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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석의 19세기 미시사 탐구(19)] 조선시대에도 흔했던 외국 어선의 불법 조업 

황당선(荒唐船), 이양선(異樣船)에 조정도 골치 

영해 침범한 중국 어선에 무방비… 살살 달래 돌려보내기도
난파한 ‘이양선’엔 인도적 지원, 교역 요구엔 기존 질서 고집


▎중국인들은 조선시대에도 서해에서 불법으로 수산물이나 임산물을 채취하곤 했다. 사진은 연평도 인근에서 불법 조업하다 2021년 4월 나포된 중국어선. / 사진:중부지방해양경찰청
서해에서 중국 어선의 불법 조업이 심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특히 봄·가을 꽃게 철에는 더욱 심해져 언론에서도 자주 보도한다. 국민 여론도 별로 좋지 않고, 해당 지역 어민들은 생업에 관련된 문제인 만큼 정부에 강력한 조치를 요청한다. 정부는 해양경찰 등의 기관을 통해 단속을 강화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외교채널을 통해 중국과 협의한다.

정부가 발표한 불법 조업 외국 어선 단속 현황에 따르면 지난해 외국 어선 54척을 나포했다고 한다. 지난 2016년 불법 조업 외국 어선 248척을 나포한 것과 비교하면 상당히 줄어든 셈이다. 정부는 앞으로도 이 수치가 감소할 것으로 예상한다. 그러나 서해에서 외국 어선의 불법 조업 문제가 해결되거나 완전히 없어지기는 좀처럼 쉽지 않을 것이다. 이익이 생기는 곳에는 언제나 사람이 몰리기 마련이고, 불법을 저질러서라도 돈을 벌겠다는 사람이 어디에나 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도 중국인들이 불법으로 수산물이나 임산물을 채취하는 일이 있었다. 내국인이 외국인을 만나는 것이 금지돼 있었고, 외국인 출입 또한 엄격하게 통제하던 조선이었다. 중국인이 조선에서 해산물이나 임산물을 불법으로 채취할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이익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사람이 몰린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크게 이상한 일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서해안에서 불법으로 해산물이나 임산물을 채취하는 중국인이 18세기까지의 외국인 문제였다면, 19세기에는 중국인은 물론이고 서양인마저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한다. 중국인의 불법 조업 문제는 서해안 일부 지역에서 일어나는 국지적 일이었던 만큼, 조선 정부에서 이를 큰 문제로 삼지 않았다. 그러나 서양인은 국가 간 공식적 교역을 요구하는 외교 문제였다. 불법 조업과는 차원이 달랐던 것이다.

서양인의 배가 와서 교역을 요구한 이 문제는 세계 질서가 새로운 형태로 재편되던 상황에 일어난 것이었다. 조선은 어쩔 수 없이 이 질서로 들어갈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조선은 새로운 세계 질서로 편입되는 것을 완강히 거부하고 기존 질서를 고집했다. 이번 호에서는 조선에 오는 외국 선박 얘기 몇 가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황당선, 어느 나라 배인지 알 수 없는 선박

흔히 쓰는 말 중 ‘황당하다’는 관용구가 있다. 말이나 행동 따위가 참되지 않고 터무니없다는 뜻의 이 말은 한자로는 ‘황당(荒唐)하다’라고 쓴다. 여기서 한자 ‘荒’은 거칠다, ‘唐’은 터무니없다는 의미다. 18세기까지 조선의 여러 기록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황당선(荒唐船)’이라는 단어는 이 ‘황당’에 배라는 뜻의 한자 선(船)을 붙여 만든 단어다.

황당선은 어느 나라 배인지 알 수 없는 배를 일컫는다. 18세기까지 조선 바다에 출몰하는 황당선은 거의 중국이나 일본 배였다. 가끔 유구국(지금의 오키나와)이나 필리핀 사람이 탄 배가 있었다. 18세기까지 조선 해안에서 발견되는 외국 선박은 대부분 폭풍 등으로 표류한 것이었는데, 중국 황당선 가운데는 해산물 등을 불법으로 채취하기 위해 조선 해역에 들어오는 배가 많았다.

[청장관전서]라는 방대한 저술을 남긴 이덕무는 당대 최고 지식인이며 개성이 뚜렷한 글을 써 나라 안팎에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서자였던 탓에 제대로 된 벼슬을 할 수 없었던 인물이다. 그는 28세인 1768년 집안일로 서울에서 황해도 서쪽 끝 장산곶 근처까지 갔다 오면서 여행일기를 남겼다. 이 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4월에 파도가 잔잔해지면 황당선이 와서, 육지에서는 약재인 갯방풍을 캐고 바다에서는 해삼을 건져내어, 8월에 바람이 거세지면 돌아가기 시작한다. 8~9척에서 10여 척의 배가 몰려오는데 배 한 척에는 70~80명에서 큰 배는 1백여 명까지 타고 온다.”

이덕무는 황당선을 타고 오는 사람은 산둥반도에 거주하는 이들로, 서해를 건너 조선에서 해산물과 약초를 채취해간다고 말했다. 그런데 관청에서도 이들을 쫓아내기 어려워 내버려둘 수밖에 없다고 했다. 관리들은 이들에게 언제 돌아갈 것이냐고 묻고 그 날짜가 되면 상부에 황당선을 쫓아냈다고 보고하는데, 상부에서도 그 보고가 거짓인 줄 알지만 더는 묻지 않는다고 적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이와 같은 내용의 기사를 많이 볼 수 있다. 황해도 관리들이 중국인의 불법을 제대로 막지 못하고, 심지어 중국인의 불법 어로를 막던 병사가 저들에게 구타당하거나 무기를 빼앗기는 일도 있었다. 게다가 이런 일은 제대로 상부에 보고하지 않고 감추기 때문에 문제를 공론화하지 못했다. 중국인의 불법 조업 문제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는데, 이 문제에 대해 영조실록을 편찬한 사관은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바닷길을 잘 아는 중국인들이 해삼을 채취하기 위하여 매해 여름과 가을에 황해도 쪽 바다에 오는데, 오는 자들이 더욱 많아져서 배가 몇백 척이나 되는지 알 수 없다. 지방의 수령과 장교들이 그들을 쫓아내려고 하지만, 저들은 수효가 많고 우리는 수효가 적으니, 몰래 술과 양식을 주어서 그들을 달래어 돌아가도록 하기도 한다. 지식 있는 사람들은 이를 걱정한다.”

중국 어선의 불법 어로는 19세기에도 계속됐다. 고종 17년(1880) 전라 감사 심이택은 “중국 어선 38척이 고군산도 근처에 와서 촘촘한 그물을 널리치고서 고기 잡는 길을 막아, 우리 백성들의 어업이 어렵게 되었다”고 말하고, 이들의 불법 조업을 금지하고 방어하는 일을 열심히 하겠다고 임금에게 보고했다.

19세기 중반부터 모양 이상한 이양선 출몰


▎19세기 들어 서양 선박이 조선 해역에서 좌초하는 일도 잦았다. 1816년 충남 서천군 서면 마량리에 정박한 알세스트호 선장은 조선인에게 최초로 성경을 전했다고 한다. 사진은 마량리 ‘한국 최초 성경 전래 기념관’에 전시된 조형물. / 사진:한국사진기자협회
헌종 14년(1848) 12월 29일 조선왕조실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올해 여름과 가을 이후에 이양선이 경상도, 전라도, 황해도, 강원도, 함경도 등 다섯 도의 바다에 들락거리며 나타났다 사라졌다 한다. 이들은 흩어져 있어서 종적을 알기 어려운데, 육지에 내려 물을 긷기도 하고, 고래를 잡아 양식으로 쓰기도 한다. 그 숫자를 거의 셀 수 없을 정도이다.”

이양선(異樣船)은 글자 그대로 모양이 이상한 선박을 뜻한다. 그때까지 본 중국이나 일본 선박과는 다른 모양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이양선은 바로 서양의 배를 말한다. 위의 실록 기사는 19세기 중반 조선 바다에는 서양의 배가 자주 나타났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서해를 건너 옹진반도로 온 중국인이 불법으로 해산물을 채취하는 일이나 조선인이 몰래 바다로 나가 중국인이나 일본인을 만나 밀무역하는 정도가 18세기까지 조정의 걱정거리였다. 그러나 18세기 후반부터 서양인이 조선 해역에서 보이기 시작하더니 19세기 중반이 되자 그 숫자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서양 선박이 조선 바다에 출몰하게 된다. 비교적 초기의 이양선 몇 가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정조 21년(1797) 8월 현재 부산시 남구 용당동 신선대 부근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선박이 들어왔다. 50여 명의 선원은 모두 코가 높고 눈이 파란데, 이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중국어, 만주어, 일본어, 몽골어 등으로 의사소통을 해봤지만 통하지 않았다. 글자를 써보라고 붓을 주니 구름이나 산을 그린 것 같은 모양의 글자를 써서 내용을 알 수 없었다.

순조 16년(1816) 7월 충청도 비인현 마량진(현재 충남 서천군 서면 마량리)에 두 척의 이양선이 정박했다가 며칠 후 떠났다. 한 척은 수백 명이 탄 큰 배고, 다른 하나는 작았는데 80~90명 정도 타고 있었다. 비인 현감과 마량진 장교가 두 배를 조사하고 상부에 올린 보고서에 따르면 이들과 의사소통을 전혀 할 수 없어서 본 것만을 써서 보고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들에게 책 세 권을 받았다는 사실도 보고서에 기록해 뒀다.

순조 32년(1832) 6월 26일 이양선 한 척이 충청도 홍주 고대도(현재 충남 보령시 오천면 삽시도리 고대도)에 정박했다. 홍주 목사 등이 이 배를 조사해보니 영국 배로, 조선과 교역하기를 원한다고 했다. 이 배에 탄 선원은 67명으로, 모두 상업에 종사하는 자들이었다. 조선 관리들이 배 안을 자세히 조사하려했지만 교역하기 전에는 보여줄 수 없다고 했고, 교역 문제로 약 20일 정도 서로 실랑이하다 돌아갔다.

1797년 부산에 온 배는 프로비던스(Providence) 호였고, 1816년 마량진에 온 두 척은 알세스트(Alceste) 호와 라이라(Lyra) 호였으며, 1832년 고대도에 정박한 배는 로드 앰허스트(Lord Amherst) 호였다. 이들은 모두 영국 선박이었는데, 선원들이 남긴 기록을 통해 이들이 조선인과 나눈 대화나 행위 등이 상세하게 알려지게 됐다.

이 기록을 바탕으로 몇 가지 흥미로운 일이 일어나게 된다. 2001년 영국 왕실의 앤드루 왕자가 영국 군함이 한국에 처음 온 것을 기념하기 위해 부산 신선대를 방문하고 기념비를 세웠다. 그리고 마량진에 정박한 알세스트호 선장이 조선인에게 준 책이 성경이라고 해 개신교에서는 2016년 마량리에 ‘한국 최초 성경 전래 기념관’을 세웠다. 또 1832년 고대도에 온 영국 배에 타고 있던 칼 귀츨라프가 개신교 선교사라고 해 보령시에서는 올해 이를 기리는 ‘칼 귀츨라프 마을’을 개관했다.

난파선은 규정에 따라 인도적 지원 후 송환

풍랑 등으로 난파한 배가 조선 해역에 들어오는 일도 많았는데, 18세기까지는 주로 중국과 일본 선박이었다. 그러나 19세기 들어 서양 선박이 조선 해역에서 좌초하거나 파손되는 일이 일어나면서 조선은 이제 서양 선박 문제까지 맞닥뜨리게 됐다.

조선시대 외국 난파선에 대한 대책은 기본적으로 인도적 지원이 우선이었다. 외국 배가 표류하다 조선 땅에 닿으면 배를 수리할 수 있으면 수리해서 돌려보내고, 배가 아주 못 쓰게 됐으면 선원들을 육로나 해로로 송환했다.

숙종 46년(1720) 100여 명의 중국인이 탄 배가 황해도 옹진에 표류했는데, 그 지방 관장이 배를 수리해 주고 땔나무와 먹을 양식까지 지급한 뒤 배에 태워서 돌려보냈다. 그리고 경종 2년(1722)에는 수십 명의 중국인을 육로로 송환했다. 일본은 해로를 통해 환송했는데, 출신 지역에 따라 쓰시마나 나가사키를 통해 돌려보냈다.

조선인이 일본이나 중국에 표류했을 때 일본과 중국에서도 각기 정해진 규정에 따라 조선인을 본국으로 송환했다. 중국에 표류한 조선인은 북경으로 보내 조선에서 온 사신이 귀국할 때 환송했다. 일본에 표류한 조선인은 쓰시마를 통해 동래 왜관으로 보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다 19세기에 들어 서양 선박이 조선 해역에서 난파하거나 좌초하는 일이 발생했다. 그런데 이들은 중국이나 일본의 난파선과는 다른 양상을 보였다. 조선은 이들 서양인을 중국인이나 일본인과 같은 방식으로 대했지만, 서양인들은 조선의 처리방식을 순순히 따르지 않으려고 했다.

조선은 규정에 따라 이들에게 식량이나 땔감 등을 무상으로 제공했지만, 서양인들은 조선이 공급한 생필품의 대금을 치르겠다고 했다. 이를 통해 각기 다른 방식으로 형성된 고도의 문화를 지닌 조선과 서양 사람이 만났을 때 이들이 각자 어떤 주장을 펼쳤는지 볼 수 있다. 또 각기 어떻게 자기합리화를 했는지도 알 수 있다.

헌종 13년(1847) 6월 30일 오후 3시께 돛대가 세 개인 이양선 두 척이 전라도 부안현 계화도 뒤쪽 바다에 정박했다. 최초 보고는 이 지역 책임자인 고군산의 유진장(留鎭將)에게 파수를 담당하는 군사가 올린 것이었다. 유진장과 조경순은 바로 현장에 가려 했지만, 바람이 심해 배를 운항할 수 없어 이튿날 새벽에야 도착할 수 있었다. 현장에서 확인해보니 두 척 모두 모래에 걸려 좌초한 것이었다. 이미 배에 물이 차 10여 척의 작은 배로 큰 배의 물건을 실어 근처 섬으로 옮기고 있었다.

지방 관리들이 그들과 소통해 알아낸 정보에 따르면 두 척의 배는 프랑스 군함으로, 모두 600명의 군인이 타고 있었다. 그들이 옮기던 물건은 대부분 화약이나 총기 등이었다. 프랑스인들은 현재 전북 군산시 옥도면 신시도리에 진을 치고 물건을 쌓았다. 조선 관리들은 그곳으로 가 프랑스인들과 수시로 문답하며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이때 지방에서 올린 상당히 많은 보고서가 남아 있는데, 당시 조선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했는지 잘 살펴볼 수 있다. 보고서 내용 중 식량 공급과 관련된 내용 몇 가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조선 관리가 프랑스인에게 “표류한 지 여러 날이 돼 부족한 것이 많을 텐데 물 사정은 어떠냐”고 물었더니 프랑스인은 “물이 부족하니 물을 실어다 주면 반드시 값을 치르겠다”고 말했다. 조선 관리는 “목 마른 사람에게 물을 주는 것은 예의고 의리다. 어찌 값을 논할 것이 있겠나. 당연히 가져다줄 것이다”고 했다. 그러자 프랑스인이 “쌀과 각종 음식도 사고 싶다”고 했는데, 조선 관리는 “물은 길어다 줄 수 있지만, 쌀과 음식은 상부의 지시를 기다려야 한다”고 대답했다.

“목마른 사람에게 물 주는 건 예의, 하지만 식량은…”


▎이양선은 글자 그대로 모양이 이상한 선박을 뜻한다. 이전까지 본 중국이나 일본 선박과 다른 모양을 해 붙인 것으로 서양의 배를 말한다. 사진은 충남 서천군 ‘성경 전래 기념관’에 전시된 선박. / 사진:한국사진기자협회
그리고 “상관의 지시를 받기까지 10일 정도 걸릴 것”이라고 하자 프랑스인은 “10일 동안 버틸 양식이 없다”고 하며 “만약 식량을 공급받지 못하면 각 처로 흩어져 각자 빼앗아 먹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조선 관리는 “규정이 그러므로 나로서는 어쩔 수 없다”고 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빨리 상관의 회신을 받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난파한 배에 실려 있는 식량의 상당량은 이미 먹을 수 없게 됐던 만큼, 좌초한 지 보름이 지났을 무렵 프랑스인들은 하루 두 끼만으로 버티고 있었다. 이에 따라 프랑스 측은 “식량과 필요한 물건을 자유롭게 구매할 수 있으면 굳이 관원들에게 식량을 사달라고 요구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그러자 조선 관원은 “외국인과 물건을 사고파는 일은 법으로 금지돼 있으니 다시는 번거롭게 그런 말을 하지 말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프랑스인들은 “그 법은 사람을 굶어 죽게 하는 법”이라고 말한다.

각기 다른 부서의 조선 관리들이 와서 같은 질문을 계속하자 프랑스인 책임자는 “죄수를 대하듯 매일 심문하니 너무 무례한 일”이라고 말한다. 좌초한지 20일쯤 돼 임금의 명령이 도착해 양식을 주게 되는데 “부족한 것은 계속 보내주겠다”고 했다. 이 말을 들은 프랑스인이 “물건값을 주겠다”고 하자 조선 관리는 “조선이 비록 작은 나라지만 난파한 배에 탄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므로 돈을 받을 순 없다”고 말한다.

프랑스인들은 처음에는 조선에서 배를 빌려 중국으로 가려고 했고, 조선에서도 무료로 배를 빌려주겠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프랑스 측에서는 작은 배에 선원을 태워 중국 상하이로 보내 영국에 구조를 요청했고, 7월 27일 영국 선박 3척이 도착했다. 그러나 영국 배에 모든 짐을 다 실을 수 없어 조선이 빌려주겠다는 배도 쓰려고 했지만, 작고 둔해 쓸 수 없어 포기했다.

1847년 6월 고군산군도 바다에서 좌초해 한 달 이상 조선에서 생활한 약 600여 명의 프랑스 군인은 영국 배를 타고 8월 5일 새벽 조선을 떠났다. 기존에 이 사건에 대해 알려진 내용은 프랑스 측 자료를 중심으로 엮은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조선 측 사료도 상당량 남아 있으므로, 균형 잡힌 시각을 갖기 위해서는 양측 자료를 다 자세히 봐야 할 것이다.

좌초한 프랑스 선박에 관한 대응에서 볼 수 있듯 19세기 중반쯤 되면서 조선 해역에 들어온 외국 선박에 관한 조선의 대응이 체계를 갖추게 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은 그러나 중국이나 일본과 전혀 다른 문화와 정치체제를 지닌 서양을 이해할 수 없었고, 이해할 생각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 이윤석 - 한국 고전문학 연구자다. 연세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고, 2016년 연세대 국어국문학과에서 정년 퇴임했다. [홍길동전]과 [춘향전] 같은 고전소설을 연구해서 기존의 잘못을 바로잡았다. [홍길동전] 이본(異本) 30여 종 가운데 원본의 흔적을 찾아내 복원했을 뿐만 아니라 작품 해석 방법을 서술했다. 고전소설과 관련된 저서 30여 권과 논문 80여편이 있다. 최근에는 [홍길동전의 작자는 허균이 아니다]와 같은 대중서적도 썼다.

202409호 (2024.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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