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토리

Home>월간중앙>히스토리

[선비 정신의 미학(78)] ‘세한도’ 남긴 동아시아 지성 추사(秋史) 김정희 

유배 시련을 학예일치 경지로 꽃피우다 

권문세가 태어나 박제가에게 배운 뒤 금석학·고증학 등 개척한 실학자
형조참판까지 올랐으나 당쟁 휘말려, 9년 제주 유배 기간에 추사체 완성


▎김광호 추사 선생 6대 주손이 충남 예산 추사고택에서 추사영실의 내력을 설명하고 있다. / 사진:송의호
"지난해는 [만학]과 [대운] 두 문집을 보내더니 올해는 우경의 [문편]을 보내왔다. 세상에 흔한 것도 아니고 천만리 먼 곳에서, 그것도 여러 해가 걸려야 비로소 얻을 수 있으니 단번에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세상은 오로지 권세와 이익만 좇는 것이 상례인데 그대는 숱한 고생으로 겨우 손에 넣은 책을 권세가에 기증하지 않고, 바다 바깥에 있는 초췌한 나에게 보내주었다.”

국보 제180호 ‘세한도(歲寒圖)’의 왼쪽 발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글은 이어 [논어(論語)] 자한편을 인용한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날이 차가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푸르름을 알게 된다’ 했는데 (…) 지금 그대와 나의 관계는 앞이라 더한 것도 아니요, 뒤라서 줄어든 것도 아니다.” 김정희는 제자이자 역관인 이상적이 중국 연경(燕京, 베이징)에서 귀중한 서책을 구해 권세를 모두 잃은 자신에게 변함없이 보내오는 지조와 고마움을 서화로 보답한다.

6월 29일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흔적을 찾아 제주 유배지에 들렀다. 제주도 남서쪽 서귀포시 대정읍에 귀양 살던 집과 추사관이 마련돼 있다. 세한도와 추사체의 산실이다. 세한도는 지하 전시장 1층에 청나라 유학자 16인의 감상평 등을 이어 붙여 1388㎝ 두루마리 형태로 다 펼치지 못한 채 관람객을 맞이했다.

추사는 본래 영조의 사위 가문 종손에다 형조참판까지 지낸 권세가였다. 그러나 당쟁에 휘말려 절해고도(絶海孤島) 제주도에 위리안치되면서 쓸쓸하고 곤궁한 처지가 됐다.

[완당평전]을 쓴 유홍준은 세한도를 두고 “그림과 글씨 모두에서 문자의 향기와 서책의 기운을 강조했던 추사의 예술세계가 소략한 그림과 정제된 글씨 속에 흥건히 배어 있다”고 평했다. 세한도 한 폭에 선비의 고매함이 응축돼 있다는 것이다. 승효상이 설계한 추사관 뒤 적려(謫廬, 귀양 살던 집) 앞에 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1840년 10월 추사는 대정현 유배소에 도착해 집 주변을 따라 먼저 가시 울타리를 둘러쳤다. 귀양살이의 시작이다. 어려움은 하나둘이 아니었다. 풍토는 낯설고 음식은 입에 맞지 않았으며 병치레는 잦았다. 그는 괴로움과 외로움을 편지로 달랬다. 아내에겐 밑반찬을 보내달라는 편지를 썼다. 벗 권돈인에겐 학문을 논의할 상대가 없다고 하소연했다. 벗과 제자들은 추사를 위로 방문했다.

세한도 한 폭에 선비의 고매함이 응축


1841년 소치 허련이 제주 유배소를 찾아온다. 그는 이후 넉 달을 머물며 시·서·화를 배웠다. 이듬해 추사는 부인 예안 이씨의 부음을 듣는다. 죽은 지 한 달이나 지나서다. 그는 유배소에 신주를 설치하고 곡한 뒤 예산 본가로 통곡의 제문을 보냈다. 애절한 시도 지었다. “어이해 월하노인 시켜 저승에 송사하여/ 내세엔 부부가 처지 바꿔 태어날꼬/ 천 리 바깥에서 나는 죽고 그댄 살아/ 내 맘의 이 슬픔 그대에게 알게 하리”

1843년엔 초의선사가 바다를 건너왔다. 추사는 초의가 머무른 6개월 동안 큰 위안을 얻었다. 그는 이후 유배지에서 열심히 책을 읽고 글씨를 썼다. 1844년 추사 나이 59세. 유배 온 지 5년이 지났다. 그해 추사는 세한도를 그린다. 2년 뒤엔 회갑을 맞아 추사의 혈육인 서자 김상우가 제주도로 내려왔다. 추사는 아들에게 난초 그리기를 가르친다. ‘시우란(示佑蘭)’에 이런 화제(畫題)가 들어 있다. “난초를 그릴 때는 자기 마음을 속이지 않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잎 하나 꽃술 하나도 마음속 부끄러움이 없어진 뒤라야 남에게 보일만 하다. 열 개의 눈이 보고 열 개의 손이 지적하는 것과 같으니 마음은 두렵도다. 이 작은 기예도 반드시 생각을 진실하게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는 데서 출발해야 비로소 기본을 얻게 될 것이다.” 추사는 제주도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박혜백·이한우·김구오 등이다. 추사는 동생에게 연락해 필요한 책까지 구했다. 자취는 대정향교에 걸린 ‘疑問堂’(의문당) 편액 등에 남아 있다.

문장과 글씨가 빼어난 소동파를 흠모


▎제주도 추사관의 세한도 전시 코너. 청나라 유학자 16인의 감상평 등을 이어붙여 가로 길이만 13m가 넘는다. / 사진:송의호
추사는 일찍이 문장과 글씨가 빼어난 소동파를 흠모했다. 추사는 소동파의 유배 모습을 그린 소치의 ‘동파입극도’에서 자신의 처지를 떠올린다. 소치는 ‘완당선생 해천일립상(海天一笠像)’을 그렸다. 추사의 처연한 귀양살이 모습이다. 1848년 추사의 지인 장인식이 제주목사로 부임했다. 그 덕분일까. 추사는 뜻밖에 대정 유배소를 벗어나 귤림서원 등 제주 읍내를 답사하고 한라산을 오를 수 있었다. 그해 12월 63세 추사는 마침내 유배에서 풀려났다. 9년 만이다.

추사는 제주도에서 많은 글씨를 썼다. 간찰을 쓰고 글을 써 달라는 숱한 부탁을 받았다. 글씨는 변해갔다. 유홍준은 “글씨의 뼈대야 귀양 전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획의 삐침, 뻗음, 내리그음이 비문 글씨의 굵고 묵직한 필획을 느끼게 한다”고 표현한다. 제주도에서 정립된 독창성과 예술성을 겸비한 추사체의 특징이다.

유배에서 풀려난 추사는 바다를 건너 완도에 도착했다. 그는 해남 대둔사에서 초의를 만나 회포를 푼 뒤 예산 고향으로 돌아갔다. 유배 사이 집안은 만신창이가 됐다. 월성위궁은 팔리고 동생들은 흩어졌다. 추사는 서울 용산의 강상(江上)에 자리 잡았다. 이 시기 추사 서화 중 일품인 ‘잔서완석루’ ‘불이선란’, 제자들의 서화 경진대회 출품작 비평서인 [예림갑을록] 등이 태어난다. 완숙기다.

1851년 7월 추사는 66세 고령에 다시 북청으로 유배된다. 제주도 귀양에서 풀려난 지 2년 반 만이다. 예송논쟁이 된 권돈인의 진종조천예론을 배후에서 발설한 사람으로 지목된 것이다. 귀양살이 1년. 추사는 북청에서 금석학자답게 주변 유물을 찾아가 고증했다. 북청은 특히 발해 땅이었기 때문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북청읍성 동쪽이 대조영의 발해 5경 중 남경쯤으로 추정했다. 이듬해 8월 추사는 유배에서 풀려난다.

그는 말년에 아버지 묘소가 있는 과천에 머물렀다. 산전수전을 겪으며 정신세계는 깊어진다. 그는 글씨를 쓸 때마다 완벽해지려 했고, 피눈물 나는 수련을 거듭했다. 추사는 권돈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술회했다. “내 글씨엔 아직 부족함이 많지만 나는 칠십 평생 벼루 열 개를 밑창 내고, 붓 일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네.”

1856년 10월 추사는 봉은사에 있었다. 영기 스님은 화엄경 판이 완성되자 경판전을 짓고 편액을 추사에게 부탁했다. 추사는 병든 몸이지만 세로 65㎝ 큰 글씨로 ‘板殿’(판전) 두 글자를 썼다. 그리고 사흘 뒤 세상을 떠났다.

7월 18일 충남 예산 추사고택을 찾아갔다. 추사고택기념관에서 김광호 주손을 만났다. LG에서 정년퇴직하고 올 초 고향에 정착한 6대손이다. 먼저 기념관 옆 추사 묘소에 들렀다. 족손 김승렬이 쓴 묘비에는 추사의 성품이 묘사돼 있다. “마주 말할 때면 화기애애했으나 무릇 의리냐 이욕이냐에 이르면 그 논조가 우레나 창끝 같아 감히 막을 자가 없었다.”

만족하지 못하는 글을 두 차례나 태워 버리다


▎추사의 제주 유배지를 복원한 적려 앞에 세워진 유허비. 추사관과 붙어 있다. / 사진:송의호
추사 김정희는 1786년 예산 용궁리 경주 김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는 추사와 11촌 대고모 사이다. 추사의 증조는 영조의 둘째 딸인 화순옹주와 혼인해 월성위(月城尉)로 봉해졌다. 그러나 월성위는 아들 없이 39세로 요절한다. 가문은 양자로 이어졌다. 추사는 아랫대에서 양자로 들어가 월성위 가문의 적통(嫡統)을 잇는다. 8세 때다.

양아버지 김노영은 홍대용과 인척으로 박지원 문하에 있는 등 북학에 경도돼 있었다. 그는 사은사 행차로 박제가와도 접촉했다. 추사는 자연히 청나라 문물에 일찍 눈을 떴다. 김노영은 추사의 교육을 북학파 박제가에게 맡긴다. 추사는 20세까지 박제가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추사 묘소 옆 고택으로 들어갔다. 김광호 주손은 “고택 일대는 당시 영조가 내린 사패지”라고 설명했다. 영조가 충청도 53개 고을에 비용을 분담하라고 명령해 53칸 집이 지어졌다. 추사가 태어난 이 집은 지금 절반으로 규모가 줄어 고택으로 복원돼 있다. 사랑채와 안채를 지나 맨 안쪽 높은 위치에 추사영실(秋史影室)이 있다. 추사의 제자 이한철이 그린 초상화를 모신 사당이다. 신주는 없다. 예를 표했다. 평생의 벗 권돈인은 영실 세우는 일을 돕고 추사체로 ‘추사영실’ 편액을 직접 썼다. 고택에는 기둥 곳곳에 추사체 주련이 걸려 있었다.

고택 오른쪽은 월성위 묘역이다. 추사의 증조 김한신과 화순옹주가 함께 묻혀 있다. 비문에는 영조의 어필이 새겨져 있고. 다시 오른쪽엔 추사의 증조모인 화순옹주의 정려문이 있다. 화순옹주는 부군이 39세로 요절하자 식음을 전폐하다 뒤를 따랐다. “영조는 옹주의 정절을 기리면서도 부왕의 만류를 듣지 않았다며 정문을 내리지 않았답니다.” 정문은 그 뒤 정조가 명(命)했다. 화순옹주는 조선왕실이 낳은 유일한 열녀였다.

추사는 “독서가 첫째,…”라는 글씨를 남겼다. 만년의 그를 건강하게 지킨 것은 공부의 즐거움이었다. 그는 자신의 글에 엄격했다. 추사고택 이승리 학예연구사는 “선생은 자신이 쓴 글 중 만족하지 못하는 것을 두 차례나 태워 남은 글이 많지 않다”고 설명했다.

추사는 24세에 생원시에 합격한다. 그해 그는 동지부사인 아버지 김노경을 따라 자제군관으로 연경에 들어간다. 청나라 학문을 직접 접할 기회였다. 추사는 그곳에서 지식인들과 교유하며 특히 대학자 옹방강(翁方綱)·완원(阮元)을 스승 삼아 그들의 학문을 받아들인다. 옹방강은 추사와 필담을 나누다가 박식과 총명함에 놀라 그를 “경술문장해동제일(經術文章海東第一)”이라 칭찬했다.

시문의 대가, 서예 명성에 문장 가려져


▎충남 예산의 추사기념관과 추사고택 사이에 자리 잡은 김정희 묘소. / 사진:송의호
당시 47세 완원은 자신의 경학관과 예술관, 금석 고증 방법론 등을 전하면서 자신의 저서 [경적찬고(經籍纂詁)] 106권과 [연경실집(揅經室集)] 6권, [십삼경주소교감기(十三經注疏校勘記)] 245권을 김정희에게 기증한다. 김정희의 호 완당(阮堂)은 완원의 제자라는 뜻이다. 인연은 이어져 주손 김씨는 2014년 완원의 후손을 만나기도 했다. 78세 옹방강으로부터는 금석 고증과 서화 감식, 서법 원류에 관한 가르침을 받는다. 옹방강은 추사가 귀국한 뒤에도 제자를 통해 완당의 질의에 답한다. 추사는 여기에 영향을 받아 31세에 옹방강과 완원의 학문을 합쳐 새로운 경학관인 [실사구시설(實事求是說)]을 지었다. 추사의 학문이 조선을 넘어 국제적인 경지로 올라선 것이다. 그런 공부 덕분에 추사는 1816년 북한산에서 ‘진흥왕순수비’를 찾아내 고증하고 이듬해엔 문무왕비 비편을 발굴했다.

추사는 1819년(순조 19) 문과에 급제하고 암행어사와 예조 참의, 설서, 시강원 보덕 등을 역임한다. 그러나 1830년 윤상도 옥사라는 모함 사건에 휘말려 아버지 김노경은 고금도로 유배되고, 추사도 관직에서 물러난다. 1833년 아버지가 유배에서 풀려난 뒤 추사는 성균관 대사성과 병조참판·형조참판을 지낸다. 1840년 윤상도 옥사가 재론된다. 김노경은 파직되고 당쟁은 이제 추사를 끌어들였다. 그해 8월 추사는 예산에서 나포돼 서울로 압송된다. 보름 뒤 영의정의 간곡한 상소 덕에 그에겐 죽임 대신 제주도 위리안치 전교가 내려졌다.

추사는 조선을 대표하는 서예가로 그치지 않는다. 동시대 시인 신석희는 “추사는 본디 시문(詩文)의 대가였으나 글씨를 잘 쓴다는 명성이 천하에 떨치면서 그것이 가려지게 됐다”고 평했다. 추사는 시문을 바탕으로 중국 학계와 교류하며 금석학과 고증학을 더해 일가를 이루었다. 정인보는 추사가 실학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 [주역] 등 경학(經學)을 기반으로 하는 정통 성리학에도 밝았음을 강조한다. 추사는 유배의 시련을 학예일치 경지로 끌어올린 동아시아의 우뚝한 지성이었다.

[박스기사] 기적처럼 국민 품으로 돌아온 ‘세한도’ - 1944년 도쿄 공습 피하며 한국으로 귀환

‘세한도’는 어떻게 오늘까지 보존됐을까. 세한도는 이상적 사후 그의 제자 김병선이 물려받았다. 그 뒤 세한도는 휘문고 설립자 민영휘의 손에 들어가 아들 민규식이 매물로 내놓는다. 일제강점기 경성제대 후지츠카 치카시(藤塚隣) 교수가 세한도를 사들였다. 후지츠카는 세한도를 귀하게 생각하며 일본으로 돌아갔고, 1936년 자신의 환갑을 맞아 100부를 영인해 지인들에게 나눠줬다.

1944년 서예가이자 서화 수집가인 손재형은 세한도를 되찾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당시 태평양전쟁 한복판인 일본 도쿄로 갔다. 그곳에서 후지츠카를 만나 2주간의 설득 끝에 세한도를 넘겨받을 수 있었다. 후지츠카는 “당신과 나는 완당을 사숙한 동문 아닙니까?”라며 잘 보존해주기를 당부했다. 세한도는 마침내 서울로 돌아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군의 공습으로 후지츠카가 학장으로 있던 대동문화학원이 불탔는데 그곳에 소장하고 있던 추사 작품도 함께 잿더미가 됐다. 세한도는 이렇게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1956년 손재형은 ‘완당 김정희 선생 100주년 추념 유작 전람회’에 세한도를 처음 공개했다. 세한도는 이후 미술품 수장가 손세기에게 넘어가 아들 손창근이 소장했다. 2020년 손창근은 세한도를 국가에 기증하면서 마침내 국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yeeho1219@naver.com

202209호 (2022.08.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