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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호의 상해임정 27년사(13)] 러시아 내전 속 공산주의 선전 강화한 레닌 

총리 이동휘, 한국 공산당 조직하다 

혁명에 성공한 레닌의 적군은 반대파 백군과의 내전 돌입
백군 지원한 일본군 몰아내려 극동 지역서 공산주의 운동


▎적군(赤軍)의 사열을 받는 볼셰비키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트로츠키(왼쪽부터 셋째). 적군은 혁명 직후 ‘백군(白軍)’의 반란에 직면했으나 물자와 병력을 총동원한 끝에 승리한다. / 사진:위키피디아
1917년 10월 레닌은 볼셰비키 혁명에 성공했다. 하지만 바로 다음 해인 1918년부터 1920년까지 3년 동안 격렬한 내전을 겪어야 했다. 레닌의 소비에트 적군(赤軍)에 대항해 내전을 주도한 사람들은 백군(白軍) 장군들이었다. 예컨대 러시아 동남 변경의 데니킨 장군, 발트 지역의 유데니치 장군 그리고 시베리아 옴스크의 콜차크 제독 등이 대표적이었다.

이들 중에서 핵심인물은 콜차크 제독이었다. 2008년 러시아에서 개봉된 영화 ‘제독의 연인’에 등장하는 주인공이 바로 콜차크 제독이다. 그는 1차 세계대전 때 흑해함대 사령관으로 이름을 날리면서 콜차크 제독으로 알려졌다. 1917년 2월 혁명 후 콜차크 제독은 미국에 파견됐다가 1917년 10월 혁명이 발발하자 귀국했다. 레닌의 볼셰비키 혁명에 반대하던 그는 1918년 11월 시베리아 옴스크에서 백군의 최고 사령관에 올랐다. 광활한 시베리아에 근거한 콜차크 제독의 백군은 레닌의 소비에트 적군에 대한 공격을 주도했다.

독일과 강화조약 맺고 내전에 집중한 레닌


▎백군의 최고 사령관인 콜차크 제독은 1920년 2월 7일 이르쿠츠크에서 체포돼 총살됐다.
당시 레닌의 소비에트 러시아는 국내 백군 장군들뿐만 아니라 국외 열강들로부터도 공격받았다. 직접적인 이유는 1918년 3월 독일과 체결한 브레스트 리토프스크 강화조약 때문이었다. 1917년 10월 혁명에 성공한 레닌은 1차 세계대전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이유는 신생 소비에트 러시아가 독일의 강력한 공격을 막아내기 벅차서였다. 또한 러시아 10월 혁명에 자극받은 독일 노동자들이 소비에트 혁명을 일으킬 것이란 기대가 컸기 때문이기도 했다.

레닌은 독일과 강화협상을 벌일 때 무병합(無竝合)과 무배상(無賠償)을 요구했다. 무병합은 독일이 점령한 러시아 영토를 반환하라는 의미였고, 무배상은 독일이 러시아에 전쟁배상을 요구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독일 지도자들은 레닌의 소비에트 러시아가 약세를 모면하기 위해 강화협상에 나섰다는 사실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독일은 병합과 배상을 요구하며 수용하지 않을 경우 더 강력한 공격을 가하겠다고 협박했다. 이런 협박에 분개한 일부 볼셰비키는 독일과의 계속 전쟁을 요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레닌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독일의 요구를 모두 수용한 조약이 1918년 3월 브레스트 리토프스크에서 체결됐다. 브레스트 리토프스크는 오늘날 벨라루스에 소재하는 도시 이름인데, 그곳에서 조약이 체결됐기에 브레스트 리토프스크 조약이라 불렸다.

이 조약 결과 소비에트 러시아는 우크라이나·폴란드·핀란드·발트 3국 등 동부 국경의 요충지는 물론 남부 국경의 코카서스 지역 요충지를 상실했다. 당시 유럽 러시아 영토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게다가 60억 마르크의 거액을 배상금으로 지불해야 했다. 러시아인들 입장에서 볼 때 이 조약은 패전조약이나 같았다.

당연히 수많은 러시아인이 격분했다. 독일을 두려워한 레닌이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했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러시아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독일과 계속 전쟁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레닌의 소비에트 정권을 타도해야 한다는 여론이 팽배했다. 이런 여론을 타고 데니킨·유데니치·콜차크 등 백군 장군들이 득세했다. 레닌은 극도로 악화한 국내 여론을 피하기 위해 페테르부르크에 소재하던 수도를 모스크바로 이전시키기까지 했다.

그런데 브레스트 리토프스크 조약은 러시아인만 격분시킨 것이 아니었다. 독일과 전쟁 중이던 열강도 격분시켰다. 열강의 입장에서 보면 1914년부터 독일에 맞서 싸우던 혈맹 러시아가 갑자기 독일과 강화조약을 맺고 전쟁에서 이탈했는데, 이는 배신이나 같았다. 게다가 그동안 열강이 제공했던 막대한 전쟁 물자를 러시아가 독일에 넘길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이런 불만과 우려 속에서 영국·프랑스· 미국·캐나다·일본·중국 등 열강은 레닌의 소비에트 러시아를 전복시키고자 출병하는 한편 백군 장군들을 적극 지원하기 시작했다. 특히 시베리아에 출병한 영국군·일본군 등이 콜차크 제독을 지원했다.

이 같은 열강의 지원을 배경으로 콜차크 제독은 1918년 11월 시베리아 옴스크에서 백군의 최고 사령관에 오를 수 있었다. 한 달 뒤 콜차크 제독의 백군은 우랄 산맥을 넘어 모스크바를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 콜차크 제독의 백군은 1919년 3월에 우파를 점령했고, 4월 초순에는 볼가강가의 요충지 카잔·사마라까지 점령했다. 볼가강가에서 모스크바까지는 1000㎞도 되지 않았다. 당시 콜차크 제독의 백군은 13만 명을 넘었지만 이에 대항하는 레닌의 적군은 겨우 2만4000명에 불과했다. 이에 따라 당시 많은 사람은 콜차크 제독의 백군이 조만간 모스크바를 점령하고 소비에트 러시아를 붕괴시킬 것으로 예상했다.

적백(赤白) 내전에서 승기 잡은 붉은 군대


▎콜차크 제독의 백군.
레닌 역시 “겨울까지 어떻게 하든 우랄 지방을 탈환하지 못한다면 혁명의 파멸은 불가피하다”고 언급할 정도로 소비에트 러시아는 절박한 입장이었다. 그런 궁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소비에트 러시아는 총동원령을 내렸다. 그래서 1919년 5월 말에는 34만 명 정도의 적군 병력이 새로 충원될 수 있었다.

당시 콜차크 제독의 백군이 5월 말 이전에, 즉 34만 명의 적군이 충원되기 이전에 총공격을 감행해 모스크바를 점령했다면 소비에트 러시아는 멸망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보급 등의 이유로 제독의 백군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사이 병력을 대거 충원한 적군은 1919년 6월 9일부터 대대적인 반격에 나섰다. 제독의 백군은 패퇴하기 시작했다. 1919년 8월에는 우랄산맥을 넘어 옴스크를 향해 도망했고, 11월 14일에는 옴스크까지 빼앗겼다. 1920년 2월 7일에는 이르쿠츠크에서 콜차크 제독이 체포돼 총살됐다. 이렇게 콜차크 제독의 백군은 사라졌다.

한편 소비에트 러시아 정부와 러시아 공산당은 콜차크 제독의 백군을 반격하면서 시베리아와 극동 지역 민족들에 대한 선전 활동과 공산혁명 활동을 강화했다. 예컨대 1919년 7월 26일에 소비에트 러시아 정부의 외무인민위원회(외무부) 부위원(차관) 카라한은 한국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격문을 발표했다.

‘고려혁명단체 국민회와 전 조선 인민들에게 보내는 소비에트 정부의 격문 [러시아문서 번역집 20]’

“러시아 노농정부의 승리군은 2년에 걸친 전투 끝에 시베리아에서 황제 장군들을 격퇴했으며, 시베리아와 조선의 노동자, 농민에게 구제와 해방을 선사하면서 시베리아 평원으로 진격해 갔습니다. 이에 소비에트 정부는 일본 압제자들에 대항해 투쟁하는 모든 한인 혁명가들에게 아래와 같은 형제적 격문을 보냈습니다. (중략) 현재 한국인에게 유일하게 안전한 장소는 모스크바입니다. 소비에트 러시아에 국민회가 조직됐습니다. 국민회의 목적은 조선 혁명을 일으키고 조선의 독립을 쟁취하는 것입니다. 우리 적군 대열에 합류한 한인 혁명가들은 현재 여러분을 도울 군대를 조직했습니다. 한인 노동자들은 모스크바의 인터내셔널, 즉 자본가와 착취자에 대항한 노동조합 인터내셔널에 가입해 다른 나라 피압박 계급과 공동 행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동시에 적군처럼 한인 빨치산들도 우랄 방면에서 시작해 항일 투쟁을 펼치게 될 것입니다. 조선 인민들은 자국에서 봉기해야 합니다. 그리고 러시아 노농정부와의 교류에 전력을 다해야 합니다. 우리가 한데 힘을 합쳐야만 블라디보스토크와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일본인들을 몰아낼 수 있습니다. 해방의 순간이 다가왔습니다. 한인 혁명가들이여, 마지막 혼신의 힘을 다 쏟으십시오. 부(副) 외무인민위원 카라한.”

위의 격문이 발표된 1919년 7월 26일은 레닌의 적군이 우랄산맥을 넘어 시베리아로 진군하던 시점이었다. 그 시점에서 레닌의 소비에트 정부가 위와 같은 격문을 발표한 이유는 콜차크 제독의 백군 때문이 아니었다. 바로 시베리아에 출병한 일본군 때문이었다.

시베리아에 남아 볼셰비키와 싸운 일본군


▎1920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의 일본군 장교들. / 사진:위키피디아
패퇴하는 제독의 백군은 이미 사기를 잃고 있었다. 그런 백군을 제압하는 것은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시베리아에 출병한 일본군은 사정이 달랐다. 우선 출병한 일본군이 7만명을 헤아렸고, 1919년 7월 일본군은 블라디보스토크·하바롭스크·니항(泥港, 니콜라옙스크)·치타 등 바이칼 동쪽의 요충 지를 모두 점령한 상태였다.

따라서 레닌의 적군이 제독의 백군을 추격하면서 옴스크와 이르쿠츠크를 넘어 극동 지역까지 공격하려면 필연적으로 일본군과의 전면전을 각오해야만 했다. 그러나 레닌은 일본과의 전면전을 피하고자 했다. 일본이 연합국의 일원이면서 동시에 강국이기 때문이었다. 레닌은 독일과의 전쟁도 부담스러워 브레스트 리토프스크 강화조약을 맺은 상황이라 일본과의 전쟁도 피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시베리아 일본군을 그대로 방치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레닌은 일본군과 무력충돌을 벌이지 않으면서 일본군을 철수시킬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그 결과가 바로 시베리아와 극동 민족들에 대한 선전 활동과 공산혁명 활동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즉, 레닌은 시베리아와 극동 민족들을 이용해 시베리아 일본군을 철수시키려 했다.

예컨대 위의 격문에서 카라한은 “우리가 한데 힘을 합쳐야만 블라디보스토크와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일본인들을 몰아낼 수 있습니다”라고 했는데, 이는 언뜻 보면 한국인과 소비에트 러시아가 군사동맹을 맺어 러시아 극동 지역과 한반도에서 일본군을 몰아내자는 의미로 읽히지만 실제는 그런 내용이 아니었다. 실제 내용은 바이칼 동쪽 지역, 즉 극동 지역의 일본군은 한국을 비롯한 극동 민족들이 앞장서서 공격해 몰아내야 하고, 그때 소비에트 러시아는 배후에서 적극 지원하겠다는 의미에 지나지 않았다. 단적으로 말해 극동 지역의 민족들을 총알받이로 이용해 일본군을 철수시키겠다는 뜻이었다. 이는 1919년 8월 극동 담당 인민위원부 전권대표에 임명된 빌렌스키의 보고서를 통해 명확히 확인할 수 있다.

빌렌스키는 러시아 공산당 고위간부였다. 그는 극동 담당 전권대표로서 극동에서의 선전 활동과 공산혁명 활동을 벌인 후 1920년 8월경 ‘동아시아 인민에 대한 활동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 보고서에 의하면 빌렌스키는 1919년 8월 자신이 주도해 ‘동아시아 인민을 상대로 공산주의 활동에 관한 테제’를 제시했다. 그 시점은 레닌의 적군이 콜차크 제독의 백군을 추격해 옴스크로 진군하던 시점이었다. 따라서 소비에트 정부는 극동의 일본군을 어떻게 철수시킬 것인지 하는 지난한 문제에 직면했는데, 그때 빌렌스키가 ‘동아시아 인민을 상대로 공산주의 활동에 관한 테제’를 해결책으로 제시했던 것이다.

극동 민족 자극한 빌렌스키의 반일 선전술


▎1922년의 적군. / 사진:위키피디아
빌렌스키 보고서에 의하면 러시아 공산당 정치국은 빌렌스키가 제시한 테제를 승인했다고 한다. 즉, 러시아 공산당 지도자들은 극동의 일본군을 철수시키기 위해 동아시아 인민을 상대로 공산주의 활동을 강화하기로 결정했다는 뜻이다. 그 결과 정치국은 빌렌스키를 극동 담당 전권위원으로 임명하고 다음과 같은 지령을 하달했다고 한다.

첫째, 극동에서 우리 정책은 가능한 모든 수단을 통해 강행됨으로써 일본·미국·중국 등의 이해관계에 상충하는 선상에 세워져 있다. 이 지령의 의미는 극동의 일본군을 철수시키기 위해 소비에트 러시아는 직접적인 무력이 아니라 미국·중국 등을 일본과 이간, 충돌시킴으로써 일본군을 스스로 철수하게 하는 외교적 책략을 써야 한다는 의미라 할 수 있다.

둘째, 중국·몽골·한국 등지에서 인민에 대한 우리의 관계는 외국자본의 압제로부터 해방되도록 의식적인 대중운동을 각성시키는 것이어야만 한다. 이 지령의 의미는 중국·몽골·한국 등 극동 민족들에게 반일과 반미 운동을 일으킴으로써 일본군을 스스로 철수하게 하는 반제국주의 책략을 써야 한다는 의미라 할 수 있다.

셋째, 동아시아 인민 사이에서 우리는 실천적으로 혁명운동을 지원하는 노력을 해야만 한다. 또한 일본·중국·한국 등의 혁명조직과 견고한 연대를 확립해야만 하며 동시에 팸플릿이나 전단을 간행하는 출판 부서의 선동사업을 강화한다. 이 지령의 의미는 극동 민족들의 반일과 반미 운동을 소비에트 러시아가 적극 지원 및 지도해야 한다는 의미라 할 수 있다.

넷째, 필수적으로 한인과 중국인의 빨치산 조직에 대한 지원을 활발하게 전개한다. 이 지령의 의미는 극동의 일본군을 철수시키기 위해 한인과 중국인의 빨치산 부대를 전면에 내세워야 한다는 의미라 할 수 있다. 이 같은 정치국의 지령에 따라 빌렌스키는 1919년 9월부터 12월까지 시베리아에서 극동 민족을 상대로 공산주의 선전선동 활동을 벌였다.

그런데 빌렌스키 보고서에 의하면 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1920년 2월 일본과 충돌 예방의 필연성을 결정했다. 당시 이런 결정이 나온 배경은 1920년 2월 7일 이르쿠츠크에서 콜차크 제독이 체포돼 총살됐고, 이르쿠츠크 역시 소비에트 적군에 장악됐기 때문이다.

그즈음 시베리아에 출병했던 영국·미국·캐나다 등은 이미 철군을 결정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일본은 철군을 결정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레닌의 적군은 이르쿠츠크를 넘어 극동으로 진군해 일본군과 전면전쟁을 벌일지 말지를 결정해야 했다. 그때 당 중앙위원회에서 일본과의 충돌 예방의 필연성을 결정했다는 것인데, 결국 일본군과의 전면전쟁을 피하기로 결정했다는 의미와 같다.

빌렌스키의 지휘 따른 이동휘의 한국 공산당

그런 결정을 내리면서 당 중앙위원회는 빌렌스키를 블라디보스토크로 파견했다. 극동 민족을 이용해 일본군을 철수시키기 위해서였다. 이 지령에 따라 빌렌스키는 1920년 2월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빌렌스키는 연해주의 한국인·중국인·몽골인을 대상으로 공산주의 선전선동 활동을 벌였다.

그런데 빌렌스키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벌이는 공산주의 선전선동 활동은 러시아 극동에 거주하는 한국인·중국인·몽골인 등을 대상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러시아 내부의 소수민족을 대상으로 하는 선전선동 활동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활동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극동 지역의 핵심 민족은 한국인·중국인·일본인 등이다. 그들을 대상으로 공산주의 선전선동 활동을 벌이려면 본토의 한국인·중국인·일본인을 겨냥해야 했다. 그러려면 러시아 공산당이 아니라 코민 테른이 주체가 되는 선전선동 활동을 벌여야 했다. 이 같은 판단에서 빌렌스키는 코민테른 산하에 ‘동아시아 비서국’을 두고 동아시아 비서국에 한국부·중국부·일본부를 배치해 본토의 한국인·중국인·일본인을 대상으로 공산주의 선전선동 활동을 강화하기로 결정했다. 동아시아 비서국의 임시의장은 빌렌스키 자신이었다.

빌렌스키는 1920년 5월 초에 보이친스키·김만겸·티토프 등 3명의 공작원을 상해로 파견했다. 당시 상해가 동아시아 국제도시였기에 이곳에 동아시아 비서국 본부를 설치하고 본토의 한국인·중국인·일본인을 대상으로 하는 공산주의 선전선동 활동을 추진하기 위해서였다. 임경석 교수의 <한국 사회주의의 기원>에 의하면 보이친스키는 28세의 러시아인이었고, 김만겸은 35세의 연해주 한인 2세였다. 티토프는 신상이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이들 모두 러시아 공산당 당원이었다.

상해에 도착한 보이친스키와 김만겸은 1920년 5월 15일 상해임정을 찾아 이동휘와 접선했다. 보이친스키와 김만겸의 권유로 이동휘는 기왕의 한인사회당을 확대·재편해 한국 공산당을 조직했다. 이 한국 공산당이 바로 코민테른 동아시아 비서국의 한국부였다. 그러므로 이동휘의 한국 공산당은 코민테른의 지휘통제는 물론 동아시아 비서국의 지휘통제도 받아야 했다.

※ 신명호 - 강원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202304호 (2023.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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