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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숙의 아트테크-컬렉터의 수장고를 열다(5)] 영은미술관 박선주 관장 

국내에서 처음으로 레지던시를 구축한 미술관 

작가와 평론가, 대중이 함께 하는 ‘살아있는(Living Art)’ 미술관
미술 참여 계층을 넓히고 문화를 선도해나가는 촉매 공간을 지향


▎영은미술관 전경 / 사진:영은미술관
미술 컬렉터는 작품을 구매할 때 개인적 특성에 따라 다양한 성향을 보인다. 그만큼 미술품을 수집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집이나 사무실 공간을 꾸미기 위해서, 투자를 위해서, 좋은 컬렉션을 갖추기 위해서…. 하지만 동기를 막론하고 미술 컬렉터가 되려면 예술가와 미술에 대한 애정, 그리고 좋은 판단력이 필요하다. 미술 컬렉터는 단순히 개인의 즐거움만을 위해 수집하지 않는다. 미술계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거나 미술시장을 형성하는 것도 작품 선정의 기준이다. 따라서 미술 컬렉터의 전시는 예술에 대한 그들의 사랑과 열정은 물론 미술계에 미치는 그들의 힘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는 기회가 된다.

영은미술관은 경기도 광주에 있다. 미술관 앞으로 경안천이 흐르고, 뒤로는 잣나무 군락이 조성돼 있다. 나지막한 언덕을 올라가면 탁 트인 전망이 나타난다. 꽤 큰 정원과 전시 공간, 레지던시가 있는 여러 채의 건물이 산자락에 자리해 있다. 잣나무숲에 둘러싸인 야외 잔디광장은 조각공원과 생태공원으로 나뉘어 있고, 자연과 어우러진 조각과 작은 계곡 사이에 위치한 설치작품들이 미감을 느끼게 한다.

미술관의 전시기능 더해 창작 스튜디오도 겸비


▎박선주 영은미술관 관장. / 사진:영은미술관
영은미술관이라는 이름은 설립자 고 이준영(1917~2007) 이사장과 아들 고 이상은(1940~1992) 회장의 이름 마지막 글자를 따서 지은 것이다. 전시장으로 들어서면 입구에 두 분의 흉상이 보인다. 흉상 사이에는 이준영 이사장의 회고록 [작게, 낮게, 강하게]에서 발췌한 “나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에 가난하고 잘 알지 못하는 것이 항상 마음에 걸렸다. 어릴 때 가난해 겪은 고생과 남들처럼 고등교육을 받지 못한 것은 내 마음속에 언제나 한으로 남아 있다. 내 일생의 마지막 사업을 후손들에게 남기고, 이 사업을 통해 한국 현대미술 진흥 발전에 기여하고 세계미술 속에 한국미술의 위상을 높이고 싶다”박선주 영은미술관 관장. 는 내용을 옮긴 글판이 서 있다. 박선주 관장으로부터 미술관 건립 초기의 이야기도 상세히 들을 수 있었다. 소학교조차 다니지 못한 이 이사장은 배움에 대한 한으로 후학을 위해 대학을 설립하고자 했을 때 미술 분야로 집중하며 교육과 연관된 방향으로 물색했다. 이 이사장은 초기 김영순 초대 영은미술관장과 전문가의 자문을 받아 일본의 레지던시 현장을 견학한 뒤 2000년 국내 사립미술관 최초로 레지던시를 갖춘 미술관을 개관했다.

미술관의 핵심은 이 이사장의 소장품이다. 1992년 대유문화재단 설립 당시부터 설립자가 컬렉션한 동양화와 도예 작품이 다수 있었다. 여기에 고 이성경 전 국립현대미술관장의 소개를 받아 김수근 건축가가 소장했던 작품도 일괄 컬렉션했다. 이들 작품은 영은미술관의 대표 소장품이다. 영은미술관은 설립 추진 과정에서 수집한 이들 작품을 포함해 82명 작가의 작품 119점을 지난해 22주년 기념 ‘영은미술관 컬렉션 회상(回想)전’에서 소개했다. 박 관장은 당시 도록 서문에서 “이번 전시는 근대의 산물인 뮤지엄(Museum)의 전시, 교육, 소장품이라는 세 가지 필수 요소 중 ‘소장품’을 상징하고 있다. 올바른 구조와 형식을 갖춘 수장고에 소장품을 안정적으로 보관하고, 이를 꾸준하게 연구하며 전시를 통해 대중에게 선보이며 그 가치를 공유할 수 있는 일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이 뮤지엄의 소장품이다. 1960∼2000년까지 시대순으로 기획한 전시로 영은미술관이 현대미술을 생산하고 보여주는 현대미술관(Museum of Contemporary Art)의 정체성에 대해 보여주고 있다”고 밝혔다.

당시 전시했던 작품 119점 중에는 국내 1세대 현대 도예가인 권순형, 황종례, 윤광조, 김익영, 원대정, 조정현, 이수종 도예가의 대표작품과 지금은 세계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1960~1970년대 단색화 작가들의 초기 주요 작품 중 박서보의 ‘유전질 1-68’(1968), ‘묘법 52-73’(1973), 이우환의 ‘무제’(1973), ‘From the point’(1977), 김구림의 ‘정물’(1977) 등 우리 미술사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 작품들이 포함됐다. 그리고 한국화 컬렉션에서 허백련, 장우성, 송수남, 변차섭, 김차섭, 윤중식 등과 해외 작가 크리스티안 볼탄스키의 작품이 컬렉션의 소장 가치를 높였다.

영은미술관 건물은 서울올림픽선수촌·제주월드컵경기장 등을 설계한 황일인 건축가가 설계해 2001년 한국건축문화대상에 입선했다. 미술관 부지 총면적은 약 8만1000평으로 미술관과 레지던시 작가들을 위한 스튜디오·연구동 등이 자리 잡고 있다. 미술관은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로 3개 전시장과 세미나실·자료실·강의실 및 평면 스튜디오로 구성돼 있다. 중심 건물은 미술관과 스튜디오 시설로 구분돼 두 기능이 상호 분리됐으면서도 호환될 수 있도록 독특한 구조로 설계됐다. 2000년 11월 개관한 영은미술관은 우리 시대 현대미술 작품을 연구·소장·전시하는 현대미술관(museum of contemporary art)이다. 국내 초유의 창작 스튜디오를 겸비한 복합문화시설로 미술품의 보존과 전시에 초점을 맞춘 과거의 미술관 형태를 과감히 탈피했다. 미술관 자체가 창작의 현장이면서 작가와 평론가, 기획자, 대중이 함께하는 살아있는 미술(Living Art)의 장을 지향한다. 또한 종합미술문화단지를 목표로 조형예술·공연예술 등 다양한 형식과 내용의 예술을 수용하고 창작·연구·전시·교육·서비스 등의 복합적 기능을 수행함으로써 참여 계층을 개방하고 문화를 선도해나가는 문화 촉매 공간이 되기를 지향한다.

박 관장은 설립자인 이 이사장의 며느리로 음악을 전공했다. 그럼에도 박 관장은 미술을 좋아해 미술관과 전시장을 자주 찾아 다녔다. 첫 컬렉션이 지난해 작고한 방혜자 작가의 작품이었다. 방 작가의 ‘빛의 탄생’(2002)이라는 작품을 처음 대면했는데, 무엇에 이끌리듯 계속 머릿속에 머물러 컬렉션을 결정했다. 그 후 2002년 미술관장직을 맡으면서 본격적으로 미술 공부를 시작했다. 홍익대에서 예술기획을 전공한 후 석사 논문까지 마쳤다. 현장의 경험과 학업이라는 튼튼한 바탕을 갖추고 현재까지 전문경영인으로 미술관을 운영하고 있다.

영은미술관은 탄탄한 기획에 따른 전시뿐 아니라 레지던시를 통해 예술인을 키우는 미술관으로서 더욱 특별하게 운영된다. 레지던시 입주 작가는 기간에 따라 장기 입주(2년 기준) 작가는 YAMP(Youngeun Artist Management Program), 단기 입주(6개월~1년) 작가는 YAFP(Youngeun Artist Family Program)로 구분된다. 장기와 단기를 합쳐 1기부터 현재 입주하고 있는 12기까지 250여 명의 작가가 거쳐 갔다. 국내외 신진작가부터 중견·원로작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가를 대상으로 하는 레지던시는 깨끗한 자연환경에 둘러싸인 최적의 창작 환경을 제공하고 상호 소통과 협력을 유도해 ‘아티스트 커뮤니티’를 넘어 지역문화 발전에 공헌하고자 한다.

설립자의 유업(遺業) 따라 물심양면 작가 지원


▎김구림, 정물. 128x94㎝, 캔버스에 유채, 1977(좌측) 방혜자, 빛의 탄생. 135.5x110㎝, 펠트 위의 자연채색. 2022(우측) / 사진:영은미술관
‘현대 미술관’과 ‘창작 스튜디오’로서의 기능을 동시에 지닌 영은미술관은 미술계의 국제적 유망주로 주목받는 입주작가들의 뛰어난 전문성을 적극 활용해 전시 외에 체험·아카데미 등 다채로운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운영하며, 지역 작가들과 시민·소외계층·다문화가정과 함께 성장해가고 있다. 특별한 사례로는 10년 이상 레지던시 소속으로 거주한 작가도 있다. 대표적 사례가 방혜자 작가다. 프랑스와 한국을 오가며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방 작가는 2기로 입주한 후 매년 5~6개월은 레지던시에 거주하며 작업에 매진했다.

지난해 안타깝게 고인이 된 방 작가와 박 관장의 인연은 각별하다. 방 작가가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동안 두 사람은 전화로 작품 활동과 작업 계획의 내용을 교류했다. 이 같은 신뢰 아래 2019년 방 작가의 제안에 따라 ‘방혜자 - 빛에서 빛으로’ 전시를 개최했다. 2022년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에도 방 작가는 역작으로 샤르트르대성당 스테인드글라스 작업을 하는 중이었다. 귀국할 수 없는 상황에서 방 작가는 장시간의 국제 통화로 작업 상황을 자세히 전했다. 18년여 다져진 방 작가와 미술관의 상호 믿음의 결실이었다. 당시 방 작가의 진실한 태도에 박 관장은 감동했다. 이런 깊은 인연으로 영은미술관 컬렉션에는 방 작가의 작품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박 관장은 레지던시 작가를 선정할 때 “이 공간이 제일 필요한 작가가 와야 한다. 어느 한 작가의 미술관이 되면 안 된다”는 것을 신조로 한다. 입주 작가를 거쳐 간 작가들의 전시회에 찾아가면 종종 입주 당시의 에피소드를 건네는 작가들이 있다. 한 여성작가는 물감 구입할 돈도 없을 정도로 생활고로 힘들 때 레지던시가 마지막 작업 활동의 무대라는 생각으로 열심히 작업했다고 한다. 그런 상황에서 안정된 작업실 덕분에 힘든 시기를 극복했고 그 후 탄탄한 중견작가로 활동 중이다. 이 여성작가는 그 후 다른 전시장에서도 “나로 하여금 그림을 계속 그리게 한, 인생의 가장 중요한 공간이었다”고 말했다. 2003년 3기 작가로 입주한 김아타 사진작가는 미술을 전공하지 않은 공과대학 출신이다. 지금은 국내외에서 유명작가로 활동하지만 당시에는 미술계에 이름이 알려지기 전이었다. 김 작가 역시 “영은미술관은 제작품활동의 발판이 됐다. 제 인생에서 중요한 공간이다”라고 밝힌 바 있다. 박 관장이 가장 보람을 느끼는 순간이다. 이렇게 몇 작가의 사례만 들어봐도 영은미술관 레지던시는 작가들의 작품활동에 많은 도움을 주는 공간임이 틀림없다. 영은미술관 레지던시 입주 작가 선정 장르는 입체와 평면의 비율이 동일했으나 최근 들어 회화의 비중이 조금 커졌다.

영은미술관의 전시 기능 또한 탄탄하다. 4개의 전시장 외에 2개의 특별 공간에 2023년 연간 일정도 밀도 있게 구성돼 있다. 제1전시장은 특별기획전을 개최하는 곳으로, 현재 ‘김영원 - 한국의 네오모더니스트 : 氣오스모시스 조각과 회화전’이 열리고 있다. 유명 원로 조각가의 미발표 작품을 과감하게 전시할 수 있는 것은 한국국제아트페어 전시장에서 김 작가의 작품이 박 관장의 눈에 들어서다. 아트페어 후 박 관장은 바로 김 작가의 작업실을 방문했고 이후 전시가 이뤄졌다. 김 작가는 1994년 제22회 상파울루 비엔날레에서 명상을 통한 기 조각과 퍼포먼스로 주목받았다. 이번 전시는 국내에서 기공 명상 회화와 조각을 대대적으로 발표하는 의미 있는 전시다.

오픈 스튜디오 운영으로 창작 이전 과정도 전시

이 밖에 제2전시장에서는 장기 입주 진민욱 작가의 전시, 제4전시장에서는 단기 입주 정영한 작가의 전시가 개최 중이다. 레지던시에 입주한 작가들이 심혈을 기울여 창작한 작품을 전시로 볼 수 있어 레지던시 공간이 더 궁금해진다. 입주 기간 동안 오픈 스튜디오도 개최한다. 이 기간에 맞춰 둘러본다면, 작가들이 창작에서 전시까지 작품 제작의 전 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조각공원에는 비입주 작가 중 기증받은 도흥록 조각가의 작품 37점이 전시돼 있다. 도 작가는 현재 영은미술관의 명예 작가로 활동 중이다.

이처럼 영은미술관은 전시 기능과 레지던시 운영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여준다. 여기에 더해 판화·도예공방과 자료정보센터 등도 마련해 작가들의 작품활동은 물론 지역사회와 연계된 프로그램도 활발하게 운영한다. 영은미술관 고유의 교육 프로그램도 다채롭게 진행 중이다. 그중에서도 박 관장은 특히 레지던시를 중히 여긴다. ‘작가들만 남는다’는 영은미술관 설립자의 정신을 박 관장은 잊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작품 컬렉션도 주로 레지던시에 입주했던 ‘우리 작가들’의 작품을 주로 한다. 입주 기간이 끝난 후에도 한 번 인연을 맺은 작가들을 잊지 않고 그들의 활동을 지켜보며 조용히 응원하는 박 관장의 마음이 잔잔한 감동을 안겨준다.

※ 정영숙 - 갤러리세인 대표. 전 현대백화점 현대아트갤러리 수석큐레이터. 홍익대 미술대학원에서 예술기획을 전공했으며, 추계예술대 대학원에서 문화예술행정경영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기도 여주시 명장심사 도예파트 자문위원이며 ㈔한국지역문화학회 감사로 있다. 대학과 기업에서 미술시장과 투자 등을 강의하는 한편 미술비평 등 글쓰기와 컬렉터 인터뷰를 병행하고 있다.

202305호 (2023.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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