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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석의 19세기 미시사 탐구(17)] 비싼 약재였던 인삼, 언제부터 재배했을까? 

18세기 중반까지는 모두 ‘자연산’… 산삼 희귀해지면서 재배 기술 발달 

담배와 함께 국가 재정 도움… 매년 일정량 공물로 거둬
공물 숫자 채우기 위해 가짜 산삼 만드는 일도 비일비재


▎충북 음성군 농촌진흥청 국립원예특작과학원 인삼특작부 시험 재배지에서 연구원들이 빨갛게 맺힌 인삼 열매를 수확하고 있다. 18세기 중반부터 산삼이 귀해지면서 자연스럽게 인삼을 재배하는 기술이 개발됐다. / 사진:농촌진흥청
담배가 해롭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여전히 수많은 사람이 담배를 피우고 있다. 정부는 한편에서는 금연구역 지정 등의 법률적 조치를 통해 흡연을 규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막대한 담배소비세를 거둬들이고 있다. 오랫동안 담배의 생산과 판매는 국가가 관리해왔는데, 이른바 전매제도다. 우리나라에서 외국산 담배를 공식적으로 수입할 수 있게 된 시기는 1986년이다. 그 이전에는 외국산 담배를 피우다 적발되면 벌금을 내야 했고, 심지어 교도소에 갈 수도 있었다. 당시 외국산 담배를 단속하는 공무원만 200명 이상이었다고 한다.

담배의 생산과 판매를 독점하던 기관은 지금은 사라진 ‘전매청’이라는 행정기관이다. 전매청에서 관리하는 품목에는 인삼도 있었다. 담배를 공식적으로 수입하게 되면서 전매청이라는 국가 행정기관은 더 이상 존립할 의의가 없어졌다. 정부는 전매청을 ‘한국전매공사’로 바꿨다가 ‘한국담배인삼공사’를 거쳐 민영화하면서 'KT&G'로 명칭을 변경했다.

담배와 인삼은 오랫동안 국가 재정에 많은 도움을 줬다. 조선시대 서울 담배 상인들이 부담하는 세금은 시장 상인이 내는 세금 전체의 5% 정도로 상당했다. 인삼은 각 지방에 배당된 특산품의 하나로, 매년 일정량을 국가에 바쳐야 했다. 담배는 수출 품목이 아니었지만, 조선의 인삼은 중국과 일본에서 인기 있는 상품이었다.

조선시대 인삼은 고가의 약재였으므로, 일반인이 쉽게 복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자연산인 산삼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희귀해져 인삼의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인삼의 인공적 재배가 필요하게 된다. 18세기 후반부터 인삼 재배가 성행하면서 19세기에는 많은 지역에서 인삼을 재배하게 된다. 특히 개성지역은 인삼 재배에 알맞은 기후와 토양을 가진 데다 홍삼 제조 기술이 뛰어나 조선인삼의 중심지가 된다.

산삼 구하기 힘들자 서울 약국에서 사서 나라에 바쳐

요즈음 우리가 시중에서 볼 수 있는 인삼은 수삼, 백삼, 홍삼 등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밭에서 뽑아낸 인삼을 물로 씻은 것이 수삼이고, 이를 말린 것이 백삼이며, 수삼을 증기로 쪄서 말린 것이 홍삼이다. 그런데 지금 시장에서 거래되는 인삼은 모두 재배한 것이고, 자연에서 채취한 산삼은 시장에서는 볼 수 없다. 산삼은 아주 희귀한 물건이 돼서 가끔 산삼을 캤다는 뉴스가 언론에 보도될 정도다.

18세기 중반까지 조선에서 생산하는 인삼은 산삼이었고, 각 지방에서 국가에 바치는 인삼도 바로 이 산삼이었다. 그러나 산삼이 점점 귀해지면서 여러가지 문제가 생기게 된다. 영조 19년(1743) 영의정 김재로가 임금에게 다음과 같이 아뢨다.

“근래에 관동지방에서 진상하는 인삼이 점점 예전만 못합니다. 수년 전에는 인삼의 크기가 작은 것으로 겨우 무게를 채우는 경우가 많았는데, 비록 지극히 보잘 것 없지만 진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는 외형을 조금 크게 보이려고 아교로 서로 붙였습니다.”

나라에 바치는 인삼(산삼)도 아주 작은 것밖에 구할 수 없어서 이 작은 산삼을 아교로 이어 붙여 크게 만들어 바쳤다는 얘기다. 18세기 중반에는 최대 산삼 산지인 강원도에서도 크기가 괜찮은 자연산 인삼을 구하기 어려웠음을 알 수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산삼은 점점 더 희귀해졌는데, 정조 14년(1790) 양산군수 남학문의 상소에서는 경상도 상황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옛날에 영남은 산삼이 나는 고장이라고 했으나, 근래에 산삼이 점점 귀해져서 집에서 재배하는 것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 고을에 부임하여 들어보니, 산삼을 나라에 바친 것이 세 번이나 퇴짜를 맞았다고 합니다. 그 까닭을 알아보니, 담당 아전이 인삼 상인에게 속아 산삼과 재배한 인삼을 합쳐 만든 것을 사다 바쳤기 때문에 여러 번 퇴짜를 맞았다고 합니다.”

국가에 바치는 산삼의 숫자는 정해져 있는데, 자기 고을에서는 산삼을 구할 길이 없으므로, 서울의 약국에서 산삼을 사서 나라에 바치는 일이 많았다. 18세기 말 경상도에서 국가에 바치는 산삼은 대부분 서울의 약국에서 구매해서 나라에 바치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서울 상인들에게 속아 가짜 산삼을 사서 나라에 바치다가 퇴짜를 맞는 일이 빈번했다.

18세기 중반부터는 이미 나라에 바치는 산삼을 구하는 일이 쉽지 않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사정이 점점 더 나빠졌다. 철종 6년(1855) 청나라 사신 행렬을 따라 중국에 간 서경순은 북경에서 중국인과 인삼에 관해 얘기하던 중 “과거에 우리나라에서는 산삼이 났으나 근래에는 아주 드물다”고 말한다. 이 말을 통해 19세기 중반이 되면 조선에서는 이미 산삼을 구하기 어려워졌음을 알 수 있다.

인터넷에서 ‘가짜 산삼’이라고 검색해보면 관련된 수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인삼이 아닌 것을 인삼이라고 속이거나 재배한 인삼을 산삼이라고 속이기도 하고, 외국산을 국내산 산삼이라고 속이는 방법 등 다양한 사기 수법이 있다. 돈이 되는 일이면 사기꾼이 꼬이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데, 조선시대 기록에서도 가짜 산삼에 관한 얘기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조선시대 가짜 산삼의 대표적인 것은 부삼(附蔘)과 조삼(造蔘)이라고 할 수 있다. 18세기 말 나온 법령집인 [전율통보]에는 “부삼이나 조삼 같은 것은 은전(銀錢)을 위조하였을 때 처벌하는 법률에 따른다”고 했다. 은전의 위조는 화폐를 위조하는 범죄였으므로 사형에 처하게 돼 있었는데, 부삼이나 조삼같은 가짜 인삼을 만드는 일도 마찬가지로 그 죄가 사형에 해당됐다.

부삼은 본래 인삼에 다른 인삼을 아교나 풀로 붙여 크기를 크게 늘리는 방식으로 만든 인삼을 말한다. 작은 것끼리 붙여 크게 만들기도 하고, 다른 인삼을 큰 인삼에 덧붙이기도 하는데, 때로는 인삼이 아닌 더덕과 같은 이물질을 넣거나 붙이는 방식으로 크기를 늘리기도 했다.

아교로 붙여 크기를 크게 늘리는 가짜 산삼은 부삼(附蔘)

조삼은 가짜 산삼을 만드는 것으로, 여러 방법이 있었다고 한다. 산삼 뿌리의 머리 부분을 재배한 인삼의 몸통에 붙이고, 산삼 껍질에 다른 것을 채워 넣어 산삼 모양을 만들기도 하며, 인삼과 관련이 없는 식물로 인삼의 모양을 만드는 방법도 있었다.

이덕무(李德懋, 1741~1793)의 [청장관전서]나 이학규(李學逵, 1770~1835)의 [낙하생집]에는 가짜 산삼을 만드는 방법이 자세히 나온다. [청장관전서]에는 해방풍(海防風)이라는 약초를 여러 약초 삶은 물에 넣어 가짜 인삼을 제작하는 방법이 쓰여 있고, [낙하생집]에는 작은 인삼으로 큰 인삼을 만드는 여러 방법이 실려 있다.

산삼이 희귀해지면서 나라에 바치는 공물 숫자를 채우기 위해 가짜 산삼을 만드는 일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19세기 들어서는 가짜 산삼을 만들어 큰 이익을 남기려는 조직적 범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국가유산청(옛 문화재청)은 2020년 12월 1일부터 ‘인삼재배와 약용문화’를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했다. 2016년부터 전통 지식 분야에도 무형문화재 지정이 가능해졌는데, 농경 분야에서 무형문화재가 지정된 것은 인삼 관련 분야가 첫 사례라고 한다. 무형문화재 가운데는 종목만 지정하고 특정 보유자나 보유 단체는 지정하지 않는 종목이 있는데, ‘씨름’이나 ‘장 담그기‘와 마찬가지로 ‘인삼재배와 약용문화’도 보유자를 따로 지정하지 않았다.

인삼을 재배하고 가공하는 기술과 함께 약으로 쓰는 문화를 국가에서 무형문화재로 지정한 이유는 우리나라에서 인삼 관련 문화의 역사가 오래됐고, 전국적으로 전승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나라 인삼은 오래전부터 동아시아에서 그 명성이 자자했고, 현재도 그러한 명성이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다. 조선시대에도 중국과 일본에 인삼을 수출했고, 베트남에서도 조선인삼이 유통됐다. 21세기에 들어서는 중국과 일본은 물론이고 미국 등 100여 개국에 수출한다. 인삼통계자료집에 따르면 2022년 인삼 수출액은 2억7000만 달러라고 한다.

18세기 중반부터 산삼이 귀해지면서 자연스럽게 인삼을 재배하는 기술이 나오게 되는데, 재배한 인삼을 가삼(家蔘)으로 불렀다. 재배한 인삼이 나오기 전에는 인삼이라고 하면 자연산 산삼을 말하는 것이었지만, 18세기 후반이 되면서 재배한 인삼인 가삼이 퍼지게 된다. 유득공은 인삼을 재배하는 방법에 대한 기록을 남기면서 가삼 가격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근래에 약방에서 영남 사람이 재배한 가삼을 많이 판다. 산삼에 비해 맛과 효력이 조금 떨어지지만, 값은 3분의 1밖에 안 되어서 약을 복용하는 사람들이 편리하게 여긴다.”

이 기록을 통해 1800년 무렵 서울의 약방에서 판매하는 가삼 가격은 산삼의 3분의 1정도였음을 알 수 있다. 유득공은 인삼 재배가 경상도에서 시작돼 충청도로도 퍼지고 있다고 하면서 경상도에는 인삼을 재배해 돈을 번 사람도 꽤 있다고 말했다. 유득공은 백성들이 산삼을 나라에 바치느라 고생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인삼을 재배해 나라 안에 인삼이 풍부해지면 백성의 삶이 좀 나아질 수 있다고 생각해서 인삼을 재배하는 방법을 적어놓는다고 했다.

조선시대 인삼의 재배가 전국적으로 이뤄진 시기가 언제인지는 전문 연구자들도 확실하게 얘기하지 못하고 있다. 유득공은 1807년 세상을 떠났는데, 그가 생존했던 동안에는 인삼 재배가 전국적으로 이뤄지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인삼 재배에 관한 기록은 유득공 외에도 서유구의 [임원경제지], 이학규의 [낙하생집] 등에도 나타나는데, 특히 서유구와 이학규는 인삼 재배에 관해 상당히 자세한 기록을 남겼다.

조선의 인삼 재배에서 흥미 있는 내용을 기술한 사람으로는 한치윤이 있다. 그는 [해동역사]라는 역사서를 저술한 인물인데, 이 역사책에 조선의 인삼 재배에 관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남겼다.

“북쪽을 향한 깨끗한 땅의 오래 묵은 땅을 골라서, 씨를 뿌려 인삼 뿌리를 기른다. 그리고 발을 짜서 그 위를 덮어 소낙비와 따가운 햇볕을 가려 준다. 10월이 되면 인삼을 모두 캐내어, 구덩이를 파서 인삼을 넣고 두텁게 흙을 덮어 겨울에 어는 것을 막는다. 다음해 청명 무렵에 다시 꺼내 전해에 한 것과 같이 심는다. 3~4년이 지나면 크기가 뱀딸기만한 열매가 달리는데, 가을에 따서 햇볕에 말려 약에 넣는다.”

이 인삼 재배 방식은 현재 방식과 크게 차이가 없다. 다만 흥미 있는 것은 인삼은 뿌리를 쓰기 위해 재배하는 것인데, 한치윤은 열매를 약용으로 쓰는 것을 말했다는 점이다.

18세기 말 퍼지기 시작한 인삼의 재배는 거의 없어지다시피 한 산삼을 대체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인삼 제품인 홍삼을 내놓게 된다.

산삼 값의 3분의 1로 대중화 이끈 재배삼은 가삼(家蔘)


▎18세기 중반까지 조선에서 유통되던 인삼은 모두 자연산인 산삼이었다.
우리나라 건강기능식품 시장에서 홍삼이 차지하는 비율은 전체의 약 4분의 1이라고 한다. 문자 그대로 홍삼은 건강기능식품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다. 홍삼을 언제부터 만들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중국 송나라 사신이 고려에 왔다가 돌아가서 쓴 [고려도경]에 이미 인삼을 쪘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제조 방식의 홍삼이 나타난 시기는 18세기 후반 인삼 재배가 성행한 이후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정조 21년(1797) 국가가 정한 인삼에 관한 법률에는 인삼 무역은 중국어 통역관과 서울 상인들이 전담하게 돼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의주 상인들도 끼어들게 되면서 인삼 무역은 서울과 의주 상인이 통역관들과 함께 담당했다. 이때 수출하는 인삼은 재배한 인삼을 쪄서 만든 홍삼으로, 홍삼 제조 공장은 서울에 있었다.

홍삼을 제조하기 위해서는 먼저 건물을 짓고, 건물 안에 대나무를 가로로 꽂아 시렁을 만든다. 그리고 시렁 위에 쪄낸 인삼을 차례로 놓아둔 다음 밑에서 숯불을 피워 인삼을 말린다. 말리는 동안 인삼 색이 검게 변하지 않도록 하고, 또 가끔 꺼내서 바람과 햇볕을 받도록 한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인삼을 말려 홍삼을 제조하는 공장을 증포소(蒸包所)라고 하는데, 초기 증포소는 서울 한강변에 있었다.

인삼 재배는 다른 지역에서 시작됐지만, 19세기 초 조선의 인삼 생산 중심지는 개성이 된다. 순조 11년(1811) 서울 한강변에 있던 증포소를 개성으로 옮겼다. 이때가 되면 개성에서는 인삼 재배가 성행해 많은 인삼을 생산하는데, 홍삼을 만들기 위해 서울까지 인삼을 운반하는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증포소를 개성으로 옮긴 것이다.

증포소를 개성으로 옮긴 이후부터 홍삼 제조는 개성에서 도맡게 되고, 허가받지 않은 사람은 홍삼을 제조할 수 없었다. 순조 21년(1821) 개성유수 오한원이 왕에게 올린 상소를 보면 “개성 주민 중 많은 사람이 인삼 재배를 생업으로 삼고 있는데, 매년 북경(北京)에 들어가는 홍삼은 전부 이곳에서 생산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개성의 홍삼 제조업자들은 허가받지 않고 홍삼을 제조하는 자들을 색출하는 일도 하고 있었다.

중국 수출 인삼이 홍삼으로 바뀌면서 국가 통제 강화


▎쪄낸 인삼을 건조해 홍삼을 제조하는 모습. 지금과 같은 제조 방식의 홍삼이 나타난 시기는 18세기 후반 인삼 재배가 성행한 이후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홍삼은 중국에서 특히 인기가 있어서 중국에 사신으로 간 사람 중 중국인과 홍삼 관련 대화를 기록해놓은 자료들이 있다. 19세기 어떤 자료에는 중국인이 백삼과 홍삼 중 어떤 것이 나은지 물었다는 내용이 있는데, 조선 사람이 홍삼이 낫다고 하며 값도 홍삼이 조금 비싸다고 했다. 19세기에 중국에 수출하는 인삼이 홍삼으로 바뀌면서 홍삼에 대한 국가의 통제가 매우 강화된다.

허가 없이 홍삼을 만드는 것을 금지했고, 홍삼을 몰래 외국에 파는 일도 국가에서 철저히 관리했는데, 특히 외국에 몰래 팔다 적발되면 사형 당했다. 철종 14년(1863) 개성 사람 민치각은 홍삼을 몰래 만들다가 적발돼 매를 100대 맞고 경상도 인동(현재 구미시)으로 귀양 갔다. 그리고 1866년 개성상인 박경담은 홍삼을 몰래 제조하다가 붙잡혀 먼 곳의 섬으로 평생 귀양을 갔다.

이렇게 국가가 홍삼 제조를 철저히 통제했는데, 홍삼에서 거둬들이는 세금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허가받지 않고 홍삼을 외국에 가지고 가서 팔다가 적발되면 사형에 처했다. 고종 3년(1866) 몰래 홍삼을 중국에 팔려고 하다가 황해도에서 적발된 두 사람을 체포했는데, 이들은 황해도 바다를 통해 중국인에게 팔려고 했다. 조정에서는 이 두 사람을 사형에 처하되, 사람을 많이 모아 놓고 형을 집행해 경종을 울리라고 했다.

1987년 전매청이라는 국가기관이 폐지되기 전까지는 개인이 인삼을 자유롭게 재배해 판매할 수 없었다. 그런데 국가가 인삼 재배와 판매를 독점하는 이 제도는 18세기 말부터 있었고, 식민지시기를 거쳐 20세기 말까지 존재했다. 이처럼 인삼 제조와 판매를 국가가 독점하는 이유는 이 사업에서 나는 이익이 많기 때문이다.

지금은 인삼이나 홍삼도 흔하고, 인삼이 들어간 다양한 상품을 시중에서 볼 수 있으며, 값도 그렇게 비싼 편이 아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산삼은 주로 궁중에서 쓰는 귀한 약재였고, 백삼이나 홍삼도 일반인이 쉽게 복용하기 어려웠다. 19세기에 개성이 인삼 재배와 홍삼 제조의 중심이 돼 많은 양을 생산했다고 하지만, 인삼은 여전히 비싼 약재였지 지금 같은 건강기능식품은 아니었다.

※ 이윤석 - 한국 고전문학 연구자다. 연세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고, 2016년 연세대 국어국문학과에서 정년 퇴임했다. [홍길동전]과 [춘향전] 같은 고전소설을 연구해서 기존의 잘못을 바로잡았다. [홍길동전] 이본(異本) 30여 종 가운데 원본의 흔적을 찾아내 복원했을 뿐만 아니라 작품 해석 방법을 서술했다. 고전소설과 관련된 저서 30여 권과 논문 80여 편이 있다. 최근에는 [홍길동전의 작자는 허균이 아니다]와 같은 대중서적도 썼다.

202407호 (2024.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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