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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경률의 노래하는 한국사 (23)] ‘임을 위한 행진곡’에서 ‘동지가’까지 

민주화 정체성 담고 86세대 혈관 타고 도는 노래들 

광주민주화운동이 불붙이고 카세트테이프가 퍼뜨린 시대의 노래
70만 장 대박 난 '노찾사' 2집… 창작과 표현 자유 확대에 기여


▎1987년 6월 항쟁을 위해 학생과 시민들이 서울시청 앞 광장을 가득 메웠다. 역사적인 민주화 쟁취는 86세대의 긍지와 유대감을 높였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 깨어나서 외치는 끝없는 함성 /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1980년대 민중가요를 대표하는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항쟁지도부를 규합하고 대변인으로 활동하다가 희생된 윤상원과 1978년 광주에서 들불야학 노동운동을 하던 중에 비운의 사고로 죽은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을 위해 만들어졌다. 1982년 소설가 황석영이 사회운동가 백기완의 장편시 [묏비나리]를 차용해 가사를 쓰고, 전남대 출신으로 대학가요제에서 수상했던 김종률이 곡을 지었다. 영혼결혼식을 주제로 한 노래극 [넋풀이]에 고인이 된 두 남녀가 산 자들에게 남기는 마지막 노래로 쓰였다.

집단적 소속감 느끼게 하는 힘


▎‘임을 위한 행진곡’의 노랫말은 민중운동가 백기완(사진)의 장편시 〈묏비나리〉를 인용해 소설가 황석영이 지은 것이다. / 사진:통일문제연구소
“여러분 우리는 저들에 맞서 끝까지 싸워야 합니다. 그냥 도청을 비워주게 되면 우리가 싸워온 그동안의 투쟁은 헛수고가 되고, 수없이 죽어간 영령들과 역사 앞에 죄인이 됩니다. 우리가 비록 저들의 총탄에 죽는다 할지라도 그것이 영원히 사는 길입니다. 이 새벽을 넘기면 반드시 아침이 옵니다.”(‘아! 윤상원’, [5·18민주화운동], 국가기록원)

1980년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이 전남도청에 진입하자 윤상원은 무기고 앞에서 마지막 연설을 했다. 그의 시신은 다음날 시청 청소차에 실려 망월동 묘역에 가매장됐다. 신군부의 총칼에 맞서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목숨 바친 광주민주화운동의 결정적 장면 중 하나다. ‘임을 위한 행진곡’에는 그날의 결기가 흐른다.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던 외침이 쟁쟁하게 울리고,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는 맹세가 뜨겁게 끓어오른다. 이 비장한 단조 행진곡은 카세트테이프에 녹음돼 광주에서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시동을 거는 노래였다. 집회를 시작할 때 민주 열사에 대한 묵념과 함께 이 노래를 제창했다. 오늘날 86세대(1980년대에 대학을 다닌 1960년대생)는 주먹을 불끈 쥐고 팔을 힘차게 휘두르며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른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86세대 운동권의 심장에 각인돼 혈관을 타고 돌았던 곡이다. 민주화를 쟁취한 주역이라는 그들의 정체성이 이 민중가요에 투영돼 있다. 함께 부르는 노래는 힘이 세다. 자신들만의 정서적 공감대를 형성하고 집단적 소속감을 느끼게 하는 힘이다.

‘민중(民衆)’은 부당한 지배체제에 억눌리거나 저항하는 사람들을 포괄적으로 일컫는 말이다. 근대 역사학자 신채호 등이 1920년대에 선구적으로 사용하면서 널리 퍼졌다. 신채호는 일제강점기에 아나키스트 독립운동을 펼치다가 순국했다. 민중이라는 용어는 본디 이러한 사회운동의 함의를 띠고 있었다. 1980년대에 이르면 민중이 노동자, 대학생, 지식인, 종교인, 정치인 등을 아우르며 신군부 독재 정권에 항거하는 민주화 세력을 이루었다.

민중가요는 민주화운동이 치열했던 시대에 제도권 바깥에서 유통돼 민주화 세력의 호응을 얻은 저항적 성격의 노래를 가리킨다(김창남, ‘대중음악사의 맥락에서 본 민중가요’, [민중의 시대]). 1980년대는 민중가요라는 개념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창작과 공연, 보급과 수용이 활발히 이뤄진 시기였다. 결정적 계기는 광주학살이었다. 12·12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신군부가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을 총칼로 진압하자 뜨거운 분노와 슬픔이 노래가 돼 입에서 입으로 번져나갔다. 진상을 밝히려는 염원이 모여 민중가요를 일으켰다.

광주학살에 대한 분노가 민중가요 일으켜


▎‘아침이슬’, ‘상록수’ 등을 작곡한 김민기는 1980년대 민중가요에 영감을 주고 노래운동가들을 길러냈다. / 사진:학전
1980년을 전후해 대학가에 노래 동아리들이 생겨나 운동권 구전 가요들을 모으고 현실 비판적인 노래들을 지어냈다. 대학 노래패 출신들은 졸업 후에도 단체를 만들어 전문적인 노래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1984년에 결성한 노래모임 ‘새벽’은 대학교, 성당, 소극장 등지에서 공연을 진행하며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라는 카세트테이프 음반을 내놓았다(1집). ‘그루터기’, ‘일요일이 다 가는 소리’ 등이 이 음반에 수록됐다. 1980년대 중반이 되면 ‘노래마을’ 등 역량 있는 단체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내며 노래운동이 활기를 띠었다.

민중가요라고 해서 꼭 운동권 가요인 것은 아니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는 1977년부터 1992년까지 나온 민중가요 1650여 곡의 악보를 모아 [노래는 멀리멀리](전 5권)를 펴낸 바 있다(2006~2008년). 이 모음집에 실린 작품들을 살펴보면 민중가요가 의외로 다채롭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노래운동가들이 만든 사회성 짙은 곡뿐 아니라 한국과 영미권의 모던 포크송, 교회에서 흘러나온 복음성가와 흑인영가, 출처가 불분명한 구전가요, 대중가요 노가바(노래 가사 바꿔 부르기), 그리고 유명 가곡이나 동요까지 망라했다. 사회운동에 쓰이고 저항의 의미를 부여받으면 맥락상 민중가요였다.

그래도 1980년대 노래운동의 주된 흐름은 분명히 있었다. 민중가요의 중심에 자리한 곡들은 행진곡풍의 투쟁가와 비장한 서정가요였다. ‘임을 위한 행진곡’이 광주학살의 비극을 딛고 민주화운동을 힘차게 추동한 투쟁가의 레전드라면, ‘그날이 오면’은 노동자의 권리를 일깨운 전태일의 희생을 기리고 인간다운 삶을 꿈꾼 서정가요의 최고봉이다.

“한밤의 꿈은 아니리 / 오랜 고통 다한 후에 / 내 형제 빛나는 두 눈에 / 뜨거운 눈물들 / 한 줄기 강으로 흘러 / 고된 땀방울 함께 흘러 / 드넓은 평화의 바다에 / 정의의 물결 넘치는 꿈 / 그날이 오면 / 그날이 오면 / 내 형제 그리운 얼굴들 / 그 아픈 추억도 / 아 짧았던 내 젊음도 / 헛된 꿈이 아니었으리 / 그날이 오면 / 그날이 오면”

이 노래를 작사·작곡한 문승현은 ‘새벽’ 출신으로 ‘노래마을’의 백창우 등과 함께 초창기 노래운동을 이끌었다. 그들은 김민기, 한대수 등 1970년대 포크 뮤지션들의 영향을 받았다. 포크 음악은 통기타 하나만으로도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었다. 포크 계열의 어쿠스틱 사운드가 1980년대 민중가요의 근간을 이룬 이유다.

노래운동 키운 카세트테이프의 힘


▎1980년대에는 ‘새벽’, ‘노래마을’, ‘노동자노래단’, ‘예울림’ 등 다양한 노래패들이 결성돼 민중가요를 창작하고 보급했다. / 사진: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민중가요의 확산에는 카세트테이프가 지대한 역할을 했다. 카세트테이프는 누구든 간편하게 녹음하고 편집할 수 있었다. 플레이어도 비교적 싸고 사용하기 쉬웠다. 5공 치하에서 민중가요는 합법적인 경로로 판매할 수 없었다. 1980년대 중반까지 제도권 밖에서 몰래 유통해야 했다. 카세트테이프는 보급과 수용이 용이한 ‘민주적 매체’였다. 은밀한 노래는 민주화 세력의 목소리를 대변하며 멀리멀리 퍼져나갔다.

이처럼 불법이지만 민주적인 음반 유통의 효시는 1978년에 나온 김민기의 노래굿 ‘공장의 불빛’이었다. 싱어송라이터 김민기는 1970년대에 ‘아침이슬’, ‘친구’, ‘상록수’, ‘금관의 예수’ 등을 발표하며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모으는 문화적 구심점으로 자리매김했다. ‘공장의 불빛’은 동일방직 노조 탄압의 실상을 알리는 작품이었다. 동료의 녹음실에서 비밀리에 제작한 음반을 카세트테이프로 복제해 대학가와 공단 등지에 유통시켰다. 카세트테이프의 대중 확산력은 업계 화제로 떠오를 만큼 놀라웠다.

1980년대 노래운동가들은 이 유통 모델을 전국적으로 키워나갔다. 민중가요 카세트테이프는 대학가 서점, 학생회, 노동조합 등 운동권 네트워크를 활용해 판로를 넓혔다. 음반 수익은 운동단체와 활동가들을 보조하는 소중한 재원이 됐다. 대중가요에 비해 수익성도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대중가요 음반은 몇몇 인기 스타만 돈을 벌고 나머지는 소비자의 외면으로 제작비도 뽑지 못했지만, 민중가요 음반은 제작비가 적게 들 뿐 아니라 고정 수요층이 형성돼 있어 손해 볼 위험성이 낮았다. 다시 말해 크게 성공을 거두지는 못해도 열심히 하면 실패는 면할 수 있는 게 민중가요 시장이었다.

1987년 6월 항쟁과 직선제 개헌 쟁취는 제도권 밖에 머물던 민중가요의 판도를 바꾸었다. 한국 사회의 민주화가 이뤄지면서 각종 금지곡이 제재에서 풀려났고 노래운동도 합법적인 지위를 차지했다. 1987년 10월 노래모임 ‘새벽’을 중심으로 새로운 음악 단체가 결성됐다. 바로 ‘노래를 찾는 사람들(노찾사)’이었다. 1984년 ‘새벽’에서 냈던 불법 음반의 타이틀을 합법화된 노래운동 단체의 이름으로 쓴 것이다.

1980년대 후반 ‘노찾사’ 공연은 가는 데마다 성황을 이루었다. 큰 공연만 한 해에 7~8회 이상 열었다. 김광석, 안치환, 권진원 등 훗날 대중적으로 명성을 떨칠 가수들이 무대에 섰다. ‘새벽’이 낳은 ‘디바’ 윤선애도 청아하게 울리는 목소리로 함께했다.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마른 잎 다시 살아나’, ‘저 평등의 땅에’ 등 명곡들이 쏟아져 나왔다. ‘사계’는 MBC TV 프로그램 [퀴즈 아카데미]의 배경 음악으로 쓰이기도 했다.

“빨간꽃 노란꽃 꽃밭 가득 피어도 / 하얀 나비 꽃 나비 담장 위에 날아도 / 따스한 봄바람이 불고 또 불어도 /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 저 하늘엔 별들이 밤새 빛나고 / (중략) / 흰 눈이 온 세상에 소복소복 쌓이면 / 하얀 공장 하얀 불빛 새하얀 얼굴들 / 우리네 청춘이 저물고 저물도록 /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 공장엔 작업등이 밤새 비추고”

민중가요가 매주 지상파 방송에 울려 퍼지다니,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다. 민주화는 노래운동의 저변을 넓혀주었다. 1989년 10월에 낸 [노래를 찾는 사람들] 2집 음반은 무려 70만 장의 판매고를 기록했다. 대중이 민중가요에 귀 기울이는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민중가요도 대중적으로 진화했다. 새로운 단체들이 활동하면서 사운드가 풍성하고 다양해졌다. 포크 일변도에서 벗어나 록이나 트로트도 인기를 얻었다.

민중가요 대중화, 검열의 장벽 허물다


▎1989년 10월에 나온 [노래를 찾는 사람들] 2집 음반 커버. 70만 장의 판매고를 기록하며 민중가요의 대중화 시대를 열었다. / 사진:나무위키 캡처
민중가요의 대중가요화는 문화산업 지형을 바꿔놓았다. 무엇보다 사전심의를 빙자한 검열 제도를 무너뜨림으로써 창작과 표현의 자유를 확대하는 데 공헌했다. 6월 항쟁 이후 민주주의에 대한 대중의 열망이 커지면서 공연윤리위원회의 가요 심의 기준은 대폭 완화됐다. 함부로 가위질할 수 없는 사회 분위기 덕분이었다. ‘민중의 넋이 주인 되는 참세상 자유 위하여’(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기나긴 밤이었거든 죽음의 밤이었거든’(잠들지 않는 남도) 같은 표현들도 이전과 달리 사전심의를 통과했다.

“한 번 사례가 생기면 그 사례에 맞추게 되어 있으므로, 규제가 한 번 풀리기 시작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이는 대중가요의 표현과 사유의 폭을 크게 넓히는 조건을 형성해 주었다.”(이영미, ‘1980년대 조용필과 발라드의 시대’, [한국 대중가요사])

검열의 장벽은 구멍 난 둑이 무너지듯 빠른 속도로 허물어졌다.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한국 포크 음악의 대부’ 정태춘이었다. 그는 서정적인 포크송으로 출발해 차츰 사회 비판적인 노래를 짓다가 민중가요로 영역을 넓힌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다. 1990년 [아, 대한민국…]을 제작한 정태춘은 공개적으로 검열을 거부하고 보란 듯이 비합법 음반을 유통·판매했다. 공연윤리위원회의 사전심의제를 철폐하기 위해 정면 돌파를 택한 것이다. 1993년에 내놓은 정태춘·박은옥의 [92년 장마, 종로에서]도 공개적인 비합법 음반이었다.

정태춘은 검찰에 기소돼 재판을 받았지만, 대중을 만나고 동료들을 설득하며 끈질기게 저항을 이어나갔다. 사전심의를 빙자한 검열 제도에 대해 위헌 제청도 신청했다.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의미 있는 변화들이 나타났다. 1995년 서태지와 아이들의 4집 수록곡 ‘시대유감’이 심의에서 불가 판정을 받자 서태지는 가사를 고치는 대신 연주곡으로 대체해 ‘유감’을 표했다. 팬들이 들고일어났고 철폐 운동이 달아올랐다. 결국 1996년 헌법재판소의 위헌판정이 나오고 개정 법률이 시행됨으로써 가요 사전심의제는 폐지됐다.

검열 철폐 운동은 가요에서 영화로, 그리고 문화산업 전반으로 번져나갔다. 지속적인 제도 혁신에 따라 창작과 표현의 자유가 크게 증대됐고 억눌렸던 상상력과 감수성이 폭발적으로 분출했다. 오늘날 K팝과 K콘텐트가 세계적인 경쟁력을 확보하고 지구촌의 사랑을 듬뿍 받게 한 밑거름이다. 민주화의 과실이 문화예술계에서 탐스럽게 영근 것이다.

‘동지가’에 투영된 86세대의 집단 정체성


▎다큐멘터리 ‘아치의 노래, 정태춘’은 포크의 전설 정태춘이 10대 가수상, 가요 사전심의 철폐운동, 은퇴 선언을 거듭하며 겪은 40여 년 음악 인생을 대표곡 28곡과 함께 담아냈다. 정태춘은 1990년 공개적으로 가요 사전심의를 거부하고 전국을 순회하며 비합법 음반 [아, 대한민국…]을 판매했다. / 사진:NEW
민중가요는 그러나 1990년대 중반에 접어들며 대중적인 인기를 잃고 급속도로 내리막길을 탔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우선 1992년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 이후 대중가요가 청소년 취향으로 재편되는 바람에 민중가요의 입지가 좁아졌다. 김광석 등 몇몇 가수는 대중가요계에 자리를 잡았지만, 민중가요를 주도한 노래모임들은 다시 현장으로 돌아갔다. 1990년대 초반부터 유행한 노래방도 영향을 미쳤다. 학사주점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며 함께 민중가요를 부르던 대학생들이 삼삼오오 노래방에 들어가 댄스곡과 발라드에 심취했다. 노래 문화가 가볍게 바뀌면서 무게 있는 노래가 시들해진 것이다.

민중가요의 퇴조는 무엇보다 운동권의 쇠퇴와 맞물려 있었다. 민주화운동이 치열했던 1980년대에는 운동권 대학생과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민중가요를 듣고 부르고 율동까지 곁들여 즐겼다. 그들이 카세트테이프를 구매했고 공연을 관람했으며 좋아하는 노래를 전파했다. 운동권 문화의 한복판에 민중가요가 있었다. 하지만 1990년대에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민주화가 빠르게 진행되자 운동권의 존재 이유가 퇴색했다. 대학생과 노동자들의 참여도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민중가요에 대한 자발적 수요가 사그라진 것이다. 핵심 기반이 위축되면 대중적인 확장성도 기대하기 어렵게 된다. 그것이 민중가요가 부닥친 뼈아픈 현실이었다.

그런데도 민중가요는 사회운동이나 집회·시위 현장에서 여전히 생명력을 뿜어내고 있다. 호소할 곳 없는 약자의 편에서 때로는 치열한 투쟁이 되고, 때로는 따뜻한 위로가 돼 힘을 북돋우는 것이다. 86세대 운동권의 기억 속에서도 민중가요는 면면히 살아 숨 쉬고 있다. 한때 심장에 각인돼 혈관을 타고 돌았던 그 노래들이 이따금 귀에 쟁쟁하고 심금을 울린다. 그 노랫말과 음표들 사이에서 젊은 날의 자신을 마주하는 것이다.

1990년대 후반부터 젊은 나이로 정당과 국회에 진출한 86세대는 어느덧 산전수전 다 겪은 중진 정치인들이 됐다. 민주화를 쟁취한 역사의 주역이라는 자긍심은 그들의 집단적인 정체성으로 이어졌다. 민중가요 ‘동지가’의 가사처럼 끈끈한 유대감을 바탕으로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며 20년 이상 한국 정치의 주도 세력으로 아성을 쌓았다.

“휘몰아치는 거센 바람에도 / 부딪쳐 오는 거센 억압에도 / 우리는 반드시 모이었다 마주 보았다 / 살을 에는 밤 고통 받는 밤 / 차디찬 새벽 서리 맞으며 우린 맞섰다 / 사랑 영원한 사랑 변치 않을 동지여 / 사랑 영원한 사랑 너는 나의 동지”

그러나 시대 변화에도 민주 대 반민주의 적대적 정치관을 고수하고, ‘내로남불’의 위선과 몰염치로 정치 혐오를 부채질한다는 비판도 고개를 들고 있다. 최근 86세대 정치인들이 또 하나의 기득권 세력으로 지목되고 세대교체의 도마 위에 오르는 이유다. 과연 이들 민중가요 세대는 언제까지 국가권력의 중심부에서 ‘동지가’를 부를 수 있을까?

※ 권경률 - 역사 칼럼니스트이자 작가. 서강대에서 역사를 공부했다. 새로운 해석과 기발한 상상력으로 한국사에 숨결을 불어넣는다. 유튜브·페이스북에 ‘역사채널권경률’을 열어 독자들과 역사 하는 재미를 나누고 있다. [모함의 나라](2022), [시작은 모두 사랑이었다](2019), [조선을 새롭게 하라](2017) 등을 썼다.

202402호 (2024.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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