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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정신의 미학(82)] ‘여말삼은’의 맏형 목은(牧隱) 이색 

충언(忠言)으로 기우는 고려를 붙들다 

원나라 국자감서 공부하고 성균관 대사성 맡아 정몽주 등과 성리학 진흥
공민왕 개혁 돕다 급진개혁파에 밀려 유배, 끝내 이성계 도움 요청 뿌리쳐


▎목은 후손인 이완섭 전 영덕문화원 사무국장이 영덕 생가지에서 기념관 조성 내력 등을 설명하고 있다. / 사진:송의호
"왕이 노하여 글을 지으라고 급히 재촉했다. 그러자 공이 엎드려 말한다. ‘신이 차라리 죄를 얻을지언정, 어찌 감히 글을 지어 죄를 만들 수 있겠습니까.” 고려 공민왕의 다그침에도 재상은 목숨을 걸고 간(諫)한 시중(侍中) 유탁을 유죄로 만들 수 없다며 허위 글짓기를 거부한다. 앞서 공민왕은 먼저 세상을 떠난 왕비(노국공주)를 위해 화려한 영전(影殿) 건립을 추진했다. 그러자 유탁은 “이 일은 백성을 괴롭히고 재화를 낭비한다”며 “백관(百官)의 장(長)으로 죽기로써 간하겠다”며 상서(上書)하고 불가함을 아뢰었다. 그러자 왕은 크게 노하며 유탁을 하옥시키고 다른 일로 트집 잡아 그를 죽이려 재상에게 글을 짓게 한 것이다.

공민왕의 부당한 지시에 ‘안 됩니다’ 바른말을 단호히 한 재상은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이다. 제자 권근(權近)이 쓴 목은 행장에 관련 내용이 나온다. 공민왕은 여기서 다시 무리수를 둔다. 왕은 국인(國印)을 건네 목은에게 봉하게 한 뒤 왕궁을 나가 정무를 중단한다. 재상이 부덕한 자신을 따르지 않으니 더는 왕 노릇을 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그러자 영도첨의(領都僉議) 신돈(辛旽)이 나서 목은이 왕명을 따르지 않는다며 구금한 뒤 신문한다.

목은이 눈물을 흘리며 말한다. “신이 우는 것은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다만 이 한 가지 과오로 후세에 아름답지 못한 왕으로 남을까 봐 염려해서입니다.” 옥관(獄官)이 이를 왕께 아뢴다. 공민왕은 마침내 느끼는 바 있어 유탁을 석방하고 목은에겐 목욕하고 조회하도록 했다. 절대 권력을 바른말로 보좌하는 충언(忠言)은 이렇게 어려웠다.

11월 19일 목은의 자취를 찾아 경북 영덕군 영해면 괴시리를 찾았다. 700년 전쯤 여말삼은(麗末三隱)의 맏형 격인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그는 이곳 외가에서 태어나 외할아버지 김택 아래서 2년여 자란 뒤 충남 서천군 한산면 본가로 돌아갔다. 영해는 지금은 면(面)이지만 고려시대엔 예주목 또는 영해부였던 큰 고을이었다. 면 소재지 도심을 지나 망일봉 쪽으로 들어서면 산 아래 영양 남씨 집성촌인 괴시리 전통마을이 나타난다. 마을 뒤쪽 산마루에 목은 이색기념관과 생가터가 자리해 있다.

태어난 영덕 괴시리에 표석만 외로이 세워져


목은의 후손인 이완섭 전 영덕문화원 사무국장이 가파른 길을 올라 현장을 안내했다. “고려시대에는 이런 높은 곳에 집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전쟁이 나도 아래보다 안전했을 테니까요.” 이색이 태어난 집은 사라지고 그 자리엔 ‘목은이색생가지’란 표석이 세워져 있다. 집터 뒤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병풍처럼 서 있어 기운이 예사롭지 않다. 영덕군은 20년 전쯤 생가 복원을 추진했다. 그러나 문화재청이 고려시대 가옥은 전하는 게 없어 고증할 방법이 없다는 의견을 내 복원은 중단됐다. 생가지 왼쪽에 1893년 건립한 한옥이 있다. 괴시마을 남흥수가 지은 만서헌이다. 다시 그 왼쪽에 한옥 목은기념관이 들어서 있다. 만서헌은 목은과는 무관한 후대에 지어진 집이다.

이색은 10대 때 개경으로 올라가 이제현 문하에서 수학했다. 그는 14세에 성균시에 합격한다. 이색은 아버지 덕분에 일찍이 국제적인 안목을 기른다. 1348년(충목왕 4) 그는 아버지 이곡이 원나라에서 중서사 전부 벼슬을 하자 관리의 자제 자격으로 국자감 생원이 된다. 이색은 3년 동안 공부하면서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졌다. 1351년(공민왕 1) 아버지가 귀국해 세상을 떠나자 그도 급히 돌아와 삼년상을 마친다.

이색은 공민왕이 실시한 과거에 급제한 뒤 다시 원나라로 들어갔다. 그는 원나라 회시(會試)에도 합격해 응봉한림문자승사랑 등에 임명된다. 귀국해선 전리정랑 등에 등용된다. 목은은 원나라와 고려를 오가며 관리를 지냈다. 1356년 그는 연로한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28세에 영구 귀국한 뒤 한림학사가 돼 문무 관리를 선발하는 등, 공민왕을 도와 개혁에 앞장섰다.

청소하고 향 피운 뒤에야 이색 부른 공민왕


▎목은이색생가지 표석. 목은은 외가인 영덕에서 태어나 2년여 성장했다. / 사진:송의호
1361년(공민왕 10)에 홍건적이 쳐들어온다. 왕이 복주(福州, 안동)로 몽진하자 신료들은 허둥지둥 흩어졌으나 목은은 왕을 호종하며 곁을 떠나지 않고 끝까지 호위했다. 그는 일등 공신이 된다. 1367년(공민왕 16) 39세 목은은 판개성부사와 성균관 대사성을 겸한다. 왕은 홍건적의 침입으로 피폐해진 학교를 부흥시키기 위해 성균관을 고치고 정몽주·이숭인·김구용 등을 학관(學官)으로 임명한 뒤 목은을 그 장(長)으로 앉힌 것이다.

이듬해 사방에서 학자들이 모여들었다. 학관은 경서를 분담해 강의하고 수업을 마치면 목은의 주재로 서로 의심스러운 부분을 토론했다. 여기서 목은의 대학자 풍모가 드러난다. 그는 온화한 모습으로 가운데 앉아 경서를 정주(程朱)에 바탕을 두고 분명하게 해석해냈다. 하륜은 “당시 학자들은 밤을 새우고도 피곤함을 잊었다”며 “선생의 가르침은 성리학을 진흥시키고 유풍(儒風)을 일신하는 힘이 됐다”고 신도비에 적었다.

목은은 과거 시험관으로 발탁된다. 이첨 등 7인의 급제를 시작으로 1369년 동지공거가 돼 유백유 등 33인을 선발한다. 이때 시험 응시자의 필체를 알아보지 못하도록 서리가 모든 답안지를 고쳐 쓰는 역서(易書) 제도를 도입했다. 시중 유탁 하옥 사건이 일어난 것은 그 무렵이다. 이후 공민왕은 이색을 부를 때면 주변을 청소하고 향을 피우게 했다. 왕은 목은을 이렇게 평가한다. “이색의 학문은 군더더기인 살을 버리고 골수만을 얻은 것이어서 중국에서도 견줄 만한 사람이 드문데, 어찌 그를 소홀히 대할 수 있겠느냐.”

1374년 뜻밖에 공민왕이 시해된다. 10세 왕우가 자리를 물려받으니 우왕이다. 목은은 3년 전 모친상을 당한 이후 너무 슬퍼한 나머지 병이 되어 구토와 설사가 겹쳤는데 왕의 부음을 듣고 더 위중해져 7년여를 몸져누웠다. 그때부터 주변국은 간섭을 시작한다. 원나라는 우왕이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고 의심했다. 중원에 새로 선 명나라는 고려 새 임금이 원나라와 관계를 끊고 친명 외교를 펼치라고 압력을 넣었다. 우왕은 벼슬에서 물러나 있던 이색을 불러들여 국사를 논의했다. 이색은 나라가 위태로울 때 돕지 않는 것은 신하의 도리가 아니라며 우왕을 보필해 나라를 안정시켜 나갔다. 그러나 1389년 위화도 회군과 함께 고려와 이색의 운명은 격랑에 휩싸인다. 이색은 공민왕 시절부터 고려가 요동 땅을 확보해 명나라의 동북 진출을 막아야 다시 대국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고 건의했다.

목숨 걸고 명나라로 가는 사신을 자청하다


▎고려 문하시중을 지낸 목은 이색의 초상화. / 사진:문화재청
그즈음 강성해진 명나라는 고려의 요동 진출을 막기 위해 고려 땅 철령(함남 안변 인근)에 철령위를 설치하겠다고 통보한다. 철령 이북 땅을 명나라가 차지하겠다는 뜻이었다. 최영은 요동 정벌을 주장했다. 이성계는 반대했다. 우왕은 최영을 팔도도통사로 이성계를 우군도통사로 임명하고 요동 정벌을 명한다. 그러나 군사를 거느리고 요동으로 향하던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린 뒤 개경을 공격했다. 개경은 함락되고 우왕과 최영은 유배된다. 이때부터 고려 말 개혁을 추구한 신흥사대부는 이색·정몽주·길재·권근 등 왕조 유지 온건파와 새 나라를 세우자는 정도전·변계량 등 급진파로 갈라져 반목한다. 반역을 주도한 이성계는 이색을 바로 제거하고 싶었지만 따르는 선비가 많은 데다 자신의 책사 정도전의 스승이어서 회유를 거듭한다.

이완섭 전 문화원장과 함께 만서헌 옆 목은기념관으로 들어갔다. 기념관은 조촐했다. 한쪽에 목은의 학맥이 정리돼 있다. 130여 문생(門生) 중 한번은 이름을 들은 주요 인물 50여 명이 적혀 있다. 권근·길재·맹사성·문익점·이숭인·하륜 등이다.

위화도 회군 이후 명나라 태조 주원장은 고려 사신을 부른다. 조정은 두려워하며 감히 명나라로 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러자 신하로서 최고 지위인 문하시중(門下侍中) 목은이 나선다. “지금 나라에 불화가 있으니 왕이나 집정신(執政臣)이 아니면 친히 설명할 길이 없다. 왕은 어려서 갈 수 없으니 이 늙은 신하의 책임이다.” 그가 사신을 자청한 것이다. 우왕은 그가 늙고 병이 있다는 이유로 만류했다. 목은이 말한다. “신이 평민 출신으로 재상의 지위에 이르렀으므로 항상 죽음으로 나라에 보답하려 했습니다. 이제야 죽을 곳을 얻었으니 설령 도중에 죽어 시신으로라도 우리의 뜻을 천자(天子)에 전할 수 있다면 무슨 여한이 있겠습니까?” 마침내 이색은 명나라로 향한다. 주원장은 목은을 가상히 여겨 두터이 예우했다. 이듬해 귀국한다.

그해 겨울 공양왕이 즉위했다. 이성계는 실권을 장악하고 고려는 기울어갔다. 목은은 반대파의 탄핵을 받아 장단으로, 이듬해는 다시 함창으로 유배된다. 공양왕은 목은이 다른 마음이 없음을 알아 누차 불러들이지만 그때마다 탄핵이 이어졌다. 목은은 다시 금천으로, 여흥으로 귀양 갔다. 그 사이 두 아들 종덕과 종학은 곤장을 맞아 죽었다. 시 8000여 수를 남긴 문장가 이색은 여흥에 은거해 있을 때 제자가 찾아 오자 시조를 읊으며 비통해한다.

“백설이 잦아진 골에 구름이 머흘레라/ 반가운 매화는 어느 곳에 피었는고/ 석양에 홀로 서서 갈 곳 몰라 하노라”

독살설 등 목은의 사인은 미스테리로


▎기념관에서 북쪽으로 3㎞쯤 떨어진 상대산 정상 관어대의 주변 풍경. 오른쪽으로 망망대해 동해가 펼쳐진다. 목은은 ‘관어대소부’란 명문을 남겼다. / 사진:영덕군
영해 생가지에는 목은의 크고 작은 시비가 세워져 있다. 가장 높은 위치에 명문 ‘관어대소부(觀魚臺小賦)’가 새겨져 있다. 기념관을 내려와 괴시마을 괴정(槐亭)에 앉아 북쪽을 바라보니 산마루에 한 점 누각이 실루엣으로 보였다. 관어대다. 빗방울이 떨어지는 산길을 헤집고 그곳을 찾아갔다. 꼭대기 관어대에 오르니 누각 이름 그대로 발아래 동해에 헤엄치는 고기들을 셀 수 있을 것만 같다. 왼쪽으로 눈을 돌리면 송천(松川)이 지나는 영해평야가 펼쳐진다. 목은은 여기서 한순간 나라 걱정을 지웠을까.

1392년 조선이 개국했다. 새 왕조가 열리자 정도전 등은 이색을 불편해하며 극형을 가하려고 한다. 그런 분위기에 목은은 “나는 평생 망령된 말을 한 적이 없다. 비록 죽더라도 나는 바른 귀신이 될 것”이라 했다. 이성계는 그 말이 전해지자 그의 마음을 헤아려 장흥부로 옮기게 한다. 일곱 살 아래 이성계는 일찍이 이색을 존경해 자신의 자(字)와 당호, 그리고 둘째 아들의 이름을 지어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었다. 그는 왕위에 오른 뒤에도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 옛 친구로 서로 만날 것을 청한다.

1395년(태조 4) 목은은 관동지방을 유람하다가 오대산에 들어가 은거했다. 이성계가 몇 번이나 사자를 보내자 거절하다가 부득이 대궐로 향한다. 이성계는 그를 한산백으로 봉했다. 이색이 태조를 만나고 나오자 왕은 중문까지 나와 전송하면서 친구의 예로 말했다. “덕이 부족하고 식견이 어두우니 나를 버리지 말고 부디 한 말씀 가르침을 주시오.” 이색이 말했다. “망국의 신하로 살아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바라옵건대 이 몸을 놓아 고향에서 죽도록 해주십시오.”

이듬해 여름이다. 이색은 여주 남한강에서 피서를 청하고 장차 배에 오르려던 차에 병이 나서 아들 종선을 경성으로 불렀다. 병이 위독해지자 어떤 중이 불도(佛道)로 말하니 이색은 손을 내저으며 “사생의 이치에 나는 의심이 없다”는 말을 한 뒤 숨을 거두었다. 권근의 기록이다. 그의 죽음엔 여러 이설이 있다. 이색이 배를 타고 여주 신륵사로 가던 중 이성계가 선물한 술을 마시고 갑자기 죽었다는 설이 하나다. 또 정도전 일파가 독살했다는 말도 있다. 부음이 전해지자 태조는 음식을 폐하고 사흘간 조회를 중단했으며, 문정(文靖)이란 시호를 내렸다. 이색은 여말 성리학을 진흥시킨 학자이자 문장가였으며, 쓰러지는 고려를 끝까지 붙든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신이었다.

[박스기사] 목은과 나옹의 평생에 걸친 교분 - 고려 말 정치와 종교 분야의 버팀목으로 존재감

목은 이색과 나옹화상은 인연이 남다르다. 둘 다 영해부에서 태어나 여주 신륵사에서 생을 마쳤다. 목은이 8년 아래다. 나옹은 57세로 입적했고 목은은 20년 뒤 69세로 세상을 떠났다. 나옹은 친구의 죽음을 보고 20세에 공덕사(攻德寺) 요연선사에게 출가했고 목은은 어려서부터 한산 숭정산을 비롯해 강화도 화개산에서 독서했다.

목은과 나옹은 1347년 같은 해 원나라에 들어간다. 목은은 원나라 국자감에 입학했고 나옹은 그곳에서 불법을 깊이 수행했다. 목은은 원나라의 이름난 학자인 구양현(歐陽玄) 등과 교유했고 나옹은 어렸을 적 수계한 지공(指空)을 법원사에서 만난다. 나옹은 이후 10여 년 원나라에서 설법하고 불법을 터득했다.

홍건적이 침입하자 목은은 공민왕을 모시고 피난했으며 나옹은 해주 신광사에서 홍건적의 습격을 막아냈다. 이 무렵 목은은 왕명으로 [서전(書傳)] [홍범(洪範)] 등을 강의하고, 나옹은 궁중에서 설법했다. 목은은 신돈의 전횡이 끝나자 고려 성리학을 개화시켰다. 나옹은 왕의 권유로 광명사에서 수륙재(水陸齋, 물과 육지를 헤매는 영혼에게 드리는 공양)를 주관하며 불법을 펼쳤다.

목은이 지공거가 되어 인재를 뽑을 때 나옹은 오교양종의 승려들을 가르쳤다. 이런 인연으로 목은은 나옹이 입적하자 와병 중임에도 부도명(浮屠銘)을 지었다.

-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yeeho1219@naver.com

202301호 (2022.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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