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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범의 문명기행 | 한류의 기원을 찾아서(3)] 서적 보급 위해 활자에 특히 신경 쓴 ‘책벌레’ 세종대왕 

활판 기술 ‘진일보’는 물론 인쇄용 종이 품질 개선 해법 제시 

금속활자임에도 목판본 수준 근접한 ‘경자자’ 만들어 ‘인쇄혁명’
장영실 등 학자 총동원해 금속활자의 백미 ‘갑인자’ 창시하기도


▎김기창 화백이 1973년 그린 조선 4대 임금 세종의 표준 영정. / 사진:연합뉴스
조선조 4대 임금 세종의 책 사랑은 어릴 적부터 남달랐다. 그야말로 지독한 책벌레였다. 본래 몸이 약한 데다 책을 너무 읽어 눈병이 났는데도 서적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보다 못한 태종이 충녕대군 거처에서 책을 모조리 치우도록 명을 내렸다. 그러나 충녕은 병풍 뒤에 떨어져 있던 책 한 권을 발견하고는 그것을 서른 번이나 반복해 읽었다는 얘기는 유명한 일화다.

당시 미래의 세종이 병풍 뒤에서 찾아낸 책은 [구소수간(歐蘇手簡)]이라는 서적이다. 중국 북송시대 대문호인 구양수와 소식이 쓴 서간을 모아 원나라 문인 두인걸이 펴낸 것이다. 어떤 심오한 사상이나 새로운 지식이 담긴 책도 아니었다. 그저 두 시인이 안부를 전하고 소회를 털어놓은 것에 불과한데도 읽을 책이 그것뿐이었으니 서른 번이나 탐독한 것이었다. 그만큼 책 읽기를 좋아했다.

읽을 책이 부족해 100번씩 읽었던 세종

충녕의 책 사랑은 왕이 되고 나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세종은 어느 날 경연에서 [자치통감강목(通鑑綱目)]의 강독이 끝난 뒤 동지경연사 윤회에게 말했다.

“진덕수가 말하기를 ‘[통감강목]은 권질이 많아서 임금은 다 보기가 쉽지 않다’고 하더니, 내가 경자년부터 강독을 시작해 지금까지 이르렀는데 그 사이에 혹은 30여 번을 읽은 것도 있고 20여 번을 읽은 것도 있기는 하나 참으로 다 보기는 어려운 책이다.”([세종실록] 1423년 12월 23일 자)

사실 세종에게 서른 번은 적게 읽은 것이었다. 세종 스스로 고백한 얘기를 들어보자. 어느 날 우부승지 윤형이 임금에게 아뢰면서 경전과 사서를 상세히 인용하자, 세종은 “책을 볼 때 몇 번이나 읽기에 그리 능히 기억하는가”라고 물었다. 윤형이 “겨우 30번”이라고 대답하자 세종이 털어놓는다. “나는 모든 책을 100번씩 읽었다. 다만 [초사(楚詞)]와 [구소수간]만 30번 정도 읽었을 뿐이었다.”([단종실록] 1453년 6월 13일 자)

책마다 100번씩 읽으니 세종 스스로 “내가 책을 본 뒤에는 잊어버리는 게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는 것도 과장은 아닐 터다. 외울 때까지 반복해 읽다 보면 저절로 문리가 트이게 하는 것이 과거 학습법이기는 하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읽을 책이 부족한 탓이기도 했다. 책이 귀하다 보니 꼭 필요한 책을 어렵게 구해 마르고 닳도록 읽은 것이다. 하루에도 수천권씩 책이 쏟아져 나오는 오늘날 바람직한 학습법은 분명 아니다. 가능하지도 않다. 오늘날은 오히려 산더미처럼 쌓인 책 속에서 좋은 책을 골라내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 됐다.

세종은 서적의 부족함을 피부로 느끼고, 더 많은 책을 만들어 보급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세종뿐만 아니라 당대 모든 지식인이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지난 호에 썼듯, 세종의 아버지 태종 또한 서적 보급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금속활자를 주조해 책을 인쇄하는 주자소를 만들었다.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주자소를 만들면서 태종이 한 말을 상기해보자.

“우리나라는 해외에 있어 중국의 서적이 드물게 전해지고, 판각(板刻·목판 인쇄)한 책은 쉽게 훼손된다. 천하의 책들을 판각으로는 다 출판할 수도 없다. 그래서 내가 구리를 녹여 활자를 만들고 책을 얻으면 반드시 인쇄하여 책을 널리 보급하고자 하니, 정말 무궁한 이익이 될 것이다. 사업에 드는 비용을 백성에게 거두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 나와 종친·훈신들 중에서 뜻이 있는 사람과 같이 그 비용을 댄다면 아마도 성공할 수 있으리라.”(권근 [양촌집])

이때 신하들은 태종의 주자소 설립을 극구 반대했다. 세종이 “억지로 우겨서 만들게 했다”고 회상하는 것을 보면 신하들의 반대가 여간 심한 게 아니었나보다. 그것은 금속활자로 책을 찍어내기가 당시 기술로는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금속활자를 주조할 구리를 확보할 비용도 만만치가 않았다. 태종이 신하들에게 비용을 십시일반할 것을 주문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그뿐 아니라 인쇄할 종이 또한 구하기 쉬운 물건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큰 반대 이유는 신하들이 태종만큼 서적 보급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까닭이었다.

군주들은 자신의 통치 이념을 널리 전파하기 위해 책이 필요했지만 신하들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그것은 지식 독점체인 그들에게 새로운 경쟁자들을 생산해내는 위험한 발상일 뿐이었다. 자신들은 이미 권력의 따스한 온기를 마음껏 누리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에게 난로 앞자리를 양보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군주의 요구에 소극적으로 대응했다. 그들이 군주와 뜻을 같이했다면, 그래서 지혜를 모았다면 금속활자의 불편함은 훨씬 빨리 개선됐을 것이다. 하지만 세종 대에 이를 때까지도 금속활자 기술은 별반 나아진 게 없었다.

다만 세종이 누군가. 몸이 약한 책벌레라고 했지만 세종은 결코 문약한 군주가 아니었다. 어찌 보면 태종보다 더욱 강한 뚝심의 소유자였다. 그러한 뚝심은 어지간한 신하들은 범접할 수 없었던 심오한 학문의 깊이에서 나왔다. 엄청난 독서를 통해 제왕 통치의 도를 깨쳤고, 그러한 뜻을 펼치기 위해서는 금속활자가 꼭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아버지 태종 이방원의 ‘책 전파’ 유지 받들어


▎세종 2년 경자자로 찍은 [자치통감강목]. /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조선왕조실록]에서 ‘인쇄’를 검색해보면 총 597회가 나오는데, 그중 [세종실록]이 82회로 가장 많다. ‘주자소’란 단어로 검색할 경우 모두 116회에 이르는 것 중 [세종실록]이 65회로 절반이 넘는다. 둘째로 많은 [문종실록] 14회와 셋째 [정조실록] 13회에 비해서도 압도적으로 많은 수치다. 세종은 그만큼 금속활자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던 것이다. 그러한 관심으로 탄생한 것이 1420년 만든 ‘경자자(庚子字)’다.

경자자는 조선조의 첫 번째 금속활자인 계미자에 비해 두 단계를 뛰어넘는 괄목할 만한 개량을 이뤘다. 먼저 가지런하지 못하던 계미자에 비해 글자의 획을 작지만 우아하면서도 힘 있는 서체로 발전시켰다. 이는 고려 공민왕 때 진주목에서 간행한 원나라 [중용주자혹문(中庸朱子或問)]의 서체와 매우 흡사하다. 물론 고려 책은 목판본이어서 글자가 보다 가지런하고 예쁘지만 금속활자로서 목판본 수준에 거의 다다랐다는 것은 대단한 진보가 아닐 수 없다.

아울러 활판과 활자를 평평하고 바르게 만들어 서로 아귀가 잘 맞아떨어지게 만들었다. 따라서 인쇄할 때 밀랍을 사용하지 않아도 되게끔 한 것이다. 당시 스스로 평가한 것을 보자.

“전에는 책을 찍을 때 활자를 구리판에 벌여놓고 밀랍을 끓여 부은 뒤 단단히 굳으면 찍었기에 밀랍이 많이 들고 하루에 찍어내는 것이 두어 장에 불과했다. 지금은 임금이 친히 지휘해 공조 참판 이천과 전소윤 남급으로 하여금 구리판을 다시 주조해 글자의 모양과 꼭 맞게 만들었더니 밀랍을 녹여 붓지 않아도 활자가 움직이지 않고 더 똑발라 하루에 수십에서 일백 장(數十百紙)까지 찍어낼 수 있다.”([세종실록] 1421년 3월 24일 자)

활판과 활자를 평평하게 했다는 것은 획기적 기술 진보였다. 계미자는 밀랍을 이용해 활자를 활판에 고정시켰기에 활자를 밀랍에 박아 넣을 수 있도록 뒷면을 뾰족하게 만들어야 했다. 하지만 밀랍은 아무리 굳어도 부드러운 속성을 가졌기 때문에 인쇄를 할 때 활자가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던 것을 활자 뒷면을 평평하게 다듬어 활판과 맞아떨어지게 만들어 움직이지 않게 한 것이다. 그럼으로써 밀랍 없이도 더욱 단단하게 고정할 수 있어 인쇄의 효율성이 높아진 것이다.

물론 하루 100장은 과장이다. 변계량이 쓴 경자자 발문에는 “하루 20여 장”으로 나온다. 계미자의 인쇄가 하루 두어 장에 불과했고, 경자자보다 14년 뒤에 대폭 개량돼 나온 갑인자가 하루 40여 장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하루 20장의 인쇄 능력이었다는 게 맞을 것이다.

세종의 명을 받들어 금속활자 인쇄술을 혁혁히 발전시킨 인물은 이천(李蓚, 1376∼1451)이었다. 이천은 충청도 별마절도사를 지내고 골칫거리였던 왜구를 물리치는 데 공을 세운 무신이다. 대간의·앙부일구·자격루 같은 천문기기 개발은 물론 도량형 표준화와 화포 개발 등에 기여한 전천후 과학자이기도 했다.

책 찍어내는 관청 ‘주자소’에 각별한 애정


▎1668년 네 번째로 개주한 갑인자로 찍은 [동래선생음주당감]. /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이천의 자질을 알아보고 그를 오늘날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차관에 해당하는 공조 참판 자리에 앉힌 세종은 그에게 선왕 때 금속활자 계미자를 개량할 것을 주문한다. 하지만 이천조차 머리를 흔들며 난색을 표했다. 다른 것은 선진국인 중국에서 참고할 수 있는 부분이 있었지만 금속활자는 당시 조선 말고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신천지였던 것이다. 하지만 세종은 선왕과 마찬가지로 ‘억지로 우겨서’ 이천에게 금속활자 개량 임무를 부여한다. 이때를 언급하는 세종의 회상이 실록에 전해진다.

“태종께서 처음으로 주자소를 만들어 큰 글자를 주조할 때 (…) 초창기이므로 제조가 정밀하지 못해 인쇄할 때마다 (…) 겨우 두어 장 찍으면 글자가 쏠리고 비뚤어져서 다시 바로잡아야 하므로 인쇄공이 괴롭게 여겼다. 내가 이 폐단을 생각해 일찍이 경에게 고쳐 만들기를 명하였더니 경도 어렵게 여겼으나 내가 강요하자 경이 지혜를 써서 판을 만들고 주자를 한 것이 모두 바르고 고르며 견고해 밀랍을 쓰지 않고 많이 찍어내도 글자가 비뚤어지지 않으니 내가 아주 아름답게 여긴다.”([세종실록] 1434년 7월 2일 자)

금속활자 인쇄에 대한 세종의 관심은 재위 기간 내내 계속됐다. 주자소라는 극한 직업(?)에 애정을 가지고 수시로 술과 음식, 포상을 내려 격려했다.

“주자소에 술 120병을 내려주었다. (…) 임금은 그들의 일하는 수고를 생각하여 자주 술과 고기를 내려주고 (…)”([세종실록] 1421년 3월 24일 자)

“[통감속편]을 인쇄한 주자소 인력들에게 면포 74필, 정포(품질 좋은 베) 52필을 주어 포상했다.” ([세종실록] 1423년 8월 9일 자)

세종은 반대로 잘못이 있을 경우, 특히 교정을 못해 틀린 내용이 인쇄됐을 경우에는 벌을 줬다.

“교서 저작랑 장돈의와 성균 직학 배강을 의금부에 가두도록 명했다. 주자소의 관원으로서 [강목통감]을 인쇄했는데 오류가 많았기 때문이었다.”([세종실록] 1428년 1월 4일 자)

인쇄 일이 힘든 만큼 교정을 철저히 해 찍기 전 오류를 없애야 했다는 이유였다. 물론 더욱 높은 품질의 서적 제작을 위한 주마가편이었던 만큼 특별히 심한 잘못이 아니면 다음 날 모두 석방했다.

이러한 애정과 격려로 세종 대에는 수많은 책이 발행됐다. 박현모 여주대 교수(세종리더십연구소 소장)가 동료 학자들과 펴낸 [세종의 서재]에 따르면 세종 시대 찍힌 책은 무려 22분야에 걸쳐 360종이나 됐다. 오늘날 기준으로 그냥 책 360권을 생각하면 안 된다. 앞서 말한 [강목통감(자치통감강목)]만 해도 한 질이 59권에 이른다. 따라서 [강목통감]을 20부만 인쇄한다 해도 모두 1180권이 되는 셈이다. 따라서 모든 책의 양이 그렇게 많은 것은 아니지만, 360종이라 하면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양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쉽게 서적 구해 읽을 만한 환경 조성에 앞장


▎경기도 여주에 위치한 세종대왕릉인 영릉. 원래 서울 서초구에 있는 헌인릉 자리에 조성한 조선 최초 합장릉이었으나 1469년(예종 1) 풍수가 좋지 않다는 지적에 따라 현재 자리로 옮겼다. / 사진:이훈범
하지만 세종은 가능한 한 여건이 허락하는 대로 더 많은 양을 찍고 싶어 했다. 학문을 하고자 하는 많은 선비가 쉽게 책을 구해 읽을 수 있게 해주기 위해서였다. 그것이 곧 인쇄의 본질 아닌가.

“승문원에서 계하기를, ‘[지정조격(至正條格)] 10부와 [이학지남(吏學指南)] 15부, [어제대고(御製大誥)] 15부를 인쇄하고자 청합니다.’ 하니 명하기를 ‘각각 50부씩 인쇄하라’고 하였다.”([세종실록] 1423년 10월 3일 자)

[지정조격]은 원나라 마지막 법전으로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국내에 남아 있다. [이학지남] 또한 원나라 때 나온 관리 지침서로 세종 때 경자자로 찍은 판본이 유일하게 일본 와세다대에 보존돼 있는 것으로 최근 확인됐다. [어제대고]는 임금이 직접 써 내리는 유시를 모은 책이다. 세종이 이처럼 관리나 선비들만 위한 책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세종 대에 편찬된 360종의 책 중 가장 많은 것은 천문 분야로 54종에 이른다. 그다음이 45종인 유학과 철학 분야 서적이다. 통치 이념도 좋지만 백성의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과학 기술에 더욱 관심을 기울인 것이다. 대표적인 게 [농사직설]이다.

“오방(五方)의 풍토가 모두 같지 않아 곡식을 심고 가꾸는 법이 제각각 특성이 있으므로 옛글과 다 같을 수 없다. 각 도의 감사에게 명해 지역의 나이 많은 농부들을 만나 그들이 터득한 농토의 특성을 모으고 그 이유를 연구하게 하셨다. (…) 중복된 것을 버리고 꼭 필요한 것을 모아 제목을 [농사직설]이라고 했다. (…) 장차 조정과 민간에 널리 반포해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하게 이르도록 할 것이다.”([세종실록] 1429년 5월 16일 자)

당시 조선의 농서라고는 원나라에서 만들어진 [농상집요]가 유일했다. 고려 공민왕 때 문신 이암이 들여와 간행했으며 조선에 들어와서 농민들이 읽을 수 있도록 이두로 번역해 보급했다. 하지만 주로 중국 북방지역에 맞는 농업과 양잠 기술 등을 소개하고 있어 우리의 기후와 토양에 맞지 않은 부분이 많았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세종이 정초, 변효문 등에게 우리 실정에 맞는 농법을 연구하라고 시킨 것이다.

경자자는 이토록 많은 책을 찍어냈지만 글자가 작고 가늘어 보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왔다. 특히 세종의 아들, 대군들이 좀 더 큰 활자를 만들자는 아이디어를 냈던 모양이다. 금속활자를 개량하자는 데 반대할 세종이 아니었다.

“지금 대군들이 큰 글자로 고쳐 만들자고 청하는데, 근래 북정(北征)으로 병기를 많이 잃어 동철의 수요가 많고 일이 심히 번거롭고 힘들지만 활자 주조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 20여만 자를 만들어 하루 인쇄량이 40여 장에 이르고 자체가 깨끗하고 발라 작업의 수월함이 갑절이나 됐다.”([세종실록] 1434년 7월 2일 자)

금속활자와 활판 기술 업그레이드 이뤄내


▎정조 원년(1777) 여섯 번째로 주조한 갑인자. 사진은 정조가 엄선한 사기의 명문장을 모은 〈사기영선〉의 인쇄를 위해 짜 맞춘 활판. /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그것이 우리나라 금속활자의 백미인 ‘갑인자’다. 이천은 물론 장영실, 이순지 등 당시 과학자와 천문학자가 총동원돼 두 달 동안 주조를 했다. 그 결과 더욱 아름답고 힘 있는 자체를 가진 활자를 만들었으며, 활자가 고르고 네모반듯해 보다 선명하고 깔끔한 인쇄가 가능해졌다. 조판 또한 완전 조립식으로 짜 맞출 수 있도록 고안했고, 그래도 불가피한 작은 틈은 대나무를 얇게 잘라 끼워 넣으면 돼 인쇄가 간편해졌다. 갑인자는 조선 말기까지 여섯 번이나 개주되며 사용됐다.

금속활자와 활판 기술에 획기적 발전이 있었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인쇄할 종이 역시 귀하고 비용이 많이 드는 물품이었다. 게다가 통이 큰 우리의 세종 아닌가.

“이제 큰 글자의 활자를 만들어 중한 보배가 됐다. 나는 [자치통감]을 궁궐과 일반에 반포해 노인들이 보기 쉽도록 하고자 한다. 종이 30만 권만 준비하면 500~600질을 인쇄할 수 있다. 그 종이와 먹을 준비할 방법은 승정원에서 마련하라.”([세종실록] 1434년 7월 16일 자)

세종은 이러한 지시를 내리긴 했지만 그렇게 많은 종이를 구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밤새 고민을 했나보다. 이튿날 종이를 준비할 구체적 해법까지 제시한다.

“닥나무는 국고의 쌀로 비용을 지불하고, 경내의 중들을 시켜 종이 뜨는 일을 하게 하되 의복과 음식을 주라. 쑥대와 밀·보릿짚, 대껍질, 삼대 등은 마련하기 쉬운 물건이니 이들 5분(分)마다 닥 1분을 섞어 만들면 종이의 힘이 좀 더 강해질 뿐만 아니라 책을 만들기 적합하고 닥을 절약할 수 있을 것이다.” ([세종실록] 1434년 7월 17일 자)

세종은 서적 보급이라는 자신의 의지를 보다 확실히 실현하기 위해 주자소를 아예 경복궁 내로 이전하고, 서적의 편찬과 인쇄를 담당하는 부서인 ‘책방’을 궁중에 따로 설치하기도 했다. 임금이 이토록 관심을 가지니 신하들이 책을 만드는 데 소홀했을 리 없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거기서 그치고 만다. 세종 이후 조선의 출판은 답보 상태를 면하지 못했고, 오히려 후퇴하기까지 한다. 세종이 승하한 지 불과 65년 뒤 터져 나온 중종의 한탄을 들어보자.

서적 편찬·인쇄하는 ‘책방’ 궁중에 따로 두기도


▎고도와 방위, 낮과 밤의 시각을 정밀하게 측정할 수 있는 천문관측기기인 간의 복제품. 세종의 명을 받들어 금속활자 인쇄술을 발전시킨 이천(李蓚)은 무신이자 대간의 등의 천문기기를 개발한 과학자이기도 했다. / 사진:이훈범
“책이라는 것은 정교하고 치밀해야 하며 거칠고 품질이 떨어져서는 안 된다. 우리 세종조에 인쇄한 서적은 종이의 품질이 매우 우수할뿐더러 인쇄도 지극히 정밀해 근고의 책으로 아름다움이 이보다 나은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 뒤로는 점점 예전 같지 않아서 교서가 직분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 근래에 더욱 심해, 종이가 탁하고 먹이 더러우며 교정도 게을리해 서적을 졸악하게 만드니 내가 매우 한탄스럽게 생각한다.”([중종실록] 1515년 11월 4일 자)

더 많은 서적을 찍어 더 많은 사람에게 읽게 함으로써 학문과 과학·기술을 발전시켜 국가 번영을 이루고, 백성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자 한 세종의 의지에 당시 권신들이 부합하지 못한 것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그들은 책을 대량으로 찍어 보급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자신들이 읽을 수 있는 정도면 충분했다. 그들에게 지식이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자기들만의 독점적 도구였다. 무지렁이 백성에게 책을 보급해봐야 읽지도 않을 것이며, 행여 그들이 책을 읽고 지식을 쌓는다면 자신들의 기득권에 도전하는 긁어 부스럼을 만들 위험이 있으니 장려할 바가 못 됐다.

세종의 강력한 의지에 마지못해 따르던 권신들은 세종이 승하하자 속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대표적인 것이 ‘정음청(正音廳)’의 폐지 요구다. 정음청은 세종이 한글을 창제한 뒤 궁내에 설치하고 [훈민정음 해례본]과 [동국정운], [용비어천가] 등을 편찬케 한 기관이다. 세종이 왕비이면서도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던 소헌왕후 심씨의 명복을 빌기 위해 펴낸 [월인천강지곡] 또한 정음청에서 간행했다. 신하들의 반대가 심했던 언문책과 불경의 경우 주자소에서 간행하기가 껄끄러워 왕립 인쇄소를 궁내에 따로 둔 셈이었다. 신하들에게는 그러한 정음청이 한글의 연구와 보급 기지로서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을 터다.

정음청에서는 문종 즉위 이후에도 대군들이 중심이 돼 언문책과 불경을 인쇄했던 것으로 보인다. 세종 때는 말도 못하고 끙끙 앓던 신하들이 들고 일어섰다.

“대사헌 안완경이 아뢰기를, ‘주상께서 정음청의 주자를 이미 주자소에 돌려보냈다고 하시어 실로 기뻐하였으나 다시 들으니 절반을 정음청에 남겨둬 긴요하지 않은 책을 인쇄하고 대군으로 하여금 감독하게 한다고 들으니 그윽이 미혹합니다. 옛부터 임금은 사(私)가 없고 반드시 담당자에게 맡겨 책임지게 했습니다. 아울러 전날의 교지를 가볍게 고칠 수 없으니 청컨대 빨리 혁파하소서.”([문종실록] 1450년 11월 1일 자]

그러자 문종은 정음청을 자신이 설치한 게 아니라고 말하며, 대군들이 [소학]을 찍고 있으니 인쇄가 끝나면 혁파하겠다고 미루고는 끝내 없애지 않았다. 하지만 어린 단종이 즉위한 뒤 정음청은 곧바로 폐지되고 말았다. 신하들은 내친김에 주자소 역시 힘을 빼기 위해 노력했다.

주자소는 물론 책방도 지킨 세종의 손자 단종

“근년 이래 공역이 빈번하여 백성들이 지치고 피곤합니다. 주자소에 바치는 책지가 경상도·전라도에서 각각 2000권, 충청도·강원도에서 각각 500권인데 그 반을 감하시고 아직까지 수납하지 못한 것은 전부 감하소서.”(<단종실록)> 1453년 11월 4일 자)

여기까지는 양보한 단종이지만, 책방을 폐지하고 주자소와 통합하라는 신하들의 잇단 청원에는 굴복하지 않았다. “세종조 때부터 있었던 것을 가볍게 고칠 수 없다”며 끝까지 허락하지 않았다. 그것은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책 보급에 대한 할아버지 세종의 강력한 의지를 피부로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왕세손 시절부터 서적 인쇄에 대한 할아버지의 열정과 뜨뜻미지근한 신하들의 태도, 한글을 만들어 무지한 백성이 읽고 쓸 수 있게 하려는 세종의 통치 이념과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한글을 징그러운 벌레 대하듯 하던 신하들의 반감을 두 눈으로 봤기 때문일 터였다.

그렇기에 세계 최고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과학적이고 배우기 용이한 문자인 한글과 세계 최고 금속활자를 가지고도 그것이 지닌 거대한 잠재력을 최대한 이끌어내지 못했던 조선의 현실은 단종의 슬픈 운명만큼이나 안타까운 것이 아닐 수 없다.

※ 이훈범 - 남들이 못 보는 세상을 보고 싶어 기자가 됐고, 기자로 살며 본 세상을 칼럼에 녹였다. 얽매이지 않고 세상을 떠다니는 구름을 동경했지만, 32년을 중앙일보에 얽매였다 지난해 해방됐고 이제 새로운 글쓰기에 도전하고 있다. 역사에서 혜안을 얻는 게 삶의 기쁨이다. [역사, 경영에 답하다], [세상에 없는 세상수업], [품격] 등 책을 몇 권 펴냈다.

202303호 (2023.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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