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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정신의 미학(99)] 민족운동 동량 기른 정재(定齋) 류치명 

학문하며 지름길을 좋아하지 않았다 

대산 이상정의 외증손자로 대기만성, 퇴계 학맥 정통 계승하며 학단 형성
목민관 선정에 백성들이 ‘생사당’ 세워… 사도세자 추숭 상소 올렸다 유배


▎종손 류성호 씨가 종택 사랑채에 걸린 편액 ‘정재’를 설명하고 있다. 그 오른쪽 편액 ‘양파구려’는 정재의 고조인 류관현의 호를 땄다. / 사진:송의호
"이때 서도(西道)가 크게 기근이 들어 쌀 한 말이 돈 200전이었다. 읍에 더 팔 수 있는 환곡미 3000여 석이 있었는데 새 수령이 경계에 도착할 때 시가에 따라 팔아서 관용(官用)으로 쓰려고 했다. 선생이 도착하자 곧 싼 값으로 환곡을 내니, 말 한마디 사이에 6만~7만 꿰미 돈을 던져 버린 것이다.”

한 제자가 목민관을 지낸 스승의 행장(行狀)을 지으면서 기근에 시달린 백성을 구제한 선정을 남긴 기록이다. 환곡(還穀)은 백성들에게 봄에 곡식을 꾸어 주고 가을에 이자를 붙여 거두는 방식이다. 억지로 곡식을 빌려주고 높은 이자를 받는 등 폐단이 있어 자주 원성을 샀다. 새 수령은 환곡의 부담을 줄이고 배고픈 사람을 부잣집에 나눠 배속시켰다. 혁신을 통한 애민의 실천이다.

서산 김흥락은 스승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 1777~1861)의 초산(楚山) 도호부사 시절을 소상히 전하고 있다. 초산은 평안도 북단으로 압록강을 건너면 바로 만주 땅인 국경 지역이다. 지금은 자강도로 들어간다.

정재 선생이 초산에 남긴 공덕은 여럿이다. 한번은 큰물이 진 뒤로 산과 골짜기가 변하고 옮겨져 밭도 없는데 세금은 전처럼 거둬 원성이 잦았다. 그는 다방면으로 보조하고 구획해 백성이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수령은 환곡과 조세 혁파에 이어 교육에도 공을 들였다. 주민 가운데 재주와 행실이 있는 자를 뽑아 번갈아 향교에서 학업으로 이끌고 직접 강의를 맡았다. 또 손수 ‘백록동학규’ 등을 베껴 공부하는 이들이 아침저녁으로 소리 내어 읽게 했다. 그래서 궁벽한 변방에 유학의 기풍이 크게 일어났다.

이후 그는 공조 참의에 임명된다. 초산 사람들은 그때부터 살아 있는 정재의 모습을 그려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 이른바 생사당(生祠堂)이다. 백성이 선정을 인정한 것이다.

4월 16일 선생의 자취가 남은 경북 안동시 임동면 수곡리 정재종택을 찾아갔다. 류성호 종손과 인사했다. 생사당 이야기가 나왔다. “선생은 그 말을 듣고 곧 사람을 보내 훼철하여 되돌리게 했답니다.”

종택을 둘러봤다. 규모가 큰 한옥이 잘 보존돼 있었다. 종택은 1987년 임하댐 건설로 옮겨졌다. 대를 이어 수곡(무실)에 살았던 문중은 수몰이 돼 70여 가구가 구미시 해평면 일선리로 집단 이주했다. 대체 농지가 그곳에 확보됐기 때문이다. “그래도 종택은 고향을 지켜야 한다는 뜻에서 가까운 이곳에 다시 자리 잡았습니다.” 정재의 6대 종손 류성호 씨의 설명이다. “종택 뒷산에 산소가 있습니다. 선생 곁으로 온 것이지요.”

수몰 뒤 묘소 곁으로 옮겨간 종택


류치명은 과거에 급제한 뒤 초산 도호부사 등 관직을 거치면서 경륜을 펼쳤지만, 그의 족적은 ‘퇴계의 적전(嫡傳, 정통을 계승한 학자)’이란 수식어 그대로 학문에 더 크게 남아 있다. 종택 사랑채에 ‘定齋(정재)’란 당호가 반듯한 해서체로 걸려 있다. 정재는 선생이 스스로 지은 당호이기도 하다. 그는 ‘명당실소설(名堂室小說)’이란 글에서 그 뜻을 설명하고 있다. “군자는 그 자리에 맞게 평이하게 처신하면서 천명을 기다린다 했으니 바로 정(定)을 말하는 것이다.” 단정한 글씨는 사돈인 김진화가 쓴 뒤 판각해 선물했다고 한다. 사랑방에는 성학십도 병풍이 세워져 있었다.

마당은 널찍하다. ㅁ자형 거처는 앞에 사랑채가 있고 뒤로 출입문이 별도로 있는 안채로 이루어져 있다. 류치명과 종손의 4대 조상 신주가 모셔진 사당은 담을 둘러 독립된 공간이다. 종택을 나와 오른쪽으로 100여 m 떨어진 산자락에 정자가 있었다. 만우정(晩愚亭)이다. 강학 공간인 이 정자는 본래 인근 사의동에 있었는데 임하댐이 들어서면서 옮겨졌다. 풍류의 상징인 난간이 없는 구조다. 정자 이름 만우는 선생이 81세 늦은 나이에 정자를 지어 풍경도 늦고 계책도 늦었으니 스스로 어리석다는 뜻을 담았다. 작은 안내판은 있는데 정자에 현판은 보이지 않는다. 만우정 편액은 세 개가 있다고 한다. 곧 그 가운데 흥선대원군이 쓴 지정문화재 편액을 걸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이제 정재의 본령인 학문을 살펴볼 차례다. 조선 후기 안동은 퇴계 이황을 정점으로 하는 영남학파의 본산이었다. 퇴계 학맥의 적전은 호파(虎派, 호계서원)의 경우 ‘학봉 김성일~경당 장흥효~갈암 이현일~밀암 이재~대산 이상정’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은 류치명의 외증조부다.

이마를 쓰다듬어 준 외증조부 이상정


▎정재종택 오른쪽 산자락에 자리잡은 정자 만우정의 편액. 흥선대원군의 글씨다. / 사진:한국국학진흥원
류치명은 1777년(정조 1) 외가에서 태어났다. [정재문집] ‘연보’에는 특이하게 “열세 달을 어머니 배 속에 있었다”고 적고 있다. 아이가 태어나자 대산은 이름을 지어줬다. 두 살 때 본가로 돌아와 성장한다. 그가 네 살 때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일화가 전한다. “하루는 밖에 나가 놀다가 종에게 놀림을 받았다. 모친이 꾸짖기를 ‘네가 아랫사람들과 놀기를 좋아하여 스스로 놀림을 당했으니 마땅하지 않으냐’며 종에게 곤장을 치려 했다. 선생이 저지하며 아뢰기를 ‘매를 맞는 것은 사람이 견딜 수 없는 것인데, 어찌 때리려 합니까?’라고 했다.”

류치명은 5세에 종증조 류장원 아래서 배움을 시작한다. 류영수 박사는 정재 연구에서 “류장원에 입문할 당시 류치명은 공부에 매우 둔한 모습을 보여 동학들에게 놀림을 당하기도 했다”고 서술했다. 그 무렵 류치명을 지켜본 대산의 고제(高弟, 덕망이 높은 제자) 김종덕은 대기만성을 예감한 것일까. 그는 “이 아이는 늦게 문리가 터질 수 있다”며 공부를 채근하지 말 것을 권유했다. 그해 12월 대산은 세상을 떠난다. 류치명은 “비록 촛불을 드는 등자가 되지는 못했지만 오히려 이마를 쓰다듬어 주신 사랑을 입을 수 있었으니 다행스러웠다”고 외증조를 추억했다.

21세에 류치명은 남한조를 찾아가 가르침을 청하고 3년 뒤인 1800년 첫 저술인 [주절휘요(朱節彙要)]를 완성한다. [주자서절요]를 요약·정리한 [주절휘요]는 주자와 퇴계를 계승하는 기반이 됐다. 그 무렵 서애 류성룡의 학통을 이은 정종로의 문하에도 드나들며 경전을 강론했다.

1805년(순조 5) 29세 류치명은 문과에 급제한다. 그는 이전부터 과거 급제에 뜻을 두고 응시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조부의 경계를 마음에 두고 과거를 통한 명성과 이해득실에는 담담한 자세를 견지했다. 이후 여러 차례 벼슬에 임명됐지만 초산 도호부사 등 제한적으로 나아가고 수없이 사직을 청한다. 대신 더 많은 시간을 강학과 저술 등 학자의 삶으로 보냈다. 이 과정에서 그를 따르는 수백 명 문도가 형성됐다.

급제 이듬해 류치명은 훗날 자신의 결행과 무관치 않은 선배의 처세를 조우한다. 사도세자로 더 알려진 장헌세자(莊獻世子)의 변무(辨誣, 사리를 따져 옳고 그름을 가리고 억울함을 밝히는 것)를 논한 일 때문에 전라도 완도 고금도로 귀양 가는 이우를 전별한 것이다. 이우는 증조부 대산의 아우인 소산 이광정의 아들이었다. 이우는 영남 유생 1만여 명이 사도세자를 신명(伸明)하려고 만인소를 올렸을 때, 대표 격인 소수(疏首)로 활동했다.

류치명은 그해 6월 승문원 부정자로 관직에 첫발을 디뎠다. 이어 39세에 성균관 전적, 42세에 사간원 정언 등에 임명되지만 사직한다. 그는 이후 빈번한 사의를 통해 끊임없이 향리로 돌아가 자신의 할 일인 학문에 몰두하려 했고 조정은 그를 계속 불렀다. 48세엔 사헌부 지평을 거쳐 고향으로 내려와 한 달 동안 [중용]을, 이듬해엔 [심경]을 강론했다. 또 54세엔 류건휴 등과 10년에 걸쳐 류장원의 [상변통고(常變通攷)]를 교정한 뒤 간행하고 발문을 지었다.

류치명은 57세에 교리로 임명된다. 그는 이때까지 딸 셋만 두고, 형제가 없어 삼종질로 후사를 잇는다. 이후 사간원 헌납, 승지 등에 임명됐다. 1839년 초산 도호부사로 임명된다. 류치명은 유일한 외직인 부사 재임 2년여 기간 여가를 내 묘향산을 유람하고 그 견문을 [관서유록(關西遊錄)]으로 남겼으며, 평양의 기자묘(箕子墓)를 찾기도 했다.

1843년(헌종 9) 선생은 67세에 사림의 추대를 받아 [퇴계집] 간행의 주간사(主刊事)가 된다. 또 69세에는 [대산선생실기] 10권 5책을 완성하고 발문을 지었다. 그의 학문은 대체로 대산 학설에서 나아가 이(理)는 활물(活物)로서 우주의 주체며 마음의 본체라 주장했다. 이 학설은 이후 이진상에 이르러 ‘이선기후(理先氣後)’ 사상으로 발전한다. 정재는 77세엔 한성 좌윤, 오위도총부 부총관 등 여러 차례 벼슬을 받지만 사직한다. 그해 12월엔 다시 병조참판에 임명되지만 사직소를 올린다.

“장헌세자 종묘 모시자” 상소하다 유배


▎정재종택의 솟을대문. 종택은 1987년 임하댐이 건설되면서 정재의 묘소 아래 임동면 신단지 마을로 이건됐다. / 사진:한국국학진흥원
1855년(철종 6) 선생은 79세에 일대 전환기를 맞닥뜨린다. 50년 전 이우가 고금도로 귀양 간 뜻을 떠올린 것일까? 그해 정재는 영남지역 남인의 숙원을 대변해 장헌세자를 종묘에 모시자는 상소를 다시 올렸다. 주변은 만류했다. 장헌세자 탄생 2주갑(周甲, 120년)을 맞아 종묘에 신주를 모시는 추숭부묘(追崇祔廟)의 일을 청원하는 결단이었다. “엎드려 원하 건대 전하께서는 깊이 통촉하시고 정조의 지극한 정을 마음속으로 깊이 인정하시어, 겨를 없어 못 한 전례를 곧 거행하시어 이로써 신(神)과 사람의 정을 쾌하게 하십시오.”

상소가 들어가자 조정은 들끓었다. 대사간 박내만이 상소를 보고 유배를 청했다. 정재는 이 일로 그해 4월 수백 명과 작별하고 유배지 평안도 상원으로 떠났다. 도중 새로운 명령이 떨어진다. 전라도 나주 지도(智島)로 유배지가 바뀌었다는 것이다. 금부도사가 말한다. “삼사(三司, 사헌부·사간원·홍문관)가 모두 잡아다 국문하기를 청했습니다. 대신이 또 차자(箚子, 상소)를 연이어 올리니 청한 대로 윤허했습니다. 그러나 왕이 비답으로 특별히 섬에 안치하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구한말 의병·독립운동 산파 역할


▎학자 류치명의 사상이 담긴 [정재집]. [논어] 등 사서를 읽으며 느낌을 적은 ‘독서쇄어’가 보인다. / 사진:한국국학진흥원
5월에 그는 섬에 들어갔다. 가까운 집안 동생이 곁을 지켰고 날마다 강의하고 편지 쓰는 일로 바삐 보냈다. 인근 선비들도 배움을 청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는 유배지에서 “생각하고 학문의 힘을 얻는 데 좋다”며 ‘독서설(讀書說)’을 지었다. 유배는 왕의 특명으로 11월에 풀려났다. 이 과정에서 역설적으로 류치명의 영향력과 학문적 위상은 확고해졌다. 문인의 범주도 영남과 관서 지역뿐만 아니라 호남으로까지 확대됐다.

고향으로 돌아온 정재는 81세 되던 해 후학을 위한 강학 공간인 만우정을 건립한다. 그는 정자를 세운 뒤 주로 그곳에 머물며 정계·학계 인물과 교유하거나 후학을 위한 강학 등에 전념하며 마지막 5년을 보냈다.

그는 후일 의병장 서산 김흥락, 척암 김도화 등과 파리장서운동에 참여한 서파 류필영 등을 길러냈다. 문인록에 오른 문도는 400명이 넘는다. 19세기 후반 영남의 의병과 독립운동은 류치명 학단과 직·간접으로 연결돼 있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다. 1862년 정재는 문인들에게 대산의 학문 계승을 당부하면서 8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장례에는 900여 명이 참석했다고 한다.

종택 뒤 묘소로 이어지는 구수산 산길을 올랐다. 산등성이에 이끼 낀 ‘정재선생 묘동(墓洞)’이란 표석이 나타났다. 다시 그 위에 ‘조선고병조참판정재류선생지묘’란 묘비가 서 있다. 분묘는 보이지 않았다. 유택(幽宅)은 거기서 더 올라가 산마루에 널찍이 터를 잡고 있었다. 김흥락은 스승의 행장에 “조용하고 점진적으로 축적하되 지름길을 좋아하거나 빨리 이루려고 하는 병통은 없었다”고 회고했다.

[박스기사] 앎 너머 깨달음 중시한 정재의 독서론

‘독서쇄어’와 ‘독서설’ 남기며 사상 설파

정재 류치명은 58세에 ‘독서쇄어(讀書瑣語)’라는 저술을 남겼다. [논어] 등 사서(四書)를 읽고 자신의 견해를 밝힌 일종의 독서 노트 모음이다.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던가. 사시(四時)가 운행되고 만물이 자라나니 이는 이치가 절로 그렇게 되는 것일 뿐이다. 노씨(老氏, 노자)는 무(無)를 말하였고, 불씨(佛氏, 불교)는 공(空)을 말했는데, 천지를 완전히 없애야 비로소 무를 말할 수 있고 조화와 생육이 완전히 텅 비어야 비로소 공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천지 및 조화와 생육이 저렇듯 드러나고 저렇듯 큰데 어디에서 이러한 말을 찾겠는가.”

선생은 79세 지도 유배 시절에는 또 ‘독서설(讀書說)’을 썼다. 시작 부분을 소개한다. 대학자의 독서 수상록이다. “글은 도를 싣는 것이고, 글을 읽는 것은 도를 구하기 위해서다. 글을 읽는 사람은 많은데 도를 얻기 어려운 것은 무엇 때문인지 의아하게 여겨 왔다. 공자께서 도를 아는 자는 좋아하는 자만 못 하고, 좋아하는 자는 즐거워하는 자만 못하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도를 위해 말씀하신 것이지만 독서하여 도를 구하는 것이 두 가지 일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안다는 것은 읽을 만한 책을 아는 것이고, 좋아한다는 것은 읽고서 그것을 좋아하는 것이고, 즐거워하는 것은 터득한 것이 있어서 그것을 즐거워하는 것이다.”

-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yeeho1219@naver.com

202406호 (2024.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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