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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범의 문명기행 | 한류의 기원을 찾아서(6)] 세종의 ‘애민사상’으로 가득 찬 한글 

임금의 존재 이유를 백성 안녕에서 찾은 ‘철인(哲人) 정치가’ 

말과 글이 다르니 백성은 물론 배운 선비들도 여러모로 ‘난감’
법을 몰라 소송에서 원통함 겪는 일 막기 위한 깊은 뜻 서려


▎경기 여주시 세종대왕면 왕대리 세종대왕릉에 자리한 세종대왕상. / 사진:이훈범
"소리는 있어도 글자는 없으므로 중국의 글자를 빌려 소통하고 있는데, 이는 둥근 구멍에 모난 자루를 넣는 것과 같으니 어찌 막힘없이 통할 수 있겠는가. (…) 우리의 예악과 문물이 중국과 견줄만하나 오직 언어만이 같지 않아, 글을 배우는 사람이 뜻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형사 사건을 다스리는 관리가 인과관계를 파악하는 데 곤란을 호소한다.”

정인지가 쓴 [훈민정음] 해례 서문에 등장하는 한글 창제 이유다. 내친 김에 좀 더 읽어보자. 뒤이어 한글의 장점과 효과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지혜로운 사람은 반나절도 안 걸려 이해하고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열흘이면 배울 수 있다. 이 글자로 글을 해석하면 그 뜻을 쉽게 알 수 있고, 이 글자로 법률관계를 기록하면 실상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 (…) 어디를 가더라도 통하지 않는 곳이 없어 바람 소리나 닭의 울음, 개 짖는 소리까지도 모두 표현해 사용할 수 있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든 것은 이 땅의 말과 글이 다른 모순을 없애기 위한 것임은 두 말이 필요 없다. 말과 글이 다른, 아니 보다 정확하게 표현해 말은 있되 글이 없는 상황에서 겪는 불편과 어려움은 오늘날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큰 것이었다. 무지렁이 백성뿐만 아니라 사서삼경을 수백 번 읽고 외운 선비들도 곤란을 겪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 어려움을 보여주는 웃지 못 할 사례가 있다.

조선 후기 현종이 “조총의 길이가 얼마나 되는가”라고 묻자, 공조판서 유혁연이 두 손을 펼치며 “이만합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실록을 기록하는 기주관은 두 사람의 문답을 제대로 기록하지 못하고 붓방아만 찧고 있었다. 기주관이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는지 유혁연이 그를 돌아보며 이렇게 꾸짖었다.

“‘전하께서 유혁연에게 조총의 길이를 물으시니(相問鳥銃之長於柳赫然) 혁연이 손을 들고 자를 삼아 이만하다고 대답했다(然擧手尺餘以對曰如是)’고 쓰지 못하느냐?”

사관조차 한문으로 옮겨 적는 데 ‘쩔쩔’


▎세종대왕의 명으로 간행한 [삼강행실도]는 조선시대 윤리 교과서로 꼽힌다. 사진은 [삼강행실도]에 한글로 해석한 언해(諺解)를 붙여 간행한 [삼강행실도 언해본]. /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이런 예도 있다. 숙종이 인현왕후의 폐위에 반대하는 문신 박태보를 친히 문초하면서 “이리저리 꽁꽁 묶고 뭉우리돌로 쳐라”고 명령했다. 그러면서도 숙종은 과연 사관이 자기 말을 어떻게 기록할지 궁금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주서 고사직이 왕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거침없이 써내려가는 게 아닌가. 왕이 보니 그의 글은 이랬다.

“必字形縛之無隅石擊之.”

‘이리저리 꽁꽁 묶는다’는 말을 한문으로 쓰려면 과연 쉽지 않을 터였다. 그런데 한자 ‘필(必)’자가 이리저리 꽁꽁 묶은 모습처럼 생긴 것에서 착안해 필자 모양으로 결박한다고 재치 있게 표현한 것이다. 왕의 칭찬과 큰 상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단재 신채호가 [조선상고사]에서 우리의 역사 기록이 미비하고 정확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현실을 개탄하면서 들려주는 얘기다. 말은 우리말을 하면서 글은 중국어로 써야하니 어찌 안 그렇겠나. 임금의 정사를 기록하는 것이 본업인 사관조차 우리말을 한문으로 옮겨 적는 데 쩔쩔매고, 명령을 내리는 왕조차 자신의 말이 한문으로 어떻게 기록될지 궁금한데, 쓰기는커녕 읽기조차 못하는 백성들은 오죽 답답한 일이 많았을까.

백성 사랑이 둘째가라면 서러울 우리 세종이 그 답답함 중에서도 특히 엄중하게 여긴 것이 있었다. 정인지의 서문을 통해 독자들도 감을 잡았을 것이다. 정인지는 말과 글이 다른 데 따른 어려움 중에서도 특히 옥사(獄事)를 강조하고 있다. 글을 읽지 못해도 일상에서야 그저 답답함으로 그칠 수 있지만, 법률문제가 되면 자칫 그 답답함이 억울함으로 커질 수 있고 원통함으로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즉위 초부터 가졌던 세종의 일관된 생각이었다. “말과 글이 같은 중국에서도 옥사와 소송에서 억울함을 당하는 경우가 많은 걸 보면 한글을 쓴다고 달라질 게 없을 것”이라는 최만리 등의 상소에 세종이 진노하지 않을 수 없던 이유이기도 하다. 백성을 조금이라도 생각하고 걱정하는 마음이 있다면 할 수 없는 말이라고 생각한 까닭이다.

즉위 초부터 백성 억울함 막는 데 ‘진심’


▎[훈민정음해례본]의 정인지 서문(사진 왼쪽). / 사진:디지털한글박물관
세종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애민사상으로 가득 찬 사람이었다. 임금의 존재 이유를 백성의 안녕에서 찾은 철인 정치가이자 계몽군주였다. 세종이 즉위 후 2개월여 만에 중앙과 지방 관료들에게 내린 첫 유시에도 온통 백성의 삶을 걱정하는 마음뿐이다. 8개 조목이 모두 그렇다. 조금 길지만 그 마음을 읽어보자. 최대한 줄였는데, 백성을 사랑하는 아름다운 마음씨를 온전히 느끼려면 줄이는 데 한계가 있다.

1) 수령들이 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망령되이 공사를 일으켜 농사철을 놓치게 할까 염려된다. (…) 사사로이 농민을 노역시키는 자가 있으면 감사가 그 일에 따라 즉시 죄를 처단하고 아뢰라.

2) 향교의 생도들이 학문에 뜻을 두어도 수령들이 생도들에게 글 쓰는 일을 맡기고 손님 접대를 시키는 등 시도 때도 없이 사역하여 학업을 못하게 하니 이를 일절 금지시키고….

3) 수령은 백성에게 가까운 관직이라 선임이 더욱 중요하다. (…) 각 도와 고을에서 30년 동안 수령의 치적을 사실대로 찾아내 자세히 적어 아뢰라.

4) 지금 흉년이 들어 백성이 굶주림을 당할까 염려된다. 수령이 진휼할 때를 놓쳐 굶어죽은 백성이 나온다면 견책과 형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5) 탐관오리들이 법을 어기고 세금을 과중하게 징수해 백성에게 해를 끼쳐도 감사가 사실을 덮어두고 도리어 높은 고과를 주는 것은 심히 잘못된 것이다. 세밀히 살피고 단속해 백성의 생활을 돕도록 하라.

6) 수령이 사사로운 노여움으로 법을 어기고 호소할 데가 없는 백성에게 매질하고 지나친 형벌을 가하면, 감사가 엄히 다스려 법을 어겨 함부로 처형하는 일이 없게 하라.

7) 토호와 아전들이 수령을 조종해 양민을 해쳐도 수령이 그들을 신뢰하고 권한을 위임하는 사례가 있으니 감사가 엄격히 다스리고 자세히 아뢰라.

8) 전쟁에서 죽은 군졸의 자손은 요역을 면제하고, 그 중 재능이 있는 자는 아뢰어 임용되도록 하라. 재주와 도덕을 가졌으나 초야에 숨어있는 선비들도 널리 찾아내 자세히 아뢰라.([세종실록] 1418년 11월 3일 기사)

세종은 백성들에게 법을 제대로 알려 피해를 보지 않게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법을 알고도 어기면 잘못이지만, 법을 몰라 저지른 범법으로 처벌을 받으면 억울함을 풀 길이 없는 까닭이다. 따라서 백성이 법을 미리 알아 범법행위를 하지 않도록 중요한 법조문들을 각 고을 관아에 내걸게 했다. 그것도 글을 모르면 소용이 없기 때문에 각고을 수령들로 하여금 백성들에게 법조문 내용을 자세히 설명하도록 했다. 그런데 여기서도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진다.

“수령이 백성에게 법률 조문을 가르치는데 만일 글자를 몰라서 배우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속전(贖錢)을 징수해 백성의 원망이 크오니 이제부터는 글자를 아는 자 이외에는 법조문을 가르치지 말게 하옵소서.”([세종실록] 1420년 윤1월 29일 기사)

글자를 모르는 백성에게 법을 가르치면서 수강료를 받은 것이다. 글자를 못 배운 것도 억울할 노릇인데, 그렇다고 돈까지 바쳐야 했으니 억울하기 짝이 없었을 터다. 그런데 대안은 더 어이가 없다. 백성의 불만이 많으니 글을 모르는 사람들은 아예 가르치지 말자니, 이런 생각이 생겨나는 머리통은 어떻게 생겼을지 궁금하다. (앞서 유혁연의 사례처럼 한문 실력이 떨어지는 사관이 실록을 작성하면서 어찌 옮길지 몰라 대충 뭉뚱그리는 바람에 오해를 불러왔을지도 모르는 일이긴 하다.) 글을 모르는 무지렁이 백성이 법을 몰라 죄를 저지르건 말건 상관없다는 얘기 아닌가. 그러고는 법을 어기면 처벌하면 그만이라는 말이다. 듣고 있던 세종이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분명 세종은 더 좋은 방안을 내놓을 것을 지시했을 테고, 의정부와 육조의 논의를 거쳐 이런 대안이 나온다.

한문으로 쓴 책, 백성들에겐 ‘개발에 편자’


▎청도읍성에 재현된 조선시대 감옥. / 사진: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글자를 모르는 자에게는 우리말로 법률 조문의 중요한 뜻만 가르치고, 속전은 징수하지 않는다.”

세종은 그대로 이행할 것을 지시하면서도 마음 한편에 얹힌 속처럼 묵직함이 남아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터다.

세종 재위 10년째 되던 해인 1428년에는 경상도 진주 사람 김화가 자기 아버지를 죽이는 사건이 발생했다. 세종은 커다란 충격을 받는다. 보고를 받자마자 낯빛이 변하고 자신이 부덕한 탓이라고 탄식하며 자책한다. 아울러 효도와 우애를 돈독히 하고 풍속을 순화하기 위해 [효행록] 같은 책을 반포해 널리 읽히게 한다. [효행록]은 고려 말 중국의 효행 설화를 엮어 만든 책으로, 세종은 여기에 고려와 삼국시대의 효행을 더하라고 지시했다. 이렇게 해서 나온 것이 [삼강행실도(1434)]다. 이때 세종은 [삼강행실도]의 보급 방식까지 일러준다.

“백성들이 문자를 알지 못하는데 책을 반포해 내려준다 해도 누가 가르쳐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 뜻을 알아서 흥기할 수 있겠는가. 내가 [주례]를 보니 ‘외사(外史·중국 주나라 때 외국과 관계되는 왕명을 담당하는 관리)가 책 이름을 사방에 알리는 일을 담당하는데, 사방 사람들로 하여금 책의 문자를 알게 해 나아가 글을 능히 읽을 수 있게 한다’고 했다. 이것을 본받고자 하니 조정과 민간의 선비들은 백성 중에서 학식이 있는 자를 찾아내 모두 가르치도록 하라.”

유학자들에게 학식이 조금이라도 있는 백성을 먼저 가르치게 한 뒤, 그들이 다시 까막눈 백성들에게 설명하게끔 하는 방식이다. 한문으로 된 책을 아무리 많이 만들어 뿌려본들 글을 모르는 백성들에게는 개발에 편자일 뿐이니 보다 실효성 있는 단계별 강습 방식을 제시한 것이다. [삼강행실도]는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매 편마다 그림을 그려 넣었지만, 세종의 기대만큼 효과를 보지 못했다. 세종이 한글 창제의 필요성을 피부로 느꼈을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세종은 이때부터 왕자·공주들과 함께 한글 만드는 작업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재위 18년 만에 정사 대부분을 정승들에게 위임하고, 21년 후반부터는 즉위 초부터 열과 성을 다했던 경연마저 중단한 것은 그만큼 한글을 만드는 데 전념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무렵 세종의 건강이 극도로 나빠지고 이를 치료하기 위해 온천 행차가 빈번해진 것을 보면 몸도 돌보지 않는 투혼을 발휘했다고 봐도 좋을 듯하다.

법관조차 법조문 제대로 이해 못해 ‘오판’


▎감옥에 갇힌 죄수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있는 가족들. 일제강점기 평양의 화원 김윤보가 그린 [형정도첩] 수록. / 사진:문화콘텐트닷컴
앞서 말했듯 한문을 이해하는 어려움은 일반 백성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법을 적용하고 집행하는 관리들 또한 한문과 이두로 된 법조문을 읽고 이해하는 데 곤란을 겪었다. 세종은 이 문제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관리들이 법조문을 오독하거나 무지에서 나오는 오판으로 죄 없는 백성을 가혹하게 처벌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즉위 초부터 전국 각급 관청 관리들에 대한 법률 교육을 강화했다. 세종이 금속활자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던 이유도 다른 게 아니었다.

세종은 국법으로 사용하던 중국법전과 행정용어집 등을 넉넉히 인쇄해 전국 관아에 배포했다. 하지만 이런 책들은 어려운 문어체로 쓰여 있어 학문이 깊은 문신조차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국내에서 출간한 책조차도 한문과 이두가 복잡하게 섞여 난해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에 세종은 중국 법률에 정통한 문신으로 하여금 율학 생도들을 가르치게 했다.

“율문(律文)이 한문과 이두로 복잡하게 쓰여 있어 비록 문신이라 하더라도 모두 알기가 어려운데, 하물며 율을 배우는 생도들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문신(文臣) 중에 정통한 자를 가려 따로 훈도관을 두어 [당률소의(唐律疏義)] [지정조격(至正條格)] [대명률(大明律)] 등을 가르치는 게 옳을 것이다.” ([세종실록] 1426년 10월 27일 기사)

[당률소의]는 당나라 때 나온 법률 주석서다. [지정조격]은 원나라 마지막 법전, [대명률]은 명 태조 주원장이 만든 형법서다. 조선은 특히 태조 때 [대명률]을 조준 등이 이두로 번역하고 정도전 등이 윤색해 1395년 [대명률직해]를 간행한 뒤 500년 동안 형법전으로 활용했다. 그러다보니 오늘날 중국에는 1397년판 [대명률]만 남아있지만, 우리에게는 [대명률직해]를 통해 그보다 앞선 1389년판이 전해지고 있다. 자랑스러워해야 할 일인지는 독자들의 판단에 맡긴다. ([지정조격] 역시 우리나라에만 남아 있음은 이전 호에서 말한 바 있다.)

여전히 만족스럽지 못했던 세종은 즉위 13년째인 1431년 김종서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대명률]을 다시 번역하게 한다. 우리말로 해석한 오늘날의 번역서를 생각하면 안 된다. (오늘날 역시 원서보다 어려운 번역서가 많은 것도 사실이긴 하다.) 한글이 만들어지기 이전인 만큼 여간해서는 해독하기 어려운 문어체를 조선 사대부들이 널리 쓰는 한자와 이두로 풀어쓰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미국인이 쓴 오리지널 영어책을 ‘콩글리시’ 영어로 바꿔 쓰는 식이다.

어쨌거나 사인 조서강과 소윤 권극화에게 번역 임무가 주어졌는데, 그나마 번역 작업이 흐지부지된 것 같다. 3개월 뒤 조서강이 사헌집의로 발령 나고 이듬해 12월에는 권극화마저 지사간원사로 자리를 옮기지만, [대명률] 번역에 대한 후속 기사가 전혀 보이지 않는 까닭이다. 신하들도 어려운 법조문을 쉽게 풀어 쓸 자신이 없고, 임금도 그런 신하들이 번역한들 얼마나 효과를 볼 수 있을까 의심한 까닭이 아닐까 싶다.

기득권 뺏기지 않으려 발버둥치던 ‘지식인’


▎서울 광화문광장의 세종대왕상 야경. / 사진:세종축제 공식 트위터
세종은 좀더 현실적인 아이디어를 낸다. 형벌이 중한 법조문 조항만 따로 추려내 이두로 번역한 뒤 민간에 배포하자는 것이었다.

“백성에게 다 율문을 알게 할 수는 없으나, 큰 죄의 조항만이라도 골라 이두로 번역해 반포한다면 어리석은 백성이 범죄를 피할 수 있지 않겠는가.”([세종실록] 1432년 11월 7일 기사)

중형에 처해지는 범죄만이라도 널리 알려 글을 못 읽고 법을 몰라 저지르는 일이 없도록 하자는 얘기였다. 여기에도 이조판서 허조가 반대를 하고 나서는데 그 이유가 가당찮다.

“신은 폐단이 생길까 두렵습니다. 간악한 백성이 율문을 알게 되면 죄의 크고 작은 것을 헤아려서 두려워하고 꺼리는 바가 없이 법을 제 마음대로 농간하는 무리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법을 잘 아는 이른바 ‘법꾸라지’들이 법망을 피해 농간을 부리는 사례를 흔히 목격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백성에게 법을 알리지도 말자는 것은 법이라는 함정을 파놓고 그것을 모르는 백성이 빠지는 것을 기다리자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세종도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다. 허조를 꾸짖는다.

“그렇다면 백성으로 하여금 알지 못하고 죄를 범하게 하는 것이 옳다는 말이냐. 백성에게 법을 알지 못하게 한 뒤 범법한 자를 벌주는 것은 조삼모사의 술책에 가깝지 않겠는가.”

허조는 강직하기는 하나 백성을 위하는 마음은 세종을 따를 수 없는 그 시대 선비일 뿐이었다. 잠시 후 허조가 물러간 뒤 세종이 남은 신하들에게 말했다.

“허조는 백성들이 법을 알면 쟁송이 그치지 않고 윗사람을 능멸하는 폐단이 생길 것이라 하나, 백성이 금법을 알고 두려워서 피하게 하는 것이 옳다. 집현전에서 옛날 백성들에게 법률을 가르치던 전례를 상고해 아뢰라.”

백성에 법률 이해시키려 했지만 모두 ‘허사’

그러나 이후에도 허조가 계속 반대를 한 모양이다. 이와 관련해 어떠한 보고가 올라오고 어떠한 조치가 내려졌는지 후속 기사가 없다가, 7년 뒤에야 임금이 비슷한 지시를 한다. 허조가 병으로 위독한 상황이 됐을 때다.

“독법(讀法)하는 법이 있으나 백성들에게 율문을 모두 알게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사형죄에 해당하는 범죄를 뽑으면 20여 조에 불과하니, 이를 널리 알리면 사형죄를 범하는 자가 적어질 것이다.”([세종실록] 1439년 11월 13일 기사)

독법이란 태종 때 생긴 제도로, 중앙과 지방 관청 조회 날 각 부 관리가 아전 등에게 법률을 가르치는 것을 말한다. 아전은 다시 백성들에게 법률 지식을 전수했다. 하지만 어려운 법률을 우리말처럼 이해할 수 있는 관리 자체가 턱없이 부족했고, 따라서 아전과 일반 백성들에게 법률을 이해시키는 데는 애초부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일반 백성은 한자를 모르니 아예 읽을 수가 없고, 한자를 아는 관리도 어려운 법조문을 잘못 해석해 그릇된 판결에 이르는 경우가 여전히 허다했다. 이 두 역시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 같은 상황은 세종에게 한글 창제의 필요성을 더욱 절실하게 느끼도록 만들었고,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도록 재촉했을 것이다.

유교 교육을 받은 조선의 왕 대부분이 그랬지만, 세종은 누구보다 ‘재이론(災異論)’을 신봉했다. ‘임금이 잘못하면 하늘이 벌한다’는 사상이다. 세종 즉위 후 거의 매년 홍수와 가뭄이 이어졌고, 그때마다 임금은 자신의 부덕을 탓했다.

“내 들으니 ‘임금이 덕이 없고 정사가 고르지 못하면 하늘이 재앙을 보여 잘 다스리지 못함을 경계한다’고 한다. 내가 변변치 못한 몸으로 신민의 위에 있으면서 밝음을 비추지 못하고 덕으로 편안하게 하지 못해 수재와 한재로 흉년이 해마다 그치지 아니하여…”([세종실록] 1423년 4월 25일 기사)

“이번 화재가 혹심한 것은 하늘이 꾸지람을 내리어 나를 경계하는 것이다. 한편으로 하늘이 과거의 잘못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장래의 징조를 예고하는 것이다.”([세종실록] 1426년 2월 22일 기사)

한글에 온힘 써 53세 젊은 나이에 승하한 세종

가뭄과 홍수, 화재, 역질 등이 닥칠 때마다 세종은 그것이 자신의 잘못인 양 반성하고 언행을 삼가면서 환난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다 즉위 8년차가 넘어가면서 좀 더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했던 것 같다. 매년 반복되는 재해 앞에서 부덕함만 탓한다고 될 일이 아닌 까닭이다. 화재가 그치지 않고 도둑이 극성을 부리는 것을 걱정하며 신하들에게 말한다.

“재난에는 하늘에서 내리는 것이 있고 인간이 저지른 것이 있다. 아래에서 사람이 움직이면, 위에서 하늘의 변화가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세종실록] 1426년 2월 26일 기사)

인간이 자초한 재난이라도 막아 하늘의 재앙을 경감시켜보겠다는 보다 적극적인 의지다. 세종이 훈민정음이라는, 그때까지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신문물’을 만들기로 작정한 것도 여기에서 출발한 것일 터다. 백성을 편안하게 해야 하늘이 노하지 않는데, 그러려면 무엇보다 백성의 억울함을 없애야 하기 때문이다. 홍수나 가뭄으로 인한 불행이나 불운은 하늘의 뜻이니 어쩔 수 없다 해도, 옥사나 송사로 인한 억울과 원통은 인간 손에 의한 재앙이니 막을 수 있는 것 아닌가 말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글 창제와 반포 이후에도 사정이 크게 나아지지 않는다. 한글을 완성한 뒤 세종은 신하들에게 자신 있게 말했다.

“만일 언문으로 [삼강행실도]를 번역해 민간에 반포하면 어리석은 남녀가 쉽게 깨달아서 충신·효자·열녀가 무리로 나올 것이다.”

하지만 세종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삼강행실도]를 비롯해 많은 법률서의 우리말 번역이 이뤄지지 않았다. [삼강행실도 언해본]은 성종 때인 1490년이 돼서야 나왔다. 신하들의 비협조와 반대 때문이었다. “[삼강행실도]를 만들어 뿌린 지 10년이 됐는데도 충신·효자·열녀가 나오지 않는데, 그것을 언문으로 번역한들 상황이 바뀌겠느냐”고 코웃음 치는 신하들이었다. 그들의 협조를 기대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협조는 고사하고 반대나 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것을 아는 세종은 거의 혼자서 극비리에 한글을 만들었다. 그러다 몸을 상하는 바람에 한글 창제 6년여 만에 53세 젊은 나이에 승하하고 말았다.

사실 세종 뜻대로 한글이 나오자마자 온갖 책이 우리말로 번역돼 당시 세계 최고 기술을 자랑하던 금속활자로 마구 찍혀 나왔다하더라도, 세종은 결코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책 한권 읽는다고 인간 심성과 삶의 이치가 한순간에 바뀌겠는가. 하지만 한문을 잘못 읽고 잘못 해석해 생기는 백성의 억울함은 갈수록 크게 줄었을 게 분명하다. 세종은 몰랐지만, 언문으로 번역된 [삼강행실도]가 조선시대 가장 많이 읽힌 책이 됐으며, 조선 사회 전반의 정신적 기틀을 세우는 데 크게 이바지한 것처럼 말이다.

※ 이훈범 - 남들이 못 보는 세상을 보고 싶어 기자가 됐고, 기자로 살며 본 세상을 칼럼에 녹였다. 얽매이지 않고 세상을 떠다니는 구름을 동경했지만, 32년을 중앙일보에 얽매였다 지난해 해방됐고 이제 새로운 글쓰기에 도전하고 있다. 역사에서 혜안을 얻는 게 삶의 기쁨이다. [역사, 경영에 답하다], [세상에 없는 세상수업], [품격] 등 책을 몇 권 펴냈다.

202306호 (2023.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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