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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경률의 노래하는 한국사(8)] ‘쌍화점’으로 들여다본 고려 말 ‘일부다처제’ 논란 

만둣가게 회회(回回) 아비에게 손목 잡힌 고려의 딸들 

풍속 해치는 원나라 문화에 다처제 건의한 대신, 부녀자에 욕먹고 손가락질당해
이성계 역성혁명 뒤엔 경처(京妻) 한씨 있어… 후계 문제로 중혼(重婚) 금한 태종


▎밀양에 있는 고려 후기 문신 박익의 묘 벽화. 고려 말 여인들의 모습이다. 신분이 높은 집안에서 아내를 여러 명 뒀던 중혼 모습으로 추정할 수 있다. / 사진:문화재청
"쌍화점에 만두 사러 갔더니만 / 회회 아비 내 손목을 쥐더이다 / 이 소문이 가게 밖에 나며 들며 하면 / 다로러거디러 조그마한 새끼 광대 네 말이라 하리라 / 더러둥셩 다리러디러 다리러디러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 그 자리에 나도 자러 가리라 / 위위 다로러 거디러 다로러 / 그 잔 데 같이 덤거친 곳 없다” (고려가요 ‘쌍화점’ 1절)

고려가요는 고려 시대에 백성이 부른 세속적인 노래다. 조선 시대와 달리 노랫말이 솔직하고 대담해 남녀 간의 은밀한 사랑도 거침없이 드러냈다. 대표적인 노래가 고려 제25대 충렬왕(재위 1274~1308년) 때 유행한 ‘쌍화점’이다. 충렬왕은 평소 연회와 가무(歌舞)를 즐겼다. ‘쌍화점’은 여흥을 돋우는 단골 레퍼토리였다. 궁궐 안에 상설 무대를 마련하고 기생들을 남장(男裝)시켜 이 노래를 부르게 했다.

제목으로 쓴 ‘쌍화점’은 만둣가게를 말한다. ‘쌍화(雙花)’는 만두의 일종인 ‘솽화’를 한자로 음차한 것이다. 솽화는 몽골인, 여진족 등이 즐긴 북방식 만두로 추정된다. 이곳에서 회회 아비, 곧 몽골인 가게 주인이 만두 사러 온 여성 화자의 손목을 슬쩍 잡는다. 에로틱하다. 심지어 그 잠자리에 ‘나도’ 자러 가겠단다. 회회 아비에게 여자가 한둘이 아닌가보다. 난잡한 성 풍속을 묘사하는 듯하다.

조선 시대 유학자들은 이 노래를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로 규정했다. 음란한 가사라는 것이었다. 그런 시각은 오늘날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쌍화점’은 성적으로 문란한 옛 노래의 대명사격이다. 퇴폐적인 풍조를 반영한 작품으로 거론된다. 과연 그렇게만 볼 일인가? 조선 선비들의 시각은 이념적으로 편향돼 있다. 실체적인 진실은 그보다 복잡하다. 이를 파악하려면 ‘시대 보정’이 필수다. 동시대 고려 사람들의 숨결을 불어넣어야 한다.

충렬왕은 쿠빌라이 칸의 딸 제국대장공주와 혼인하고 고려를 원나라 부마국으로 만든 임금이다. ‘쌍화점’에는 고려에 흘러든 원나라 풍속이 담겨 있다. 세계제국을 건설한 몽골인들은 처와 첩을 여럿 두는 일부다처제를 고수했다. 유목민족의 오랜 풍습이었다. ‘쌍화점’의 회회 아비도 그랬을 것이다. 그잔 데 같이 ‘덤거친’ 곳이 없다고 했다. 자러 갔지만 일이 순조롭지 못하고 답답했다는 뜻이다. 이 노랫 말에 스며 있는 시대상은 무엇이었을까?

성과 혼인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쌍화점’ 가사를 곱씹어보면 에로틱한 욕망 속으로 일부다처 풍속에 대한 고려 사람들의 관심이 흐른다. 회회 아비뿐만이 아니다. 3절에는 우물 용이 여성 화자의 손목을 쥔다. 옛사람들에게 우물은 궁궐을, 용은 임금을 은유하는 말이다. 고려 시대 임금은 비(妃)와 후궁을 여럿 거느린 일부다처의 화신이었다. 2절의 삼장사 사주(社主)와 4절의 술집 아비도 아마 동시대인에게는 같은 맥락이었을 것이다. ‘쌍화점’이 널리 유행하던 그 무렵 고려에 일부다처제 시행 논란이 일어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고려를 뒤흔든 ‘다처제’ 시행 논란


▎고려가요 ‘쌍화점’ 악보. 조선 영조 때 엮은 악보집 [대악후보]에 실려 있다. /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1275년 충렬왕이 신하를 거느리고 연등회에 나섰을 때 일이다. 대부경 박유도 왕의 행차를 따르고 있었다. 웅성웅성, 군중이 술렁거렸다. 한 노파가 그를 손가락질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내를 여럿 두자고 청한 놈이 바로 저 늙은 거지다(請畜庶妻者, 彼老乞兒也)!” 부녀자들도 다 같이 손가락질했다. 그 모습이 마치 붉은 손가락들로 두름을 엮어놓은 것 같았다. [고려사] 열전 ‘박유’ 조에 나오는 흥미로운 이야기다. 대체 임금에게 무엇을 청했기에 고려 여인들의 공적이 되었을까?

“우리나라는 본디 남자가 적고 여자가 많은데도 지금 신분에 상관없이 아내(妻)를 한 사람만 두고 있습니다. 원나라에서 온 사람들은 아내의 수에 한도가 없으니, 여인과 물산이 모조리 그들이 사는 북쪽으로 흘러갈까 걱정됩니다. 이제부터 대소 신료들이 여러 명의 처(庶妻)를 둘 수 있도록 해주소서. 그 수는 품계에 따라 정하고 평민도 일처일첩(一妻一妾)을 얻을 수 있게 하소서. 또 본처가 아닌 아내의 자식도 벼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과부와 홀아비가 줄고 인구가 늘어날 것입니다.” ([고려사절요] 1275년 2월)

살아도 사는 게 아닌 딸 뺏긴 부모 마음


▎2013~2014년 방영한 드라마 [기황후]. 공녀로 원나라에 건너가 황후 자리에 오른 실존 인물 기황후를 모티브로 삼았다. / 사진:MBC
박유가 건의한 것은 일부다처제 시행이었다. 고려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일부일처제에 반하는 것이었다. 물론 왕실을 비롯해 지배층 남성들은 여러 명의 처와 첩을 뒀다. 태조 왕건은 삼한 통합을 위해 무려 29명(왕후 6명, 부인 23명)을 아내로 맞아들였다. 또 부잣집에서는 처첩 3~4명을 들였고 조금만 맞지 않아도 헤어졌다는, 12세기 송나라 사신의 견문록도 있다(서긍, [고려도경] ‘잡속’). 하지만 원칙은 일부일처제였다. 설혹 여러 명 아내를 묵인하더라도 적자 상속과 서자 차별로 본처의 지위를 보장했다.

박유의 건의는 본처의 지위를 흔드는 것이었다. 날벼락 같은 소식에 부녀자들의 원망이 들끓었다. 그는 임금 앞에서 ‘늙은 거지(老乞兒)’라고 욕먹었다. 연등회장에서 무더기로 손가락질을 당했다. 고관의 체면이 말이 아니다. 손가락에 찔려 죽을 것 같았다. 일부다처제는 결국 무산됐다. 재상 가운데 아내를 겁내는 자들이 있어 시행할 수 없었다고 했다([고려사] 열전 ‘박유’).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 하물며 ‘마눌님’의 심기를 거스르는 다처제 시행이라니 ‘택도 없는’ 소리였다. 그럼에도 당시 고려 조정에 이런 논의가 등장한 까닭은 뭘까? 박유도 언급했듯이 여기에는 원나라의 공녀 징발과 다처제 풍습이 끼어든다.

“요즘 고려에 사신으로 가는 자들은 황제의 명이라 해 처녀만 데려오는 데 그치지 않고 자기 처첩까지 얻으려 합니다. 그 과정에서 재물과 여색으로 독직(瀆職)을 저지르고 있으니 이를 엄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조정의 후정(後庭, 여인이 거처하는 궁궐 깊숙한 곳)이 이미 차고 넘치는데 구태여 외국에서 데려와야 합니까?”([고려사] 열전 ‘이곡’)

1335년 원나라에서 벼슬한 고려인 이곡이 순제에게 올린 공녀 폐지 상소다. 13~14세기에 유라시아를 제패한 몽골제국은 속국에 공녀(貢女)를 바치게 했다. 고려도 원나라 간섭기에 ‘처녀(處女)’, ‘동녀(童女)’, ‘동녀절미자(童女絶美者)’ 등을 징발했다는 기록이 수두룩하다. 미모의 미혼 여성을 수시로 뽑아 원나라에 끌고 간 것이다. 원나라 사신, 다루가치, 집정대신 등이 처첩으로 삼거나 선물로 쓰려고 사사로이 데려간 여인도 적지 않았다.

공녀 징발 대상은 양인 이상의 신분층이었다. 평민은 물론 왕족, 권문세족, 관인(官人), 호장(戶長) 등 고려 지배층도 딸들을 내놔야 했다. 원나라로 건너간 고려 공녀는 황실, 왕부, 권세가 등에 분배돼 궁인이나 시녀로 일했다. 신분이 높은 집안의 딸들은 조서를 받거나 중매를 통해 원나라 황제, 제후, 고관대작의 배필이 되기도 했다. 몽골 지배층의 다처제 문화에서 고려 여인들은 둘째 부인이나 잉첩(媵妾, 시중드는 첩)으로 자리를 잡았다.

‘쌍화점’ 노랫말에는 이런 시대상이 녹아 있다. 회회 아비에게 손목 잡힌 고려의 딸들! 이곡은 순제에게 올린 상소문에서 딸과 영영 이별하는 부모의 마음을 애절하게 묘사했다. “남자를 데려와 살게 할지언정 딸은 내보내지 않는 것이 고려의 풍속입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품 안에서 딸을 빼앗아 4천 리 밖으로 보내버리니, 한 번 문을 나서면 죽을 때까지 돌아오지 못하는 것을 뻔히 아는 그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고려사] 열전 ‘이곡’)

고려에서는 예로부터 딸을 혼인시켜도 집에서 내보내지 않았다. ‘서류부가혼(壻留婦家婚)’이라는 풍속이었다. 남녀가 혼례를 치르면 남편이 아내의 집에 머물렀다. 자식을 낳아 기를 동안 처가(친정)에 거주한 것이다. 대개 양육을 마칠 때쯤 아내와 아이가 남편의 집에 들어갔다. 여자가 시집가는 게 아니었다. 남자가 장가가는 것이었다. 그러니 품 안의 딸을 이민족에게 빼앗기는 부모의 마음이 오죽했을까? 살아도 사는 게 아니었다고 한다.

딸을 지킬 방법을 찾아야 했다. 숨기거나 뇌물을 쓰는 건 미봉책이었다. 저들이 요구하는 건 미혼 여성이었다. 배우자를 얻으면 딸을 곁에 둘 수 있었다. 혼인이야말로 딸을 지킬 확실한 방법이었다. 풍속의 변화가 나타났다. 딸 가진 집에서는 혼인을 서둘렀다. 어린 사내아이를 데려와서 여차하면 사위로 삼았다. 예서(預壻), 곧 데릴사위였다. 제국의 뒤뜰로 끌려가거나 이민족의 처첩이 될 모진 운명에서 꼬마신랑이 각시를 구한 것이다.

‘중혼(重婚)’에 담긴 권문세족의 셈법


▎드라마 [정도전]에서 그래픽으로 복원한 고려 말 개경의 모습. 이성계는 중앙 정계에 진출하고자 향처 한씨를 두고 경처 강씨를 새로 얻었다. / 사진:KBS
한편 신분이 높은 집안들은 민심을 곁눈질하며 일부다처제 시행을 거론했다. 박유의 건의에는 권문세족의 정치적 셈법이 깔려 있었다. 고려의 권문세족은 옛 문벌귀족, 무신정권 세력, 부원배(附元輩) 등으로 이뤄졌다. 그들은 정략결혼으로 지위를 공고히 했다. 지배층이라도 관인(관리층)이나 호장(향리층)과는 통혼하지 않으려고 했다. 권문세족끼리 혼인해 명성과 재력과 인맥을 공유했다. 한 다리 건너면 사돈이고 인척이었다.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며 뒤를 봐줬다.

거미줄처럼 짜놓은 혼맥이 부와 권력의 기반이므로 딸들은 사랑스러운 자식이자 귀중한 자산이었다. 딸을 이민족의 처첩이나 공녀로 보내는 건 권문세족에게 별로 득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출세를 도모하는 부류도 있었지만, 권문세족은 딸을 곁에 두고 정략결혼시키는 쪽을 선호했다. 안정적으로 가문을 번창시키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중혼(重婚)’은 딸을 원나라에 빼앗기지 않으면서도 권문세족 간의 혼맥을 넓힐 수 있는 효과적인 방안이었다. 본처 외에 또 다른 아내를 얻는 것이다. 권문세족은 중혼에 열을 올렸다. 나아가 신료들이 품계에 따라 여러 명의 처를 두는 방안도 내놨다. 나라에서 시행해 법제화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다른 신분층은 시큰둥했다. 부녀자들은 거세게 반발했다. 아내들의 성난 손가락질에 다처제 시행은 물거품이 됐다.

그렇다고 중혼을 엄히 금한 것은 아니었다. 고려 말에 이르면 ‘양처(兩妻)’라는 풍속이 벼슬아치들 사이에 퍼져 나갔다. 향처(鄕妻)와 경처(京妻), 곧 시골 부인과 서울 부인을 따로 둔 것이다. 특히 지방의 유력자가 중앙 정계에 진출할 때 고향에 본처를 놔두고 개경에 또 다른 처를 얻곤 했다. 중앙에서 출세하려면 개경에 연줄이 있어야 한다는 취지였다. 물론 임지에서의 내조도 기대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함흥과 개경에 ‘양처(兩妻)’를 둔 이성계


▎태조 이성계의 둘째 부인 신덕왕후 강씨가 묻힌 정릉. 사후 이방원에게 자식들이 살해당하고 본인도 왕후 대우를 못 받는 수모를 겪었다. 1669년 복권돼 정릉에 제사 지내던 날 소낙비가 쏟아졌다. 백성들은 원통함을 씻어주는 비라고 여겼다.
양처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고려 말 변방의 무장에서 일약 실권자로 떠오르며 마침내 조선의 창업자가 된 이성계다. 그는 일찍이 안변 사람 한경의 딸과 혼인해 자신의 본거지 함흥에 살림을 차리고 슬하에 6남 2녀를 뒀다. 외침을 연달아 물리치고 장수로서 명성이 높아지자 그는 다시 권문세족 강윤성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다. 2남 1녀 자식들의 나이를 감안하면 1370년대 이성계가 왜구 토벌전에서 두각을 나타냈을 무렵의 일일 것이다. 한씨 부인은 향처, 강씨 부인은 경처로 볼 수 있겠다.

강씨 집안은 원나라 간섭기에 군주와 섭정의 총애를 받으며 재상가로 발돋움했다. 강씨 부인의 아버지 강윤성과 숙부 강윤충, 그리고 오빠 강순룡이 모두 찬성사를 지냈다. 원나라에서 벼슬을 한 이성계 가문과는 겹사돈을 맺을 만큼 교분이 두터웠다. 숙부 강윤충과 사촌오빠 강우가 이성계의 백부인 쌍성 만호 이자흥의 사위였다.

이성계가 중앙 정계로 진출하자 강씨 집안은 뒤를 봐주기로 했다. 강윤성의 딸을 맺어준 게 그 증표다. 이성계는 청년기까지 원나라 사람으로 살았다. 몽골인의 다처 풍습에 익숙했기에 양처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을 것이다. 역할 분담도 자연스럽게 이뤄졌다. 한씨 부인에게는 함흥의 가별초(家別抄, 이성계 가문에 속한 백성이자 군사 집단)를 맡기고 강씨 부인은 중앙 정계 진출의 동아줄로 삼으면 됐다.

경처 강씨는 이성계가 고려 말에 권력을 잡고 새 나라를 일구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성계의 아들딸로 권문세족 가문과 혼맥을 형성하고 신진사대부 인재들이 이성계의 깃발 아래 모여들 수 있도록 가교 노릇을 훌륭히 했다. 집안의 인맥을 십분 활용해 이성계 세력을 구축한 것이다. 참모 역할도 톡톡히 해냈다. [태조실록] 총서를 보면 창업의 마지막 걸림돌 정몽주를 제거한 일은 그녀와 이방원의 합작품이었다. 이성계는 후일 “내조와 충고로 창업을 도운 어진 보좌였다”고 경처 강씨를 치켜세우기도 했다(권근, [양촌집]).

조선 건국의 3대 공신은 정도전과 이방원, 그리고 강씨 부인이었다. 이성계는 1392년 왕위에 오르자 마자 향처 한씨를 절비(節妃)에, 경처 강씨를 현비(顯妃)에 봉했다. 한씨가 한 해 전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조선 최초의 왕비는 사실상 강씨였다. 태조 이성계는 그녀에게 큰 선물을 안겨줬다. 현비 소생의 막내아들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한 것이다. 막내를 울루스의 후계자로 삼았던 몽골 풍습을 따랐을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그녀의 공적에 대한 보상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다처제 논란에 종지부 찍은 태종 이방원


▎작자 미상의 [구운몽도]. 주인공 성진은 꿈속에서 2처 6첩을 두고 부귀영화를 누렸다. 김만중의 소설 [구운몽]은 17세기 이래 널리 읽혔으며 민화로도 그려져 인기를 끌었다. / 사진:국립민속박물관
하지만 태조의 이 결정은 엄청난 비극을 부르고 말았다. 사실 공신들 대다수는 후계자로 다섯째 아들 이방원을 지지했다. 세자 자리를 빼앗기자 이방원은 적개심을 불태웠다. 그는 1398년 왕자의 난을 일으켜 현비의 아들들과 사위, 그리고 친정을 도륙했다. 강씨가 병으로 죽고 불과 2년 후의 일이었다.

현비 강씨는 사후 신덕왕후(神德王后)로 받들어지고 도성 안 정릉(貞陵)에 묻혔다. 그러나 1408년 태상왕 이성계가 세상을 떠나자 예우가 급변했다. 태종 이방원은 정릉을 파헤쳐 도성 밖으로 이장시켰다. 제사도 후궁의 예로 떨어뜨리고, 신주도 종묘에 모시지 않았다. 신의왕후(神懿王后)로 추존한 생모 한씨는 본처이므로 격을 높이고, 신덕왕후 강씨는 본처가 아니므로 격을 낮춘 것이다.

1413년 태종은 처가 있으면서 다시 처를 얻는 것을 엄히 금했다. 중혼을 금지한 것이다. 고려 말에 성행한 양처도 배척했다. 자식들이 서로 적자라고 다투거나 재산 상속 분쟁이 많다는 게 이유였다. 신덕왕후의 위상은 애매해져 왕비도 후궁도 아닌 채로 세월에 묻히고 말았다. 그녀는 1669년 송시열 등이 상소해 비로소 복권됐다.

원나라 간섭기 이래 끊임없이 구설에 올랐던 다처제 논란에 이방원이 종지부를 찍었다. 하지만 넓게 보면 다처 풍습인 ‘축첩(畜妾)’은 조선 시대에도 본처들의 우환이 됐다. 고전소설 [구운몽]에서 양소유는 2처 6첩과 함께 부귀영화를 누렸다. 양반 남성들의 로망은 곧잘 ‘난봉’으로 이어졌다. 규방에는 정한(情恨)만이 쌓여갔다.

“사랑방에 올라 보니 온갖 가지 술을 놓고 / 기생첩을 옆에 끼고서 권주가를 부르더라 / 건넌방에 내려와서 아홉 가지 약을 먹고 / 비단 석 자 베어 내어 목을 매어 죽었더라 / 진주 낭군 이 말 듣고 버선발로 뛰어나와 / 내 이럴 줄 왜 몰랐던가 사랑 사랑 내 사랑아 / 화류계 정 삼 년이요 본댁의 정 백 년인데 / 내 이럴 줄 왜 몰랐던가 사랑 사랑 내 사랑아”(민요 ‘진주난봉가’ 중에서)

※ 권경률 - 역사 칼럼니스트이자 작가. 서강대에서 역사를 공부했다. 새로운 해석과 기발한 상상력으로 한국사에 숨결을 불어넣는다. 유튜브·페이스북에 ‘역사채널권경률’을 열어 독자들과 역사하는 재미를 나누고 있다. [시작은 모두 사랑이었다](2019), [조선을 새롭게 하라](2017), [조선을 만든 위험한 말들](2015) 등을 썼다.

202211호 (2022.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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