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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운의 기후와 문화 그리고 작품을 찾아서(10)] 그리스 신들이 놀던 숲은 어디로 갔을까 

전쟁·교역·은광 위해 닥치는 대로 벴다 

소크라테스 한탄 “농사 면제된 군대 먹여 살릴 정도로 비옥했는데…”
숲을 파괴하며 번성해나가, 대규모 함대 건조해 지중해 교역망 장악


▎그리스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의 모습. 고대 그리스 시절부터 수많은 나무가 청동기나 도자기의 연료, 선박의 재료로 쓰이기 위해 무분별하게 벌목됐다. / 사진:연합뉴스
그리스는 서양 문명의 요람이자 철학·서사시·연극 등 인류에게 많은 유산을 안겨준 지중해의 보석 같은 나라다. 하지만 기대에 부풀어 이곳을 찾았던 지인들의 반응은 조금 달랐다. 대개 ‘실망했다’는 인상을 남기곤 했다. 많은 유물이 영국이나 프랑스로 넘어간 탓도 있지만, 그리스의 자연환경도 적지 않은 영향을 준 것 같다. 그리스 신화의 무대이니 젖과 꿀이 흐를만한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질 줄 알았는데 온통 메마르고 황량한 풍경이 펼쳐지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이런 인상 평이 2000년 전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점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지인들에게 했던 이야기를 들어보자.

“옛날에 이 땅(아테네)은 그 어떤 땅보다도 비옥하였고 농사일을 면제 받은 군대도 먹여 살릴 수 있었다더군. 이 땅은 그 훌륭함에 더해 산출량 또한 엄청났던 게야. 요즘 산이라는 것은 오늘날 벌들에게 먹잇감 정도를 주는 게 고작인 곳도 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장 큰 집의 덮개로 쓰이는 나무들을 거기서 베었고, 그것으로 만든 지붕들은 아직도 건재하거든. 그리고 그 밖에도 키가 큰 재배 나무들이 많아 가축들에게 무진장 사료를 제공해주었네. 그러면 과연 이 말이 얼마나 믿을 만한 것일까? 그리고 지금 남아있는 땅이 당시의 땅 중 일부라고 한다면 그 말은 무엇을 근거로 맞는 말이 되는 것일까?”([크리티아스] 중)

소크라테스가 이렇게 반문하는 것을 보면, 그가 살던 시대에도 아테네는 결코 비옥한 땅은 아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신화의 고향 아테네는 왜 그런 환경이었을까.

부(富)를 얻었지만 숲은 황폐화

이후 고고학과 지질학자들의 조사를 통해 소크라테스가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라는 게 밝혀졌다. 그리스 문명이 전성기를 구가하던 무렵의 크레타 섬이나 펠로폰네소스 반도는 낙엽이 많은 졸참나무나 소나무의 혼교림(混交林)으로 뒤덮여 있었다고 한다. 즉, 신화에서 아프로디테 여신과 아폴로 신이 사냥하러 다녔던 것처럼 그리스는 숲의 나라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 문명은 숲을 파괴함으로써 비로소 번성할 수 있었다. 역사는 때때로 역설적이다.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 그리스는 가장 앞서가는 상공업 선진국이었다. 특히 청동기나 도자기는 그리스가 자랑하는 수출 제품이었다. 그런데 이를 만들려면 대량의 연료가 필요했기 때문에 곳곳에서 나무가 베어졌다. 이것은 비단 그리스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고대 청동기 문명이 발달했던 메소포타미아나 레반트 같은 오리엔트 지역이 모두 비슷한 운명에 처했다. 고고학자들은 오리엔트 각지에서 구리나 철을 정련했던 용광로 유적을 발견했는데, 이 지역들은 현재 대개 바위투성이 땅이다. 이곳 역시 과거에는 녹음이 우거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아테네에서 나무를 사라지게 만든 요인은 몇 가지가 더 있었다. 그중 하나는 은광(銀鑛)이다. 물론 은광은 축복이었다. BC 5세기 아테네 서부 라우리온 일대에서 대규모 은광이 발견됐는데, 이는 아테네에 전례 없는 부를 안겨줬다. 하지만 은을 대량으로 채굴하고 정련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연기는 아테네의 공기를 지독하게 오염시켰다. 기원전 4~5세기경 이곳에서 나오는 연기 때문에 아테네 주변의 나무가 말라 죽는가 하면 사람들이 건강 문제로 고생했다. 훗날 그리스 출신 로마인이었던 스트라본이 쓴 지리서에는 이로 인한 대기 오염이 너무 심각해 당시 아테네에서는 높은 굴뚝을 세워 오염물질을 분산시키려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한편 막대한 은이 매장된 광산이 발견되자 아테네에서는 이 ‘횡재’를 어떻게 활용할지를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상당수의 정치인은 은을 공평하게 시민들에게 분배하자고 제안했다. 아마 대부분 시민에게 귀가 솔깃할 제안이었다. 하지만 당대 유력 정치인이었던 테미스토클레스는 단호하게 반대했다. 그는 이 은으로 함대를 만들어야 한다고 설득했고, 200여 척에 달하는 갤리선을 건조할 수 있었다.

전쟁 위해 숲과 함대를 맞바꿨다?


▎고대 아테네는 지중해 최고의 해군을 바탕으로 ‘델로스 동맹’을 만들어 전성기를 보낸다. 그림 속 분홍색 부분이 아테네와 델로스 동맹의 영역. / 사진:World History Encyclopedia 홈페이지 캡처
이것은 앞을 내다보는 혜안이었다. 아테네는 상공업으로 일어선 국가였다. 그리고 외부 세계와 교역을 하려면 배가 필요했고, 상선들이 안전하게 지중해를 다니기 위해서는 해로를 지켜줄 함대가 필요했다. 이것이 아테네, 그리고 그리스 일대 숲의 운명을 갈랐던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배를 만들려면 막대한 목재가 필요했다. 그래서 한때 신들이 살았던 거대한 숲은 하나둘 사라졌고, 이것은 거대한 함선의 재료로 투입됐다. 하지만 테미스토클레스의 혜안은 곧 빛을 발하게 되는데, 페르시아의 황제 크세르크세스 1세가 직접 지휘하는 페르시아 원정군이 침공하자, 아테네는 이 함대를 거느리고 살라미스 해전에서 페르시아를 완파한 것이다. 고대 문명의 축이 페르시아에서 그리스로,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넘어온 순간이 바로 이때다.

하지만 그리스에서 대규모 함대가 동원된 전투는 살라미스 해전뿐만이 아니다. 이후 그리스는 패권을 놓고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30여년간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벌였고, 이때 양측의 동맹으로 대부분의 그리스 도시가 동원됐다. 이 과정에서 수백, 수천여척의 함선들이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으며, 그때마다 또다시 남아있는 숲이 배를 만들 목재로 선택돼 사라졌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먼 훗날의 이야기다.

일단 페르시아와의 전쟁으로 아테네는 지중해 최고의 해군을 바탕으로 ‘델로스 동맹’을 만들어 전성기를 만끽하게 된다. 숲을 희생시킨 대가가 헛되지만은 않았던 것이다. 아테네는 막강한 해군을 앞세워 지중해 세계의 교역망을 장악했고,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가 됐다. 또한 이런 바탕 위에서 예술과 철학을 꽃피우면서 인류에게 영원한 유산을 안겨주기도 했으니, 따지고 보면 전 세계 인류가 그리스의 숲에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그리스인 키우던 염소는 새순 먹어 치워


▎르네상스 시대의 회화 거장인 라파엘로가 그린 ‘아테네 학당’. 중앙을 기준으로 왼편에서 허름한 옷을 입고 열변을 토하고 있는 인물이 소크라테스다.
하지만 아테네 사람들은 벌목과 삼림 파괴 과정을 신화적으로 재처리했다. 다시 [크리티아스]를 보자.

“9000년 동안 대홍수가 여러 차례 일어났고 그 기간 내내 고지대로부터 토사가 흘러내리는 재해를 겪다 보니 흙이 이렇다 할 만한 퇴적층을 이루지 못한 채 언제나 소용돌이치듯 돌면서 흘러내려 가 깊은 바닷속으로 사라져 버렸던 거야. 당시보다 지금은 비옥하고 부드러운 토양이 모조리 유실되어 마치 병든 몸의 뼈 마냥 앙상한 땅덩이만 남게 된 것이네. 당시는 재해를 입지 않은 상태라서 산들은 개간하기 좋은 높은 구릉 지대들을 가지고 있었고 오늘날 ‘돌흙’ 평야라고 이름 붙여진 곳 또한 비옥한 땅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으며, 산들에는 숲이 울창하였네. 그때는 지금처럼 빗물이 벌거숭이 땅에서 바로 바다로 흘러가 없어져 버리는 일은 없었네. 오히려 토양이 두터웠던지라 빗물을 받아들여 담수가 잘 되는 점토로 된 땅에 저장해 두었다가, 그 흡수된 물을 고지대에서 계곡들로 흘려보내 모든 지역에다 풍부한 샘물줄기와 강물 줄기를 제공했다네.”

이제 그리스 땅에서 숲은 사라졌다. 소크라테스는 9000년 전부터 일어난 대홍수 때문이라고 했지만 그럴싸한 ‘시나리오’였을 뿐, 실제로 숲을 사라지게 만든 건 그리스인들이었다. 위에서 본 것처럼 그리스인들이 청동기·철제 무기와 농기구·도자기·함선 등을 만들면서 막대한 목재가 필요했고, 그리스의 숲을 고갈시켰다. 지중해와 오리엔트 지역의 유목도 숲이 만들어지는데 어려움을 줬다. 이 지역은 오래전부터 양과 염소를 키운 것으로 유명한데, 염소는 풀이나 새순을 모두 먹어 치우는 식성을 갖고 있다. 그래서 염소가 많은 곳에서는 숲이 남아나기 어렵다고 한다. 예를 들어 레바논 국기에는 삼나무가 그려져 있는데, 그것은 레바논 산맥의 삼나무가 오래전부터 배를 만드는 재료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이미 기원전 1000년경부터 페니키아로 시작해 이후 그리스·로마·이집트 등으로 수출했다고 한다. 물론 이 지역에서도 이제 울창한 삼나무 숲을 보기란 어렵다.

목재 부족해지자 흑해로 눈 돌려

어쨌든 그리스에서 숲이 사라졌다고 해서 배를 그만 만들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리스인들이 눈을 돌린 곳이 흑해 일대였다. 그리스나 메소포타미아만큼 문명이 발달하지 않은 이곳은 울창한 삼림이 뒤덮고 있었고 그리스인들은 이곳에 식민지를 건설해 필요한 목재와 식량을 보충했다. 또, 먼 훗날의 이야기지만 스파르타가 그리스의 패권을 놓고 아테네와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벌였을 때도 가장 주력했던 것 중의 하나가 아테네와 흑해 사이의 바다 운송길을 차단하는 것이었다. 이를 막으면 식량과 목재 부족으로 아테네를 이중으로 곤경에 빠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렇게 됐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등장한 시기는 이런 전환기였다. 아테네는 전성기를 지나 어느덧 황혼기를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삼림 파괴로 토양 침식이 가속화하면서 농지는 황폐해졌고, 그리스는 이제 곡물과 목재를 외부에서 수입해 와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렸다. 소크라테스는 부유한 농민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다음 세대인 플라톤의 시대부터는 농민 계급이 거의 몰락한 상황에 처했다. 철학이나 종교는 바로 이런 거대한 전환기에 탄생한다. 이전의 경험이나 가르침이 먹히지 않을 때 사람들은 새로운 진리를 갈망하고, 신선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한나라가 고조선을 무너뜨리고 한사군을 설치했을 때 탐을 냈던 자원도 목재였다는 설이 있다. 중국도 춘추전국 시기를 거치며 철기 보급과 개발이 가속화하면서 황하 유역의 삼림이 거의 사라졌기 때문이다. [삼국지(三國志)] 위지동이전에 따르면 진한(辰韓)에 살던 염사치라는 인물은 낙랑군의 땅이 기름지고 살기 좋다는 소문을 듣고 귀화하려고 가던 중 호래(戶來)라고 하는 한 한인(漢人)을 만났다. 호래는 3년 전 목재를 벌채하려고 진한 지방에 왔다가 붙잡혀 노예가 된 1500명의 중국인 중 하나였다. 염사치는 호래를 데리고 탈출해 낙랑군으로 들어갔고, 이 사실을 알려 한나라 낙랑군에서 진한에 사로잡힌 중국인 포로들을 쇄환(刷還) 시켰다고 한다. 염사치는 최초의 ‘민족반역자’인 셈이다. 어쨌든 이 일화는 고대 문명에서 목재가 차지하는 중요성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 유성운 - 중앙일보 기자.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기후환경학과 석사 과정을 밟고 있다. 저서로 [걸그룹 경제학], [리스타트 한국사도감], [사림, 조선의 586]이 있으며 [당신이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면], [세계사 속 중국사도감] 등을 번역했다.

202305호 (2023.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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