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포토포엠] 저서(底棲) 

 

이현승

▎서울역 뒤쪽 노숙인 텐트 / 사진:박종근 비주얼실장
여기 한 권의 책이 누워 있다.
거리의 책, 이슬에 젖은 디오게네스의 책,
바람벽을 등지고 앉아 겨울 햇살을 쪼이는 책,
쪼그리고 앉아 꽁초를 주워 피우고 있는 책,
여기에 있지만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는 듯
잘 읽히지 않는 눈빛을 가지고 있는 책,
두께와 깊이를 알 수 없는 책,
난해하다기보다는 난독인 책,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심연 아래로 가라앉아 있는 책,
바닥 아래의 바닥, 심연 너머의 심연을 간직한 책,
처음부터 삶이 죽음의 젖을 빨며 자라듯
죽음에 잇대어진 삶의 책,
거리의 책,
빈자이며 철학자이고 성자인 한 권의 책이
너덜너덜 헤어진 책이 한 권
여기 하늘을 덮고 누워 있다.

※ 이현승 - 전남 광양 출생. 1996년 [전남일보] 신춘문예 시부문과 2002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 당선으로 등단. 고려대 대학원 국문과 박사과정 수료 후 가천대 교양대학 교수로 재직 중. 시집은 [대답이고 부탁인 말] 외 다수. 김춘수시문학상, 김달진문학상 수상.

202210호 (2022.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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