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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특별기획시리즈] 다시 기업가정신이다-한국 경제의 개척자들(3)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회장 上 

졸업장 없는 천재, 대한민국 거부(巨富) 반열에 오르다 

1938년 대구에서 창업한 삼성상회가 글로벌 삼성의 기원, 10년 만에 삼성물산으로 확장
시대 흐름 탄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의 거듭된 성공… 4개 시중은행 주식 소유하며 다각화


▎서울 장충동 신라호텔 뒤편 공원에 세워진 삼성 창업회장 호암 이병철의 동상. 삼성의 성취는 대한민국 경제 발전 궤적과 정확히 포개진다.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李秉喆, 1910~1987)은 일본의 한국 강점 6개월 전인 1910년 2월 12일 경남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에서 천석꾼인 경주이씨 찬우(纘雨, 1874~1957)의 2남 2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조부 이홍석(李洪錫, 1838~1897)은 당대에 재산을 1000여 석으로 불렸을 뿐 아니라 서당인 문산정(文山亭)을 세워 후학을 양성한 실사구시 유학자였다.

이병철은 5세 때부터 문산정에서 5년 동안 한문을 익히고 1922년 3월에 진양군 지수면의 지수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했다. 1921년 개교한 지수보통학교는 이병철을 비롯해 LG그룹 창업주 구인회, GS그룹 창업주 허준구 등을 배출한 곳으로 교정에는 지금도 이병철과 구인회가 심었다는 수령 90년의 노송 두 그루가 버티고 있다.

이병철은 1922년 9월 서울 종로구 수송공립보통학교로 옮겨 공부하다 1925년 인근의 중동중학교 속성과에 진학했다. 또한 그는 같은 해 12월 2세 연상인 박두을(朴杜乙) 규수와 혼인했다. 당시 그는 17세였다. 신부는 사육신 박팽년의 후손으로, 경북 달성군 하빈면 묘동 출신이었다.

1929년에 중동중 4년을 수료한 이병철은 대공황이 세계를 덮치던 1930년 일본 와세다대학 전문부정경과에 진학했다. 하지만 각기병을 앓아 2학년 가을 학업을 포기했다. 이병철은 [호암자전]에서 중퇴와 관련해 “나에게는 졸업증서라는 것이 한 장도 없다”고 언급했다. 그러면서 “나는 어릴 때부터 출중하다는 말을 별로 듣지 못했다. 그러나 수학 과목만은 학급에서 상위권을 유지”했으며 “남에게 지는 것을 싫어했다”고 회고했다.

26세 청년 이병철은 부친에게서 받은 5만원(쌀 300석 가치)으로 1936년 경남 마산에서 협동정미소를 경영하며 사업을 시작했다. 경남 합천 출신의 정현용, 박정원 등과 함께 각자 1만원씩 출자해 마산에서 가장 큰 정미시설을 갖췄다. 마산은 목포, 군산과 함께 국내 최대의 미곡 수출항으로 도정(搗精) 물량이 풍부했다. 또한 일본인 소유의 마산일출자동차를 인수해 트럭 20대의 화물 운송도 겸했다. 이병철은 정미소에서 얻은 수익금과 저리(低利)의 식산은행 대출금으로 김해의 논밭을 매입했다가 시세차익을 남기고 되파는 수법으로 단기간에 200만 평을 확보한 대지주가 됐다. 그러나 1937년 중일전쟁 발발에 따른 쌀값 폭락과 식산은행의 대출 중단으로 자금난에 몰리며 논밭을 헐값에 매각했다. 정미소와 운수업체까지 처분했다.

조홍제(효성 창업주)와 의기투합


▎이병철 삼성 창업회장과 구인회 LG 창업주가 심은 것으로 알려진 지수초등학교의 ‘재벌 소나무’.
한동안 실의에 빠졌던 이병철은 1938년 3월 1일 대구에서 자본금 3만원으로 삼성상회를 설립했다. 삼(三)은 ‘큰 것, 많은 것, 강한 것’을, 성(星)은 ‘밝고 높으며 영원히 빛나는 것’을 의미한다. 대구에서 상권이 가장 큰 서문시장 부근 250평의 4층, 지하 1층짜리 건물을 2만원에 매입해 살림집 겸 사무실로 사용했다. 삼성그룹의 모체였다.

일본 유학 시절 친구였던 경남 합천 출신의 이순근을 지배인으로 영입했다. 이병철은 이순근에게 회사 내부 관리 일체를 위임하고 자신은 은행융자와 상담 등 중요업무를 담당했다. “의심이 가는 사람은 쓰지 말고 일단 채용했으면 의심하지 말라(疑人勿用, 用人勿疑)”는 경영자 이병철의 인사원칙이다. 삼성상회는 청과와 건어물, 식품 등을 취급했다. 특히 ‘별표국수’는 만들기가 무섭게 팔려나갔다. 주 고객은 안동, 봉화 등지의 도매상들로 삼성상회의 하루 국수 생산량은 100상자 이상이었다.

이 무렵 전두환(全斗煥, 1931~2021) 전 대통령의 부친 전상우는 빈민촌에 살면서 삼성상회에서 품팔이를 했다. 이병철의 장남 이맹희(李孟熙, 1931~2015)는 이런 인연으로 동갑인 전두환과 곧잘 어울렸다. 노태우 전 대통령을 비롯해서 김복동, 정호용, 김윤환, 유수호 전 의원과 김상조 전 경북도지사 등이 이맹희의 경북중학교 동기들이었다.

이병철은 1939년 경영진 내분 탓에 급매물로 나온 조선양조장을 10만원에 인수했다. 일본인 소유의 조선양조는 소주, 탁주, 청주 등 연간 생산능력 7000석의 대구 최대 양조장이었다. 이병철은 인수 1년 만에 생산능력 1만 석으로 사세를 키웠다. 중일전쟁이 확대돼 전반적으로 경기가 침체됐지만, 양조업은 호황을 누렸다. 특별한 판매 전략 없이도 할당량만 생산하면 저절로 팔려 이병철은 대구 굴지의 고액 납세자가 됐다.

1948년 11월 이병철은 서울 종로2가 부근에 무역업체인 삼성물산공사를 설립하고, 조홍제(1906~1984)를 경영진으로 영입했다. 후일 효성그룹을 형성한 조홍제는 경남 함안 출신이며 이병철보다 4세 연상으로, 어려서부터 이병각·병철 형제와 교유하던 사이였다. 삼성에서는 조홍제가 삼성물산공사의 전무이사로 근무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효성에서는 무역전문가인 조홍제가 삼성물산 설립 시 공동투자자로서 부사장을 맡아 삼성물산 경영을 주도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1950년대 말 조홍제가 삼성에서 퇴사할 때 삼성그룹 지분 분리와 관련해 이병철과 갈등했기 때문이다.

삼성물산과 제일제당의 성공


▎중동중 시절이었던 17세의 이병철(왼쪽). 그는 “수학은 상위권이었으며 지는 걸 싫어했다”고 회고했다. / 사진:호암재단
삼성물산은 자주(自主) 무역을 시도했다. 해방 직후 무역은 소위 ‘홍콩무역’ 혹은 ‘마카오무역’ 등으로 불렸다. 무역품을 배에 실은 홍콩과 마카오의 중국 상인들이 인천과 부산 등지로 와서 국내 상인들과 물물교환한 데서 유래했다. 그러나 이런 무역 관행은 가격흥정, 상품 종류, 조달 시기 등에서 한국 상인들에게 불리했다.

1949년 11월 조홍제는 마른오징어 3만 근을 배에 싣고 부산을 출발해 8일 만에 홍콩에 도착했다. 국내 굴지의 무역상들과 거래하던 찬넬양행을 찾았는데 현지의 오징어 시세가 너무 낮았다. 조홍제는 궁리 끝에 교포 무역상인 이창복에게 마른오징어 판매를 위탁하는 한편 이를 담보로 찬넬양행에서 면사 50고리(梱)를 외상으로 매입했다.

조홍제는 삼성 직원들 사이에서 ‘무역백과사전’으로 불렸다. 비록 무역실무 경험은 없었으나 영어나 독일어로 된 무역 관련 지식을 독학으로 익혔다. 삼성물산은 홍콩, 싱가포르 등지에 오징어와 한천 등을 수출하고 면사 등을 수입해 왔다. 수입품이 국내에서 약 10배에 거래될 정도로 막대한 이윤을 얻었다.

그러나 1950년 6·25전쟁 발발로 이병철은 거의 빈손으로 서울을 빠져나와야 했다. 그해 12월 부산에서 사업을 재개했다. 전쟁이 초래한 극심한 물자 부족을 해소할 유일한 대안은 무역업이었다. 수입물품 결제용 달러화 확보가 관건이었으나 정부가 무역업자들에게 할당해주는 달러는 턱없이 부족했다. 무역업체들은 서울 명동의 무허가 환전상 등에서 암달러를 긁어모으는 한편 외화벌이가 될 만한 것들은 전부 수출했다.

삼성은 국내에서 고철, 탄피 등을 수집해서 일본에 수출하고 대신 홍콩에서 설탕과 비료를 수입했다. 수입한 설탕은 부산 국제시장에서 도매상을 하던 이양구에게 넘겼다. 함경도 함흥 출신의 이양구는 해방을 전후한 시기에 빈손으로 월남해서 서울 남대문시장 인근에서 과자, 밀가루와 설탕 유통으로 부를 축적했다. 그는 1957년 귀속업체인 풍국제과(현 오리온의 전신)를 인수해서 동양그룹을 형성했다. 삼성은 무역업을 통해 획득한 이익금과 정부자금을 융통해서 수입물량 확대와 품목 다변화에 주력했다. 주로 소비재를 수입한 삼성은 국내 무역업계의 기린아로 급성장했다.

이 무렵 이병철은 새로운 사업 구상에 골몰했다. 해방 이후의 극심한 물자 부족과 미국 등에서 제공한 막대한 원조물자가 그 원동력이었다. 정부는 해외에서 무상으로 제공된 원조물자를 민생안정과 전쟁 복구 사업에 우선 배정했다. 이것이 수입대체 공업화의 기폭제가 되자 기업 활동이 왕성해졌다. 그 와중에 정경유착 관행도 자리 잡았다. 원조물자 배분, 일제의 유산인 귀속재산 불하 등 각종 경제적 자원 배분과 관련해서 집권당인 자유당 정치인 및 관료 등과 기업인들 간에 특혜와 뇌물을 주고받는 블랙 커넥션이 형성된 것이다.

이병철은 원당(原糖)이 원조물자로 국내에 대량 공급되고 있던 점에 주목해서 제당업 진출을 결심했다. 설탕은 소비가 점증했으나 국내 생산은 전무했다. 설탕이란 원당을 적당히 가공하면 생산이 가능하기 때문에 기술적으로도 큰 어려움이 없다고 판단했다. 공장 설립에 필요한 외화 18만 달러를 정부 협조로 특별대부 받고, 상공은행에서 2000만환을 대출받아 사업자금을 확보했다. 1953년 화폐개혁으로 구화(舊貨) 100원(圓)이 신화 1환(圜)으로 교환됐다. 부산 전포동 743번지의 1000평을 확보하고 제당설비 일체를 일본에 발주해서 1953년 6월 자본금 2000만환의 제일제당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연건평 315평의 제당공장은 하루 설탕 25t을 생산하도록 설계됐다. 그해 11월부터 설탕을 생산했다. 국내 최초의 제당업체가 출현한 것이다.

이 무렵 수입산 설탕 가격은 근당 300환이었으나 제일제당 제품은 100환이었다. 비록 품질 면에서는 외제에 못 미친다 해도 가격이 매우 저렴해 수요가 늘자 제일제당은 생산 개시 6개월 만에 제당 설비를 확장했다. 제일제당은 국내 설탕 소비량의 33.3%를 공급할 정도로 급성장, 설립 1년 만에 흑자를 시현했다. 1955년에는 자본금을 20억환으로 늘리는 등 삼성의 주력 기업이 됐다.

제당·제분 이어 모·방직업에도 진출


▎1938년 3월 1일 대구 서문시장 부근에 설립한 삼성상회. 삼성그룹의 모체다. / 사진:호암재단
제일제당이 단기간에 성공하자 경쟁업체들이 생겨났다. 1954년 8월에는 동양제당(서울 용산)과 한국제당(서울 영등포)이 설립됐고, 1955년에는 삼양사(경남 울산)가 제당 공장을 지었으며 1956년에는 금성제당(서울 용산), 해태제과(서울 영등포), 대동제당(경기도 시흥) 등이 잇따라 생겨났다. 그 결과 국내 설탕 시장은 1955년부터 공급과잉 상태에 직면했다. 제당업체들 간에 덤핑 등 치열한 이전투구를 거쳐 1958년에는 제일제당, 삼양사, 대한제당(대동제당의 후신) 등이 국내 설탕 시장을 분할 지배했다.

이후부터 제당업체들 간에 불공정행위들이 불거졌다. 정부는 수입 대체 공업화를 명분으로 제일제당이 설립된 1953년부터 1993년까지 40년 동안 일관되게 설탕을 수입제한 품목으로 지정해서 사실상 설탕 수입을 금지했다. 그 와중에 제당업체들은 명시적 혹은 묵시적 담합을 통해 생산량을 조절하는 수법으로 초과이윤을 누렸다.

한편 제일제당은 식품 중심의 다각화에 착수해 1956년 4월 동성물산㈜의 소유인 포항 구룡포의 통조림공장을 인수해서 ‘팽귄표’ 통조림을 시판했다. 1957년 10월에는 부산의 제일제당 부지 내에 원조물자인 소맥(小麥)을 원료로 한 제분공장 건설에 착수했다. 제분설비는 100% 국산이었다.

고된 작업 끝에 6개월 후인 1958년 4월 건평 172평의 공장과 1700t 용량의 사일로 3기를 완성했다. 한 달 후인 5월부터 ‘삼성’(1등급), ‘월세계’(2등급), ‘미인’(3등급) 등 3종의 밀가루를 시판했는데 이 역시 호황이었다. 1950년대 중반에는 제당·제분·면방직 등의 삼백(三白) 산업이 국내경제를 이끌면서 소위 ‘삼백경기’가 도래했다. 삼성은 제당과 제분에 뛰어들어 국내 최정상 재벌이 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이병철은 모·방직업에도 진출했다. 섬유산업은 6·25전쟁 이후 긴급한 의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정부와 원조 공여국들의 지원에 힘입어 급속히 성장했다. 그러나 이는 주로 면방직공업 위주여서 모·방직업은 거의 불모지였다. 당시 모·방직업은 일제 시대의 구식기계를 수리한 것이 고작인 데다 거의 수공업 수준이어서 품질이 매우 불량했다.

한편 국내에서는 미군의 진주와 함께 주한미군이 세련되고 따뜻한 모직 양복을 유행시키며 밀수까지 성행했다. 최고 명품으로 치부되던 영국제 모직물인 ‘마카오 복지’로 만든 양복 한 벌 가격이 웬만한 월급쟁이의 봉급 3개월 치에 달해 부자들이 아니면 언감생심이었다. 대체품으로 미군 정복을 염색해서 재 가공한 신사복이 인기였다. 이병철은 강성태 상공부장관으로부터 “모직공장은 국가적으로 시급하다. 긴 안목에서 보면 면방보다 모방이 더 유리하다. 정부가 적극 후원하겠다.”([호암자전])는 답변을 얻어냈다. 정부가 제당·제분·방직·시멘트·비료·판유리 등을 국가 기간산업으로 정하고 참여 업체들에 정부 보유 달러화 및 원자재 우선 배정, 해외의 설비 공급선 및 차관 알선, 장기저리의 거액 융자, 세금 감면 등의 특혜를 제공해서 기업들의 경쟁이 치열했다.

이승만 만난 뒤 사업보국 철학 굳혀


▎‘의심하면 쓰지 않고, 쓰면 의심하지 않는다’는 이병철의 인사 원칙이었다. / 사진:호암재단
이 대목에서 이병철과 이승만 대통령과의 관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병철의 부친 이찬우는 청년 시절 서울에서 독립협회와 기독교청년회 등에서 한 살 아래인 이승만(李承晩, 1875~1965)과 잠시 사귄 적이 있었다. 이병철은 1946년 대구에서 이승만을 처음 만났다. 민족지도자로 부상한 이승만이 1946년 ‘10월 폭동’ 진압 직후 대구를 방문했을 때, 대구 유지 30여 명이 환영위원회를 꾸렸는데 이병철은 조선양조장 대표 자격으로 참여했다.

이승만은 위원 한 사람씩 일일이 악수하며 인사를 나눴다. 그 자리에서 이병철은 자신을 이찬우의 아들이라 소개해 이승만의 눈길을 끌었다. 얼마 후 이병철은 대구신탁은행 중역이던 오위영과 함께 종로구 이화장으로 이승만을 방문했다. 이 만남을 계기로 이병철은 ‘사업을 통해 국가와 사회발전에 기여’하는 사업보국(事業報國) 경영철학을 굳혔다.

1954년 9월 15일 자본금 1억환의 제일모직주식회사를 설립하는 한편, 대구 침산동 105번지 일대의 23만1000㎡(7만 평)를 공장용지로 확보했다. 산업은행에서 5830만환을 융자받아 일관기계설비를 정부 권고에 따라 서독 스핀바우(Spinbau)사에서 발주했다. 당시 정부는 낙후된 국내 모직공업을 진작 시킬 목적으로 최신설비의 정부직영 모직공장을 건설하기로 확정하고 스핀바우사에 모방 5000주를 발주해둔 상태였다.

1955년 1월 4일부터 소모, 방모, 직포, 염색, 가공 등의 일관공장 건설을 서둘러 1년여 만인 1956년 3월 완공하고, 5월부터 가동했다. 원료인 울탑은 영국 및 호주산을 도입했는데 주로 ICA(International Co operation Administration) 원조자금을 사용했다. 초기에는 소모사(털실), 방모사, 양복지 등을 생산했으나 품질이 나빠서 생산을 거듭할수록 적자가 커졌다.


▎이병철(오른쪽) 삼성 창업회장과 유년 시절의 이건희(가운데) 회장. / 사진:삼성
정부는 소·모·방 공업을 국가 기간산업으로 정하는 한편, 제일모직에 자금을 지원하고 1958년에는 소모사를 제외한 모직물 전반에 대한 수입금지 조치도 취했다. 이 조치로 제일모직의 재정 수지가 점차 개선됐다. 1960년에는 자본금을 30억원으로 증가하는 등 승승장구했다. 제일모직 설립 2년 만에 이병철은 거부(巨富)의 반열에 올랐다. 또한 삼성물산은 제일모직, 제일제당과 함께 트로이카 체제를 구축했다.

우리나라는 1945년 해방과 동시에 38선을 경계로 남한은 미군, 북한은 소련군이 통치했다. 남한에는 일본계 금융기관인 조선은행, 식산은행, 저축은행, 신탁회사, 무진회사, 금융조합연합회 등과 민족계 은행인 조흥은행과 상업은행이 있었으나 빈껍데기였다. 해방 전에 시중 은행들은 일본 기업체들에 25억환을 대출해줬으며 일본인 기업들이 발행한 회사채와 주식 291억환어치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일본 패망으로 전부 휴짓조각이 된 탓이다.

정부는 은행 정상화를 명분으로 1950년 5월 5일 한국은행법과 은행법을 제정해 조흥은행, 상업은행, 상공은행, 저축은행, 신탁은행 등 5개 시중은행의 정부귀속주 민간불하를 결정했다. 1954년 10월에는 자본이 가장 부실한 신탁은행과 상공은행을 합병해서 흥업은행(한일은행의 전신)을 설립했다. 이로써 시중은행을 조흥은행, 상업은행, 저축은행, 흥업은행 등 4개로 축소하고 불하작업에 박차를 가했으나 이후 여섯 차례나 유찰됐다. 시중은행 운영의 민주화를 목적으로 1인당 입찰 계좌 수와 양도를 제한해 대자본의 참여가 원천 봉쇄된 탓이다.

1950년대말 국내 최대의 금융콘체른 완성


▎이병철 삼성 창업회장은 대학 졸업장이 없었지만, 1982년 보스턴대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 사진:호암재단
정부는 은행 민영화를 조속히 매듭짓는다는 구실로 은행의 재벌지배 우려에도 입찰 계좌 수 제한을 철폐했다. 1957년 8월 조흥은행, 상업은행, 저축은행, 흥업은행, 제일은행 등 5개 은행 귀속 주 매각에 삼성, 삼호, 개풍, 조선제분 등이 참여했는데 삼성은 흥업은행주 83%와 조흥은행주 55%를 각각 매입해 최대주주가 됐다. 상업은행은 당초 대한제분의 이한원이 최대주주였으나 이병철이 최대주주가 된 흥업은행 신탁부가 상업은행 지분율 33%를 확보하고 있었던 탓에 상업은행 또한 이병철이 최대 주주가 됐다.

이병철은 4개 시중은행 주식의 거의 절반을 소유하며 국내 최대의 은행소유주가 됐다. 상호출자가 비결이었다. 은행들끼리 서로의 지분을 소유한 상호주(相互株)는 신탁은행 64.4%, 저축은행 56.5%, 조흥은행 41.0%, 상업은행 35.4%, 상호은행 24.8%, 조선은행 20.3%, 식산은행 14.1% 등이었다. 시중은행 하나를 불하받으면 상호출자로 연결된 여타 은행들까지 줄줄이 낚을 수 있는 구조였다.

한편 삼성은 4대 시중은행 장악 이후부터 급속히 다각화했다. 과도한 은행 부채로 경영난에 직면한 부실기업을 인수한 덕분이었다. 1957년 8월 천일증권을, 1958년 한국타이어를 이양구, 배동환과 공동으로 인수했다. 한국타이어는 일제하에서 일본인들이 설립한 조선타이어로 해방 후 정부에 귀속된 뒤 민간에 매각됐다. 1957년 ICA 원조 35만 달러를 들여 시설보수를 완료했으나 과잉투자로 부실화했다.

같은 해 삼성은 삼척시멘트(동양시멘트) 주식을 이양구와 50%씩 인수했으며 이 외에도 안국화재보험(삼성화재), 동일방직과 호남비료 주식 45%를 매입했다. 1957년 2월에는 효성물산을, 1958년 12월에는 근영물산을 설립했다. 1950년대 말 삼성은 4대 시중은행을 소유함은 물론 산하에 16개 계열기업군을 거느린 국내 최대의 금융콘체른을 형성한다.

※ 이한구 - 고려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경제학 석사를, 한양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를 취득했다. 수원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강의하며 경상대학장, 금융공학대학원장을 지낸 뒤 현재 명예교수로 있다. 국내 기업사 연구의 권위자로 (사)한국경영사학회 부회장을 지냈다. 저서로 [일제하 한국기업설립운동사]와 [한국재벌형성사], [대한민국기업사], [한국의 기업가정신]등이 있다.

202303호 (2023.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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