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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정신의 미학(84)] 탕평 내세운 ‘소론 영수’ 명재(明齋) 윤증 

스승 우암 송시열의 경직된 사상을 비판하다 

노론에서 배웠지만, 영수 우암의 편벽주의와 실질 없는 북벌 비판 가해
병자호란의 수치 잊지 않고 근신하며 초야에서 제자 양성한 백의정승


▎윤완식 후손이 명재고택 사랑채에서 편액 ‘離隱時舍(이은시사)’ ‘桃源人家(도원인가)’의 유래를 설명하고 있다. 가운데 보이는 담장 뒤편이 노성향교다. / 사진:송의호
"그해 겨울 오랑캐가 대거 침입하자 공(公)은 모부인을 모시고 강도(江都, 강화도)로 들어갔고, (아버지) 팔송공은 어가를 배종하여 남한산성으로 피란했다. 공이 동지들과 함께 (…) 자청해 (강화도) 성을 수비하는 곳에 나누어 예속되었다. 이듬해 정축년(1637) 성이 함락되었다.”

우암 송시열이 1674년(현종 15) 지은 윤선거(尹宣擧) 묘갈명의 한 부분이다. 윤선거의 아들은 이른바 사색(四色)당파 중 소론(少論)의 영수로 불리는 명재(明齋) 윤증(尹拯, 1629~1714)이다. 윤증은 1673년 박세채가 지은 행장과 자신이 정리한 연보를 우암에게 들고 가 아버지 비문을 써 달라고 부탁했다. 집안사람들은 윤선거와 우암의 생전 관계 때문에 우려했지만, 명재는 “아버지와 뜻을 같이한 벗은 오직 이 어른이 계실 뿐”이라고 했다.

우암은 명재에게 아버지의 벗이자 자신의 스승이었다. 그러나 윤선거는 윤휴라는 사람에 대한 평가에서 우암과 생각이 달랐다. 남인 윤휴는 이른바 예송논쟁에서 우암 등 서인과 달리 3년 상복을 주장한 인물이다.

우암은 묘갈명을 쓰면서 윤증 부자가 가장 난처해 하는 강화도 사건을 언급했다. 윤증은 9세에 병자호란을 만나 부모와 함께 강화도로 피신했다. 이듬해 강화도가 함락되자 어머니는 자결하고 아버지는 미복(微服) 차림으로 그곳을 탈출했다. 이후 윤선거는 사헌부 지평 등에 임명되지만 강화도에서 대의를 지키며 죽지 못한 것을 자책하고 끝내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윤증은 부친의 묘갈명을 짓는 우암에게 진심을 담은 편지로 이 사건을 해명했다. 하지만 우암은 “박세채가 (행장에서) 극진히 찬양했기 때문에 나는 기술만 하고 짓지 않는다(述而不作)”며 은근한 조롱을 가했다. 윤증은 불쾌했지만, 감정을 억누르며 장문의 편지로 고쳐주기를 간곡히 청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우암은 자구(字句) 몇 자만 손질할 뿐 수정하지 않았다.

송편 대신 백설기를 쓰는 종가


1월 19일 충남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 명재고택을 찾았다. 고택을 지키는 윤완식 후손이 안채에서 나왔다. 그날 마침 해체 수리 중인 안채의 상량식이 있었다. 그는 먼저 배롱나무를 가리켰다. “배롱나무는 겉과 속이 같습니다. 선비는 겉과 속이 같도록 늘 바르게 해야지요.” 그래서 명재고택은 추석에 송편 대신 겉과 속이 같은 백설기를 쓴다고 했다. 배롱나무는 껍질이 얇아 스스로 허물을 벗는다. 이야기는 우암의 묘갈명으로 옮겨갔다. “(명재는) 이후 제자의 예를 다하면서 스승의 잘못을 간언(諫言)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1680년(숙종 6) 서인 재집권으로 우암은 유배에서 풀려나 조정으로 돌아오고 윤증은 우암을 찾으면서 사제 관계는 유지된다. 그 무렵 우암의 정적 윤휴가 사약을 받으면서 유림엔 공포가 엄습한다. 윤증은 침묵만 지킬 수 없다며 우암에게 보낼 편지를 썼다. 후손이 “부치지 않은 편지”로 표현하는 이른바 1681년 ‘신유의서(辛酉擬書)’다.

윤증은 편지를 박세채에게 먼저 보였다. 박세채는 보내는 것을 만류했다. 스승인 우암을 지나치게 비난하고 있다는 것이다. 박세채의 사위는 공교롭게도 우암의 손자였다. 손자가 몰래 이 편지를 우암에게 보여줬다. 우암은 편지를 보고 크게 화를 내며 두 사람 관계는 더 악화됐다. 1400자 신유의서에서 윤증은 우암의 정치와 학문, 사상 등을 두루 비판하면서 자신의 정견을 제시했다. 이에 따르면 ‘우암은 학문의 근본을 주자학에 뒀다지만 한쪽으로 기울어 주자의 실학을 배우지 못했으며, 풍습 교화가 뒤떨어져 후세의 비웃음을 면치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림의 종장이 되려면 치우침을 고치고 주자의 정학(正學)에 정진해야 한다’고 했다. 또 ‘우암이 주장하는 북벌(北伐)은 말뿐이며 그의 기득권만 강화했다’고 비판했다.

신유의서는 이렇게 윤증과 우암의 정치사상 차이를 드러냈다. 우암이 주자학의 이념을 좇아 대의명분을 중시하며 서인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한 반면 윤증은 실용적이고 반권위적인 정견을 펴나갔다.

경직된 주자학 종본주의에 염증


▎보물로 지정된 윤증의 초상. / 사진:문화재청
차장섭 강원대 교수는 “스승과 제자 사이인 우암과 윤증의 이러한 반목과 대립은 양측 문인들이 가세하면서 서인은 1683년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졌다”고 분석한다. 그 무렵 경신환국으로 재집권한 우암은 김익훈을 비롯한 임금 친척인 이른바 훈척(勳戚)을 비호했다.

언관으로 훈척 횡포를 문제 삼던 서인 소장파들은 윤증이 스승을 비판하자 동조했다. 그들은 우암의 경직된 주자학 종본주의(宗本主義)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윤증은 송시열이 영수인 노론에 대응하는 소론의 영수로 추앙받는다. 노론과 소론 대립은 상소를 통해 격화됐다. 소론은 명재와 우암의 학문을 비교했다. 우암이 주자학의 껍질이나 이름만 있는 것이라면 명재는 학문에 속과 내실이 있다고 주장했다. 즉 참된 도리를 깨우쳐 실생활에서 실천해 나간다는 것이다.

명재고택 사랑채로 들어갔다. 처마에 ‘離隱時舍(이은시사)’란 편액이 걸려 있다. 명재의 9대손 윤하중이 붙였다고 한다. 선비는 모름지기 출처진퇴(出處進退)를 때에 맞게 해야 한다는 뜻을 담았다. 윤하중은 명재의 실용과 실질을 중시하는 정신을 이어 1944년 해시계를 만든 뒤 표준시 오차수정을 제안한 천문학자였다. “그런 전통 때문인지 후손들은 인문보다 공학도가 많습니다.” 윤완식은 전자공학 1세대다. 의례도 “차례(茶禮)는 번잡한 상차림 대신 본래의 뜻대로 차 한 잔만 올린다”고 덧붙였다.

신유의서에 이어 윤증이 세상을 떠난 뒤 간행된[가례원류(家禮源流)]도 노론과 소론의 대립을 격화시킨다. 병자호란 직후 윤선거는 유계와 함께 [가례원류] 초본을 만들었다. 유계는 1664년 죽음을 앞두고 제자인 윤증에게 수정을 부탁했다. 이를 유계의 손자이자 윤증의 제자인 유상기가 당시 좌의정 이이명의 후원을 받아 간행하기 위해 ‘스승이 보관하고 있던 중간본을 달라’고 요청한다. 윤증은 아버지 윤선거도 같이 편찬했고 자신도 일부 보완했는데, 편찬자를 유계 단독으로 추진하려는 것을 보고 제공한 중간본을 다시 회수했다. 그러자 유상기는 집안에 보관돼 있던 가장본(家藏本)에 노론 권상하의 서문을 붙여 간행에 착수한다.

[가례원류] 사건은 우암과 명재의 이른바 ‘회니시비(懷尼是非, 회덕 송시열과 이산 윤증의 시비)’로 번져 노론과 소론의 갈등을 키운다. 아버지와 스승 중 누구를 더 중시해야 하느냐의 문제였다. 숙종은 처음에는 명재를 옹호해 노론계 인물을 처벌하다가 다시 노론 지지로 돌아서 윤선거·윤증 부자의 관작을 삭탈했다. 붕당 간 대립을 역이용하는 숙종의 왕권 강화책 같은 것이었다. 윤증 부자의 관작은 소론이 집권하는 경종 시기 회복된다.

그쯤에서 윤완식 후손은 믿기 어려운 이야기 하나를 꺼냈다. 당시 집권층 노론은 소론의 본부나 다름없는 명재고택의 출입자와 동향을 상시 감시했다는 것이다. “고택 왼쪽에 노성향교가 있어요. 담장을 같이합니다. 또 오른쪽에는 공자의 영정을 모신 사당 궐리사(闕里祠)가 있습니다. 향교와 궐리사 모두 처음에는 다른 곳에 있었는데 노론·소론 갈등이 커지면서 노론이 이곳으로 옮겨 세운 것입니다. 소론 본거지를 출입하는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사찰하기 위해서였지요.”

“서인과 남인이 원한 풀어야”


▎명재고택의 사랑채 전경. 사랑채 앞은 담장이나 솟을대문 없이 트여 있다. / 사진:송의호
노성향교 안내문에는 그 주장을 뒷받침하듯 “1700년 경 지금의 자리로 옮겼는데 그 이유는 알 수 없다”고 적혀 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당쟁의 어두운 이면이다.

명재고택은 오히려 의연히 대처했다. 후손은 “(고택을) 드나드는 사람이 누구인지 훤히 볼 수 있도록 있던 솟을대문까지 아예 없앴다고 해요.” 지금도 고택 앞에 서면 사랑채가 바로 보인다.

윤증은 1629년(인조 7) 서울에서 윤선거의 장남으로 태어나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가족을 따라 강화도로 피란했다. 강화도 사건을 계기로 아버지 윤선거는 자신의 행동을 부끄러워하며 평생 관직을 단념하고 향리에 묻혀 지냈다.

윤증도 이 사건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도 아버지의 길을 따랐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평생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산림처사(山林處士)로 [의례문답] 저술 등 학문에 정진하고, 정제두 등 80여 명의 후학 배출에 전념했다.

윤증은 아버지 윤선거를 비롯해 유계와 송준길, 송시열로부터 주자학 등 당대 정통 학문을 배웠다. 또 19세엔 문경에 낙향해 있던 권시의 사위가 되어 본격적으로 퇴계 이황의 심학을 공부하는 등 학문의 폭을 넓혔다. 그는 송시열 문하에선 유독 뛰어나 고제(高弟)로 지목되기도 했다.

윤증은 36세에 학문이 출중하다며 내시 교관에 발탁된다. 이때부터 세자시강원 진선, 대사헌, 호조 참판, 의정부 참찬, 이조판서에 제수되고 81세엔 우의정에 발탁된다. 그러나 그는 한 번도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래도 딱 한 번 참여를 검토한 적은 있었다. 명재는 55세에 왕의 부름을 받고 상경하다가 과천에 머무른 적이 있었다. 그때 윤증과 송시열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하던 박세채가 과천까지 내려와 하룻밤을 묵으면서 함께 국사(國事)를 맡자고 설득한다.

그러자 윤증은 박세채에게 3가지 선결 조건을 제시했다. 첫째는 송시열의 세도를 막고, 둘째는 서인과 남인이 원한을 풀어야 하며, 셋째는 훈척의 발호를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박세채가 불가를 내비치자 윤증은 그날 밤 고향으로 내려왔다.

윤석열 대통령은 윤선거의 형인 윤문거의 후손이라고 한다. 윤 대통령이 지난번 대선을 앞두고 후보 출마를 고심하다 고향을 찾았을 때, 윤완식은 바로 명재의 이 대목을 언급했다고 한다. “양분된 국론을 해결할 자신이 있으면 출마하시라.”

윤증은 고향 논산에 머물면서 1675년 노강서원(魯岡書院) 규정을 만들고 유생들에게 율곡 이이가 정한 석담서원 학규와 퇴계의 성학십도를 가르쳤다. 또 1676년에는 유봉에 새집과 서실을 짓고 제자들에게 주자 십훈과 퇴계 육조 등을 강의했다. 1684년 최신이 상소를 올려 윤증이 스승을 배신했다는 배사론(背師論)을 제기했을 때는 문을 닫고 강의를 중단하기도 했다.

상소와 편지로 노론 일변도 견제


▎논산시 노성면 파평 윤씨의 문중 서당인 종학당 전경. 여기서 42명의 대과 급제자가 나왔다고 한다. / 사진:송의호
유봉에서 동쪽으로 4㎞쯤 떨어진 명재고택은 1709년 제자들이 앞장서 지었다고 한다. 하지만 명재는 너무 화려하다며 유봉에 머무르며 강의 때만 한 번씩 이곳에 들렀다. 유봉에는 초상을 모신 영당(影堂)이 남아 있다. 명재고택은 손자 윤동원 대에 이르러 비로소 중심 터전이 됐다.

이은순 전 한국외대 교수는 “윤증은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지만 정치적으로 중대한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상소 또는 정국 주도자나 학인과의 편지 등을 통해 정견을 피력했다”고 봤다. 그것은 노·소 분당과 이후 당쟁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것은 물론 노론의 일방적인 정국 운영을 견제했다. 명재는 평생을 재야에서 보냈지만 백의(白衣)정승으로 지지자들에 의해 소론의 영수로 추대돼 그 위치가 흔들리지 않았다. 그만큼 학문은 탁월했고 실용적 정치사상을 바탕으로 국정을 바로잡으려 했다. 그러면서도 노·소 당쟁에 휩싸여 송시열과 유계 두 스승을 배반했다는 호된 비판을 벗어나지 못했다.

명재를 우의정에 임명했던 숙종은 그가 세상을 떠나자 한 번도 만나지 못한 것을 한으로 여기며 조시를 지어 추모했다. “군사부(君師父)를 한결같이 섬긴다지만 본래부터 경중이 다른 법 / 우스워라! 논사(論思)를 주도한 어른이 대로(大老)의 무함을 달게 받았으니.”

명재는 불명예스러운 강화도 사건을 잊지 않으며 초야에서 학문을 연마하고 후학 양성에만 전념했다. 염치를 아는 선비의 근신이자 속죄였을까. 그러면서 병자호란 이후 변화하는 동아시아 질서에 따른 새로운 실용적 주자학을 스승에게 간하며 갖은 풍상을 감내했다.

[박스기사] 尹 대통령 낳은 파평윤씨는 조선의 대표 명문가 - 문중 서당 창건 후 282년 동안 과거 급제자 다수 배출

노성의 파평윤씨는 회덕의 은진송씨, 연산의 광산김씨와 더불어 호서지방 3대 사족(士族)으로 통한다. 논산시 노성면에는 명재고택과 함께 파평윤씨의 또 다른 명소 종학당(宗學堂)이 있다. 문중의 자녀교육, 나아가 과거시험 준비를 위해 1643년 처음 세워진 기숙형 학사 같은 문중 서당이다.

종학당은 윤순거가 동생 윤선거, 사촌 윤원거와 함께 종약과 가훈을 만들고 창설했다. 윤순거는 당장(堂長)이 돼서 책과 기물, 재산 등을 마련하는 등 기반을 닦았다. 윤증은 상세한 학규를 만들었다. 이곳에선 윤씨 문중과 처가 자제들이 합숙하며 교육을 받았다. 건물은 종학당·정수루·백록당·보인당 등으로 이뤄져 있다.

백록당과 정수루는 학문을 토론하고 시문을 짓던 곳이다. 정수루는 안동 병산서원 만대루와 비슷한 모습이다. 정수루에 오르니 멀리 능선이 보이고 파평윤씨 선대묘역도 한눈에 들어왔다. 백록당은 대청마루에다 서가를 설치했다.

종학원의 유래를 새긴 돌에는 창건 후 282년 동안 여기서 배출된 대과 급제자가 42명에 이른다고 밝히고 있다. 무과 합격자도 31명. 종학당은 일제강점기엔 상급 과정을 폐쇄하고 초학 과정만 교육했다. 종학당의 인재 양성으로 이산(尼山)에 터 잡은 파평윤씨는 조선의 명문가로 성장할 수 있었다고 적었다.

-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yeeho1219@naver.com

202303호 (2023.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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