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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탐구] 폭넓은 연기 스펙트럼 지닌 27년 차 배우 박은빈 

“대본 볼 때 내 마음 두드리는 작품을 고른다” 

이승훈 월간중앙 기자
작품마다 이미지 변신 노력해 성공… 철저한 자기관리엔 완벽주의 성향
“나를 이끄는 원동력은 인내심과 책임감… 앞으로도 소신대로 살아갈 것”


▎올해로 데뷔 27년 차를 맞는 박은빈은 사극, 법정물, 판타지물 등 폭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가졌다는 점에서 강점을 지녔다. / 사진:나무엑터스
어느 드라마에 나오는 인물이 매력적이라면 필히 그 인물을 연기한 배우가 매력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배우 박은빈이 그렇다. 안정적인 감정 표현, 또렷한 발음의 대사전달력, 다른 배우와의 완벽한 ‘케미(연기 합)’까지. 박은빈은 시청자에게 어느덧 ‘믿고 보는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아역배우 틀을 벗고 드라마 [청춘시대]로 연기 변신에 성공한 그는 [스토브리그],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로 연속 안타를 때리더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로 만루 홈런까지 날리는 저력을 보였다. 여기에는 비단 소속사의 힘뿐만 아니라 배우 박은빈의 오랜 연기 경험이 녹아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박은빈의 강점은 만 29세에 브라운관과 스크린을 오가며 사극부터 법정물, 판타지물 등 소화 가능한 연기 스펙트럼이 넓다는 데 있다. 드라마 56편과 영화 10편에 출연한 박은빈은 올해 데뷔 27년 차를 맞았다. 2015년을 제외하고 매년 작품 활동을 하고 있어서 박은빈의 필모그래피를 본다면 “박은빈이 이 드라마도 찍었어?”라고 외치게 될 만큼 다양한 작품에 출연했다. 최근 ‘우영우 신드롬’을 타고 박은빈이 스타 브랜드 평판 1위를 기록하자, 각 방송사는 편집실 캐비닛에 잠든 ‘박은빈 리스트’를 꺼내 일명 ‘하드털이(과거 자료를 공개하는 것)’를 시전, 최근의 인기에 편승하기도 했다. 그는 [은밀하게 위대하게] 특별출연 이후 오랜만에 [마녀 2](2022)로 스크린에 복귀했으며 [보스턴 1947]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클리셰를 비트는 신선한 설정을 좋아한다”


▎박은빈은 JTBC [청춘시대](2016)를 통해 캐릭터 변신에 성공했다는 평을 받는다. / 사진:Jtbc
8월 22일 강남 모처 카페에서 진행된 [우영우] 종방 기념 라운드 인터뷰에서 특히 박은빈은 관록 있는 배우의 면모는 물론 그 나이대에 걸맞은 모습까지 솔직하게 보여줬다. 대중의 인기를 먹고사는 배우로서 자칫 난감할 수도 있는 질문도 피하지 않았다. 삶의 중심에 자기 자신이 굳건히 서 있는 모습이었다.

박은빈이 어렸을 때는 연기 잘하는 아역배우가 적어 특정 배우 몇 명에게만 섭외가 몰렸다고 한다. 그 무렵 ‘남자는 유승호, 여자는 박은빈’이었다. 이러한 다작 경험은 성인이 되자 뛰어난 연기력으로 피어났다.

사극을 좋아하던 어린 시절 박은빈은 [명성황후], [무인시대], [천추태후], [선덕여왕], [태왕사신기] 등 대형 드라마에 이름을 올렸다. 차분하게 생각하며 연기를 할 수 있어서 사극을 좋아했다고 한다. 2000년대 초반부터 송혜교, 오연수, 김하늘, 한지민, 소유진, 송지효 등 선배들의 아역도 도맡았다. 대중에 각인된 그때의 아역 이미지는 성인이 돼서도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박은빈이 아역 이미지에서 맘먹고 변신을 시도한 작품은 JTBC [청춘시대](2016)였다. 평소의 청순하고 단아한 캐릭터가 아닌 음담패설과 음주가무를 즐기는 ‘모태솔로’ 송지원 캐릭터였다. 변신은 성공적이었다. 박은빈에게 어울리지 않을 것이라는 세간의 우려를 보기 좋게 날려버렸다. 박은빈은 “이런 역할을 해낼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면서 “연기적으로 갈증이 있었는데 해소됐다”고 자평했다. [청춘시대]는 시청률 면에서는 아쉬운 점이 있었지만 넷플릭스에 공개되고 2017년 시즌2까지 제작되며 웰메이드 드라마로 인정받았다.

박은빈의 변신은 멈추지 않았다. 야구구단 운영기를 그린 SBS [스토브리그](2019)에서 불의를 참지 않는 이세영 팀장 역을 맡아 시청자에게 ‘사이다’를 선사했다. 특히 8화에서 구단과 계약을 약속한 선수가 백승수(남궁민 역) 운영단장에게 술을 뿌리자 곧바로 술잔을 집어던지며 “선은 네가 먼저 넘었어!”라고 일갈하는 그 장면이 유명했다. 성량·감정·대사전달 3박자가 완벽했던 만큼 화제가 됐다. 워낙 시청자 뇌리에 각인 됐는지 유튜브와 여러 커뮤니티에 공유되기도 했다. ‘이세영이 박은빈의 인생캐릭터(배우와 가장 잘 어울리는 등장인물)’라는 말도 나왔다.

박은빈은 작품을 고르는 기준이 분명하다고 했다. 그는 “대본을 볼 때 나의 마음을 두드리는 작품을 고른다”고 했다. KBS [연모](2021)를 택했던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그는 “여성이 곤룡포를 입고 왕으로 등장하는 사극은 처음이었다”면서 “클리셰를 비트는 신선한 설정이 좋았다”고 설명했다. [스토브리그]의 이세영 또한 주체적인 여성상을 보여주며 극 중 최연소 단장 자리에까지 오른다는 점에서 흔치 않은 설정이었다. 보통 스포츠물에서 여성은 매니저 등 조력자로만 등장한다. 이러한 박은빈의 진심과 도전을 시청자들이 알아준 것일까? 그는 [스토브리그]로 2020년 SBS 연기대상 미니시리즈 판타지 로맨스 부문 여자 최우수연기상을 받았다. 이듬해엔 [연모]로 2021 KBS 연기대상 여자 최우수상과 인기상까지 2관왕에 올랐다.

촬영장서 주변 기운 북돋아주는 역할 자처


▎박은빈은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서 직접 바이올린을 연주하기 위해 손가락에 굳은살이 박일 만큼 연습했다. 사진은 힘이 부침에도 “해내야 한다”고 말하는 모습. / 사진:나무엑터스 유튜브 캡처
카메라는 솔직하다. 한 치도 거짓을 허락지 않는다. 배우는 악기 다루듯 섬세하게 자신의 몸과 목소리를 이용해 캐릭터를 화면에 표현한다. 그런 의미에서 연기는 종합예술이다. 연기와 배우라는 직업을 대하는 박은빈의 태도에서 완벽주의적 성향을 읽을 수 있다.

박은빈은 SBS [브람스를 좋아하세요?](2020)에서 바이올린을 좋아하는 29살 늦깎이 음대생 채송아 역을 맡았다. 클래식 소재 드라마여서 실제 연주하는 장면도 소화해야 했다. 어설프게 흉내만 내는 게 싫어 촬영이 없는 날에는 레슨을 받았다. 손가락에 굳은살이 박일 만큼 연습도 했다. 대역 없이 진행된 졸업 연주회 장면은 그렇게 탄생했다.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도 노력하는 박은빈의 진가가 발휘된 대목이다. 팬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명대사도 이때 생겨났다. 소속사 나무엑터스가 박은빈의 연습 영상을 브이로그로 제작했는데, 영상 속 그는 “바이올린을 조금 켤 줄 아는 정도가 아니라 전공생 수준으로 보여야 하는 거잖느냐”면서 “그 시간, 세월의 수준까지 따라잡기가 어려운 과정이었던 것 같다”고 했다. 이어 “그렇지만 어쩌겠나. 해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나를 이끄는 원동력은 인내심과 책임감”이라고 했다. [우영우]에서 부녀로 합을 맞춘 배우 전배수는 “은빈이는 자기관리가 철저했다”며 “오미크론 변이가 절정이던 시기에 8개월간 식당에 가지 않고 혼자 차에서 도시락만 먹었다”고 밝혔다. 주연이 코로나19에 감염돼 촬영 일정에 차질이 생기면 안 된다는 생각에서였다고 한다. 박은빈은 혹여라도 눈에 다래끼가 생길까봐 여름에는 수영장에 가지 않고, 부상을 당할까봐 겨울에는 스키장에도 가지 않는다고 한다.

박은빈은 항상 넘치는 에너지로 촬영장의 기운을 북돋아주는 역할도 도맡았다. 시간의 제약으로 쪽대본으로 촬영이 진행되는 드라마 제작 특성상 출연 신과 대사량이 많은 주연은 그만큼의 공력을 필요로 한다. 잠도 못 자고 촬영하는 것이 예사인 만큼 주연배우가 동료배우와 현장 분위기에 공을 들인다는 것은 제작 환경까지 고려하는 그만의 배려이자 책임감이다. 촬영이 끝난 후 전배수는 박은빈에게 경외의 마음을 담아 큰절을 했다고 한다.

이쯤 되면 ‘박은빈은 개인 생활도 없이 연기 인생에 모든 걸 쏟아붓고 있다’고 오해할 수도 있다. 취재진의 이러한 질문에 박은빈은 “정정하고 싶다”며 웃어 보였다. 그는 “독 짓는 늙은이같이 장인의 길을 걷고 싶은 건 절대 아니다”면서 “나름대로 재밌게 즐기면서 살아가고 있다”고 강조했다.

뭐든 열심히 하는, 자기중심 굳건한 배우

실제 그는 연기뿐 아니라 학업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빡빡한 스케줄에도 대학생활을 이어갔다. 연기와 마찬가지로 학업도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서강대 11학번으로 심리학을 전공한 그는 학기마다 20학점씩 꼭꼭 채워 들었다. 신문방송학도 복수 전공했는데 한 학기 조별과제를 5개씩 해내면서 교내의 명물이었다는 소문이다. 작은 체구의 여학생이 이 건물, 저 건물에서 발견된다는 목격담도 수차례 전파돼 ‘서강대 헤르미온느’라는 별명도 붙었다고 한다.

박은빈이 본인의 ‘하드털이’와 관련해 학창 시절 친구와의 에피소드를 들려준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2008년 SBS [그것이 알고 싶다]의 ‘아역배우, 누구를 위한 꿈인가?’ 편에 출연했는데, 그 영상에서 친구들의 얼굴이 공개됐다. 그중 한 친구가 ‘그것만은 풀지 말아줘’라며 창피해하자 박은빈은 “그때의 너와 지금의 너는 다르기 때문에 그때의 자신을 너의 전부라 생각하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조언했다고 한다. 박은빈의 화법에는 또래 친구들과는 차원이 다른 깊은 내공이 담겨 있었다.

드라마 [우영우]는 박은빈 출연작 중 공전의 히트작이 됐지만 후반부에서 페미니즘 이슈가 불거져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이슈가 앞으로 작품 선정에 영향을 끼치지 않겠느냐고 묻자 그는 다시 한번 “대본을 볼 때 나의 마음을 두드리는 작품을 고르는 편”이라는 자신의 발언을 소환하며 “아직 내 개인사적인 모든 것을 흔들 만한 큰 사건은 겪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앞으로도 소신대로 살 것 같다”고 말했다. 역시 박은빈다운 답변이었다.

- 이승훈 월간중앙 기자 lee.seunghoon1@joongang.co.kr

202210호 (2022.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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