 시절에 있었던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중에는 얼음을 저장하는 방법에 대한 것도 있다. 조선시대에 얼음을 저장하는 일은 서울에서만이 아니었다. 얼음이 어는 지방에서는 대부분 겨울에 얼음을 채취해 저장했다. 특히 서울의 대궐에 진상하는 물품을 신선하게 보관하려면 얼음이 반드시 필요했다. 각 지방에서도 얼음을 보관하는 빙고를 자체적으로 만들어 얼음을 저장했던 까닭이다. 그런데 여기에 들어가는 비용이 상당히 많을 뿐 아니라 얼음 채취와 보관이 주변에 민폐를 끼치기 일쑤였다.

정약용은 곡산에 부임한 후, 얼음을 채취해 저장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아전들은 다산이 여름에 얼음을 쓰지 않겠다는 말로 알아들었다. 아전들은 만약 그동안에 사또가 바뀌고, 다른 이가 부임해 얼음을 찾는다면 자신들이 곤란해진다고 말했다. 이에 다산은 얼음을 저장하는 다른 방도가 있다고 말하고,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얼음을 저장했다.

먼저 햇볕이 들지 않는 응달에 구덩이를 파서 토굴을 만들었다. 이 토굴의 벽에는 석회와 모래 그리고 흙을 섞어서 발라둔다. 그리고 아주 추운 날이 되면 이 토굴에 물을 부어 얼리는데, 차츰차츰 부어서 구덩이가 가득 차도록 물을 부어 얼렸다. 이렇게 하면 토굴에 부은 물 전체가 하나의 큰 얼음 덩어리가 됐다. 여기에 일반 빙고처럼 위를 덮어두면 여름까지 얼음이 녹지 않았다. 만약 우물이 멀리 떨어져 있다면 대롱을 이어서 홈통을 만들어 물을 끌어왔다.

다산은 곡산에 재임하는 동안 이 방식으로 직접 얼음을 만들어 저장했다. 여름에 토굴을 열어보니 얼음이 매우 단단해 도끼로 쳐서 겨우 깨뜨릴 수 있을 정도였다고 했다. 당시 서울에서는 한강에서 얼음을 채취해 빙고까지 운반해서 저장했다. 다산은 자신이 곡산에서 시험한 이 얼음 제조와 저장 방식이 인력이나 경비를 크게 줄일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정약용은 자신이 시험한 방식을 임금에게 아뢰어 실행하려 했지만, 정조의 승하와 함께 다산도 유배를 가게 되면서 결국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조선시대 얼음 채취와 보관은 국가에서 주관했는데, 이 일의 일부를 민간에 하청을 주면서 민간에 얼음 사업이 나타나게 됐다. 일반적으로 18세기 후반에 민간인 얼음 사업자가 나타났다고 하지만, 얼음을 채취하는 일이 원체 힘들고 기술이 필요한 일이었으므로 일찍부터 민간인에게 이 일을 맡겼던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이전에도 국가에서는 군인을 동원해 얼음을 채취했다. 군인들이 강변에 사는 민간인들의 얼음을 구입해 자신의 몫으로 바쳤다는 기록도 있다. 조선 후기 민간의 얼음 사업에 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으므로, 20세기의 기록을 바탕으로 이 시기의 민간 얼음 사업의 실체를 추정해볼 수 있다.

다산 정약용도 관심 가졌던 얼음 저장법


▎연일 불볕더위가 계속된 지난해 7월 20일 오후 충북 청주시 육거리시장에서 한 상인이 생선에 얼음을 붓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조선의 마지막 임금 순종은 1909년 9월 일본인에게 얼음 공장과 얼음 창고의 설비를 맡겨, 이듬해 3월에 부산에서 준공했다. 매일 6t의 제빙 능력을 갖춘 이 회사의 얼음은 대부분 수산물의 냉장 운반에 쓰였다. 이후 회사가 더 생겨나서, 1914년 부산의 연간 얼음 생산량은 약 2600t까지 증가했다. 그 뒤 서울에도 제빙 공장이 들어섰고, 서울에 얼음이 부족하면 압록강에서 채취한 얼음을 기차로 서울까지 운반해 오기도 했다.

인조빙 생산이 증가하고, 다른 지역의 천연빙까지 서울에 들어오자, 조선시대부터 한강에서 얼음을 채취해 상당한 이익을 내던 전통 얼음 장수들은 위기감을 느끼게 됐다. 특히 천연빙에 유해 물질이나 세균이 들어 당국이 판매를 금지하는 일이 생기면서, 천연빙을 채취해 판매하는 사업은 또 다른 어려움에 처하게 됐다.

1925년 1월 16일 [동아일보]에는 조선시대 한강에서 얼음을 채취해 판매하는 사업에 관한 내용을 잘 알 수 있는 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에서는 빙고업(氷庫業)은 수백 년 이래 조선인이 해온 사업이라는 점을 먼저 명기했다. 그리고 이 사업은 겨울에 한강이 얼면 한강 근처에 빙고를 짓고 한강의 얼음을 채취해 저장했다가, 여름철에 얼음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파는 것이라고 했다. 또 이 사업에 드는 돈은 채취한 얼음을 창고까지 운반하는 데 드는 일꾼에게 주는 삯이 전부이고, 20㎏ 정도 얼음 한 덩어리에 약 3~4전이 드는데, 여름이 되면 이를 70전 내지 1원에 판매한다는 것이다. 상당히 이익이 많이 남는 사업인 셈이었다.

‘인조빙’ 생산 늘면서 얼음 장수도 사라져

이 신문 기사는 당국에서 한강의 얼음 채취를 금지하면서 얼음 채취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었다는 내용과 함께 수백 년 전부터 조선 사람들이 해오던 사업을 할 수 없게 됐다는 주장을 보도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기사에서는 겨울에 한강에서 채취한 얼음을 여름까지 보관해 하절기에 생선을 신선하게 유통시키는 데도 사용해왔는데, 이제 그 일도 할 수 없게 됐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 기사를 보면 18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 민간의 얼음 사업은 거의 같은 방식이었다고 해도 무방할 것 같다.

이후 20세기 들어 천연빙에 유해 세균이 들어 있다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밝혀졌다. 천연빙을 식용으로 사용하는 데 대한 당국의 감시가 점점 엄격해진 이유였다. 1957년에는 천연빙과 인조빙을 구분할 수 있도록 얼음을 만들 때 노란색 물감을 들이라는 지시를 당국에서 내린 일도 있었다.

그러나 다방의 냉커피나 음식점의 냉면에 들어 있는 얼음 가운데 ‘노란 얼음’을 사용하는 곳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대부분의 서울 음식점이나 다방에서 비싼 인조빙보다 값싼 천연빙을 쓴 셈이다. 1960년 대 초까지도 서울 근교의 한강 변 야산에서 수십t이나 수백t의 얼음을 묻어놓은 것을 적발했다는 보도가 존재하는 것을 보면, 조선 후기부터 전해진 오랜 얼음 사업의 ‘전통’이 이때까지도 계속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제는 한강이 얼어붙어도 여기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사람이 없다. 한강의 얼음을 채취해 식용이나 냉장용으로 팔거나 사겠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도 없는 시대가 됐다. 지구온난화로 인해 얼음을 채취할 만큼 한강이 얼지 않는 겨울도 과거보다 훨씬 잦아졌다. 조선시대에도 겨울에 날씨가 춥지 않아서 한강물이 제대로 얼지 않을 때가 가끔 있었는데, 이렇게 되면 한강의 상류로 올라가 얼음을 채취해야 했다.

정조 때도 이런 일이 있었는데, 임금 스스로 자신의 덕이 부족해 얼음이 얼지 않는다고 자책했다. 그리고 정조는 채취하는 얼음의 양을 줄여 백성의 노역을 줄이도록 하라고 명령했다. 사소한 일처럼 보이는 일에서도 현명한 군주의 깊은 애민정신이 드러난다.

※ 이윤석 - 한국 고전문학 연구자다. 연세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고, 2016년 연세대 국어국문학과에서 정년 퇴임했다. [홍길동전]과 [춘향전] 같은 고전소설을 연구해서 기존의 잘못을 바로잡았다. [홍길동전] 이본(異本) 30여 종 가운데 원본의 흔적을 찾아내 복원했을 뿐만 아니라 작품 해석 방법을 서술했다. 고전소설과 관련된 저서 30여 권과 논문 80여 편이 있다. 최근에는 [홍길동전의 작자는 허균이 아 니다]와 같은 대중서적도 썼다.

202209호 (2022.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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