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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호의 상해임정 27년사(12)] 레닌의 볼셰비키 혁명, 한인 볼셰비키 운동을 추동하다 

통합임정의 불행 예고한 이동휘와 한인사회당의 사회주의 노선 

임시정부에 소속된 다양한 당파 몰아내고 권력 잡은 레닌파
레닌의 계급적 국제주의 따라 통합임정 타도 몰두한 이동휘


▎임시정부 타도를 운동하던 레닌의 볼셰비키는 1917년 10월 임시정부를 타도하고 권력을 잡았다. 사진은 레닌 100주년 레닌루트 관련 그림.
영국 출신의 E.H. 카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역사가 중 한 명이다. 그는 한국인들에게도 [역사란 무엇인가?]의 저자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30여년의 연구 결실인 4부 14권의 대작 [소비에트 러시아사]가 E.H. 카의 진짜 대표작이다.

특히 [볼셰비키 혁명사]로 명명된 1부 3권은 레닌이 주도한 볼셰비키 혁명을 정치·경제·외교 측면에서 검토한 명저이다. 1부 3권을 통해 E.H. 카는 전체 [소비에트 러시아사] 이해에 필요한 역사 배경과 기초 사실을 정리했다. 1부 1권에 의하면 러시아 사회주의 운동의 공식적인 출발은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창당이다. 1898년 3월 러시아 사회주의자 9명이 벨라루스 수도 민스크에 모여 사회민주노동당을 창당했는데, 레닌의 사상적·정치적 스승인 플레하노프(1856~1918)가 주도했다. 1870년 출생한 레닌은 플레하노프보다 15살 어렸다.

이인호 교수의 [플레하노프와 러시아 맑스주의의 이론적 기초]에 의하면, 플레하노프는 젊은 시절 나로드니키라고 하는 농촌해방 운동에 참여했다. ‘인민주의 운동’이라 번역되는 이 운동은 1860~1880년대 러시아 진보지식인들이 추진했다. 당시 ‘미르’로 불리던 러시아 농촌은 마치 조선 시대 농촌처럼 소수의 지주와 다수의 소작인이 있었고, 소작인이 러시아 국민의 압도적 다수를 차지했다.

산업화 속 등장한 노동계급 사회주의 조직


▎1917년 10월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공산주의’란 현수막을 내걸고 행진하고 있는 병사들.
러시아 진보지식인들은 ‘브나로드(v narod)·인민 속으로’를 외치며 미르 안으로 들어가 농촌해방운동을 벌였다. 이 운동은 크게 농민사회주의 노선과 아나키즘 노선으로 구별됐다. 라브로프(1823~1900) 등으로 대표되는 농민사회주의 노선은 농민을 주체로 사회주의 혁명을 추구하는 노선이었고, 바쿠닌(1814~1876) 등으로 대표되는 아나키즘 노선은 모든 지배기구를 부정하는 무정부주의 노선이었다.

농민사회주의자들은 미르 농민에 대한 애정과 신뢰를 바탕으로 했다. 그들은 러시아 국민의 대다수인 미르 농민을 각성시키고 단결시켜 차르 체제를 전복하고 나아가 집단농장을 핵심으로 하는 농민사회주의를 성취해 농민을 해방하려 했다. 이 노선은 1902년 창당된 사회주의혁명당 그리고 1905년 창당된 입헌민주당으로 계승됐다. 반면 아나키스트들은 각성된 개개인의 활동으로 차르 체제를 전복하고 모든 지배체제를 해체함으로써 농민을 해방하고자 했다. 그들이 말하는 개개인의 활동이란 결국 개개인의 테러로 귀결됐다.

젊은 시절 바쿠닌 노선을 추종하던 플레하노프는 테러에 의존하는 아나키즘 노선에 회의를 느끼고 1883년 마르크스주의자로 전향했다. 당시 스위스 제네바에 망명 중이던 그는 노동자 해방단이라는 사회주의 조직을 결성하고 마르크스 저작을 러시아어로 번역해 널리 전파했다. 동시에 나로드니키의 아나키즘 노선과 농민사회주의 노선을 마르크스 이론으로 비판하는 글들을 썼다. 예컨대 농민사회주의 노선에 대해 비역사적·비과학적이라 비판했는데, 이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단계와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 혁명단계라는 마르크스 이론에 입각한 비판이었다. 이로써 플레하노프는 러시아 사회주의 운동의 아버지로 불리게 된다. 이 사실은 러시아 사회주의 운동이 바쿠닌 등의 아나키즘에서 전이(轉移)됐음을 알려준다.

1890년대 들어 제정 러시아 수도 페테르부르크를 비롯해 모스크바·키예프 등 대도시에서는 급속한 산업화와 함께 급속한 노동자 확대 현상이 나타났다. 이런 배경에서 1895년 26살의 레닌과 23살의 마르토프 등은 페테르부르크에서 ‘노동자계급 해방 투쟁 동맹’이라는 사회주의 조직을 결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조직 결성 직후 그들은 체포돼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졌다. 그들은 1900년에야 시베리아 유형에서 석방돼 귀환할 수 있었다. 그동안 대도시 중심으로 사회주의 조직은 양적·질적으로 크게 강화돼 있었다.

한편 레닌과 마르토프 등이 시베리아에서 유형 중이던 1898년 3월 플레하노프 등 9명의 사회주의자가 사회민주노동당을 창당했다. 고가영 교수의 [러시아 혁명기 유대인 사회주의 운동-분트(Bund)의 활동을 중심으로]에 의하면, 창당 주역 9명 중 3명이 분트 당원이었다. 나머지 6명은 플레하노프 같은 해외 망명자를 비롯해 페테르부르크·모스크바·키예프 등 대도시 사회주의 조직 대표들이었다. 하지만 창당 주역들 대부분이 창당 직후 체포됨으로써 당은 이름만 있을 뿐 이렇다 할 활동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분트(Bund)는 독일어를 어원으로 하는 유대인 이디시(Yiddish)어로서 연맹을 의미한다. 분트는 제정러시아의 서쪽 변경지역 즉 오늘날의 폴란드·리투아니아·벨라루스·우크라이나 지역의 유대인 대표 13명이 1897년 9월 현재 리투아니아 수도 빌뉴스에서 조직한 ‘러시아와 폴란드의 전 유대인 노동자 연맹’ 약칭이다. 이 분트는 러시아 유대인들이 조직한 최초의 사회주의 조직이자, 사회민주노동당보다 반년 정도 먼저 구성한 사회주의 조직이기도 했다. 즉 러시아 사회주의 운동의 한 축을 유대인들이 담당했던 것이다. 초기 러시아 사회주의 운동가의 절반이 유대인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유대인들의 역할이 컸다.

사회주의 운동의 한 축 담당한 유대인들


▎1919년 5월 25일 붉은 광장에서 군중들을 향해 연설하는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당시 유럽에는 약 1200만명의 유대인이 있었고 그중 절반이 러시아에 거주했다. 중세부터 유럽 유대인 대부분은 게토(Ghetto)라고 하는 유대인 집단 거주지에 수용됐는데 유럽의 게토는 19세기부터 폐지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제정 러시아의 유대인들은 19세기에도 여전히 페일(Pale of settlement)이라는 집단거주지에 수용됐다.

유럽 유대인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었다. 게토 또는 페일에 수용된 빈천한 유대인들이 첫 번째 부류이고 그 외 부유한 유대인들이 두 번째 부류이다. 빈천한 유대인들은 ‘게토 유대인’ 또는 ‘페일 유대인’이라 불렸다. 반면 부유한 유대인들은 ‘궁정(宮庭) 유대인’이라 불렸다. 그 이유는 [구약성경]의 모세 때문이다. 모세는 애굽의 히브리 노예마을인 고센(Goshen)에서 태어났다. 애굽 고센의 노예 히브리인들은 빈천한 목축업에 종사했고 온갖 민족적 차별과 토착민의 폭력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히브리 사람들이 크게 늘어나자 애굽 왕은 히브리 사람들을 줄이기 위해 산파들로 하여금 새로 태어나는 남자애들을 죽이게 했다. 이런 상황에서 모세가 태어나자 어머니 요게벳은 석 달 동안 숨기다가 바구니에 담아 나일강에 띄웠다. 그것을 애굽 왕의 공주가 발견해 양자로 들였고 어머니 요게벳은 유모가 됐다. 그 결과 모세는 왕자로 생활하며 궁정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 요컨대 애굽 시대 히브리 사람들은 고센의 노예마을 사람과 궁정의 모세 왕자로 대표되는 고귀한 사람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처럼 유럽 유대인들도 게토와 페일에서 빈천하게 사는 유대인과 그 외 성공한 궁정 유대인으로 구별됐다.

유럽의 게토·페일 유대인과 궁정 유대인은 마치 고센의 히비리 마을 사람들처럼 극심한 민족차별에 더해 토착인의 광적 폭력에 시달렸다. 그 차별과 폭력은 애굽 시대 고센의 히브리 노예마을까지 소급된다는 사실에서 세계인들은 측은한 감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런 차별과 폭력 속에서 세계사적 유대인들이 출현했다는 사실은 역설적이기도 하다. 예컨대 모세·바울·마르크스·프로이트·아인슈타인·빌 게이츠 등이 그렇다. 특히 모세와 마르크스는 여러 면에서 대비되는 인물이다. 애굽 공주의 양자가 된 모세나 성공한 독일 유대인의 아들 마르크스는 궁정 유대인이라는 점에서 공통적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인생과 사상은 전혀 반대였다.

모세는 유일신 야훼의 부르심과 히브리 노예동포의 울부짖음에 응답해 출애굽을 감행했다. 당시 다신교가 판치던 현실에서 유일신 신앙으로 민족해방을 추진했다는 면에서 모세는 민족주의를 상징한다. 하지만 그 민족주의는 선민사상과 결합됨으로써 우월적 민족주의 또는 폐쇄적 민족주의로 변질돼 자칫 파시즘이나 쇼비니즘이 되기도 한다.

당내 주류로 떠오른 레닌의 통일전선전술


▎1919년 소련의 지도자인 레닌(가운데)과 트로츠키(가운데 오른쪽)가 러시아 혁명 2주년을 맞아 소비에트 연방 각국 지도자와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 사진:위키피디아
반면 마르크스는 역사 법칙의 부르심과 자본주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울부짖음에 응답해 세계 프롤레타리아 계급해방 이론을 정립했다. 민족주의를 극복하고 세계 프롤레타리아 계급해방을 추진했다는 면에서 마르크스의 계급주의는 국제주의를 상징한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계급주의와 국제주의는 인간의 본성이라 할 개인주의·민족주의·지역주의를 극단적으로 부정하는 약점을 내포한다. 극단적인 계급주의와 국제주의는 개인탄압·민족문화탄압·지역문화탄압 등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1898년 3월 창당 직후 주역들 대부분이 체포됨으로써 유명무실해진 사회민주노동당은 1900년 레닌·마르토프 등이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귀환하면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플레하노프와 레닌, 마르토프 등은 당을 재건하고자 노력했다. 그들은 [이스크라(불꽃)], [자리야(새벽)]라는 사회주의 잡지를 발간해 마르크스 사상을 널리 선전했다. 이런 노력 끝에 그들은 1903년 7월과 8월 브루셀과 런던에서 제2차 당 대회를 개최할 수 있었다. 분트를 비롯한 총 25개 사회주의 단체대표 43명이 참여했다. 그들은 당 강령과 당 규약을 결정했는데 그 과정에서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핵심 쟁점은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 혁명 단계를 제정 러시아 현실에 어떻게 적용하느냐의 문제였다. 논쟁은 마르크스 이론이 일반이론과 특수이론으로 나뉘었기에 더욱 치열해졌다.

마르크스는 영국과 프랑스 역사에서 도출된 역사 법칙을 근거로 일반역사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단계와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 혁명단계로 나뉜다는 일반이론을 정립했다. 일반이론은 민주주의 혁명단계는 부르주아가 주도하고, 사회주의 혁명단계는 프롤레타리아가 주도한다는 의미에서 ‘단계혁명’이라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독일 역사의 특수상황을 근거로 독일 프롤레타리아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단계도 주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기했다. 이런 가능성을 마르크스는 ‘영구혁명’이라 했다. 특수한 상황에서는 프롤레타리아가 민주주의 혁명단계도 주도하고 사회주의 혁명단계도 연이어 주도한다는 의미였다.

제2차 당 대회 때 마르토프는 일반이론을 주장했다. 일반이론에 따르면, 1903년 차르 체제에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급선무이다. 그러므로 당은 민주혁명이 완수될 때까지 부르주아를 도와야 하고, 그러기 위해 대중적 민주정당이 적합하다는 결론이 제시됐다.

반면 레닌은 특수이론을 주장했다. 특수이론에 의하면, 1903년 차르 체제에도 불구하고 프롤레타리아 주도의 민주주의 혁명이 가능하므로, 당은 ‘영구혁명’을 위한 독재적 전위정당이 적합하다는 결론이 제시됐다. 다만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단독으로 차르 체제를 타도하기 어려우므로 차르 타도 때까지만 부르주아와 동맹하고, 차르 타도 즉시 부르주아를 타도해야 한다고 했다. 이는 부르주아를 대상으로 하는 통일전선전술이라 할 수 있다.

이 논쟁에서 다수파 레닌이 승리했다. 레닌의 다수파가 볼셰비키였고 마르토프의 소수파가 멘셰비키였다. 레닌의 특수이론은 러시아판 특수이론이라는 면에서 볼셰비즘이라 할 수 있다. 볼셰비즘은 러시아의 정치· 경제·사회 등과 같은 국제적 특수성뿐만 아니라 민족적·문화적 특수성까지 내포하는데, 그것은 결국 러시아 민족주의로 환원될 수 있다. 즉 볼셰비즘에는 국제주의와 민족주의에 내포되는 극단적 요소 모두가 포괄된 것이다.

레닌파 주도로 숙청 거듭된 사회민주노동당


▎1917년 2월 혁명으로 로마노프 왕조가 세운 제국이 무너졌다.
1903년의 제2차 당 대회에서 분트는 ‘유대인 프롤레타리아의 유일한 대표’로 인정할 것을 요구했다. 유대 민족의 특수성을 인정하라는 요구였다. 하지만 레닌의 볼셰비키는 부르주아적 발상이라며 격렬하게 비난했는데, 이는 마르크스의 국제주의에 근거한 비난이었다. 그 결과 분트는 당에서 탈퇴했다. 이는 볼셰비키 치하 약소민족운동의 운명을 예고했다.

유대민족의 특수성을 주장하던 분트 조직원들은 분파주의자로 몰려 숙청당했다. 사회민주노동당에 참여해 국제주의를 추구하던 유대인들 역시 스탈린 시대 미제 앞잡이로 몰려 숙청됐다. 민족주의자는 국제주의 원칙으로 숙청되고, 국제주의자는 민족주의 원칙으로 숙청됐던 것이다. 이런 사실들을 종합해 E.H. 카는 볼셰비키의 ‘민족자결의 대차대조표’를 구성했다. 결론은 볼셰비키는 의식적으로 국제주의를 추구했지만 무의식적으로 러시아 민족주의에 점점 더 잠식됐다는 것이다. 분트에도 참여하지 않고 사회민주노동당에도 참여하지 않은 유대인들은 외국 이주 또는 모세의 방식대로 약속된 땅 가나안으로 돌아가려는 운동 즉 시오니즘 운동을 전개했다. 시오니즘 운동은 재력을 갖춘 민족주의적 궁정 유대인이 주도했다. 거시적으로 볼 때 러시아에서 유대 민족주의 노선은 이주 노선 또는 시오니즘 노선을 통해 성공했다.

임경석 교수의 [한국 사회주의의 기원]에 의하면 1922년 러시아 극동에는 한인 25만명이 거주했다. 그들은 러시아 유대인처럼 빈천한 한인과 부유한 한인으로 나뉘었다. 부유한 한인은 러시아 국적을 취득하고 토지를 소유한 사람들로서 원호인(原戶人)이라 불렸다. 국적도 토지도 없어 빈천한 사람들은 여호인(餘戶人)으로 불렸다. 한인 25만명 중 원호인은 5만명, 여호인은 20만명이었다.

1917년 2월 러시아 혁명이 발발해 차르 체제를 전복하고 임시정부가 성립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추구하는 임시정부에는 사회혁명당을 위시해 입헌민주당과 멘셰비키 등 다양한 당파가 참여했다. 하지만 레닌의 볼셰비키는 볼셰비즘에 따라 임시정부 타도에 돌입했다.

당시 5만명 원호인은 임시정부를 지지했다. 농민사회주의를 계승하는 사회혁명당과 입헌민주당은 물론 멘셰비키도 농민과 부르주아 위주의 민주주의 정책을 추진했기 때문이다. 원호인을 대표하는 최재형·문창범 등이 주동해 임시정부를 조직적으로 지지하고 민족자치를 추구하기 위해 1917년 5월 전로 한족회 중앙총회를 조직했다.

민족주의와 국제주의 양 극단 헤맨 이동휘

그런데 임시정부 타도를 운동하던 레닌의 볼셰비키는 결국 1917년 10월 임시정부를 타도하고 권력을 잡았다. 그러나 볼셰비키에 반대하는 왕당파·부르주아 민주주의자·사회혁명당·멘셰비키·약소민족 등 반혁명파가 무장봉기했고, 여기에 영국·미국·프랑스·일본 등 열강의 군사개입까지 겹쳐 러시아는 극심한 내전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1920년 레닌의 볼셰비키는 서부 전선의 반혁명 세력들을 제압하고 우랄 산맥을 넘어 시베리아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시베리아와 극동 지역의 반혁명 세력들도 급속도로 와해됐다. 그러자 임시정부를 지지하던 원호인들은 주저 없이 볼셰비키 노선을 지지하면서 볼셰비키 운동에 뛰어들었다. 원호인들은 러시아 내 민족적 특수성을 지키며 살기 위해 처음에는 부르주아 민족주의 노선을 따르다가 어쩔 수 없이 사회주의 민족주의 노선으로 바꾼 것이었다. 그러나 유대인의 분트와 마찬가지로 원호인 조직도 끝내 민족 특수성을 유지할 수는 없었다.

이는 애초부터 사회주의 민족주의 노선을 택했던 한인사회당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인사회당은 10월 혁명 후인 1918년 4월 여호인을 대표하는 이동휘·김립 등이 주동해 창당됐다. 한인사회당은 처음부터 볼셰비키 노선을 지지했다. 그러면서 한인사회당의 여호인들은 마치 유대인 시오니즘 운동가들처럼 독립된 고국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런 면에서 한인사회당은 유대인의 분트 또는 레닌의 볼셰비키처럼 국제주의와 민족주의라는 지난한 모순 속에 갇힌 조직이라 할 수 있다.

이동휘가 상해의 통합임정에 참여한 것은 민족주의 입장에서였다. 하지만 이동휘는 마치 레닌의 볼셰비키처럼 계급적 국제주의에 따라 통합임정 타도에 몰두했다. 볼셰비즘을 따르는 한인사회당의 속성상 당연한 귀결이었다. 하지만 그런 귀결은 이동휘의 불행이었고 한인사회당의 불행이었으며 나아가 통합임정의 불행이기도 했다.

※ 신명호 - 강원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202303호 (2023.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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