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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숙의 아트테크-컬렉터의 수장고를 열다(6)] OCI미술관 이지현 관장 

“한 점, 한 점 구매할 때가 생각나 판매는 생각도 못해” 

‘예술 애호가’였던 송암 이회림의 값진 유산 계승
창작 스튜디오 운영하며 신진 작가 발굴해 지원


▎OCI미술관 이지현 관장. / 사진:OCI미술관
미술관·박물관의 전시 기획은 미술컬렉터가 수집한 미술품을 바탕으로 열린다. 국내뿐만 아니라 미국과 유럽의 미술관들은 미술 애호가들에게 작품을 빌리지 않으면 전시회를 열기조차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에는 개인 컬렉터가 미술 전시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대규모 현대미술품 수집은 대부분 개인 컬렉터에 의해 이뤄졌다. 개인 컬렉터는 양질의 미술품을 지속해서 수집한다. 또한 구입한 미술품을 잘 보관해 훼손되지 않도록 유지하는 역할도 한다.

OCI미술관은 서울 종로구에 있다. 외관은 고풍스러운 붉은 벽돌을 쌓아 올린 집으로, 입구에는 ‘송암회관’ 현판이 있다. 송암은 OCI(The Origin of Chemical Innovation) 그룹의 모체인 이회림(1917~2007) 설립자의 아호다. 마지막 개성상인이며, 한국의 근현대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송암은 1954년 이 집을 구매 후 양옥에서 다시 5층 건물로 증축했다. 설계한 건축가는 김종남·김종운 건축가 형제로 OCI 본사 사옥, 포천 연수원, 인천 공장, 인천 송암미술관 등도 맡았다. 건축가가 회상하는 송암은 “건축 디자인과 콘셉트에 대해 새로운 의견을 제시하고, 도면이 이해되지 않을 땐 직접 벽돌을 쌓아보며 공간 간격을 가늠할 정도로 건축에 대한 열정도 굉장했다. 수송동 집엔 특히나 정성을 들였다”고 했다. 송암은 서화와 골동에 높은 안목을 갖추고 전통 예술과 문화의 가치를 보존하고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이 벽돌집은 그의 방대한 컬렉션을 보관하는 수장고 겸 개인 공간으로 활용됐다. 주로 5층에 머물렀던 송암은 자신의 방을 서예를 하고 신문과 음악을 들으며 방문객들과 문화와 예술 이야기를 나누는 예술사랑방으로 즐겨 사용했다. 특히 수준급 서예로 군자의 정신 수양을 했고, 많은 이들에게 기품 있는 기업인으로 인정받는 삶을 위한 실천이었다. 송암과 가깝게 서로 존중하며 교류했던 예술가 중에는 창원 이영복 화백, 월전 장우성 화백, 운보 김기창 화백 등이 있다. 1989년 자신의 집을 모두를 위한 열린 공간으로 개방한 후 송암회관으로 현판을 걸고 한학 사료와 문인화, 고향 땅을 그리며 모아온 북한 유화 등을 전시하며 특색 있는 갤러리로 호응을 얻기 시작했다. 송암은 1979년 재단법인 ‘회림육성재단’을 설립해 학술·문화 부문에 연구비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OCI 창업주 이회림 초대회장. / 사진:OCI그룹


미술 사랑이 각별했던 할아버지 송암 이회림


▎OCI미술관 외관. / 사진:OCI미술관
송암 이회림 탄신 100주년 기념호 [송암, 그 집으로의 초대] 책자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송암의 미술 사랑은 각별했다. 아무리 적은 돈이라도 쉽게 쓰지 않았지만 우리 문화유산 속에 들어 있는 선현들의 지혜는 감히 화폐로 환산할 수 없을 만큼 크다는 혜안을 가지고 꾸준히 미술품을 수집했다. 그가 1950년 대부터 한 점, 두 점 모아온 미술품의 수는 점점 늘어나 집 한 채를 채우고도 남을 작품들이었다. 송암은 이 값진 유산을 후대에 계승하고 아낌없이 사회에 환원했다. 문화 재단을 설립하고 1989년 인천에 새로 송암미술관을 지어 2005년 인천시에 기증했다.” 미술관은 대지면적 4400평에 지하 1층, 지상 2층 연건평 765평이고, 기증한 작품으로는 통일신라의 ‘청동여래입상’, 고려 시대 ‘청동지장보살좌상’, 조선 시대의 ‘금동보살좌상’과 ‘분청사기철화당초문대발’등 8000여 점으로 빼어난 수작이 많다.

그 후로도 미술품 수집은 계속 이어졌고, 송암회관을 시대에 맞춰 현대미술의 전문 미술관으로 면모를 갖춰 2010년 OCI미술관을 개관했다. 미술관 등록 작품 100점은 1980~2000년대 국내 최고 작가들의 작품들이었다. 이들은 작고 작가로 이세득, 천경자, 최영림과 현재에도 최고의 원로작가인 정상화, 하종현, 김구림, 한운성, 임옥상 등이다. 미술관 개관 후 국내 근현대 작가 중 가장 경매가가 높은 김환기 작가의 작품을 소장한 것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김을, 눈물새, F.R.P., 우레탄, 290(높이)x70x250㎝, 2022(좌측) 김환기, 무제, 캔버스에 유채, 125x81㎝, 1968(우측) / 사진:OCI 미술관
유서 깊은 OCI의 역사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전략을 알아보기 위해 이지현 관장을 만났다. 이 관장은 대학에서 프랑스어, 대학원에서는 미술사학을 전공하고 미국에서 19세기 후기 인상파에 관한 박사과정을 밟았다. 2011년 귀국 후 미술관에 출근하게 됐다. 전공과 더 밀접한 일에 관심이 많았으나 운명처럼 맡게 된 미술관 운영을 위해 다시 현대미술을 공부했다. “공부가 가장 재미있는 취미”라는 이 관장은 전시와 작가의 작업실 등을 탐방하며 밀도 있는 연구를 진행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컬렉션도 진행했다. 첫 컬렉션은 한성필 사진작가의 작품으로 사진전문 갤러리에서 구매했다. 예술을 사랑하는 할아버지의 열정적인 유전 인자를 이어받은 면모로 보인다. 인터뷰 장소에는 단색화의 최고 작가 중한 분인 윤형근 작가의 작품이 걸려 있었다. 미술관의 중요 기능인 미술품 소장을 지속해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한국 미술사 아우르는 명작과 고미술품 전시


▎OCI미술관 내부. / 사진:OCI 미술관
OCI미술관의 중요 역할은 국내 미술사에 기여하는 기획 전시와 작가를 후원하는 레지던시 운영이다. 기획 전시의 경우 미술계에 많이 알려진 작가들보다는 작업이 탄탄하고 지렛대 역할을 통해 주목받은 훌륭한 작가를 발굴하는 데 목적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관장부터 학예사들의 심도 있는 연구를 통해 전시를 선보이고 있다. 또한 송암의 컬렉션을 지속적으로 연구하고 전시하기 위해 고미술 학예사도 별도로 근무하고 있다. 지난해 [완상의 벽] 기획은 한국의 우수 문화를 해외에 소개하는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KOFICE)의 ‘트래블링 코리안 아츠(Traveling Korean Arts)’사업의 일환으로 주오사카 한국문화원이 주관하고 OCI미술관이 기획을 맡았다.

지난 2019년 같은 사업을 통해 일본과 중국에서 개최한 ‘그 집’ 전시의 후속 전시로 한국 미술에 대한 해외 관람객의 높은 관심에 호응하고자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미술관 소장품을 포함하고 있다. “우리 선조들이 아끼던 그릇을 중심으로 다양한 작품들을 21세기 눈으로 다시 한번 ‘완상(玩賞)’해 보고자 기획됐고 한국의 도자기와 회화를 통해 우리 선조들의 완상 문화를 소개한다. 오늘날의 OCI미술관이 존재할 수 있게 한 송암 이회림 선생이 모은 소장품 공개란 의미를 넘어, 지난 몇 년간 학예연구진이 열심히 고르고 연구한 작품들을 기쁜 마음으로 준비했다. 진정한 예술 애호가의 자세와 그 뿌리를 음미해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는 이 관장의 인사말엔 전시에 담고자 하는 정신이 담겨 있다. 전시작은 고려 시대의 ‘청자완’부터 조선 후기의 ‘백자청화운현명만자문병’에 이르기까지 한국 도자기의 역사를 연대순으로 보여준다. 특히 OCI미술관의 대표 소장품인 ‘백자청화운현명만자문병’은 병의 형태에 따라 사방으로 연속으로 퍼지는 독창적인 만자(卍字) 문이 새겨져 조선 후기 청화백자의 수준 높은 미의식을 볼 수 있다. 이 도자기는 역사성과 함께 뛰어난 조형성, 잔존 상태 등을 인정받아 2016년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됐다. 근대 회화 소장품 중에는 장승업의 ‘기명절지도’ 10폭 병풍은 조선 후기 작품으로 문인적 취향과 길상적인 의미, 장식성 등이 뛰어나다.

OCI미술관은 중견 작가들의 작품세계에 주목해 그중 작품성이 뛰어난 발군의 작가를 선정, 초대 개인전을 개최하고 있다. 2011년부터 진행 중이며 주요 작가로는 오경환, 윤동천, 공성훈, 유근태, 서원희, 오원택, 김기철, 곽남신, 김을 등이다. 그중 작고한 공성훈 작가는 2012년 전시 당시 반응이 좋았고, 그 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을 받게 돼 이 관장은 큰 보람을 느꼈다고 한다. 지난해 김을의 ‘김을 파손죄’ 전시에서 보험에 가입한 작품 수는 무려 729점. 어렵게 준비한 만큼 전문가 사이에 입소문이 나서 관람객도 많았다.

“작가들이 찾아와 친정이라고 말할 때 뿌듯”

젊은 작가를 지원하는 전시는 ‘OCI YOUNG CREATIVES’ 프로그램이다. 2010년부터 엄정한 심사를 통해 창의적이고 실력 있는 국내·외 신진작가들을 선정한다. 선정된 작가는 총 1000만원의 순수 창작지원금을 받게 되며, OCI미술관에서 별도의 초대 개인전을 개최한다. 일회적인 지원에 그치지 않고, 향후 작가의 역량에 따라 다각도의 지원을 계속해 갈 예정이다. 2010년부터 이우성, 양정욱, 우정수, 애니한, 최수진, 김수연 등 80명이 넘는 작가들이 거쳐 갔다.

OCI미술관은 창작 스튜디오도 운영한다. 인천 미추홀구 소재 구 경인방속국(ITV) 내 유휴 공간을 개조한 공간으로 예술 창작 의욕을 펼칠 수 있는 창작 공간 지원사업이다. 2011년부터 구본아, 이주리, 김효숙, 박종호, 허수영, 사윤택 작가 등 80여 명 작가가 창작했다. 이 관장은 창작의 과정을 고스란히 경험하고, 작가들의 작업세계를 깊이 이해하며 추후 자체 기획전, 그리고 외부 활동도 응원을 아끼지 않는다. 창작 스튜디오를 거쳐 간 작가들이 작품이 좋아지고 환골탈태하며 성장해가는 모습을 보며 미술관이나 주요 갤러리에 전시할 때 뿌듯하고 행복하다고 한다. 결국 작가들이 잘되는 것이 관장으로서 큰 보람이다. 여성 작가도 그렇지만 남성 작가도 미술관을 친정이라고 표현한다. 창작 스튜디오를 거쳐 간 작가들이 다시 OCI미술관 전시를 보러 올 때 무엇보다 반갑고, 작가들과 신나고 열정적으로 작업 이야기를 나눌 때도 기쁘다.

이 관장은 마음속으로 작가들을 응원한다. 직접적인 응원은 작품 컬렉션이다. 간간이 미술관이나 개인으로 컬렉션을 한다. 미술사에 기록될 만한 작가의 대표 작품을 구입하기도 한다. 이 관장은 미술사를 전공했기 때문에 작품 한 점 한 점에서 인생을 본다. 그렇기 때문에 작품을 판매한 경험은 없다. “판매해 봐야 안목이 생긴다고 하는데, 저는 한 점, 한 점 구매할 때가 생각나 판매는 못 한다”고 한다. 송암 선생의 피가 흐르고 있는 대목이다.

※ 정영숙 - 갤러리세인 대표. 전 현대백화점 현대아트갤러리 수석큐레이터. 홍익대 미술대학원에서 예술기획을 전공했으며, 추계예술대 대학원에서 문화예술행정경영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기도 여주시 명장심사 도예파트 자문위원이며 ㈔한국지역문화학회 감사로 있다. 대학과 기업에서 미술시장과 투자 등을 강의하는 한편 미술비평 등 글쓰기와 컬렉터 인터뷰를 병행하고 있다.

202306호 (2023.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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