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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덕현의 K컬처 톺아보기(14)] 쏟아지는 ‘여성향 콘텐트’의 인기 요인 

'더 글로리'부터 '퀸메이커'까지… 주체성·연대 서사로 여심 잡았다 

여성들 갈증은 시대마다 변해, 어떤 여성상 보여주느냐로 성패 갈려
최근엔 [나는 살아있다], [사이렌: 불의 섬] 등 몸 쓰는 콘텐트 눈길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퀸메이커]. [더 글로리]처럼 최근 여성 캐릭터를 전면에 세워 여성 서사를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는 콘텐트가 주목받고 있다.
여성들을 주 타깃으로 하는 콘텐트들이 쏟아져 나올 전망이다. 이른바 ‘여성향 콘텐트’ 경향은 시대에 따라 변주돼왔을 뿐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흐름이다. 이런 흐름은 왜 생겨났고, 현재는 어떻게 변주하고 있을까?

학교폭력에 대한 이슈를 끄집어내 사회적인 파장까지 불러일으킨 김은숙 작가의 [더 글로리]는 복수극 서사를 차용하고 있다. 즉 학교폭력 피해자인 문동은(송혜교)이 그의 온몸에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긴 가해자들을 하나하나 그만의 방식으로 복수해 나가는 이야기를 그렸다. 그런데 그 복수극에서 대결하는 양자인 피해자와 가해자가 모두 여성이다. 모든 학교폭력의 피해자들은 물론이고 가진 것 없어 보호받지 못하는 약자들의 대변자인 문동은이나, “연진아 나 너무 기뻐” 같은 유행어가 나올 정도로 남다른 악역 존재감을 드러낸 박연진(임지연)이 모두 여성 캐릭터다. 물론 이 드라마에도 문동은을 돕는 주여정(이도현)이라는 남성이 등장하고 그들 사이에 멜로 구도도 존재한다. 하지만 드라마 속에서 문동은과 주여정의 로맨스보다 더 주목되는 건 같은 여성들의 끈끈한 연대를 보여주는 문동은과 강현남(염혜란)의 워맨스(Woman Romance)다. 학교폭력을 당했던 문동은이나 상습적인 남편의 가정폭력 피해자인 강현남의 연대는 폭력적인 세상과 맞서는 같은 전선에 서 있다는 점 때문에 그 어떤 관계보다 강렬한 인상을 준다.

김은숙 작가가 그려온 주체적 여성들


▎김은숙 작가는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를 통해 비극적 현실에 맞서는 주체적인 여성상을 그려냈다. / 사진:연합뉴스
김은숙 작가만큼 여성을 중심에 두고 작품을 써온 작가도 드물다. 그는 [파리의 연인], [프라하의 연인], [연인]이라는 연인 시리즈로 스타작가로 떠올랐다. 드라마의 주 시청층인 여성들을 겨냥한 로맨틱 코미디를 일관되게 그려온 그는 그 후에도 [온에어], [시크릿 가든], [신사의 품격], [상속자들] 같은 작품들을 성공시켰다. 하지만 당시 작품들은 주로 여성들을 신데렐라 판타지로 그린다는 점 때문에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런 비판이 호평으로 바뀐 건 [태양의 후예] 이후에 보다 능동적으로 바뀐 여성 캐릭터들 때문이었다. [태양의 후예]의 전장에서 사투를 벌이는 의사 강모현(송혜교)이나 [쓸쓸하고 찬란하신 도깨비]에서 도깨비의 저주를 풀어주는 도깨비 신부 지은탁(김고은), [미스터 션샤인]에서 개화기 의병활동을 하는 고애신(김태리) 같은 여성 캐릭터들은 더는 남성들의 천거를 받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삶을 개척해가는 능동적인 여성들로 주목 받았다. 물론 [더 킹: 영원의 군주]에서 백마 탄 왕자님이 등장함으로써 또다시 비판 받았지만, 그 비판을 밑거름 삼아 새로 쓴 [더 글로리]를 통해 ‘역시 김은숙’이라는 호평을 만들어냈다. 이처럼 2000년대 초반부터 지금껏 맹렬히 활동하고 있는 김은숙 작가의 작품들을 들여다보면 콘텐트에서 여성향이 얼마나 일관된 흐름이었는가를 확인할 수 있다. 그를 지금까지 드라마 판의 중심에 서 있게 한 건, 그 일련의 작품들이 여성향 콘텐트였고 그래서 여성들의 선택을 계속 받아왔기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여성 소비자는 우리 대중문화 콘텐트가 태동하던 시기부터 늘 중심에 있었다. 대표적인 게 드라마다. 1950년대 최고의 히트작으로 꼽히는 [청실홍실]이 큰 인기를 끌 수 있었던 건 다름 아닌 여성과 가정주부들 덕분이었다. 삼각관계를 다룬 멜로드라마였던 [청실홍실]은 미망인을 등장시켜 동시대 여성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는데, 그 후로 멜로드라마와 결합한 신파극은 [아씨], [여로] 같은 대히트작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이들 신파극은 여성들을 주 소비층으로 끌어왔지만, 대부분 가부장적 체계 속에서 핍박 받는 여성들의 소극적인 토로에 머무는 한계가 있었다. 이렇게 된 건 당시 작가들이 한운사, 신봉승, 유호, 김동현, 이은성 등등 거의 남성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점에서 1972년 [새엄마]를 쓴 김수현 작가의 등장은 여성들이 겪는 삶의 애환을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여성 소비자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얻었다. 그 후 1980~90년대를 거쳐 가족 드라마와 멜로드라마가 주력 장르로 자리한 것 역시 여성 시청자들의 영향이 크다.

물론 남성이 주 시청층인 장르도 존재했다. 80년 대 방영된 [3840유격대] 같은 반공 드라마나 [조선왕조 5백년] 같은 사극, 또 90년대에 방영된 [여명의 눈동자], [모래시계], [제4공화국] 같은 작품들이 그 사례다. 2000년대 들어서도 [야인시대] 같은 시대극과 [태조 왕건] 같은 대하사극들이 남성향 드라마의 계보를 이었다. 하지만 이 같은 남성향 드라마에서도 여성 시청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멜로 서사는 빠지지 않았다. 예를 들어 [여명의 눈동자]의 여옥(채시라)과 최대치(최재성)의 절절한 사랑 이야기가 그랬고, [모래시계] 역시 태수(최민수)와 혜린(고현정)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가 빠지지 않았다. 게다가 전통적으로 사극은 여성보다는 남성을 주 타깃으로 삼기 마련이었는데, [대장금]부터 [동이], [선덕여왕] 같은 퓨전 사극들이 여성 사극의 문을 열었고, 그 후에 [해를 품은 달], [다모], [성균관 스캔들], [구르미 그린 달빛] 같은 여성향 팩션 드라마가 나왔다. 최근 방영된 [옷소매 붉은 끝동], [연모], [슈룹] 같은 사극들은 모두 이러한 여성향의 경향을 잘 보여준 작품들이다.

즉 드라마의 태동기부터 현재까지의 경향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처럼, 여성향은 최근에 갑자기 등장한 현상이 아니다. 한국전쟁 이후 가부장적 사회 속에서 콘텐트의 주 소비층이 여성들이었고, 그래서 그들이 마주한 현실의 갈증들을 콘텐트가 채워주는 건 그 성패를 가름하는 일이 됐다.

물론 앞서 김은숙 작가의 사례를 통해 이야기한 것처럼, 시대에 따라 여성들이 가진 갈증도 달라졌고 그래서 여성상도 변화했다. 예를 들어 신파극의 전통은 가부장제가 90년대까지도 계속 이어져 왔던 터라 꽤 오래도록 재현되곤 했다. [전설의 고향]의 구미호라는 캐릭터는 결국 남편의 배신으로 인간이 되지 못하고 승천하는 구미호의 이야기를 그렸는데, 그 상황에 대한 슬픔을 토로할 뿐 이렇다 할 행동을 취하지 않는 신파극의 정서를 재현했었다. 하지만 2010년에 로맨틱 코미디로 재해석된 구미호 이야기인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를 보면 발랄하고 능력까지 갖춘 구미호(신민아)가 주도적인 인물로 스토리를 이끌어나간다.

신파극에서부터 늘 중심에 있던 여성향


▎SBS 축구 예능 [골 때리는 그녀들]에 출연하는 정혜인이 4월 7일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한국과 잠비아의 여자 축구 대표팀 친선 경기 하프타임 때 승부차기 이벤트를 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90년대에 유행했던 [사랑을 그대 품안에], [질투] 같은 이른바 ‘트렌디 드라마’에서 여성들은 어떤 남성과 사랑이 이뤄져 결혼하느냐에 따라 신분 상승하게 되는 수동적 존재로 그려지곤 했지만, 2000년대 들어 [커피프린스 1호점]이나 [파스타] 같은 작품들은 사랑만큼 일이 중요한 여성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바리스타나 셰프 같은 직업군이 드라마에 중요한 요소로 자리했고, 이것은 로맨틱 코미디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본격화하면서 사랑이나 결혼만큼 일에서의 자기 성취가 중요한 여성들의 갈증으로 자리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시대에 따라 달라진 여성들의 갈증은 드라마 주력 장르의 변화만 봐도 알 수 있다. 드라마는 신파극 전통에서 가족드라마와 멜로드라마로 주력 장르가 옮겨갔고 최근에는 장르물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즉 신파극이 가부장적 체계 안에서의 여성들의 갈증을 다룬다면, 가족드라마와 멜로드라마는 가족과 개인이라는 여성들의 양면적인 삶에 투영된 갈증을 다뤘다고 볼 수 있다. 장르물은 가족보다 개인이, 사랑보다는 일이 더 중점적으로 다뤄진다는 점에서 현재 여성들의 관심사가 어디로 옮겨갔는가를 보여준다.

차별·편견 넘는 여성 서사 향해


▎MBC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은 이산 정조 시대의 이야기를 성덕임(이세영)이라는 주체적인 궁녀의 관점으로 보여줬다. / 사진:MBC
여성향은 늘 한국 콘텐트의 중심에 있었지만, 여성들이 차별과 편견을 넘어서는 서사를 그리기 시작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지난해 가장 큰 화제를 불러일으킨 작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같은 작품이 대표적이다. 이 작품은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변호사 우영우(박은빈)를 중심으로 노부부, 여성, 자폐장애인, 어린이, 성소수자, 중소기업인, 탈북민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이야기를 다뤘다. 즉 사회적 약자들과 연대하는 여성 서사를 그렸던 것이다. [옷소매 붉은 끝동] 같은 사극은 이산 정조 시대의 이야기를 성덕임(이세영)이라는 주체적인 궁녀의 관점으로 그렸고, [작은 아씨들]은 남성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던 누아르를 여성 버전으로 재해석해 내는 과감한 시도를 선보였다. 이런 흐름은 올해 정치판 여성들의 활약을 그린 [퀸메이커]로 이어졌다.

상대적으로 예능 프로그램 같은 경우 꽤 오래도록 남성 예능인 중심의 버라이어티쇼가 인기를 끌면서 여성이 설 자리가 마련되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그러던 것이 최근 몇 년 전부터 여성들을 중심에 세우는 프로그램들이 시도되고 있다. [노는 언니] 같은 여성 스포츠 선수들이 출연하는 프로그램이 등장했고, [골 때리는 그녀들]처럼 그간 소외됐던 여성 단체 스포츠를 본격적으로 다루는 축구 프로그램이 나왔다. [스트릿 우먼 파이터] 같은 여성 댄서들의 서바이벌 프로그램은 자극적인 대결 구도 속에서도 여성들의 끈끈한 동지의식을 보여줌으로써 여성 시청자의 응원과 지지를 받았다. [나는 살아있다]처럼 여성들이 몸으로 부딪치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최근 등장했으며, 올해 상반기 24인의 여성이 직업군별로 맞붙는 생존 전투 서바이벌 예능 [사이렌: 불의 섬]이 넷플릭스를 통해 방영될 예정이다.

여성향과 본격적인 여성 서사 사이에는 여전히 괴리가 남아있다. 하지만 늘 여성향을 그려왔던 그 일련의 흐름 속에서 여성 서사도 조금씩 진화해 왔다고 말할 수 있다. 여전히 콘텐트에 있어서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여성 서사가 적은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차별과 편견을 넘어서는 여성들을 다루는 콘텐트가 하나둘 시도되고 있는 건 그래서 중요하다. 그건 여성을 바라보는 관점들도 변화시키고, 나아가 보다 나은 사회를 향한 길을 열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 정덕현 - 대중문화평론가이자 칼럼니스트.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MBC 시청자 평가원, JTBC 시청자 위원으로 활동했다. 백상 예술대상, 대한민국 예술상 심사위원이며 SBS [열린TV 시청자 세상], KBS [연예가중계] 등 다양한 방송에 출연했다. 저서로 [숨은 마흔 찾기], [다큐처럼 일하고 예능처럼 신나게], [웃기는 레볼루션] 등이 있다.

202305호 (2023.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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