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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케다 다이사쿠 칼럼]미국 하버드대학교 강연 ‘21세기 문명과 대승불교’(4) 

참된 ‘나’의 위대한 연대가 평화의 세기를 연다 

인간계와 자연계 모든 존재는 서로 의존하며 우주 구성
자신에게 충실한 주체적 삶들이 보편적 하나 이루는 원소


▎1993년 9월 미국 하버드대학교에서 이케다 다이사쿠 국제창가학회(SGI) 회장의 두 번째 강연이 열렸다. 이케다 회장은 ‘21세기 문명과 대승불교’라는 주제로 대승불교가 21세기 문명에 공헌할 수 있다는 관점을 제시했다. / 사진:한국SGI
1993년 9월, 이케다 다이사쿠(池田大作) 국제창가학회(SGI) 회장이 미국 하버드대학교에서 ‘21세기 문명과 대승불교’라는 제목으로 두 번째 강연을 했습니다(첫 번째 강연은 1991년 9월). 이 강연을 4회에 걸쳐 소개합니다. 이번 최종회에서 대승불교가 21세기 문명에 공헌할 수 있다는 관점을 세 가지로 요약해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대승불교가 21세기 문명에 공헌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관점 중 첫째, ‘평화 창출의 원천’, 둘째 ‘인간복권의 기축’이라는 지난 호에 이어)

셋째, ‘만물이 공생하는 대지’라는 관점입니다.

법화경에서는 수많은 비유를 설하는데, 그중에는 광대한 대지가 골고루 단비를 맞아 크고 작은 온갖 초목이 생생하게 싹트는 묘사가 있습니다. 한 폭의 명화를 보듯 웅대하고 역동적인 참으로 법화경다운 생명의 약동은, 직접적으로는 부처의 평등대혜(平等大慧)한 법에 감싸여 모든 사람이 불도(佛道)를 이루어가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인간과 산천초목에 이르기까지 부처의 생명을 호흡하면서 개성 풍부하게 생(生)을 구가하는 ‘만물이 공생하는 대지’의 이미지를 훌륭하게 상징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불교에서는 ‘공생(共生)’을 ‘연기(緣起)’라고 설합니다. ‘연기’를 ‘연하여(緣) 일어 남(起)’이라고 쓰듯이 인간계든, 자연계든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은 없고, 모든 것이 서로 연(緣)이 되면서 현상계(現象界)를 형성합니다. 다시 말해 사상(事象)의 참모습은 개별성이라기보다는 관계성이나 상호의존성을 근저로 삼고 있습니다.

살아 있는 모든 존재는 서로 관계하고 의존하면서 살아 있는 하나의 코스모스(내적 조화), 철학적으로 말하면 의미연관(意味連關)의 구조를 이룬다는 것이 대승불교에서 바라보는 자연관의 골격입니다.

일찍이 괴테는 [파우스트]에서 “모든 것이 하나의 전체를 만들어낸다. 하나하나가 서로 살아 움직인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불교적 식견에 관해 젊은 벗 에커먼은 “예감은 하지만 실증이 없다”라고 평했는데, 그 뒤 백수십 년이 지나면서 그 괴테의, 나아가서는 불교의 연역적 발상의 선견성이 꾸준히 입증되고 있습니다.

인과율(因果律)을 예로 들면, 연기론(緣起論)에서 말하는 인과율은 근대과학에서 말하는 인간의 주관으로부터 분리된 객관적인 자연계를 지배하는 기계론적 인과율과 전혀 다른 인간 자신을 포함한 넓은 의미의 자연계에 걸쳐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재해가 일어났다고 합시다. 그 재해가 어떻게 해서 일어났을까. 그 일정한 원인은 기계론적 인과율로 규명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거기에는 왜 자신이 그런 재해를 당했는가 하는 식의 물음은 결정적으로 어울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실존적 물음을 잘라낸 데서 성립한 것이 기계론적 자연관입니다.

살아 있는 모든 존재에 통하는 상호의존 관계

불교에서 설하는 인과율은 “무엇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이 있는가?”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이 있다”라는 석존의 원초적인 응답이 나타내듯이, 그러한 ‘왜?’라는 물음을 정면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깊은 사색을 통해 중국 천태대사 지의의 유명한 ‘일념삼천(一念三千)’론처럼 근대과학과도 충분히 정합성(整合性)을 갖는 웅대하고 정밀한 논리를 전개합니다. 이처럼 현대의 생태학, 트랜스퍼스널심리학, 양자역학 등은 각각의 관점에서 그러한 불교적 발상과 친근해지고 있는 듯합니다. 그런데 관계성이나 상호의존성을 강조하면 자칫 주체성이 매몰돼버리지 않을까 생각하기 쉬운데, 여기에는 오해가 하나 있는 것 같습니다.

불전에는 “나야말로 나의 주인이니 어찌 주인이 따로 있으랴. 자신을 잘 다스리면 얻기 힘든 주인을 얻으리라” “마땅히 자신을 등불로 삼고 법을 등불로 삼아라. 다른 것을 등불로 삼지 말라. 자신에게 귀의(歸依)하고 법에 귀의하여 다른 데에 귀의하지 말라”라고 씌어 있습니다.

두 구절 모두 ‘다른 것에 분동되지 말고 자신에게 충실하면서 주체적으로 살아가라’고 강하게 촉구합니다. 다만 여기서 ‘나’와 ‘자신’이라는 말은 이기주의에 사로잡힌 작은 자신, 다시 말해 ‘소아(小我)’가 아니라,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무한히 인과(因果)로 얽혀 있는 우주생명에 융합하는 커다란 자신, 다시 말해 ‘대아(大我)’를 가리킵니다.

“자신을 등불로 삼고 다른 데에 귀의하지 말라”


▎경주 불국사의 다보탑과 석가탑. 현재의 부처(석가여래)가 법화경을 설법하자 그 앞에 과거의 부처(다보여래)가 화려한 탑으로 솟아났다는 법화경 중 ‘견보탑품(見寶塔品)’을 형상화했다. “모든 존재는 서로 관계하고 의존하면서 살아 있는 하나의 코스모스”라는 대승불교 철학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러한 ‘대아’야말로 심리학자 카를 구스타프 융이 ‘자아(에고)’ 깊은 곳에 있는 대문자 S의 ‘자기(Self)’라 부르고, 에머슨이 “모든 부분과 분자가 평등하게 맺어지는 보편적인 아름다움, 영원한 하나”라고 부른 차원과 깊이 공명하고 서로 공진(共振)하면서 다가올 세기에 ‘만물이 공생하는 대지’를 만들어내리라 저는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것은 또 휘트먼이 인간의 혼(魂)을 예찬하며 읊은 시 한 구절을 떠올리게 합니다.

나는 뒤돌아서
그대를 부른다
오 혼이여, 그대야말로 참된 ‘나’
그러자 그대는 참으로
아주 상냥하게
모든 천체를 휘하에 넣고
그대는 ‘시간’의 반려자가 되어
‘죽음’을 향하여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면서
‘공간’의 광활함을
빈틈없이 채우고
마음껏 부풀린다


대승불교에서 설하는 이 ‘대아’는 일체중생의 고(苦)를 자신의 고로 삼아 나아가는 ‘열린 인격’의 이명(異名)이고, 늘 현실사회의 사람들을 향해 발고여락(拔苦與樂)의 행동을 펼칩니다.

이러한 위대한 인간성의 연대야말로 이른바 ‘근대적 자아’의 폐색(閉塞)을 뚫고 나가 새로운 문명이 지향해야 할 지평을 열어주지 않을까요. 그리고 또 ‘생(生)도 환희, 사(死)도 환희’라는 생사관은 이 역동적인 대아의 맥동 속에서 확립되는 것이겠지요.

니치렌(日蓮) 대성인의 [어의구전]에는 “사상(四相, 생로병사)을 가지고 우리의 일신(一身)의 탑을 장엄하느니라”(어서 740쪽)라고 씌어 있습니다. 저는 21세기의 인류가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의 보탑’을 빛내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그리고 ‘열린 대화’의 장대한 교향(交響)으로 이 푸른 지구를 감싸면서 ‘제3의 천 년’을 향해 신생의 한 걸음을 내딛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그 광채 빛나는 ‘인간과 평화의 세기’의 여명을 응시하면서 강연을 마치겠습니다. 경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케다 다이사쿠 전집] 제2권 수록. 직함이나 시기 등은 강연할 당시를 기준으로 했습니다.

※ 이케다 다이사쿠(1928~2023) - 국제창가학회(SGI) 회장 역임. 소카대학교·소카학원·민주음악협회·도쿄후지미술관·동양철학연구소 등 설립. 유엔평화상·대한민국 화관문화훈장 등 24개국 훈장, 세계계관시인 등 수상 다수. 전 세계 대학으로부터 409개의 명예박사·명예교수 칭호 수여. 토인비 박사와의 대담집 [21세기를 여는 대화]를 비롯한 저서 다수.

202408호 (2024.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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