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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이슈] 시진핑 1인 지배체제 굳힌 중국, 어디로 갈까 

대만 무력 통일, 더는 상상의 영역 아니다 

예영준 중앙일보 논설위원
충성심 강한 ‘시자쥔’ 일색 상무위원 구성, 5년 후에도 재집권 유력
투자 자본의 ‘차이나 런’ 심화… 미·중 갈등 속에서 한국 압박 커져


▎2022년 10월 23일 중국 신임 최고지도부 7인이 베이징 인민대회당에 입성하고 있다. 그 선두에는 시진핑(왼쪽) 중국 국가주석이 있다. / 사진:AFP연합뉴스
시진핑(習近平·이하 직함 생략) 중국 국가주석이 2012년 18차 공산당 대회에서 중국의 14억 인구를 통치하는 최고 권력자로 결정된 직후 첫 지방 방문지로 택한 곳은 ‘개혁개방 1번지’라 불린 광둥(廣東)성 선전(深圳)이었다. 인구 3만 명인 한적한 어촌에 지나지 않던 선전에 덩샤오핑(鄧小平)은 중국 최초 경제특구를 설치하고 시장경제를 받아들이는 실험장으로 삼았다. 지금도 덩샤오핑은 시 중심부의 롄화산(蓮花山) 꼭대기에서 글로벌 첨단 도시로 변모한 선전을 내려다보고 있다. 사후에 동상을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어기고 중국 당국은 2000년 덩샤오핑의 동상을 세웠다. 시진핑은 총서기에 취임하자마자 이곳에 달려와 동상에 헌화하고 덩샤오핑이 남순강화(南巡講話) 때 심었던 것과 같은 종류 나무를 골라 기념식수를 했다. 그의 이런 행보는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노선의 충실한 계승자가 되겠다는 다짐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때까지만 해도 시진핑이 덩샤오핑의 시대에 종언을 고하고, 덩샤오핑과 동격 혹은 덩샤오핑을 넘어서는 권위와 위상을 추구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2022년 10월 23일, 전 세계의 이목은 베이징 인민대회당의 레드카펫에 쏠렸다. 새로이 구성된 중국 공산당의 최고지도부, 즉 정치국 상무위원 7명의 면면이 공개되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내외신 기자 600명이 진을 치고 있는 가운데 시진핑 주석을 필두로 나머지 상무위원들이 당 서열에 따라 차례로 입장했다. 시진핑의 바로 뒤를 따라들어오는 상무위원의 얼굴이 드러나는 순간, 기자석에서는 놀라움 섞인 탄식이 터져 나왔다. 뜻밖의 인물인 리창(李强) 상하이 서기가 두 번째로 입장했기 때문이다. 부총리 역임자 가운데 한 사람을 서열 2위 상무위원으로 발탁하고 총리직을 맡기는 관례를 깬 인사였다. 리창은 시진핑이 저장성 서기로 근무하던 시절, 2년여 동안 비서장을 맡았던 인연으로 발탁된 시진핑의 측근이다. 이런 측근들을 가리켜 시파이(習派) 혹은 시자쥔(習家軍)이라 부른다.

시자쥔의 득세, 공청단의 몰락


▎ 사진:연합뉴스
리창뿐만이 아니었다. 그 뒤로 등장한 서열 3위에서 7위까지가 예외 없이 리창처럼 시진핑과 지방 근무를 함께했던 시자쥔, 혹은 시진핑이 신뢰하는 측근 심복들 일색이었다. 가령 서열 5위로 중앙서기처 1서기를 맡을 예정인 차이치(蔡奇) 베이징 서기는 시진핑과 푸젠성, 저장성 근무가 겹쳤고, 수석부총리를 맡게 될 서열 6위의 딩쉐샹(丁薛祥)은 시진핑이 상하이 서기로 근무하던 시절 비서장으로 일하던 부하 출신이다.

집단지도체제를 구성하는 상무위원을 총서기의 측근 내지 심복만으로 채운 것은 전례 없는 일이다. 상무위원 구성에서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 출신 등 계파별 안배가 어느 정도 이뤄져오던 관행이 여지없이 무너진 것이다. 지난 10년간 태자당 출신 시진핑이 총서기와 국가주석을 맡고, 공청단 출신 리커창(李克强)이 총리를 맡았던 것은 일종의 계파 간 안배와 타협의 산물이었다.

시자쥔 일색의 상무위원 구성은 시진핑으로의 권력 집중을 의미한다. 따라서 중국이 개혁개방 이후 견지해오던 집단지도체제가 형해화(形骸化)하고 말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덩샤오핑이 설계한 집단 지도체제 아래에서 규정상 총서기는 상무위원회를 소집할 수 있는 권한만 가질 뿐 표결·발언권은 나머지 상무위원들과 동등했다. 분공제(分工制)라 하여 각각의 상무위원들이 담당하는 고유 업무 분야에 대해서는 총서기조차 관여할 수 없었다. 상무위원이 9명이던 후진타오(胡錦濤) 집권기에는 이런 시스템이 잘 지켜져 ‘구룡치수(九龍治水)’란 용어가 나왔다. 하지만 앞으로는 시 주석 이외의 다른 용이 존재할 수 없게 됐다. 새로운 지도부 구성을 보도한 [인민일보] 1면의 지면 편집을 시기별로 비교해보면 집단지도체제가 유명무실해지는 추세를 읽을 수 있다.

덩샤오핑이 2선으로 물러나면서 장쩌민(江澤民)을 총서기로 발탁한 이후, 중국 지도부에는 대체로 공청단과 상하이방, 태자당 등 대체로 세 개 계파가 공존했다. 이 가운데 상하이방은 장쩌민 퇴장 및 시진핑 취임 이후의 반부패 드라이브로 사실상 유명무실해진 상태다. 혁명 원로의 자녀 그룹을 뜻하는 태자당은 최고 권력자 시진핑을 제외한 대다수는 고령으로 인해 현직에 남아 있지 않아 계파로서 의미가 사라지고 말았다. 결국 남는 것은 퇀파이(團派)라 불리는 공청단이 유일하지만, 시진핑이 철저히 배척함으로써 이번 당대회에서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다. 공청단 인맥의 대부 격인 후진타오 전 주석이 당대회 폐막식 석상에서 시진핑의 지시를 받은 요원에 의해 퇴장당하는 장면이 시진핑과 공청단의 역학관계를 상징한다.

공청단은 학생이나 청년이 정식 공산당원이 되기 전에 입단하는 조직을 말한다. 경쟁을 거쳐 입단이 승인되는 데다 입단 후에도 훈련과 교육을 받고 규율을 지키기 때문에 공청단은 공산당의 엘리트 인재 공급원 역할을 해왔다. 개혁파 지도자였던 후야오방 총서기와 후진타오 전 주석 등 두 명의 당 최고지도자를 배출했다. 직전 상무위원 중에도 리커창 총리와 왕양 정협주석 등이 포함돼 있었다. 두 사람은 이번에 직책을 내놓고 평당원으로 돌아가게 됐는데, 이는 임기를 채우고 물러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에 비하면 이번에 정치국원 자리를 내놓고 중앙위원으로 강등당한 후춘화(胡春華)의 경우야말로 공청단파에 훨씬 더 가혹하고 치명적인 조처였다.

마오쩌둥·덩샤오핑과 같은 반열로


▎중국 공산당 지도부가 확정된 다음 날 [인민일보] 1면. 2012년(왼쪽 둘째)보다 2017년(왼쪽 셋째), 2022년(오른쪽) 시진핑의 권력이 강력해졌음을 실감할 수 있다. 마오쩌둥 사진이 전면을 차지한 1969년 4월 25일 자(왼쪽)에 필적할 만하다. / 사진:인민일보DB 캡처
베이징대 수석 졸업과 공청단 제1서기 등 화려한 이력의 후춘화는 후진타오 집권 시절 차기 지도자감으로 낙점받고 40대에 상무위원 바로 아래 단계인 정치국원에 진입했다. 하지만 시진핑 집권 10년 동안 계속 정치국원에 머무르다 이번 당대회에서 승진은커녕 강등당함으로써 사실상 정치 생명이 다했다. 원래 정치국원은 25명이 정수였는데 이번에는 24명으로 확정됐다. 찬반 표결을 생각할 때 짝수 정원은 이례적이다. 그래서 마지막 순간 후춘화가 배제된 것 아니냐는 추측도 무성하다.

왜 그에게 이런 시련이 닥친 것일까. 중국 공산당의 공식 설명에 따르면 20차 당대회의 인사 원칙은 “시진핑을 핵심으로 하는 당 중앙과 고도의 일치 유지”였다. 다시 말해 시진핑에 대한 충성심의 강도가 인사를 좌우했다는 것이다. 이 설명을 보고 머릿속에 떠오른 장면이 있다. 필자는 [중앙일보] 베이징 특파원이던 2017년 3월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기간 당시 주요 지방 대표단별로 공개회의를 관람한 적이 있다. 당시 랴오닝성 서기였던 리시(李希)는 10분 남짓 발언 동안 ‘핵심’이란 단어를 20회 이상 사용하면서 “시진핑 총서기가 당의 핵심이 된 것은 당과 민족의 최대 행운. 마르크스주의 정치가 중 걸출한 지력과 계략을 갖추고 있다”고 발언했다. 리시는 광둥성 서기를 거쳐 이번에 서열 7위 상무위원에 발탁됐다. 당시 필자가 접한 다른 지방 지도자들의 발언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광둥성 서기였던 후춘화는 단 한 차례도 ‘핵심’이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리시와 후춘화의 엇갈린 운명은 이때 이미 정해진 것인지 모른다. 중국 공산정권을 창업했다는 의식이 강한 혁명 원로의 자녀 시진핑이 볼 때, 자신에게 충성하지 않는 엘리트 집단 공청단보다는 차라리 능력은 못 미쳐도 자신에게 우직하게 충성하는 심복이 더 곱게 보일 것이다.

5년마다 열리는 당대회 중에서도 이번 20차 대회가 특히 주목받은 것은 시진핑의 3연임이 확정되면서 종신집권의 길까지 열어놓았기 때문이다. 널리 알려진 대로 중국의 최고지도자는 5년 임기에 한 차례 연임하여 10년 집권한 뒤 물러나는 게 덩샤오핑이 세운 관례였다. 그런데 시진핑이 이를 깨고 3번째 임기를 시작했다. 하지만 이 사실 자체는 전혀 놀랍거나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필자가 보기에는 적어도 5년 전 19차 당대회 무렵부터 예고돼온 일이다. 어쩌면 2012년 11월 제18차 당대회를 통해 그가 권좌에 오르는 순간부터 차곡차곡 준비해오던 일이라 보는 게 맞는 듯하다.

시진핑 사상, 즉 ‘시진핑 신시대 중국특색 사회주의 사상’이란 긴 이름의 통치 이념은 이미 2017년 19차 당대회에서 헌법보다 우위에 있는 최고 규범인 당장(黨章)에 명기됐다. 당시 시진핑은 3시간 동안 낭독한 개막식 정치보고에서 ‘신시대’란 단어를 37차례 사용했다. 이는 1949년 공산정권 수립 이래 중국 현대사를 마오쩌둥(毛澤東) 시대와 1978년 개혁개방 이후의 덩샤오핑 시대, 그리고 2012년 자신의 집권과 함께 시작된 신시대, 즉 시진핑 시대로 나누는 새로운 역사 해석이었다.

‘포스트 시진핑’은 없다


▎2022년 11월 15일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윤석열(왼쪽) 대통령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 사진:연합뉴스
이러한 역사 해석을 공식화한 게 지난해 공산당 19기 6중전회에서 채택된 ‘중국 공산당의 100년 분투로 이룩한 중대한 성취와 역사적 경험에 관한 당 중앙의 결의’다. 마오쩌둥 시대인 1945년에 1차 역사결의, 덩샤오핑 시대인 1981년의 2차 역사결의에 이어 시진핑 시대를 맞아 3차 역사결의를 채택한 것이다. 시진핑의 집권 연장도 실은 2018년 국가주석직 연임 제한을 철폐한 헌법 개정으로 이미 예고된 것이다. 결국 이번 당대회의 핵심적인 내용은 시진핑이 지난 10년 동안 꾸준히 단계적으로 추진해온 일들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전임자인 후진타오나 전전임자인 장쩌민과 같은 수준을 넘어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에 육박하는 힘과 권한을 누리게 된 것은 결코 하루아침에 이뤄진 일이 아니란 이야기다.

그렇다면 5년 뒤에는 어떻게 될까. 남은 기간 동안 시진핑의 1인 권력이 더욱 확고해지면 21차 당대회에서도 물러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이번에 구성된 상무위원 진용 중에는 나이와 경력상 5년 후를 기약할 수 있는 후계자감이 눈에 띄지 않는다. ‘포스트 시진핑’은 시진핑 자신이란 이야기가 그래서 나온다. 더 나아가 마오쩌둥 사망 이후 폐지된 당 주석 제도를 부활해 시진핑이 차지할 것이란 전망까지 나온다. 이런 흐름은 1978년 개혁개방으로 국가 노선을 전환한 이후 시장경제를 도입하고 국제사회와 협력하면서 정치적으로는 착실하게 집단지도체제를 확립시켜온 것과 역행하는 흐름이다.

중국은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작동하지 않는 공산당 1당 지배 국가다. 문제는 시진핑 시대의 중국이 마오쩌둥 시대의 중국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힘을 갖췄다는 점에 있다. 막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미국과 패권 경쟁을 펼치는 중국의 모든 권력이 개인의 손에 쥐어진 현실을 외부 세계는 불안한 시선으로 볼 수밖에 없다. 시진핑이 그 힘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국제 질서는 안정과 조화를 유지할 수도 있고, 반대로 전 세계가 불안과 긴장으로 빠져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시진핑이 20차 당대회에서 제시한 목표는 ‘중국식 현대화’다. 방점은 앞부분의 ‘중국식’에 있다. 다시 말해 시장경제를 포함한 서구식 제도와 시스템을 도입하면서 현대화를 추구했던 덩샤오핑 이래의 개혁개방 노선과 선을 긋겠다는 뜻이다. 중국식 현대화를 강조한 것은 서방과의 체제 우월성 경쟁을 피하지 않겠다는 이야기다. 필연적으로 미국을 포함한 외부 세계와 충돌이 잦아질 수밖에 없다.

기회에서 위협으로 변하는 중국

가장 큰 우려 요인은 대만 문제다. 시진핑은 외면적으로는 마오쩌둥, 덩샤오핑에 이은 권력과 권위를 누리려 하지만 공산혁명 지도자로서 특별한 카리스마를 지녔던 마오쩌둥이나 중국을 가난에서 벗어나게 한 덩샤오핑만큼의 정당성도 없고 업적도 쌓지 못했다. 그래서 시진핑은 조국 통일, 즉 대만 흡수 병합이야말로 자신이 해결해야 할 대업이라고 생각할 가능성이 있다. 시진핑은 당대회 개막식 정치보고에서 “조국 통일은 반드시 실현할 수 있다. 평화 통일을 향한 노력을 하겠다”고 하면서도 “무력 해결의 선택지를 포기할 수 없다”고 했다. 중국의 대만 침공 시나리오가 상상의 영역에만 머무는 것이 아님을 공개적으로 밝힌 것이다.

대만 해협에서 무력 분쟁이 터지고 미국이 대만 방위에 나서는 사태는 우리에게 강 건너 불이 아니다. 당장 전략적 유연성 차원에서 주한 미군이 움직일 수 있고 동맹인 한국에도 지원을 요구할 것이다. 주한 미군이 빠져나가는 힘의 공백을 북한이 노릴 수도 있다. 한국이 직간접적으로 얽혀들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대만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시진핑 집권 3기의 대외 정책은 전랑외교(戰狼外交)란 단어로 상징되는 강경 기조가 이어질 것으로 예고되고 있다. 미·중 패권이 격화하는 속에서 한국은 미국이 주도하는 공급망 재편과 대중 봉쇄 기제 참여를 둘러싸고 미·중 양쪽에서 압박을 받는 곤란한 상황에 빠질 수 있다. 우리 경제의 높은 대중 의존도를 고려할 때 중국과의 디커플링은 당장의 손실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여기에다 한·미·일 vs 북·중·러의 신냉전 구도가 펼쳐지면 북핵 문제 해결은 더욱 요원해질 것이다.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에 치중하는 안미경중(安美經中)으로 이익을 누리던 시절은 이미 옛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안보와 경제, 두 분야에서 동시에 압박이 펼쳐지는 새로운 상황이 시진핑의 ‘황제’ 등극과 함께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 예영준 중앙일보 논설위원 yyjune@joongang.co.kr

202212호 (2022.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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