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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범의 등산미학(22) 고흥 팔영산 해돋이 신년 산행 

 

계묘년 첫날, 아집으로부터의 탈출을 다짐했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고 최고의 발명품이라 칭송하는 자본주의 민주주의 사회에서 세상만물, 특히 살아있는 생명의 생사 여탈권을 웅장하게 휘두르며, 완벽한 독과점에 영원한 절대자로서 혼자 장구 치고 북 치며 온 우주를 주물럭거리는데도 용케 뭇매나 욕을 얻어먹지 않고, 심지어 찬사를 받으며 온전히 잘 살아가는 신기한 놈이 있다. 또한 약 1억5000만km나 떨어져 있고, 이글거리는 수천도의 높은 온도(5860k)에 지구보다 훨씬 큰 덩치와 무게(지구 지름의 110배, 지구의 질량의 30만 배), 과학 기술이 아무리 발달한들 그놈 앞에서는 모든 것이 새발의 피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그놈 앞에서는, 아니 상상만 해도 경외심과 두려움, 존경심이 솟구쳐 만인 만물이 숭배하고, 매년 정월 초하루면 소원을 빌기 위해 지구 구석구석 소위 ‘해돋이 명소’라는 곳에서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북새통을 이룬다.

2023년 계묘년 새해, 그놈의 핏덩이가 세상을 붉게 물들이면서 온 우주의 광명을 찬란하게 내리 뿜는 장엄한 탄생을 보기 위해 서울 사당역에서 2022년 섣달그믐 밤 11시 30분 칠흑 같은 어둠을 헤치며 리무진 버스가 달렸다. 버스는 수많은 국토의 대동맥을 부지런히 달려 2023년 정월 초하루 새해 새벽 4시쯤 다도해 해상국립공원의 백미라는 고흥 팔영산 어느 산기슭에 멈춰섰다. 달빛도 없는 캄캄한 밤, 마치 우주의 미로처럼 암흑의 세계에서 광명을 찾아 헤매듯 천 길 낭떠러지 바위산 팔영산을 헤드 랜턴 하나에 의지해 산행을 시작했다.


제1봉: 선비의 그림자를 닮은 유영봉(491m), 제2봉: 팔영산을 지켜주고 주인 되신 성주봉(538m), 제3봉: 아름다운 바람 소리 그윽한 생황봉(564m), 제4봉: 동물의 왕 사자처럼 다부진 사자봉(578m), 제5봉: 다섯 명의 늙은 신선들이 춤을 추는 듯한 오로봉(579m), 제6봉: 천국을 향하는 통천문이 있는 두류봉 (596m), 제7봉: 북두칠성의 정기가 찬연한 칠성봉(598m)을 차례대로 온몸으로 부둥켜안고 느끼면서 드디어 아침 7시 20분, 3시간여 만에 칠성봉 정상에 두발을 올렸다. 북두칠성의 정기를 받은 칠성봉 칼바람이 곧 태어날 지존 태양의 찬란한 탄생맞이에 여념이 없는지 씽씽 쌩쌩 분주하기가 그지없었다. 그렇게 싸늘한 적막 속에 시간은 흐르고, 동쪽 하늘 그 어디서인가 붉은 핏덩어리가 어둠 속에서 조금씩 굵어지더니 마침내 계묘년 신생아 태양 놈이 검붉은 속살을 드러내며 우뚝 솟아올랐다. 그 순간 온 세상의 어둠이 삽시간에 사라지고 온천지에 광명이 뻗치기 시작했다.

그놈은 세상에 태어난 지 채 3분도 안 되어서 이 세상 최고의 지존답게 온 우주를 맑고 밝게 물들이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세상만사 산천초목에 생기를 불어넣어 버렸다. 다시 새 소리, 나무들의 광합성 소리, 저 멀리 뱃고동 소리 등등 온 우주만물의 숨소리가 힘차게 뛰기 시작했다. 매일 거의 똑같이 벌어지는 그놈의 탄생인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징그럽게 웅대하고 거룩하고 성스럽고 또 아름다운지 모르겠다. 아마도 그것은 어둠과 괴로움, 그리고 즐거움과 행복함, 그 모든 것을 정지하고 새롭게 리셋해 설레는 마음으로 성스럽게 다시 시작하는 그 찬란한 첫날이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어쩌면 저놈은 참으로 불쌍한 놈인지 모른다. 불과 100~200년 전, 과학과 기술이 발달하지 못한 시기에는 신비, 동경, 공포, 경외와 숭배의 대상으로만 보였지만 허블 망원경, 우주 탐사 등을 통해 현재적 관점으로 진실을 말하자면 수소와 헬륨 기체들이 연쇄충돌, 연소하면서 발생하는 거대하고 엄청난 용광로일 뿐이다. 그 과정 즉, 핵융합, 분열의 잔해이자 부산물이 지구 생명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태양빛인 것이다.

그 짧은 찰나에 최근 어릴적 마음의 지주였던 친구 아버지, 왠지 모르게 어두웠던 착한 친구, 늦장가 가서 행복의 결실을 채 맺지도 못하고 떠난 친구 아내가 마음속에서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내 나이가 내일모레면 벌써 환갑, 제아무리 길어도 30~40년, 그리고 실제 활동은 10~20년에 불과할 텐데, 저 태양과 같이 온 우주를 아름답게 비추지는 못할망정 쩨쩨하고 어리석게는 살지 말아야 할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며 멋진 시 한 수가 머릿속을 점령했다. 우주만물의 역동성을 대승적으로 바라보며 승려임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호탕하고 호방하게 살고 가신 분, 본명은 일옥이요 법호가 진묵으로 술 잘 마시고 무애행 기행으로 유명한 조선 중엽 진묵대사(1563-1633)의 시조다.


천금지석산위침(天衾地席山爲枕)
월촉운병해작준(月燭雲屛海作樽)
대취거연잉기무(大醉居然仍起舞)
각혐장수괘곤륜(却嫌長袖掛崑崙)

하늘을 이불삼고 땅을 침대 삼으며 산을 베게 삼아
달빛은 촛불되고 구름은 병풍이며 바닷물은 술통이라
크게 대취해 일어나 한바탕 신바람나게 춤을 추고 일어나니
긴소매 옷자락이 곤륜산(상상의 높은 산) 자락에 걸릴까 걱정이구나.


장엄한 저 태양만큼은 아닐지언정, 무릇 사내대장부라면 저 정도는 호호탕탕하게 살다 가야 하지 않을까! 그러다 불현듯 어쩌면 그렇게 허허실실 호방하고 멋지게 사는 분이 바로 내 위의 친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틀 전, 2022년 12월 30일에 38년간의 경찰 봉직을 마감하는 퇴임사에서 후배 경찰관님들과 행사장에 모인 지인들에게 이런 멋진 말을 하셨기 때문이다.

“감사 인사드립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젊은 혈기로 경찰에 입직한 지 어느덧 38년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거친 세파와 풍랑 속에서 긴 항해를 함께했던 선후배, 동료 경찰관님! 파란 하늘, 시원한 미풍의 아름다운 항해를 여기서 모두 마칩니다. 이제 사랑했던 직장과 선후배님들을 뒤로하고 인생 제2막을 출발하려 합니다. 그동안 경찰로서 자랑스럽고 행복했습니다. 지난 시간을 뒤돌아보면 거친 파도와 풍랑 속 선후배님들은 제게 항상 꺼지지 않는 등불, 나침반이었습니다. 정말 여러분이 곁에 있어서 긴 항해를 안전하고 행복하게 마칠 수 있었습니다. 진심으로 머리숙여 감사드립니다. 비록 현역에서 물러나지만, 영원한 경찰로서 저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경찰은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치안의 마지막 보루이자 국민 안전의 선봉장, 파수꾼이기 때문에 항상 품의와 자부심을 잊지 말자는 것입니다. 그것이 대한민국의 인격이자 품격입니다.”


어쩌면 지겹고 힘들었을 38년의 경찰직을 마감하면서까지 경찰의 자부심과 명예를 잊지 않겠다는 그 말씀이 정말로 신선하고 아름답게 다가왔다. 똑같은 가난한 산골, 같은 부모 슬하에서 나고 자랐는데 어떻게 나와 이렇게 다른 인생을 살아 갈 수 있을까? 나는 나에게 조금 불리하고 해가 되거나 생각이 다르면 그 알량한 지식과 만용으로, 정의와 명분이란 이름으로 얼마나 상대편을 깔아뭉개고 심한 언사로 아픔을 주며 살아왔는가! 시원하고 똑똑하다는 말로 나를 꼬드기며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나를 증오하고 싫어하며 괴로움에 치를 떨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내 형은 세상만물을 고루 비취는 저 태양처럼 모든 사람, 특히 상사나 부하의 마음을 헤아리고 이해하며 먼저 다가가서 고개 숙이고, 그 사람과 한 몸 한마음이 되어 한 번도 불협화음, 즉 사람들과의 갈등과 고뇌 없이, 세상사를 호탕하게 웃으며 경찰 38년 봉사직을 너무나 행복하고 즐겁게 마감했다는 것이다. 호방한 인간의 대명사인 저 진묵대사처럼 말이다. 왜 나는, 저 태양처럼 세상을 밝게 고루 비추지 못하고, 그리고 형처럼 남을 이해하고 화합하지 못하고 오로지 남을 이기려고만 했을까? 지금 생각하니 어리석은 착각이었다. 아! 지나간 세월이 참 바보스럽다.


제8봉: 초목의 그림자 푸르름이 겹쳐 쌓인 적취봉(591m)을 지나 팔영산의 팔봉과 고흥 다도해의 아름다움을 다 담은 깃대봉(609m)에 오르자 벌써 해는 중천에 떠 있었다. 저 넓은 파란 하늘 아래 퐁당퐁당 소년소녀가 아기자기 사랑놀이하는 듯 다도해 작은 섬들이 환하게 미소 지으며 행복해 보였다. 그래 만시지탄이지만 이제라도 저 태양처럼, 저 아름다운 팔영산처럼, 호방한 진묵대사처럼, 형처럼 작은 티끌에 목메 쩨쩨하게 살지 않겠다고 신년 다짐을 해 봤다. 그리고 저 멀리 곧 신재생 에너지 태양광발전 대단지로 거듭날 해창만 간척지가 시름하는 이 지구를 되살리는 마중물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생 방송작가로 살다가 관악산 자락에서 도자기를 빚으며 제2의 인생을 멋지게 꾸려가고 있는 내 친구의 아내처럼 형도 아름답고 멋지게 제2의 인생을 살아가길 기원했다.


하산길에 다시 팔영산의 경치를 바라봤다. 고흥을 대표하는 팔영산은 소백산맥이 힘차게 뻗다가 다도해 맞바람에 힘이 달린 듯 서쪽으로 기울다가 동남쪽 고흥반도를 바라보며 팔경이 우뚝 선 모습이다. 팔봉의 그림자가 저 멀리 한양에까지 드리워져서 팔영산이라 불렸다고 했다. 일설에는 금닭이 울고 날이 밝아오면서 붉은 햇빛이 바다 위로 떠오르면 팔봉은 마치 창파에 떨어진 인파(인쇄판) 같다고 해 그림자 영(影)자를 넣어 팔영산이라 이름 지었다고도 했다. 그 아름다운 팔영산을 내려와 가까이 있는 녹동항에서 일행들과 맛있게 회를 먹고 계묘년 해돋이 산행을 모두 마치고 상경했다. 잊을 수 없는 계묘년의 첫 산행이었다.


※필자 소개: 김희범(한국유지보수협동조합 이사장)- 40대 후반 대기업에서 명예퇴직. 전혀 다른 분야인 유지보수협동조합을 창업해 운영 중인 10년 차 기업인. 잃어버린 낭만과 꿈을 찾고 워라밸 균형 잡힌 삶을 위해 등산·독서·글쓰기 등의 취미와 도전을 즐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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