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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석의 19세기 미시사 탐구(3)] '춘향전'에도 등장하는 조선시대 흡연 풍습 

17세기 초 일본에서 들어와 조선을 통째로 삼킨 담배 

춘향이 이도령에 대접한 ‘금광초’… 신분 따라 담뱃대 길이도 달라
양반은 물론 부녀자들도 중독… 어린이가 어른과 맞담배 피우기도


▎풍속화가 신윤복이 그린 ‘연소답청(年少踏靑)’. 남녀 세 쌍이 행락길에 나선 가운데 한량이 기생에게 담뱃대를 건네고 있다.
오래전 개봉한 영화 ‘마음의 행로(Random Harvest)’는 제1차 세계대전 중 부상으로 기억상실증에 걸린 한 군인이 기억을 다시 회복하는 내용의 멜로 드라마다. 주인공이 기억을 찾은 계기는 담배와 관련이 있다. 지나가다 우연히 들어간 담뱃가게임에도 불구하고 언제가 들른 적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 서서히 잃었던 기억을 되찾게 된다. 물론 여자 주인공의 헌신적 노력이 그 뒤에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기억상실증은 영화나 드라마 소재로 지금도 여전히 쓰이고 있다. 반면 과거 소도구로 빠지지 않았던 담배는 이제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기 어렵다. 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영화라면 담배를 피우는 장면이 나와도 문제가 없는 것 같은데, 그렇지 않은 작품에는 담배 피우는 장면은 넣을 수 없게 된 모양이다. 옛날 영화나 드라마를 방영할 때도 담배 피우는 장면은 ‘모자이크 처리’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담배가 설 자리가 점점 더 줄어들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제 길거리에서 모르는 사람에게 담뱃불을 빌리는 풍경은 흔하지 않다. 빌딩 사이 어두컴컴한 공간이나 후미진 거리 구석에서 뭔가 못 할 짓을 하고 있는 것 같은 흡연자들의 모습을 보면 현재 사회에서 담배가 차지하는 위상이 무엇인지 충분히 알 수 있다.

20세기 초까지 어린아이들도 피웠던 담배


▎조선 후기 긴 담뱃대는 신분 높은 사람이 사용한 반면 지체가 낮은 사람은 짧은 담뱃대를 썼다. 사진은 백동으로 만든 고급 담뱃대 ‘백동연죽’. / 사진:문화재청
조선시대에 담배는 여러 가지 명칭이 있었다. 초기에는 남쪽에서 온 신령스러운 풀이라는 의미의 ‘남령초’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남쪽에서 전해졌다는 의미로 ‘남초’라고도 했다. 연기가 나는 풀이라는 의미의 ‘연초’도 많이 쓰였다. 담배는 전국적으로 재배했으므로, 각 지방의 지명 뒤에 풀 ‘초(草)’자를 붙여 생산지를 표시했다.

잘 알려진 대로 담배의 원산지는 아메리카 대륙이다. 15세기 말 콜럼버스가 유럽으로 가져갔고, 16세기 말 유럽인이 일본에 전했으며, 17세기 초 일본에서 조선에 들어왔다고 한다. 17세기 초 중국 남쪽 지방으로 전해졌다는 기록도 있다. 담배는 동아시아 모든 지역에서 폭발적 인기를 끌었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삽시간에 유행하게 된다.

담배의 중독성은 조선에도 잘 알려져 있었다. 담배가 들어온 초기 기록에도 “담배의 해독을 알고 이를 끊으려 해도 끊을 수 없다”는 말이 보인다. 담배를 ‘요망한 풀’이라는 의미의 요초(妖草)로도 불렀던 이유다. 조선에서는 담배가 전해진 지 5년 정도 지나 전국적으로 크게 유행했다. 급기야 아이들까지도 담배를 피우게 된다.

정조 임금의 총애를 받았던 당대 최고 지식인 이덕무는 어린이 교육에 관한 글에서 담배의 폐해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어린아이가 담배 피우는 것은 좋은 행실이 아니다. 연기에 찌들어 골수와 혈기가 마르며, 독한 진액으로 책이 더러워지기도 하고 담뱃불로 의복을 태우기도 한다.”

이덕무는 어린이가 어른과 맞담배를 피우는 문제도 지적했다. 그의 글을 통해 18세기 후반 조선에서는 어린이들도 담배를 피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9세기 초 한치윤이 지은 <해동역사>에도 “높은 벼슬의 양반들부터 부녀자나 어린아이 그리고 종까지도 모두 담배를 즐기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적혀있다. 17세기 중반 조선에 표류했다가 탈출한 헨드릭 하멜의 <하멜표류기>에도 “조선에서는 4~5세 아이들도 담배를 피운다”고 했으니, 담배가 조선에 들어온 후 어린아이들도 줄곧 담배를 피웠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이 빌려준 돈을 갚자는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난 1907년에는 국채를 갚기 위해 금연을 촉구하는 글이 잡지에 실리기도 했다. 이 글에서 이규영은 담배의 해로움을 논하면서 “우리나라에는 남녀, 노소, 상하, 빈부의 모든 사람이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이 드물다”고 했다. 그러니 담배를 끊고, 그 돈을 모아 나라 빚을 갚자고 호소했다. 20세기 초 조선에서도 여전히 어린아이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던 것이다.

영국 성공회 의료선교사로 주로 제물포 지역에서 활동했던 랜디스(E. B. Landis)는 1898년 미국 민속잡지에 한국 동요 몇 편을 소개했다. 여기에는 ‘고추 먹고 맴맴. 담배 먹고 맴맴’이라는 노래가 들어 있다. 이 노래 가사는 1928년 윤석중이 발표한 동시 ‘집 보는 아기 노래’에도 들어 있다. 윤석중의 동시는 그 후 제목이 여러 번 바뀌어 현재는 ‘맴맴’이라고 한다. 발표 당시 1절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아버지는 나귀 타고 장에 가시고, 할머니는 건너 마을 아저씨 댁에. 고추 먹고 맴맴. 담배 먹고 맴맴.” 그런데 이 노래가 해방 후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리면서 후렴구의 “담배 먹고 맴맴”이 “달래 먹고 맴맴”으로 바뀌었다. 어린이가 담배 피우는 내용을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을 수는 없다고 생각해 ‘달래’로 바꾼 것이다. 그래서 요즈음은 이 노래 원 가사가 “고추 먹고 맴맴. 담배 먹고 맴맴.”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도 많다. 아무튼, 조선에서는 20세기 초까지 아이들이 담배 피우는 것을 큰 문제로 보지 않았던 것 같다.

담배를 ‘먹는다’고 표현했던 조선


▎일본이 빌려준 돈을 갚자는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난 1907년 국채를 갚기 위해 금연을 촉구하는 글이 잡지에 실리기도 했다. 사진은 국채보상운동 기념사업회가 2021년 개최한 특별기획전 포스터. / 사진:국채보상운동기념사업회
호랑이는 민화 소재로 자주 쓰인다. 호랑이를 소재로 한 그림 가운데 호랑이가 담배를 피우는 그림이 있다. 사찰 벽화 중에는 토끼가 호랑이에게 담뱃대를 바치는 형상을 그린 그림도 있다. 왜 호랑이가 담배를 피우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한국 속담에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이 있다. 오랜 옛날을 가리키는 이 속담을 요즈음에는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이라고 말한다.

‘담배를 먹다’라는 표현이 낯선 것이 되면서 익숙한 표현인 ‘피우다’로 바꾼 것이다. 현재 ‘담배를 먹다’라는 표현을 잘 쓰지 않으므로, 이 표현을 잘못된 것으로 아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인터넷에 보면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먹던’이란 표현을 호랑이가 담뱃잎을 먹는 것으로 잘못 이해하는 경우도 있다. 요즈음 담배를 먹는다는 표현은 거의 쓰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틀린 말은 아니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먹다’ 항목을 보면 “담배를 피우다”라는 설명이 들어 있다.

앞에서 본 동요에서도 ‘담배 먹고 맴맴’이라고 했듯이 조선시대에도 담배는 ‘먹는’ 것이었다. ‘피우다’라는 단어도 사용하지만, 주로 ‘먹다’라고 표현했다. [춘향전]에도 담배 피우는 장면이 여러 군데 나온다. 어떤 대목에서는 ‘피우다’라고 하고, 어떤 대목에서는 ‘먹는다’라고 했다. [춘향전]에서 담배가 등장하는 장면 몇 군데를 살펴보기로 한다.

이도령이 방자의 안내를 받아 처음으로 광한루 구경을 갈 때, 이도령은 “백통대에 삼등초를 피워 물고” 길을 나선다. ‘백통대’는 담뱃대의 담배 넣는 부분을 백통으로 만든 고급 담뱃대를 말하는 것이다. ‘삼등초’는 평안도 삼등 지방에서 나는 담배로 조선시대 고급 담배다. 이 대목에서 19세기 중반에는 ‘담배를 피운다’라는 표현이 쓰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대목 외에 담배가 나오는 장면에서는 대부분 담배를 먹는다고 했다. 이도령이 처음 춘향집을 찾아가서 춘향과 대면하는 대목에서는, 춘향이 담뱃대에 담배를 넣고 불을 붙여 이도령에게 주며 “도련님 잡수시오”라고 말하며 담배를 권한다. 이 장면에서 담배와 관련된 재미있는 표현이 발견된다. 윗사람에게 담배를 권할 때는 ‘먹다’의 존댓말인 ‘잡수시다’를 썼다는 점이다.

암행어사가 된 이도령이 변사또 생일잔치에 가서 음식을 얻어먹다가 담배를 달라는 대목이 있다. 이도령은 이 장면에서 기생을 보내주면 “담배까지 붙여 먹겠소”라고 하면서 담배를 먹는다고 표현했다.

한국 최초 근대소설이라고 하는 이광수의 [무정]에도 ‘담배를 피우다’와 ‘담배를 먹다’가 함께 쓰였다. 자세히 조사해보면 두 가지 표현의 차이를 알아낼 수도 있을 테지만, 이 글에서는 20세기 초까지 담배는 먹는 것이기도 하고 피우는 것이기도 했다는 것만 말해두기로 한다.

최고 명품 담배는 남한산성 인근에서 재배한 ‘금광초’


▎담배 피우는 호랑이를 묘사한 조선의 민화. / 사진:위키피디아
한국 법률 중에는 담배에 관한 것이 여럿 존재한다. 담배전매법이나 담배사업법처럼 담배라는 단어가 들어간 법률 외에도 국민건강증진법이라든가 청소년보호법에도 담배 조항이 있다. 산림보호법이나 철도안전법에도 담배와 관련된 내용이 들어 있다. 여러 법률 가운데 특히 담배전매법에는 “담배는 정부가 전매한다”고 정해뒀다. 이는 사사로이 담배를 제조하거나 팔면 법률 위반으로 처벌을 받는다는 의미다.

이처럼 정부가 담배 제조와 판매를 독점하는 이유는 국가 재정수입을 늘릴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도 정부가 담배 판매 권한을 특정 상인에 한정해 이익을 보장해줬다. 담배 상인들은 담배 판매를 독점하는 대신 국가가 필요로 하는 경비를 댔다. 다만 국가에 세금을 내지도 않으면서 담배를 파는 사람도 많았던 만큼, 담배 판매를 둘러싼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조선시대에는 담배 소비량이 상당해 담배 재배가 전국적으로 이뤄졌다. 많은 지역에서 담배를 생산했고, 그 중 특히 맛이 좋은 지역의 담배는 명품 담배로 통했다. [춘향전]에도 명품 담배가 등장한다. 이도령이 처음 춘향 집에 갔을 때 춘향이 여러 가지 담배를 내놓는 대목에서다.

춘향은 먼저 평안도 성천초, 강원도 금강초, 전라도 진안초, 양덕 삼등초 등을 내놓지만, 정작 이도령에게 주는 담배는 경기도 남한산성초다. 남한산성초는 남한산성 근처에서 재배한 담배로 ‘금광초’를 뜻한다. [춘향전]에서 언급하는 명품은 당대 최고 물건이므로, 19세기 초 조선에서 가장 좋은 담배는 삼등초나 진안초가 아닌 금광초였음을 알 수 있다.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의 [임하필기]에 금광초 항목이 있는데, 여기에서 금광초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경기도 광주 남한산성 남문 밖 세촌면 금광리의 김 씨 밭에서 나는 담배는 우리나라에서 품질이 가장 뛰어나다고 말한다. 세촌면에서 생산되는 담배를 통틀어 금광초라고 하는데, 지금은 그 일대에서 생산되는 담배를 모두 금광초라고 한다.”

이유원은 이 글에서 금광초 외에도 전라도 상관초, 경상도 신녕초, 평안도 성천초 등을 좋은 담배라고 언급했다. 상관은 현재 전라북도 완주군 상관면이고, 신녕은 경상북도 영천시 신녕면이며, 성천은 평안남도 성천군이다. 이유원의 글을 통해 19세기 중반 조선에 명품 담배가 여러 가지 있었고, 그 중 가장 좋은 담배가 금광초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은 [춘향전]을 통해서도 확인이 된다.

금광초 생산지인 광주군 세촌면 금광리는 현재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금광동으로 행정구역이 바뀌었다. 금광동은 성남의 번화한 거리로 변해 과거 조선 최고 품질의 담배를 생산하던 곳이었다는 흔적은 찾아볼 길이 없다.

조선 후기 담뱃대 길이가 신분에 따라 달랐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긴 담뱃대는 신분 높은 사람이 사용했다. 담뱃대 길이가 너무 길어 담뱃불을 붙여주는 하인이 따로 있어야 할 정도로 긴 긴 것을 쓰기도 했다. 반면 지체가 낮은 사람은 짧은 담뱃대를 사용했다. 신분에 따른 담뱃대 길이 차이는 ‘궐련’의 등장으로 사라지게 된다.

담뱃불 붙여주는 하인 따로 두기도

담배를 종이에 말아서 피우는 궐련이 유행하게 된 시기는 조선 말기다. 조선이 문호를 개방해 외국 물품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궐련도 수입됐다. 특히 갑오개혁 때 거리에서의 담뱃대 사용을 금지하면서 궐련 수입이 증가했다. 휴대가 간편하고 피우기도 편한 궐련이 성냥과 함께 흡연의 주류로 자리 잡으면서 담뱃대는 서서히 과거 유물이 돼갔다.

성냥이 없던 시절 담배에 불을 붙이기 위해서는 도구가 필요했다. 불을 피워놓은 화로나 모닥불이 있으면 괜찮았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부싯돌로 불을 피운 다음에야 비로소 담배를 맛볼 수 있었다. 지체 높은 사람이 담배를 피우기 위해 하인이 필요했던 것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춘향전]은 궐련이 들어오기 이전 작품이므로, 소설에 등장하는 담배는 모두 담뱃대를 이용해 피우는 것이다. 담뱃대 길이가 신분에 따라 다르다는 것은 이도령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도령이 담배 피우는 모습을 묘사한 대목에는 언제나 긴 담뱃대가 등장한다. 다만 그가 암행어사가 된 뒤 신분을 감추고 다닐 때는 ‘돌통대’로 담배를 피운다. 돌통대는 담배 넣는 부분을 나무나 돌로 만든 짤막한 담뱃대다.

이도령이 어사가 돼 민정을 살피기 위해 농부들을 만나는 대목에서도 농부들은 ‘조대’나 ‘곰방대’로 담배를 먹는다. 조대는 돌통대와 같은 것이고, 곰방대도 짧은 담뱃대다. 휴대가 편리하지만 담배를 넣는 부분은 나무나 돌로 만든 하급 담뱃대였다. 고급 담뱃대는 담배 넣는 부분인 ‘대통’을 금속으로 만들고, 여기에 화려한 무늬를 넣어 가격이 비쌌다.

담배의 해로움이 제대로 알려지기 전에는 군인들에게 담배를 무상 지급하기도 했다. 이런 얘기는 이제 까마득한 옛날이야기다. 담배가 혐오 대상이 된지 오래다. 그러나 담배는 여전히 국가가 전매하고, 담배 회사는 큰 이익을 남기고 있다. 몸에 해롭다는 문구를 쓴 물건을 판매하면서 돈을 버는 이 기이한 모순이야말로, 오랫동안 기호품으로 인간과 함께 한 담배의 가장 적나라한 모습일 것이다.

※ 이윤석 - 한국 고전문학 연구자다. 연세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고, 2016년 연세대 국어국문학과에서 정년 퇴임했다. [홍길동전]과 [춘향전] 같은 고전소설을 연구해서 기존의 잘못을 바로잡았다. [홍길동전] 이본(異本) 30여 종 가운데 원본의 흔적을 찾아내 복원했을 뿐만 아니라 작품 해석 방법을 서술했다. 고전소설과 관련된 저서 30여 권과 논문 80여 편이 있다. 최근에는 [홍길동전의 작자는 허균이 아니다]와 같은 대중서적도 썼다.

202305호 (2023.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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