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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A의 핫피플 & 아트(26)] 회화, 설치, 조각, 판화 넘나드는 홍순명 작가 

부분이 모여 거대한 하나 이루고 주변이 있기에 중심이 돋보인다 

사회적 이슈의 현장에서 얻은 재료로 ‘그날의 기억’ 각인
여러 조각으로 대형 작품 만드는 독창적 기법으로 주목


▎홍순명 작가의 작품은 독창적이다. 수많은 조각이 모여 하나의 거대한 작품을 이룬다. 독일의 물리학자 하이젠베르크의 〈부분과 전체〉를 읽고 영감을 얻었다. 2022년 아그네스파크 전시장에 걸린 작품 ‘아쿠아리움’ 앞에서. / 사진:홍순명
"우리 삶에 중심과 주변이 나뉘어 있을까? 있다면 이를 와해시킬 방법은 없을까? 주변이 독립해 홀로 서면 중심도, 주변도 사라질까?” 40여 년을 회화, 설치, 조각, 판화 등 다양한 매체를 넘나들며 평면과 입체로 풀어온 홍순명 작가의 오랜 화두다.

부산대 미술교육학과를 졸업하고, 파리 국립고등미술학교에서 석판화를 전공했다. 초기의 판화 작품은 직관적이며 적나라했다. 졸업 후 2000년대 초까지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설치 작업으로 유수 화랑에서 작가 인지도 상승과 함께 많은 주목을 받았다. 사실 홍순명 작가는 1990년대 초 독일의 물리학자 하이젠베르크의 저서 [부분과 전체]를 읽고 작품 내용과 형식 면에 많은 영감을 얻었다. 그 영감을 2003년부터 페인팅과 입체 작품에 본격적으로 가미해 직접적이거나 상투적이지 않고 은유적으로 풀어냈다. 20여 년 해온 가장 대표적인 연작 [사이드스케이프(Sidescape)]는 한국의 사회·정치적 문제뿐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에서 이슈가 된 사건의 보도사진을 수집하고, 사건의 중심에서 벗어난 사이드를 선택해 수십 또는 수백 개로 나눠 그리는 식으로 작품을 만들었다. 여러 개로 나눠진 그림이 종국에는 전체를 관통하며 ‘부분과 전체’라는 화두를 유감없이 드러냈다. 작은 조각들이 모이고 모여 거대한 풍경이 되어 압도하듯 언젠가 우리 사회에 나비효과를 가져오지 않을까.

獨 하이젠베르크의 '부분과 전체'에서 영감

홍순명 작가는 [호반미술상 수상 기념전](2023, 용산 전쟁기념관), [저기](2023, 씨알콜렉티브), [비스듬히 떨어지는 풍경-재난, 가족](2022 사비나미술관) 등 다수의 개인전과 [APRICITY](2024, Frieze No. 9 영국), [나, 너의 기억](2022, 국립현대미술관), [보이스리스](2018, 서울시립미술관) 등의 그룹전에 참여해 부드러운 변주와 환유로 비판적 희망을 제시했다.

특히 [메모리스케이프(Memoriscape)]를 비롯한 많은 연작을 통해 동시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회·정치적 쟁점들을 환기시키며 우리에게 질문거리를 던진다. 밀양의 송전탑 건설 현장과 여수의 기름 유출 사건, 세월호의 상징적 공간 팽목항 등 현장 주변에 버려진 나뭇가지와 의자, 깨진 부표, 선풍기 날개 등의 여러 사물은 그에게 훌륭한 작품 소재다. 현장에서 수집한 물건들을 쌓거나 엮어 비닐랩으로 감아 고정한 뒤 캔버스 천을 덧씌워 ‘여기 있었음’을 봉인한다.

불규칙적으로 튀어나온 울퉁불퉁한 사물의 집합체는 언뜻 원초적인 생명체가 꿈틀거리는 듯 기묘하게 재탄생하고, 그 표면에 그린 어느 한 장면의 일부분은 ‘나는 보았다. 그런데도’의 여운을 남긴 매서운 각인과 다름없다. 우리 안에 내재한 상실감과 아픔을 되살린 일부분이 사건 전체를 대변한 명작이다.

뿐만 아니라 미메시스아트뮤지엄에서 선보인, 10여 년에 걸쳐 그려온 3000여 점의 풍경과 직접 촬영한 여수 아쿠아리움의 흰고래를 캔버스 91개에 나눠 그린 ‘아쿠아리움-1402’ 역시 많은 주목을 받았다. 제1회 호반미술상과 제17회 이인성미술상을 수상할 정도로 그의 작품은 이미 정평이 나 있다. 현재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파리 국립고등미술학교 등에 소장돼 있다. 파주 작업실에서 만나 진행한 인터뷰는 그의 미적 항해를 더욱 인상 깊게 했다.


▎2014년 미메시스 미술관 개인전.
얼마 전, 호반미술상 첫 번째 수상자로 선정됐다. 어떤 점 때문이라고 생각하나?

“이전에 대구미술관 이인성 상도 받았다. 그 상을 받는 바람에 심사하게 됐고, 다양한 심사를 많이 해봤지만, 내가 왜 호반미술상을 받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재수 좋은 놈이 받은 것 같다. 근본적으로 예술에 무슨 등수가 있겠는가. 누가 더 잘했고, 누가 잘못했고 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상을 받으면 좋은 점 하나는 내 그림을 공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어 좋고, 상금 주니까 좋다.”

초기에 했던 판화는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고등학교 미술부에서 판화를 처음 시작했다. 대학내내 판화를 하고 프랑스로 유학을 가서 석판화를 전공했다. 대학교 1학년 때 부산의 국제시장에서 수건에 실크스크린 하는 것을 보고, 따라 해보니 어렵지 않아 집에 판을 만들어 시작했다. 2학년 때 부산미전에서 특선을 받고, 4학년 때는 금상을 받았다. 당시에 대학생이 금상을 받은 건 처음이었다. 그때 작가를 할까? 자신감 같은 게 생겼다.”

대학생 때 판화로 부산 미전에서 금상


▎2022년 사비나 미술관 개인전.
그런데 1989년도에 돌연 판화를 그만뒀다. 계기가 있었나?

“프랑스 유학 생활 중 판화가 세계 미술시장에서 장래가 밝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안 되겠다 싶어서 1년에 40학점을 받고 3년 만에 빨리 졸업했다. 당시에 잘나가는 작가들을 봤더니 설치 아니면 영상이었다. 학교에서 졸업생들에게 1년간 기회를 주기 때문에 설치 관련 수업을 청강하면서 전시 준비도 하고, 공모전도 냈다. 그런데 3년 동안 공모전에서 100% 떨어져 내 길이 아닌가 생각할 정도였다. 돌이켜 보면 그 시간이 작업하는 데 좋은 에너지로 작용했다.”

판화를 그만둔 뒤에는 어떤 방향으로 작업을 전개했는지 궁금하다.

“실험적인 작업을 했고, 2000년대 초까지 설치 작품을 했다. [운석] 작품은 종이 찰흙으로 만든 길쭉한 돌덩어리 조각이다. 사람이 들어갈 수 있게 안이 파여 있고, 밑에 구멍이 뚫려 들어가면, 깜깜한 곳에 별들을 박아놓아 그 안이 우주처럼 느껴진다. 돌멩이 안에 우주가 있고, 그 우주 안에서 이 돌을 어딘가에서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을 다시 할 수 있다는 식으로 역전되는 작품들을 했다. 또 다른 작품은 귀국 후 [부분과 전체]라는 제목으로, 책장처럼 보이는데 수백 개의 캔버스가 꽂혀 있고 이 옆면에 그림을 그렸다. 멀리서 보면 책장 같은 게 있는데 전체 그림으로 받아들이도록 했다. 하나를 뽑으면 레진으로 만든 물방울이 하나씩 있다. 물방울 하나와 바다 전체의 관계에 대한 것인데 관객 반응도 좋았다.”

1990년대 초반부터 [부분과 전체]라는 주제로 계속해 오고 있는데, 그 이유가 있을 것 같다.


▎세월호 참사 이후 팽목항에서 수집한 재료들로 만든 작품. Paengmok. April. 2015.
“독일의 물리학자 하이젠베르크의 [부분과 전체]라는 책을 읽고 감동 받았다. 파리에 있을 때 서양의 앵글로색슨 계통 백인 남성은 지구의 주인공인 반면 한국 유학생은 난민과 별반 구분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예를 들어 백인 주인공과 엑스트라의 관계 등 이런 것들을 역전시키거나 대치시킨다고 할까. 양자역학 등에서 느낀 점들을 가지고 사전적 의미와는 다른 세상의 본질적인 것들을 ‘부분과 전체’로 부각하면서 작업을 이어왔다.”

'메모리스케이프(Memoriscape)' 연작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우리 주변의 사건 사고를 작품화했다. 특히 기성세대로서의 미안함과 죄책감으로 진도 팽목항을 자주 갔는데, 어느 날 폐쇄된 해수욕장에 종일 앉아 있다가 ‘야 너는 좀 봤잖아’,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라고 생각하다가 팽목항이 세월호의 상징적인 현장이라 이곳에 버려진 오브제로 타임캡슐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트럭에 의자, 나뭇가지, 조개, 부표 등을 주워 와 얼기설기 넣어 랩으로 감은 다음 그 위에 캔버스 천을 입히고, 사건의 부분을 그렸다.”

가장 대표적인 작품을 꼽는다면?


▎1997년 작 ‘부분과 전체(The part and the whole-sea)’. 책장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그림이 그려진 수백 개의 캔버스가 꽂혀 있다.
“장르마다 좋아하는 작품이 있을 뿐 대표 작품은 없다. 굳이 꼽자면 아내하고 찍은 뒷모습 사진으로 만든 판화 작품이 있고, 2000년대 초까지 설치 작업을 했다. 멋있고 화려하긴 한데 내 옷이 아니라는 생각에 접었지만, 현대화랑 전시도 반응이 좋았고 작가 인지도가 올라갈 정도로 평이 좋았다. 미국 9·11 테러 당시를 기억하기 위해 만든 작품 [911]과 [아쿠아리움]도 좋아한다. 여수 아쿠아리움에 있는 고래를 직접 사진을 찍고, 91개로 나눠 그렸는데 NFT도 만든 작품이다.”

프랑스 유학 중 설치 미술로 전환


▎1981년 지금의 아내와 연애하던 시절 찍은 사진- 가장 기억에 남은 사진. 이 사진을 이용한 작품으로 1982년 부산미전에서 금상을 수상했다.
대형 작품 한 점이 아니라 굳이 수백 장, 또는 수천 장을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하는 것도 독특하다.

“그 정도로 크게 그릴 데가 없고, 운반도 안 된다. 보관도 거의 불가능하다. 물리적인 이유도 있지만, 순전히 그리기만을 하고 싶은 이유가 크다. 그리기만 하면 비구상을 그릴 수밖에 없다. 그건 싫어서 그림은 그리되 묘사할 방법을 생각했다. 대형 작품은 사건의 중심이 아닌 ‘사이드스케이프(Sidescape)’를 계속 그려나가는 것이다. 예를 들어 화분을 그린다고 치자.“하나의 화분 이미지를 100개로 나누면 그중 한 조각은 화분이 아니다. 화분이 가지고 있는 정보를 다 잃게 된다. 색깔과 붓 터치와 뉘앙스, 속도 같은 것만 남아 그냥 하나의 무언가로 남게 된다.”

보도사진에서 어느 한 부분만 선택해 그림으로 그린다. 어떤 이유가 있는가?

“그림만 보면 어떤 사건이 일어난 현장인지 전혀 알 수 없다. 중요한 것을 벗어난 것들이다. ‘사이드’라는 것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앞서 말한 책으로 연결된다. 파리에서 설치미술을 하다가 페인팅으로 넘어올 때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보도사진에서 중요한 것을 비켜간 한 부분을 그리게 됐다. 사실 ‘작은 것’과 ‘큰 것’에 관한 것으로, ‘진짜 그게 더 큰 거야’, ‘정말 이것이 더 중요한 거야’에 관한 이야기다.”

“사건은 반드시 ‘중심’과 ‘사이드’로 구성된다”

왜 ‘보도사진’인가?

“반드시 보도사진이 필요한 건 아니다. 보도사진을 처음 하기 시작한 것은 ‘사이드’라는 단어 때문이다. [911] 테러 그림도 핵심인 건물은 모두 제외하고 건물 위 연기만 그렸다. 보도사진은 정확하게 사건의 핵심과 중심을 찍어 보도한다. 필연적으로 사이드가 있게 되고, 사이드가 있다는 건 반드시 중심이 있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실제 사건에 이 두 요소가 있고, 필요한 이미지를 하루에 수십만 장 찾을 수 있는 장점도 있다.”

초기 작품과 최근 작품을 놓고 봤을 때 어떤 변화가 있나?

“초기에는 판화 작업을 하다가 그만두고, 2003년부터 지금까지 페인팅과 입체 작업을 하고 있다. 작품 주제도 40년을 해오다 보니 일관성도 보이지만 그때그때 읽은 책이나 경험 때문에 바뀌곤 했다. 첫 전시 이후 관심사에 따라 50대까지도 계속 변화가 있었는데 얼마 전부터 안 바뀌고 있다. 관심사가 더 이상 없는 게 아니라 관심사와 작업이 따로 분리돼, 지금까지 해온 주제를 좀 더 가지치기하고 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기억에 남은 사진이 있다면?

“대학생 때 사귄 여자와 결혼해서 평생 살고 있다. 연애할 때 아내하고 찍은 뒷모습 사진으로 판화 작품을 만들어 공모전에 냈다. 어찌 보면 그때 금상을 받는 바람에 작가의 길로 들어서게 됐다고도 할 수 있다. 물론 작가가 되려고 결심한 것은 30대 중반을 넘어서였다. 누구나 인생에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한두 가지가 있기 마련인데 결혼하기 몇 년 전 아내와 찍은 사진이 그렇다.”

※ JOA(조정화) -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하고, 순수사진으로 석사 학위를, 조형예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몇 차례 개인전을 열고, 광주비엔날레 등 다수 국내외 그룹전에 참여했다. 단국대, 상명대 등에서 20여 년간 강의하면서 [포토닷], [디지털카메라매거진], [미술세계], [월간중앙] 등에 예술 관련 연재와 기고 글을 써오고 있다. 저서로는 [그래서 특별한 사진 읽기](2020년)가 있다.

202408호 (2024.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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