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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정신의 미학(85)] 퇴계와 이기(理氣) 논쟁 벌인 고봉(高峯) 기대승 

나이와 지위 넘어 논박하되 겸허를 잃지 않다 

일찍이 수양이 중심인 위기지학 실천, 문과 급제 뒤 처음 퇴계 만나
편지로 8년간 퇴계와 논변… 둘 사이의 감화로 성리학 수준 끌어올려


▎월봉서원 강당인 빙월당 앞에서 기호석 회장(오른쪽)이 백옥연 광산구청 역사문화전문위원과 서원 내력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왼쪽으로 장판각이 보인다. / 사진:송의호
"어찌 물속 달의 밝음과 흐림이 모두 달의 작용이며, 물과는 관계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1527~1572)이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에게 보낸 ‘사단칠정(四端七情) 논변’ 제1서 조열(條列) 13조의 한 대목을 쉽게 푼 것이다.

사단은 인·의·예·지에서 나오는 측은지심·수오지심·사양지심·시비지심이다. 칠정은 희·노·애·락·애·오·욕 등 7가지 감정을 가리킨다. 밤하늘에 뜬 달이 강물에 비치고 있다. 퇴계는 하늘의 달을 절대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강물에 비친 달은 하늘에 떠 있는 달의 종속적 작용이라고 보았다.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의 이데아가 떠오른다. 선과 악을 구분하는 것과 같은 이른바 이원론(二元論)이다. 그러나 고봉은 그렇지 않다고 논박한다. 강물에 비친 달은 물과도 관계가 있으니 둘은 분리할 수 없다는 일원론(一元論)이다. 옳고 그름이 아닌 관점의 차이라고 할까. 바로 조선 철학사상 역사에서 백미로 꼽히는 ‘퇴계 고봉 논변’이다.

2월 16일 퇴계와 편지를 통한 아름다운 논변을 벌인 고봉이 모셔진 광주광역시 광산구 광산동 월봉서원(月峯書院)을 찾았다. 지금으로부터 450여 년 전 논쟁을 더듬기 위해서다. 기호석 종중회장과 백옥연 광산구청 역사문화전문위원을 만났다. 백우산 아래 자리잡은 서원을 들어서자 동·서재를 지나 강당인 빙월당(氷月堂)이 나타났다. ‘빙월’은 정조 임금이 고봉의 글을 읽고 투명하고 깨끗한 성품을 ‘빙심설월(氷心雪月)’이란 말에서 따와 이름 붙였다고 한다.

빙월당 왼쪽에 장판각이 있다. 고봉이 남긴 저작을 새긴 목판 474장과 유영루(游泳樓) 등 편액이 보관된 곳이다. 1년에 하루 목판 습기를 햇볕과 바람에 말리는 날만 들어간다는 장판각의 문을 열었다. 백 전문위원이 목판 가운데 책 이름이 ‘四七理氣往復書上篇(사칠이기왕복서상편)’이라 새겨진 판각 하나를 꺼내 보였다. 정확히 상편 3,4쪽이다. 보관된 여러 목판 중 고봉이 퇴계와 8년 동안 벌인 유명한 이기 논변의 한 부분이다. 고봉의 손서 조찬한이 목판을 만들었다.

정지운 '천명도설'이 논변의 발단


영남의 퇴계와 호남의 고봉은 당시 천 리 밖에서 편지를 주고받았다. 서울과 안동, 안동과 광주를 오갔을 이들 편지 120여 통은 하나에 한 달이 걸렸을 것이다. 기호석 회장은 “우주 운영의 질서를 이와 기로 설명하는 사칠논변 글은 당시 선비들의 뜨거운 관심으로 이동 중 내용이 미리 알려졌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고봉이 퇴계에게 질문을 시작하며 이어진 사칠이기론은 한국 사상사의 큰 흐름을 만든다. 이어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고, 성호 이익 등도 관련 저술을 펴냈다. 1553년(명종 8) 정지운은 자신이 작성한 [천명도설(天命圖說)]을 퇴계에게 보이며 질정을 구한다. 이에 퇴계는 “사단은 이에서 발하고 칠정은 기에서 발한다”는 정지운의 설을 “사단은 이의 발함이요 칠정은 기의 발함”이라고 고쳐줬다. 논변의 발단이다. 그 뒤 정지운은 고친 도설을 퇴계에게 보였고, 퇴계가 그것을 다시 수정하고 정리하면서 [천명도설]은 새로 정립된다. 퇴계는 이어 [천명도설후서]를 지어 정지운에게 전한다. 이규필 경북대 교수의 분석이다.

1558년 10월, 32세 고봉은 문과에 합격해 승문원 부정자가 됐다. 이달 고봉은 서울에 머물던 퇴계를 찾아간다. 당시 퇴계는 성균관 대사성을 지낸 58세 대학자로 학문에 힘쓰고 있었다. 고봉과 퇴계의 첫 만남이다. 그 무렵 고봉도 [천명도설]을 접한다. 정지운이 이 책을 들고 와 함께 토론한 뒤 고봉은 퇴계의 의견에 이의를 제기했다. 퇴계는 정지운과 고봉이 나눈 이야기를 전해 듣고 논리를 정정한 뒤, 고봉에게 편지를 보낸다. 골자는 “사단이 발하는 것은 순리(純理)이기 때문에 선하지 않음이 없고, 칠정이 발하는 것은 겸기(兼氣)이기 때문에 선악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1559년 퇴계와 고봉의 사칠논변 출발이다.

고봉은 퇴계의 편지를 받고 답장을 보내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다. 핵심은 이런 것들이다. “사단과 칠정은 모두 정(情)이다.” “이는 기의 주재이고 기는 이의 재료여서 본래 구분되지만 사물에 있어서는 혼륜(渾淪, 마구 뒤섞여 있는 상태)해 나눌 수가 없다.” 퇴계는 이 편지를 받고 사단 역시 정이라는 고봉의 견해에 동의하면서도 사단과 칠정은 소종래(所從來, 근본 내력)가 다르다고 말한다. 사단은 본연지성(本然之性)에 근원하고 칠정은 기질지성(氣質之性)에 뿌리를 둔다는 것이다.

고봉은 편지를 보내 여기에 다시 이견을 낸다. 퇴계는 고봉의 두 번째 편지를 받고도 사단과 칠정의 소종래는 다르다고 논박한다. 퇴계는 이렇게 고봉의 문제 제기를 상당 부분 인정하면서도 자신의 기본 논리를 지키면서 새 논리를 내놓았다. 즉 “사단은 이가 발하여 기가 따르고 칠정은 기가 발하여 이가 탄다(乘).”

퇴계는 고봉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제자 정유일에게 보낸 편지에 고봉을 이렇게 평가한다. “나의 주장 가운데 선악미정(善惡未定)이란 말은 완전치 못하다고 여겼는데, 명언(고봉)이 지적한 바에 따라 표현을 달리 고치고자 하면서도 좀 더 신중하기 위해 고치지 못하고 있었는데, 편지에 낱낱이 지적한 것을 보니 남을 더욱 깨치는 바가 있음을 알겠습니다. 이 도움을 받아 큰 잘못은 없을 듯하니 참으로 다행한 일입니다.” 퇴계는 이렇게 논거를 제시하며 조목조목 분석하는 고봉을 ‘이로운 친구’로 규정한다. 퇴계는 손아래 문인들에게도 높임말을 썼다. 편지를 통한 논변은 8년 동안 이어졌다. 고봉은 퇴계의 주장을 수용하며 자신의 논리와 절충했고, 퇴계 역시 고봉의 주장을 수용해 자신의 학설을 일정 부분 수정 보완하면서 논쟁은 마무리됐다.

“형제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한 몸”


▎장판각에 보관돼 있는 ‘사칠이기왕복서’의 판각. 기대승의 손서 조찬한이 목판을 만들었다. / 사진:송의호
편지 왕래를 시작했을 때 그들의 나이 차는 무려 스물여섯. 퇴계는 쉰여덟 대학자로 성균관 대사성의 지위에 있었고, 고봉은 이제 갓 과거에 급제한 서른 둘 신출내기 선비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나이나 지위에 구애받지 않고 학문 논쟁을 뛰어넘어 서로의 안부와 정치, 나아가고 물러남, 집안일까지 끈끈하게 문답했다. 양 선생의 인연은 지금껏 이어져 도산서원 김병일 원장이 월봉서원 원장을 겸하고 있다.

장판각을 닫고 빙월당 뒤 계단을 올라 정안문으로 들어서니 숭덕사(崇德祠)가 있었다. 기호석 회장의 안내로 향을 피우고 예를 표했다. 위패에는 ‘文憲公高峯奇先生(문헌공고봉기선생)’이라 쓰여 있다. 고봉만 모셔진 사당이다. 월봉서원은 본래 고봉 사후 6년만인 1578년 학덕을 기리기 위해 호남 유생들이 신룡동에 사당 망천사를 세우면서 시작됐다. 이후 망천사는 임진왜란 시기 소실돼 산월동인 동천으로 옮겨졌다. 1654년 효종이 월봉으로 사액(賜額)하면서 사당은 서원이 됐다. 당시엔 고봉과 함께 박순·김장생 등이 배향됐다. 그러나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월봉서원은 훼철된다. 1941년 월봉서원은 백우산 기슭 너브실(광곡)로 옮겨져 빙월당을 중건한 뒤, 1991년 지금의 모습이 됐다.

서원을 나와 두세 사람이 나란히 걸을 수 있는 서북쪽 산길로 들어섰다. 서원이 ‘철학자의 길’로 명명한 고봉 묘소로 이어지는 소나무 숲길이다. 길옆 바윗돌에 고봉이 남긴 시조가 새겨져 있다. “호화코 부귀키야 신릉군(信陵君, 중국 전국시대 4공자의 한 사람)만 할가마난/ 백년이 못되어 무덤 우희 밧츨가니/ 하물며 여나믄 장부야 닐러 무삼하리오”

죽으면 모든 게 없어지는 허무를 노래했다. 150m 쯤을 가니 황룡강을 바라보는 백우산 중턱에 고봉의 묘소가 있었다. 고봉의 생애를 새긴 신도비는 서원을 내려다보는 오른쪽 언덕에 세워져 있다. 비문은 서울대 교수를 지낸 조순 부총리가 2003년 지었다.

고봉(高峯)이라는 호는 관향 행주에 그런 지명이 있어 그가 스스로 붙였다고 한다. 고봉의 선대는 대대로 경기 고양과 서울에 살았다. 그의 할아버지 기찬은 홍문관 응교를 지냈고 아버지 기진은 아우 기준과 함께 성리학으로 당대에 이름을 얻었다.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는 집안을 산산조각냈다. 기준은 화를 당했고 기진은 그길로 세상일에 뜻을 접고, 멀리 광주(光州) 고룡리로 낙남(落南)했다. 기대승은 1527년 여기서 태어났다.

물러나며 선조에게 고봉을 천거한 퇴계


▎빙월당 뒤 높은 위치에 세워져 있는 기대승의 위패가 모셔진 사당 숭덕사(崇德祠). / 사진:송의호
기대승은 7세에 [소학]을 시작으로 17세 무렵까지 사서삼경·당송고문 등을 두루 읽었다. 그는 일찍이 수양이 중심인 위기지학(爲己之學)에 힘썼다. 고봉은 “형제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한 몸으로 서로 도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호석 회장은 “그래서 후손들은 형제간 우애를 끈끈하게 지키려 애쓴다”고 말했다. 고봉은 또 “주자는 조정에 벼슬한 기간이 겨우 40여 일”이라며 사화가 이어지자 처음엔 벼슬길을 멀리했다.

1558년 기대승은 문과에 급제한다. 이때부터 그는 14년간 승정원 주서, 홍문관 응교, 직제학, 좌승지 등 여러 관직을 지낸다. 46세이던 1572년 고봉은 대사성·대사간·공조참의에 올랐으나 병으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오다 태인에서 세상을 떠났다. 1590년(선조 23) 고봉은 사후 공신에 오른다. 그가 일찍이 태조 이성계의 선조를 이인임으로 잘못 기록한 [대명회전(大明會典)]을 바로잡는 이른바 종계변무(宗系辨誣) 논의에 참여하고, 명나라에 보낸 주문(奏文)을 지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 공로로 이조판서 덕원군에 봉해지고 문헌(文憲)이란 시호를 받았다. 서원 관계자는 지금 월봉서원이 들어선 너브실 일대가 당시 사패지(賜牌地)라고 말했다.

조순 부총리는 신도비에 고봉의 경연 활동을 언급했다. “선생은 조정에서 벼슬할 때 항상 근본에 힘쓰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고 강상(綱常)을 세우고 어진 이를 높이고 사악함을 물리치는 것으로 자신의 임무를 삼았다.” 경연 석상에서 고봉이 남긴 말은 [논사록(論思錄)]에 기록돼 있다. 대표적인 것이 1567년 상주한 내용이다. “조광조와 이언적에게 일체 표창한다면 시비가 분명해지고 인심이 흥기할 것입니다.” 후일 정조 임금은 제왕학의 교과서 같은 [논사록]을 읽은 뒤 “지금 이 글을 탐독하면서 밤이 이미 깊고 촛불이 누차 바뀌는 것조차 깨닫지 못했으니, 야대(夜對, 임금이 밤중에 신하를 부르는 경연) 열 번보다 훨씬 나았다”고 했다.

월봉서원 입구의 달(月) 조형물


▎기대승의 저작이 담긴 [고봉집(高峯集)]. / 사진:진 광주광역시 광산구청
서원 유물전시관에 들렀다. 눈길을 끈 것은 퇴계 선생 묘갈명 탁본이다. 비석 4면과 함께 이수 문양까지 찍혀 있다. 알려진 대로 묘갈명은 퇴계 선생이 미리 써둔 자명(自銘)이 있고 그 뒤에 서(序)를 유언대로 고봉이 지었다. 퇴계와 고봉 두 사람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비석이다. 퇴계는 벼슬을 물러나며 선조에게 고봉을 학문하는 선비로 중용토록 천거한다. 퇴계는 그만큼 고봉의 학문을 인정했다.

고봉의 학문은 기호학파로 이어졌다. 고봉은 본래 기개가 대쪽 같고 주장은 예리했다. 그러면서 대신들과 대립하는 일이 잦았다. 결국 고봉의 정치 개혁 꿈은 이루어지지 못한다.

조순 부총리는 “고봉은 탁월하고 명확한 자질로 행동거지는 오직 도산(陶山, 퇴계)을 본보기로 삼았다”고 정리했다. 그는 조정에서 경륜을 펼 때도 오직 퇴계를 준칙으로 삼았다. 천품은 사람을 쉽게 용납하지 않았지만 퇴도(退陶)만은 기쁘게 따랐다. 퇴계 역시 고봉을 인정하고 스승의 자리를 사양했다. 고봉은 깊은 뜻이 담긴 글을 만날 때마다 퇴계에게 질문했으며, 다른 문인은 여기에 참여할 수 없었다.

월봉서원 입구에는 사칠이기 논변을 상징하는 달 조형물이 만들어지고 있다. 조선을 대표하는 두 지성은 나이와 지위, 지역을 넘어 치열한 논박을 하면서도 잠시도 인간적 겸허를 잃지 않았다. 극단의 논리로 대화와 타협이 실종한 시대, 우리에게 던지는 큰 울림이다.

[박스기사] 고봉의 학문적 철학 담긴 '주자문록' - 임란 때 일본에 탈취됐지만 극적으로 발견돼

고봉 기대승이 남긴 저술 중에 [주자문록(朱子文錄)]이란 게 있다. 1557년(명종 12) 고봉이 31세에 정리를 마친 방대한 100여 권 [주자대전]의 다이제스트라 할 수 있다. 퇴계 이황은 [주자서절요]를 남겼다. 당시에는 [주자대전]이 귀했다고 한다. 정병련 전남대 교수는 “고봉이 이 책을 하나하나 검토한 것은 후일 퇴계와의 논변에서 월등히 다른 논리적, 합리적 결론을 과감하게 도출하는 토대가 됐다”고 분석한다. [주자문록] 4책은 그 속에 고봉의 주장이나 말이 수록된 것은 아니지만 방대한 책에서 그가 발췌한 내용 그 자체가 그의 철학적 견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주자문록]은 기구한 운명을 거쳐 전한다고 한다. 기씨 족보 ‘대승’조에 따르면 [주자문록]은 정유재란 당시 왜구에 의해 탈취당해 일본 도서관에 소장돼 있었다. 고봉의 맏아들 기효증은 임진왜란 당시 창의해 군사와 군량미를 모았으며, 차남과 삼남은 정유재란 때 화를 당해 집안은 풍비박산 났다. 그 와중에 [주자문록]은 왜적의 손을 거쳐 일본으로 건너갔으리라는 추정이다. 그 뒤 용케도 아베 요시오(阿部吉雄)가 이 책이 일본 내각문고에 소장돼 있다는 사실을 알려왔다고 한다. 이후 13대손 기세훈은 이 책을 영인해 [고봉전서]에 부록으로 실을 수 있었다.

-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yeeho1219@naver.com

202304호 (2023.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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