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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범의 등산미학(16) 고향마을 뒷동산에 올라 그리운 친구들을 생각한다 

 

내 인생 제일로 행운은 덕진 산골에서 태어난 것

너펄너펄 빨간색 미니스커트에 하얀 블라우스…노란 캔디 머리를 손으로 빗어 올리자 색조 화장이 눈부셨다. 예쁘게 꽃단장한 ‘악바리’ 미자가 서울서 내려왔다. 내 기억 속 그는 마을 뒷동산 옆구리에 껌딱지처럼 붙어있는 조그만 우리 집을 아카시아 나무에 기대어 야릇한 미소를 지으면서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버님 기일을 맞아, 코로나19팬데믹에 바쁘다는 핑계로 그동안 찾아뵙지 못했던 고향 집을 방문했다. 언제나 가슴 설레고 이국적인 마을 앞 코빼기 산을산골집 툇마루에 걸터앉아 하염없이 바라봤다. 어느 순간 너무나도 예뻤던 40여 년 전 그녀의 환영이 뒷동산에서 빵금놀이(신랑과 각시놀이)를 하자며 윙크를 보내더니 나를 산으로 이끌었다.

뒷동산은 번들번들했던 옛길은 다 어디 가고, 거미집과 이름 모를 넝쿨나무들이 가득했다. 막대로 장애물들을 쳐내고 새 길을 내며 정상에 오르자 숨겨진 옛 추억의 보물 창고들이 쏟아져 나왔다. 50여 년 전, 경숙이와 빠끔살이 하던 작은 우리 집은 여전히 아기자기한 꼬맹이 돌들로 금줄이 쳐져 있었다. 금방이라도 그가 나를 부르며 뛰어 나올 것만 같았다.


“따따따 따따따…쾅쾅~쾅쾅~쾅” “유섭이 땅, 동수 땅, 승만이 땅… 내가 이겼다. 만세!” 온 동네 아이들이 당시 너무나 재미있던 TV 드라마 [전우]를 흉내 내며 북한군과 국군으로 편을 나눠 일진일퇴를 벌였던 참호와 방공호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서로 용감한 군인 대장이 되겠다고 옥신각신했던 옛 동무들의 얼굴이 눈에 선하다. 많은 세월이 흘러 당시의 원형은 모두 사라지고 흩어졌지만 여기저기 구석구석 자취가 분명히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어린 시절의 흔적을 하염없이 바라보다 보니 그 시절 재밌게 뛰어놀던 옛 동무들의 아름다운 숨결과 추억들이 스멀스멀 아련하게 피어나기 시작했다.

술래잡기, 말뚝박기, 딱지치기, 삼년고개, 오징어게임, 짤짤이, 홀짝, 자치기, 돼지싸움, 닭싸움, 씨름, 낫치기, 비석치기, 윷놀이, 찐돌이, 골목축구, 공동묘지 야구, 구슬치기, 땅따먹기, 물놀이, 썰매타기, 얼음지치기, 팽이놀이, 연날리기, 기마전, 공기놀이, 실뜨기 놀이, 장기, 바둑, 보자기놀이, 고무줄놀이…. 참 귀엽던 미경이가 물구나무를 섰다가 고무줄을 다리로 꼬아서 착지하는 퍼포먼스를 선보였을 때 보일락말락 했던 그 하얀색 꽃무늬는 지금도 아찔하게 내 머리통을 강타한다.

동지섣달 겨울밤에 남녀 친구들이 함께 모여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도 못하는 팝송을 크게 틀어 놓고 엉덩이를 흔들어대면서, 하늘을 향해 손가락을 찌르고 디스코 춤을 신나게 췄다. 그러다 지치면 방바닥에 삥 둘러앉아 손에 손잡고 ‘지치기 지치기 뽕 지치기 지치기 뽕’ 놀이를 했는데, 그때 박자가 틀려서 당황한 나를 보며 함박웃음 짓던 연희 그 친구도 그립다. 쌀쌀한 찬바람이 불어오면 성만이네 집 사랑방 아랫목에 둘러앉아 민화투를 치다가 점수대로 이긴 사람이 진 사람의 손목을 때리거나, 머리에 꿀밤을 놨는데 하도 꿀밤을 맞아서 벌겋게 익은 연단이의 이마가 아직도 눈에 선하다. 정월 대보름날에는 깡통에 불을 붙여 옆 마을 친구들과 쥐불놀이를 하고, 짱돌 던지기 싸움으로 한바탕 대 혈전이 펼쳐지기도 했는데, 동수는 돌에 맞아 머리에 피를 질질 흘리면서도 “너희들 이제 다 죽었어”라며 돈키호테처럼 저돌적으로 돌진하기도 했다.

무더운 한여름 밤 별빛이 흐드러지게 피어나고 하얀 달빛이 소복이 내려앉으면 ‘까바굴’ 냇가에서 남자들끼리 대충 물을 끼얹은 후, 엉금엉금 낮은 포복으로 기어서 아늑한 길 숲에서 멱을 감던 계집아이들의보일락말락 한 앙가슴을 몰래 훔쳐보며 더위를 식히곤 했었다. 까까머리 소년 시절 그 설렘과 짜릿함을 꿈엔들 잊으리!


겨울에 큰 눈이 오면 작대기 하나씩 손에 들고 삼삼오오 짝을 지어 그 넓은 덕진골을 싸돌아다니며 토끼몰이를 하고, 사계절 수시로 산을 두 개 넘어 장성댐 중류 어디쯤에서 대나무 낚시로 물고기를 잡아 매운탕을 맛있게 끓여 먹었다. 가끔씩 덤으로 개구리도 잡아 영양 보충을 했다.

배가 출출해지는 밤이 되면 부모님이 타지로 나가셔서 친구만 있는 집에 쳐들어가 제사떡을 얻어먹고, 때때로 수박, 참외, 복숭아와 닭, 토끼 등을 서리하며 허기진 배를 채웠다. 지금은 범법 행위가 돼 절대 해서는 안 될 일이지만, 그때는 네것 내것 가릴 것 없이 따 먹고 삶아 먹고 구워 먹었다. 온 마을이 한 가족처럼 그렇게 오손도손 살았다.

고개를 돌려 뒷동산 더 넓은 덕진골을 바라보니, 마음이 먹먹해지면서 한 서린 눈물이 눈가에 이슬로 맺힌다. 그 당시 산골은 오로지 나무로 불을 때면서 삼시 세끼 밥을 하고 북풍 설한 긴긴 겨울을 났기 때문에,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대부분 나무를 하고 소를 먹일 소꼴을 베어야 했다.

겨울이면 가까운 산에는 나무가 없어, 서울의 북한산 정도는 되는 산봉우리 두 개를 넘어가서 나무를 했다. 중학교 2학년 때 할아버지가 내 지게를 맞춰 줬는데, 그 지게로 거의 날마다 꼴을 베고 나무를 했다. 나무를 다 한 뒤에는 네 다발로 묶어 한 짐으로 지고 내려왔다. 나무를 지고 내려오다 눈길에 미끄러지거나 나무뿌리에 발이 걸리기라도 하면 나뭇짐이 데굴데굴 산 아래로 굴러 내려가곤 했다. 굴러 처박힌 그 나무 다발을 끌어올리면서 미끄러지고 넘어지고…. 너무나 배고프고 서러워서 울고 또 울었다. 그런데 그렇게 눈물짓던 그 애달픈 그 무게의 한은 평생 밑바닥 인생의 버팀목이자 기준점이 됐고, 지금은 아름답고 소중한 추억, 마음속 보석이 됐다.

뒷동산을 지날 때마다 잊을 수 없는 움푹 파여 있는 자리가 있는데, ‘그 날’의 아픔과 슬픔이 비장하게 간직된 채 풀 한 포기 자라지 않고 똬리를 틀고 있었다. 내 친구이자 짝꿍, 똑똑한 반장에 귀공자처럼 잘 생겼던 읍내 친구 형택이가 우리 마을에 놀러 왔던 적이 있다. 성숙하고 이쁜 친구 영미와 첫눈에 반해 사귀게 됐는데, 그 눈꼴시런꼴을 못 보던 주먹깨나 쓰던 2년 선배의 눈에 띄었다. 선배는 마을 풍기문란 죄목으로 연대책임을 물어 야밤에 뒷동산 바로 그 구덩이로 우리 친구들을 모두 불러모았다. 열중쉬어 자세에서 워커발로 차이고, 주먹으로 명치를 숨이 안 쉬어질 만큼 서너 번을 두들겨 맞았다. 그 당시에는 선배가 아버지보다 한참 위로 하나님과 동기동창쯤으로 보였는데, 그 선배가 정말 무섭고 보복이 두려워 아무 소리 못 하고 그냥 원 없이 두들겨 맞았다. 그 무렵 4H클럽 모임에서 우연히 옆자리에 앉은 그 여인의 몽롱한 향내가 너무 좋아 나도 그만 짝사랑에 진하게 빠져 버렸는데, 그녀가 형택이를 만나러 갈 때면 쓰라린 마음 다스리며 애처롭게 지켜만 봐야 했다. 바보같이 그때 한 번이라도좋아한다고 편지 고백이라도 해볼 걸 그랬다.


그러던 추석 무렵 어느 날, 내가 ‘그 깡패 선배 놈과 싸우면 이긴다’고 말했다는 헛소문을 어디서 주워들은 모양이다. 친구 유섭이 집에서 놀다가 방에서 나오던 나는 무방비 상태에서 두들겨 맞아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굵은 작대기로 온몸을 마구잡이로 때리는 바람에 바로 쓰러졌고, 꼬박 1주일을 병원에서 보내야 했다. 우리 부모님은 그렇게 이유 없이 아들이 두들겨 맞았는데도 동네 종갓집 그 건달 놈이 무섭고 두려웠는지, 아니면 그의 인생이 불쌍해서 그랬는지 경찰에 신고도 하지 않았다. 사과도 받지 않았고, 심지어 병원비도 우리 돈으로 지불했다. 나는 평생 그게 한이 됐다. 강한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다시는 당하지 않으리라 다짐했고 또 다짐했다. 그 뒤로 나를 건드리거나 부당하게 시비를 거는 자가 있으면 최소 10배, 100배로 갚아줘 다시는 나를 얕보지 못하게 했다. 움푹 팬 뒷동산 그 자리를 보니 참으로 만감이 교차했다. 이렇게 눈물도 서러움도 많았던 어린 시절이었다.

그래도 날마다 우리 마을 조무래기 애들은 교과서 외에는 만화나 동화 등 책 한 권 구경도 못 했지만, 대자연에서 시끌벅적 떠들고 사람 냄새 맡으며 재미나게, 사람답게 살았다. 강산이 4~5번 정도 변할 만큼 시간이 지난 지금의 덕진마을에는 그 많던 친구, 이웃들은 다 어디 갔는지 마을이 비어 적막한 무주공산이다. 당시에는 60여 가구, 350여 명 정도 살았는데 지금은 고령의 6가구 10명만이 산다. 길게 잡아도 15년이면 더는 사람이 살지 않는 유령마을이 될 것이다. 참 인생 허무하기 그지없다.

나는 너무나 운 좋고 복이 많아 그런 산골에서 나고 자라 인간미를 알고, 아무데서나 잘 자고, 음식 가리지 않고, 남의 눈치 보지 않고 아무거나 잘 입고, 작은 일에 만족하고, 가난하지만 모든 것에 감사하며 마음만은 부자로 산다.

세계적인 성공을 거둔 [오징어 게임]에서 나오는 그 모든 놀이를 다 해보고 그 이상을 누리며 살았는데, 더는 그 무엇이 부럽고 소중하겠는가! 이만하면 세상에서 제일로 멋지고 행복한 사람이 아닐까. 나를 그 시절 추억으로 인도한 미자는 어느 놈하고 도망갔는지 모를 일이다. 나 혼자 옛 추억을 실컷 맛보다가 시나브로 어둠하고 동무가 돼 작대기를 휘두르며 다시 산에서 내려왔다. 그래도 고향이 참 좋다.





※필자 소개: 김희범(한국유지보수협동조합 이사장)- 40대 후반 대기업에서 명예퇴직. 전혀 다른 분야인 유지보수협동조합을 창업해 운영 중인 10년 차 기업인. 잃어버린 낭만과 꿈을 찾고 워라밸 균형 잡힌 삶을 위해 등산·독서·글쓰기 등의 취미와 도전을 즐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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