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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호의 상해임정 27년사(14)] 외교 노선 충돌에서 빚어진 이승만과 이동휘의 대립 

대통령 이승만, 모스크바 특사로 이희경을 지명하다 

이동휘의 독단적 밀사 파견에 불만 고조된 상해임정
권한 무시당한 이승만, 상해임정 기강 세우고자 출국


▎1948년 5월 31일 서울 세종로 중앙청 회의실에서 이승만(가운데) 당시 의장이 제헌국회 개원사를 하고 있다.
[안창호일기]에 의하면 군무차장 김희선이 1920년 5월 31일 안창호를 방문했다. 김희선은 먼저 상해임정 현안을 질문했다. 뒤이어 “화부(華府)로서 이희경(李喜儆)을 모스크바 정부에 특파로 송(送)하는데 정부로 대표의 임명장을 수여(修與)하기를 요구한다”는 말을 했다.

위에 언급된 화부(華府)는 워싱턴이다. 워싱턴은 한자로 화성돈(華盛頓)으로 표기되기 때문이다. 당시 워싱턴에는 구미위원부가 있었기에 화부(華府)는 워싱턴 구미위원부를 지칭하기도 한다. 구미위원부 의장은 김규식, 실제 책임자는 대통령 이승만이었다. 따라서 이희경을 소비에트 러시아 특사에 지명하고 상해임정에 그 임명장을 요구한 주체는 대통령 이승만이라 할 수 있다.

워싱턴 구미위원부는 상해임정의 외교 업무를 총괄하는 곳이었고, 구미위원부의 최고 책임자는 대통령 이승만이었다. 그러므로 대통령이 모스크바 특사로 이희경을 지명하고, 그의 임명장을 상해임정에 요구한 것은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었다. 국무회의에서 논의하고 시행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군무차장 김희선이 이 소식을 개인적으로 안창호에게 알린 이유는 그렇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상해임정은 대통령 모르게 소비에트 러시아 밀사 한형권을 파견한 상황이었다. 물론 총리 이동휘 독단으로 이뤄진 일이었지만 안창호 등은 묵인하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을 모른 채 대통령이 모스크바 특사로 이희경을 지명하고 상해임정에 임명장을 요구했으니, 우선 총리 이동휘가 곤란한 상황이었다. 그 외 한형권 밀사를 묵인하고 있는 안창호 등도 곤란한 상황이었다. 자칫 이 문제는 구미위원부의 대통령과 상해임정의 총리 사이에 크나큰 쟁점거리가 될 수 있었다. 대통령은 자신의 권한이 무시됐다고 분개할 것이고, 총리는 자기 재량으로 그 정도도 못하느냐고 반발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김희선이 우선 안창호를 찾아와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지 물은 것이었다.

모스크바 특사 이희경을 국무회의 안건으로 상정


▎1920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제2차 대회의 모습. 한인사회당 중앙위원을 지낸 사회주의 운동가 박진순(오른쪽 셋째)이 참가했다. 박진순 옆에는 레닌이 앉아 있다. / 사진:레닌 사진집
안창호라고 해서 뾰족한 대책이 있을 리 없었다. 안창호는 “국무원에 제언(提言)하는 것이 호(好)하겠다”고 대답했다. 모스크바 특사 이희경 문제를 국무원 회의에 정식안건으로 올려 공개 토론하자는 뜻이었다. 이에 따라 국무원 회의에 모스크바 특사 이희경 문제가 정식안건으로 올려졌다. 그때 구체적으로 어떤 토론이 벌어졌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다만 [안창호일기]의 “이 대통령에게 전(電)해 모스크바에 대표파송(代表派送)하는 여부를 문(問)하고, 상해에서 이미 대표를 파송했다는 것을 알게 하다”는 기록을 통해, 이승만으로 하여금 이희경 특사를 포기하게 함으로써 상황을 마무리하자는 토론이 있었을 것으로 이해된다. 아마도 이런 토론은 총리 이동휘 측이 주도하고, 안창호와 이동녕 등은 조용히 상황을 마무리하고자 동의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이승만이 상해임정 의도대로 반응할지는 미지수였다. 이승만은 상해임정에서 이미 모스크바 밀사를 파견한 사실을 존중하고 안창호처럼 묵인할 수도 있었다. 이승만의 개성이 타협적이고 유약하다면 그럴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이승만이 자신의 권한이 침해됐다고 느끼며 상해임정의 기강을 잡고자 공격적으로 나올 수도 있었다. 이승만의 개성이 원칙적이고 강력하다면 그렇게 할 수도 있었다. 상해임정의 전보에 이승만이 어떻게 반응했는지는 1920년 6월 16일 상해임정에 도착한 전보 내용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 내용이 [안창호일기]에 이렇게 기록돼 있다.

“정무협회(政務協會·국무회의)에 출석하니 화부(華府)에서 래(來)한 이 대통령 전(電)에 했으되, ‘아국(俄國) 밀사는 하인(何人)을 송(送)하였느냐?’ 문(問)함과 구미 외교에 관한 사(事)는 자기를 부지(不知)케 하고는 행치 말라 했는지라. 차(此)에 대해 대통령에게 사실을 고하고 구미 외교에 일치 행동케 하자 복전(覆電)하려 했더니, 총리는 대통령과 일체 교섭을 단절하겠다 하는지라. 여왈(余曰), ‘정체상(政體上)에 여차(如此)히 하면 대불가(大不可)’라 하다.”

위의 짤막한 기록은 상해임정 전보를 받은 대통령 이승만이 어떤 마음이었는지, 또한 위와 같은 대통령의 전보를 받은 후 안창호와 이동휘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음을 압축적으로 알려준다. 이승만은 대통령인 자기 모르게 파견한 모스크바 밀사는 인정할 수 없다는 뜻이 확고했다. 즉, 미국·영국·프랑스는 물론 러시아를 포함한 모든 구미 외교는 자신의 권한이기에 절대로 양보할 수 없다는 것이 대통령의 마음이었던 것이다.

상해임정의 독단적 밀사 파견에 이승만 분노


▎이승만은 1920년 상해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을 맡았다. 사진은 1920년 12월 28일 이승만의 부임 환영식.
그 마음은 1920년 8월 17일 이승만이 상해의 장붕(張鵬)에게 보낸 서한에서 “자기들은 노(露) 정부와 교섭한다고 하여 인원을 파송하며 아(我)에게 문의한 적도 무(無)하더니, 궐후(厥後)에 아(我)가 이희경을 밀송해 상해로 가서 상의(相議) 전왕(前往)하라 한 것을 어떻게 알았던지 전보로 질문해 불평한 의사를 발표한지라. 제(弟)는 차등(此等) 사(事)에 소욕관론(小欲關論)이고 함묵(含默)하고 지내나, 각원(閣員)의 지위에 처해 여시(如是)히 행동을 하면 민국대사(民國大事)에 내하(奈何)오”라고 한 언급에 잘 드러나 있다.

즉, 이승만은 상해임정 전보를 받고, 자신의 권한이 무시됐다는 마음과 함께, 그대로 있으면 상해임정의 국가 기강이 엉망진창이 될 것이라는 마음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승만은 상해임정에서 누구를 러시아 밀사로 파견했는지 물으면서, 구미 외교에 관한 일은 자신 모르게 추진하면 안 된다는 답전을 보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승만의 답전은 기왕의 한형권 밀사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이 지명한 이희경을 새로 파견하겠다는 선언이나 같았다.

만약 이승만이 정말로 이희경을 소비에트 러시아 특사로 파견한다면 가장 곤란한 사람은 이동휘였다. 자신이 파견한 한형권 밀사는 절차상 문제가 있고, 그래서 정식 사절이 아니라는 사실이 폭로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되면 소비에트 러시아의 레닌 정부는 한형권을 대한민국의 특사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고, 그것은 곧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국제적으로 신뢰를 잃고 망신당하는 것이나 같았다.

이런 사태를 막기 위해 안창호는 “대통령에게 사실을 고(告)하고 구미 외교에 일치 행동케 하자 복전(覆電)”할 것을 제안했다. “대통령에게 사실을 고(告)”하자는 것은 결국 총리 이동휘가 한형권을 독단으로 파견한 사실을 알리자는 것이고, “구미 외교에 일치 행동케 하자”는 것은 비록 총리가 독단으로 밀사를 파견했지만, 어쨌든 대한민국 총리 명의로 밀사를 파견했으니 정부 체면을 보아 대통령이 별도의 특사를 보내지 말게 하자는 의미였다.

이는 안창호가 사실을 알린다면 이승만이 대의를 위해 참을 것이라 기대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그동안 조용히 묵인해왔던 이동휘의 독단적 밀사 파견을 공론화함으로써 이동휘가 더 이상 그런 일을 반복하지 못하게 하려는 뜻도 있었을 것으로 이해된다. 안창호뿐만 아니라 이동녕, 이시영 등도 이동휘의 독단적 밀사 파견에 큰 불만을 갖고 있었다. 예컨대 1920년 5월 20일 이동녕과 이시영은 안창호를 방문해 이동휘의 독단적 밀사 파견을 성토하며 사직하겠다고 한 적이 있었다. 이런 상황들을 고려해 안창호는 “대통령에게 사실을 고(告)하고 구미 외교에 일치 행동케 하자”고 제안했던 것이다.

그러나 안창호의 제안에 이동휘는 “대통령과 일체 교섭을 단절하겠다”며 격렬하게 반발했다. 그 말은 결국 한형권 밀사 파견 사실을 알리지 않겠다는 의미이자, 이승만의 모스크바 특사 추진 자체도 무시하겠다는 것이나 같았다. 그런 이동휘의 행동은 상해 임시정부의 법과 절차를 무시하면서 엉뚱한 생트집으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려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 국무회의에서 안창호와 이동휘 등 국무위원 사이의 논쟁이 구체적으로 어떠했는지는 1920년 6월 18일 안현경이 이승만에게 보낸 서한에 잘 나타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궁지에 몰리자 총리직을 사직해버린 이동휘


▎하버드대 석사과정 재학 시절의 이승만(뒷줄 맨 왼쪽)과 그의 급우들. 가운데 앉은 인물은 브라운대에서 초빙한 국제법 담당 객원교수 윌슨이다.
“(전략) 일전에 아라사(러시아) 대표사건으로 전보가 온 것을 가지고 이동휘는 대불평(大不平)이 발했는데, 그 이유로 말하면 전일에 자기 사람을 아라사에 밀파해 자기 뜻대로 범사를 교섭했다가 기회가 있는 대로 아령 세력을 자기가 잡고자 하던 터이더니, 시방 또 정부 명의로 워싱턴서 대사(大使)를 보낸다고 하면 자기 경영은 다 와해될 뿐인 고로 그 전보를 가지고 국무회의에서 의론을 하다가 각 총장들과 의견이 충돌됐는데, 그 사연은 각 총장이 말하기를, ‘우리가 정식으로 작정해 대사(大使) 보낼 일을 워싱턴으로 위임하자’ 한즉 이동휘 말하기를, ‘구미 외교라는 것이 다 썩은 외교인데 또 무슨 일을 위임하고자 하느냐’고 불미(不美)한 말을 하는 고로 안창호씨가 말하기를, ‘우리가 이승만씨 내각으로 있어서 그 대통령이 잘못하는 일이 있으면 서로 권고해 일을 하거나 만약 그렇지 않으면 차라리 사직을 하고 나가는 것은 가하되 국무총리에 지위로서 사석이나 공석에서 대통령 험담이나 욕설을 발하는 것이 합당치 않다’고 했더니 이동휘 말하기를, ‘나는 그 대통령 밑에서 일 안 하겠다’고 별별 잡설을 하는 고로 신규식씨는 이동휘와 대언전(大言戰)이 됐으며 근일(近日)에 각 총장들이 국무총리와 시비가 매우 큰 모양이요. 만약 이 일이 잘 타협되기를 희망키 불능(不能)한 바 앞일이 막막하외다(하략).”

위의 서한에 의하면 1920년 6월 16일 국무회의에서 각 총장은 “우리가 정식으로 작정해 대사(大使) 보낼 일을 워싱턴으로 위임하자”고 주장했다. 위의 각 총장은 내무총장 이동녕, 재무총장 이시영, 법무총장 신규식을 지칭한다. 그들 세 총장은 모스크바와의 외교 문제를 워싱턴에 위임하자고 주장했는데, 그것은 기왕의 한형권 밀사를 취소하고 이희경 특사를 파견하자는 뜻이었다. 세 총장이 그런 주장을 한 이유는 이동휘의 독단적 밀사 파견에 대한 불만 때문으로 이해된다.

모스크바 특사로 지명된 적십자회 초대 회장 이희경


▎경무대 뜰에 앉아 있는 이승만. / 사진:e영상역사관
그런데 세 총장의 말대로 될 경우 이동휘는 정치적·외교적 측면에서 궁지에 몰릴 수밖에 없었다. 상해임정의 절차와 규정을 무시하고 총리 직위를 남용했음이 드러나는 것은 물론 한형권 밀사까지 취소되면 레닌 정부로부터 신용을 잃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이동휘는 정치적·외교적으로 사망하는 것이나 같았다. 그래서 이동휘는 세 총장의 말에 결사반대하면서 이승만을 온갖 말로 헐뜯었다고 이해된다.

그런 험담을 듣다 못 한 안창호가 “차라리 사직을 하고 나가는 것은 가하되 국무총리에 지위로서 사석이나 공석에서 대통령 험담이나 욕설을 발하는 것이 합당치 않다”는 말까지 했을 것이다. 이런 내용들을 본다면 6월 16일 국무회의에 참석했던 안창호, 이동녕, 이시영, 신규식 등은 대통령의 모스크바 특사 파견에 찬성이었고, 오직 이동휘만 반대였음을 알 수 있다. 이동휘는 애초에 절차와 규정을 무시한 잘못에 더해, 그렇게 잘못한 문제가 공론화됐을 때 막무가내 태도를 보임으로써 인심을 더 잃었다고 이해된다. 결국 이동휘는 1920년 6월 18일 사직서를 제출했고 6월 23일 웨이하이(威海)로 가버렸다. 상황이 워낙 궁색해지자 일단 모면하기 위한 도피였다.

그런데 이승만이 러시아 특사로 지명한 이희경은 1919년 8월 29일 상해에서 복설(復設)된 대한적십자회 초대 회장이었다. 본래 대한적십자회는 1905년 10월 창설됐지만 1909년 7월 일본적십자회에 흡수·통합되면서 사라졌다. 이런 상황에서 안창호는 상해임정 명의로 대한적십자회를 복설했는데, 그 이유는 적십자회를 통해 동포들을 구제하는 한편 독립전쟁에서 발생할 사상자들을 치료하고 또 의연금 명목으로 정부 재정을 보충하기 위해서였다. 특히 안창호는 간호사 양성의 필요성을 고려해 대한적십자회를 복설했다. 그런 안창호에게 적극 협조한 인물들이 바로 초대 회장 이희경을 비롯해 김순애, 이화숙 등 상해의 대한애국부인회 여성들이었다.

초대 회장 이희경은 평안도 출신으로 미국에서 의학을 공부한 의사였으며 3·1운동 후 상해로 왔다. 대한적십자회 복설 직후, 이희경은 적십자회 조직 확대 및 의연금 모금을 위해 1919년 9월 미국으로 갔다. 조규태 교수의 [미주지역 한인의 적십자 조직과 민족운동]에 의하면, 이희경은 미국 각지에 대한적십자회 지부를 설치했으며 10만 달러 의연금도 모금했다. 특히 1919년 12월에는 샌프란시스코에 대한적십자회 북미지방총회 북미지부를 설치하고 1920년 7월까지 그곳에 머물며 조직 확대 및 의연금 모금 활동을 벌였다. 이렇게 모금된 의연금으로 상해 적십자회본부에 설치된 간호원양성소가 차질 없이 운영될 수 있었다.

한편 구미위원부에서 이승만의 비서로 일했던 임병직의 [임정에서 인도까지]에 의하면, 구미위원부 사무실은 워싱턴 14번가 콘티넨털(continental) 빌딩에 있었다. 또한 이승만의 개인 공관은 워싱턴 매사추세츠 거리(Massachusetts Avenue)에 있었으며, 그 공관에서 대통령뿐만 아니라 서재필, 김규식, 노백린 등이 함께 거주했다. 그들의 일상생활은 이승만의 수양딸이자 비서 역할을 하던 김노디(Nordie Kim)양이 맡아서 돌보았다. 대통령 공관에서는 간혹 간소한 파티도 열어 한국독립을 돕는 미국의 명사들을 초청하곤 했는데, 당시 윌슨 대통령의 큰딸도 그런 명사 중 한 명이었다.

상해임정 기강 잡고자 워싱턴에서 출발한 이승만

[이승만일기]에 의하면 당시 이승만은 구미위원부 사무는 의장 김규식에게 맡기고 자신은 순회강연과 외교활동에 전념했다. 예컨대 이승만은 뉴욕 전역의 순회강연을 위해 1920년 1월 10일 워싱턴을 떠났다가 1월 15일 귀환했다. 또한 사우스캐롤라이나와 조지아 등의 순회강연을 위해 3월 7일 워싱턴을 떠났다가 3월 11일 귀환했다. 뒤이어 시카고와 덴버 순회강연을 위해 3월 17일 워싱턴을 떠났다가 3월 28일 귀환했다.

이처럼 미국 전역을 대상으로 순회강연과 외교활동에 몰두하던 이승만은 5월 14일 오후 8시 워싱턴에서 출발해 아이오와주의 디모인(Des Moines)으로 갔다. 당시 한인구제회의 서기 신마실라(申麻實羅)가 대통령을 수행했다. 신마실라는 이화학당 제1회 졸업생으로 미국에 유학 왔으며 대한적십자회 활동에도 열심이었다. 이승만과 신마실라는 디모인·시카고·디트로이트·클리블랜드를 거쳐 5월 28일 워싱턴으로 귀환했다. 그리고 3일 후인 5월 31일 “이희경(李喜儆)을 모스크바 정부에 특파로 송(送)하는데 정부로 대표의 임명장을 수여(修與)하기를 요구한다”는 전보가 상해임정에 도착했다. 이런 사실로 본다면 대통령이 이희경을 모스크바 특사로 지명한 시점은 5월 14일부터 5월 28일 사이의 순회강연 때로 이해된다. 신마실라는 이희경과의 자연스런 만남을 위해 동행했을 것이다.

이승만은 이희경을 모스크바 특사로 지명하고 그 사실을 상해임정에 알렸지만, 이미 상해임정에서 모스크바 밀사를 파견했다는 답전을 받았다. 이에 이승만은 “구미 외교에 관한 사(事)는 자기를 부지(不知)케 하고는 행치 말라”는 전보를 보냈고, 그것이 6월 16일 상해임정에 도착했다. 따라서 그 전보는 6월 16일 이전 워싱턴에서 보냈다고 이해되는데, 아마도 6월 12일 전후 보냈을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6월 12일에 이승만이 워싱턴을 떠났기 때문이다. 이번은 일반적인 순회강연이 아니라 상해를 목표로 했다. 이승만은 모스크바 특사 문제를 겪으면서 상해임정의 기강을 바로잡아야 할 필요를 느꼈던 것이다. 바야흐로 상해에서 이승만과 이동휘의 정면충돌이 다가오고 있었다.

※ 신명호 - 강원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202305호 (2023.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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