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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운의 기후와 문화 그리고 작품을 찾아서(6)] '초한지', '삼국지연의'로 본 장안-낙양 흥망성쇠 

한신이 성공한 북벌, 제갈량은 왜 다섯 번이나 실패했을까 

기원 전후 중국에서 가장 풍족했던 장안, 기후변화로 수량 줄자 쇠퇴기 맞아
조선이 개성 버리고 한양으로 향한 이유는? 물길로 세금 운송하기 편리해서


▎장안(현 시안)은 과거 농업생산에 매우 유리한 생태환경을 갖고 있어 오랜 기간 역대 중국 왕조의 수도로서 기능했다. 사진은 지금의 중국 산시성 시안시. / 사진:신화통신(연합)
[초한지]와 [삼국지연의]를 읽고 난 뒤 갖게 된 궁금한 점 중 하나는 북벌이었다. 한(漢)나라를 건국한 유방과 촉한을 세운 유비는 모두 서촉에서 기반을 마련했고, 다음 목표로 관중(關中)을 겨냥한 북벌을 추진했다. 관중은 중국 북부의 산시성(陝西省) 웨이수이(渭水) 분지 일대. 주(周)의 수도 호경(鎬京), 진(秦)의 수도 함양(咸陽), 한(漢)의 수도 장안(長安)이 있었던 곳이다. 유방과 유비는 모두 한중을 베이스캠프로 삼은 뒤 이곳에서 장안(진나라 때는 함양) 점령을 노렸다. 결과는 180도 달랐다.

기원전 186년 대지진 일어나


▎제갈량은 기원전 186년 일어난 대지진으로 한중과 관중 일대의 물길이 끊겨 한신처럼 속도전을 할 수 없었다. 사진은 영화 [적벽대전] 속 제갈량. / 사진:영화 [적벽대전] 캡처
한신이 이끈 한나라 군대는 단 한 번 만에 관중을 점령한 반면에 제갈량은 무려 다섯 번이나 시도하고도 성공하지 못했다. 이것이 나에겐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신출귀몰한 책략을 내는 제갈량이, 양쯔강의 기상현상까지 완벽하게 파악해 적벽대전에서 조조의 백만 대군을 물리친 제갈량이 어떻게 한신이 한 번에 해내는 것을 이뤄내지 못했을까. 그것도 승상이라는 자리에 있으면서 촉나라의 모든 자원을 거의 다 동원할 수 있었는데도 말이다.

20여년 가까이 가슴속에 남아있던 의문에 대한 해답을 얻은 것은 비교적 최근이다. 각각 중국인, 일본인 학자가 쓴 책을 읽고 나서다. 과거에 한중에서 장안으로 가는 길은 크게 4가지가 있었다.

1. 자오도(子午道): 한중에서 출발해 장안에 도착한다. 길이는 660리로 긴데다 좁고 험준하다.

2. 포야도(褒斜道): 한중에서 출발해 오장원에 도착한다. 오장원에서 위수를 건너면 미현이다. 길이는 470리로 비교적 짧다.

3. 진창도(陳倉道): 포야도와 비슷한 경로로 진창에서 가깝다. 기원전 3세기 진(秦)나라 때 개발된 오래된 길이다.

4. 기산도(祁山道): 한중에서 출발해 한수를 따라 서쪽으로 가서 진령산맥의 서쪽 끝인 기산에 도착한다. 길이 상대적으로 넓고 편하지만, 길이도 가장 길다.

한나라가 북벌을 시작했을 때 움직임이 처음 파악된 곳은 기산도였다. 초나라는 이것을 성동격서라고 봤다. 유방 측이 실제로 노리는 길은 기산도가 아니라 장안까지 가장 가까운 자오도라고 생각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후 한나라의 다른 군대가 자오도의 길을 수리하고 있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초나라 측은 주력 부대를 모두 자오도 앞으로 이동시켰다. 그런데 며칠 후 기산도에 나타났던 한나라 군대가 사라졌다는 보고가 들어왔고 이어서 한신이 이끄는 한나라 대군이 이미 진창도를 건너 주변 성들을 함락시켰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자오도 앞에서 진을 치고 기다리던 초나라 사령부는 패닉에 빠졌고 허무하게 함양성을 내줬다. 하지만 몇백년 후 제갈량의 북벌 과정은 달랐다. 제갈량은 주로 하나의 길을 선택해 움직였고, 번번이 위의 방어에 가로막혔다.

[초망](楚亡)을 쓴 리카이위안에 따르면 양측의 성패를 가른 것은 스피드였다. 한신의 공략과정을 보면 부대가 매우 빠르게 움직였다. 처음에 기산도에서 출몰했다가 그다음엔 자오도, 나중엔 주력군이 진창도로 튀어나왔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니 초나라의 백전노장들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제갈량은 한신처럼 속도전을 시도할 수 없었을까. 그랬다. 할 수 없었다. 비밀은 지형 변화에 있었다.

한신이 대군을 이끌고 관중을 공략한 것은 기원전 206년. 그런데 20년 뒤인 기원전 186년에 이 지역에 대지진이 일어났다. 저우홍웨이라는 중국 학자의 논문 [한나라 초기 무도대지진과 한수 상류의 수로 변화]에 따르면 한중과 관중 일대는 큰 강으로 이어져 있었는데, 대지진으로 물길이 끊기고 지형이 바뀌었다고 한다. 즉, 한신은 강을 이용해서 병력을 빠르게 이동시킬 수 있었으나, 제갈량은 이미 물길이 사라진 뒤였기 때문에 그런 작전을 쓸 수 없었다는 것이다.

기원 전후 중국에서 가장 풍요로웠던 곳은 산시성(陝西省)의 장안(長安) 일대, 즉 관중이었다. 관중은 중원 기준에서 보면 다소 서쪽에 치우친 감이 있다. 하지만 교통이 편리하고 물산이 풍부해 중국 역사에서 오랫동안 전략적 요지로 자리매김했다. 진나라가 함양을 수도로 삼은 뒤 국력이 강성해져 전국시대를 통일했고, 진나라 멸망 후 초한 대전에서 승리한 유방도 함양 인근에 장안성을 세워 새 수도로 삼았다.

20세기 이후 기후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당시 관중 지역은 기온이 지금보다 약 섭씨 1.5도 정도 높은 온난습윤한 기후를 갖고 있었으며, 농업생산에 매우 유리한 생태환경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중국에서 손꼽히는 식량 생산 지역이기도 했다.

그런데 진나라에 이어 한나라까지 수백 년에 걸쳐 도읍으로 기능한다는 것은 그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다. 인구가 큰 폭으로 증가하면 이를 감당할 농경지가 필요하며 이것은 주변 삼림 파괴와 자원 고갈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이것은 진나라뿐 아니라 인류 역사에서 일정한 패턴으로 반복되는 역사다. 예컨대 구한말 조선의 한양을 방문한 서양인들이 하나같이 지적한 것 중 하나가 산에서 나무를 보기가 힘들다는 것이었다.

왜 모두 관중을 탐냈을까


▎18세기 일본의 경세가이자 지리학자였던 하야시 시헤이(林子平)가 만든 한반도 지도. 물길은 과거 세금 운송의 중요한 수단이었다. / 사진:서울역사박물관
풍요롭던 장안의 환경을 근본적으로 흔든 요인은 또 있었다. 한랭화가 시작된 것이다. 실크로드 개척으로 유명한 한나라 무제 시대부터 추운 날이 많아지고 서리가 잦아지는 등 기후 한랭화와 관련된 기록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이처럼 기후가 급변하면 각종 재해를 동반하기 마련이다. 장안 일대도 수재(水災), 한재(旱災), 그리고 메뚜기가 대량으로 일어나는 황재(蝗災) 등이 빈번하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것은 장안이 갖고 있었던 농업 생산량을 비롯한 여러 가지 장점이 사라지는 큰 위협이었다.

또한 한랭건조한 기후는 주요 강의 수량이 감소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신의 북벌에서도 볼 수 있듯이 고대 사회에서 강이나 바다를 이용한 수운(水運)은 육로보다 훨씬 빠르고 안전했으며 중요했다. 국가 세금을 운반하는 핵심 유통망도 육지가 아닌 강을 통해서 이뤄졌다. 그런데 강의 수량의 줄어들면 국토의 서쪽에 위치한 장안으로서는 수도의 세금 확보 등 유통을 통해 얻는 이점을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오카모토 다카시 일본 교토부립대 교수는 “삼국시대가 되면 장안 주변의 경제적, 정치적 위상이 크게 낮아진 것 같다. 그래서 [삼국지연의]에서도 이 주변은 별로 중요한 무대가 되지 않았다. 제갈량이 장안을 점령하려고 서촉에서 산을 넘어 수차례 북벌을 시도했는데, 점령했더라도 얻을 것이 많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삼국지연의]에서 장안을 무대로 일어선 군벌은 찾아보기 어렵다. 유비, 조조, 손권, 동탁, 유표 등 대부분이 장안 외 다른 도시를 기반으로 일어섰다.

이런 이유로 기원 8년 한나라가 망하고(전한), 왕망이 세운 신(新)나라를 거쳐 광무제 유수가 다시 한나라를 재건(후한)했을 때는 수도를 장안보다 동쪽에 있는 낙양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장안과 비교했을 때 낙양은 중원과 보다 가까웠으며, 회수나 장강 일대로부터 세금을 운반하기도 수월했다.

비슷한 관점에서 보면 조선 건국 후 수도를 개성에서 한양(서울)으로 천도한 것에서도 힌트를 얻을 수 있다. 고려가 망한 13세기 말은 동아시아가 한랭화로 큰 어려움을 겪던 시기였다. 유라시아 대륙을 제패한 원나라도 한랭화로 농업 생산량이 급감하자 이를 견디지 못하고 주원장이 이끄는 반란군(명)에게 중원을 내줄 수밖에 없었다. 한반도에서도 고려가 무너지고 조선이 들어섰다. 고려 왕조 480여년 동안 여러 어려움이 있었지만, 이때만큼은 도저히 극복하기가 어려웠던 것 같다. 그리고 농업, 식량에 대한 관심은 그 어느 때보다도 커졌다. 조선을 건국한 혁명세력(신진사대부)이 가장 먼저 외친 것이 토지재분배였던 이유다. 이들은 권문세족에게 집중된 토지를 거둬들여 일반 양인들에게 분배했다.

조선은 왜 개성을 버리고 한양으로?

그리고 이어 추진한 것이 천도였다. 그동안 조선이 개성을 버리고 한양으로 간 것은 풍수도참의 영향이라는 주장이 적지 않게 제기됐고 그럴듯하게 믿어진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하륜이 이성계에게 한양을 추천하면서 가장 먼저 든 장점은 ‘국토 중앙에 있으며, 물길로 세금을 운송하기 편리하다’는 점이다.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고려 말은 한랭화로 인해 농업 생산량이 급감했던 시기였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남쪽 지역, 즉 충청·경상·전라도에 대한 식량 의존도가 더 커졌을 것이다. 적어도 황해도나 평안도보다는 따뜻했고 농업 생산량도 안정적이었을 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수도 역시 이곳에서 식량 수송을 하기보다 편리한 남쪽으로 이동시켜야 한다는 고민을 할 수밖에 없다.

수도 한양의 탄생은 이런 배경에서 볼 때 더욱 입체적인 이해가 가능하다. 풍수지리는 어디까지나 수도를 옮겨야 하는 지배층 입장에서 일반 백성들을 설득하고, 천도 여론을 만들어내기 위한 ‘프로파간다’ 적 기능으로 보는 편이 합리적이다. 고려 시대 불교의 비합리성을 비판하고 일어선 신진사대부들이 천도라는 중요한 결정을 하는데 풍수도참에 기댔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기 때문이다.

한반도는 국토의 내륙 깊숙이까지 강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강이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주요 강의 길이와 유역 면적을 보면 압록강 3만1000㎢, 한강 2만6000㎢, 낙동강 2만3000㎢, 대동강 1만6000㎢, 금강 9800㎢, 예성강 4200㎢ 등이다. 강의 유역 면적은 한반도 면적 22만㎢의 70%를 차지한다. 이것은 도로를 제대로 정비하지 않고도 수백 년간 중앙집권적 시스템이 가능하게 해준 조건이기도 하다. 강을 통해 세금 수송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으뜸은 역시 한강이다. 한강을 이용하면 서해부터 충청북도, 강원도 등 내륙까지도 진출이 가능하다. 그러니 백제를 세운 온조가 처음에 서울을 찍은 것은 탁월한 선택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 이 글은 조윤재 고려대 문화유산융합학부 교수의 [중국 진한시기 기후·수계환경 변화와 도성입지 및 배도제 운영과의 상관성]을 참고했습니다.

※ 유성운 - 중앙일보 기자.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기후환경학과 석사 과정을 밟고 있다. 저서로 [걸그룹 경제학], [리스타트 한국사도감], [사림, 조선의 586]이 있으며 [당신이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면], [세계사 속 중국사도감] 등을 번역했다.

202301호 (2022.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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