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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경률의 노래하는 한국사(30)] 창작동요 ‘반달’, 민족의 설움과 희망을 노래하다 

방정환은 왜 ‘어린이 운동’에 모든 것을 걸었을까 

방정환, 아동 잡지 [어린이] 펴내 동요 후원하고 보급
상심한 어른들을 응원… “샛별 등대란다 길을 찾아라”


▎지난 5월 26일 대구은행 제2본점 오라토리움 대강당에서 영남창작동요회 주최로 열린 ‘반달이 주는 선물- 할머니가 들려주는 이야기’ 공연. 1924년에 작곡가 윤극영이 발표한 동요 ‘반달’은 이후 남녀노소를 불문하는 애창곡이 됐다. / 사진:연합뉴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 /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 /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 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 나라로.”

1924년에 작곡가 윤극영(1903~1988)이 발표한 동요 ‘반달’이다. 그해 소파 방정환(1899~1931)이 펴낸 잡지 [어린이] 11월호에 그가 지은 노랫말과 악보가 실렸다. 당시 가사에는 ‘은하수(銀河水)’가 아닌 ‘은하물’이라고 썼다. 한국 최초의 창작동요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설날’이 먼저 나왔다.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로 시작하는 노래다. 1924년 [어린이] 1월호에 수록됐는데, 역시 윤극영의 작품이다.

발표 순서와 관계없이 ‘반달’은 기념비적인 동요다.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은하수를 건너는 하얀 쪽배…. 아름다운 노랫말과 애틋한 곡조가 나라 잃은 한국인의 설움을 다독이고 순수한 동심의 세계로 이끈다. 하얀 쪽배는 반달을 형상화한 것이다. 누이의 죽음으로 슬픔에 잠긴 윤극영이 한낮에 외로이 뜬 반달을 보고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가엾게도 먼 길을 떠나는 누이와 함께 정처 없이 헤매는 민족의 운명이 어른거렸을 것이다.

‘반달’은 금세 한국인의 애창곡으로 떠올랐다. 1920년대 중반부터 입에서 입으로 퍼져나가다가 1930년대에 유성기와 라디오가 보급되며 인기를 끌었다. 아이고 어른이고 ‘푸른 하늘 은하수’를 즐겨 불렀다. 해외에서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 중국에서는 1950년대에 ‘소백선(小白船)’이라는 제목으로 번안됐고, 1970년대엔 음악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2024년은 한국 창작동요가 탄생 100주년을 맞이한 해라고 한다. 우리 창작동요의 주춧돌을 놓은 ‘반달’이 1924년에 나왔기 때문이다. 근대 이전 한자문화권에서 동요(童謠)는 민심이나 징조를 알려주는 세간의 뜬소문을 의미했다. 그러나 1920년대에 어린이의 꿈과 동심을 담은 노래들이 출현하며 동요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다. 그 배경에는 방정환이 이끈 ‘어린이 운동’이 있었다. 윤극영 또한 소파를 만나면서 인생행로가 바뀌었다.

어린이 운동으로 독립의 싹 키우자


▎국립한글박물관이 동요의 역사를 돌아보는 ‘파란 마음 하얀 마음, 어린이 마음의 빛깔을 노래하다’ 특별전에서 선보인 동요집 [반달]의 표지. 1926년 윤극영은 자신의 작품들을 모아 창작동요집 [반달]을 출간하고 유성기 음반도 내놓았다.
서울 종로구 소격동 양반가에서 태어난 윤극영은 원래 경성고등보통학교(지금의 경기고등학교)를 나와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외사촌이자 동급생인 심훈과 함께 1919년 3·1만세운동에도 참여했지만,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지 못하고 이듬해 관립 경성법학전문학교에 들어갔다. 그러나 법학이 적성에 맞지 않아 얼마 후 학교를 그만뒀다.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음악이었다. 윤극영은 1921년 일본 도쿄로 건너가 동경음악학교에서 성악을 전공했다. 나중에 음악 동료가 될 작곡가 홍난파, 정순철 등도 그 무렵 도쿄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운명적인 만남은 1923년에 이루어졌다. 소파 방정환이 그의 하숙집으로 찾아온 것이다.

방정환은 천도교 제3세 교조이자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중심이었던 손병희의 사위였다. 1919년 3·1운동 당시 그는 실상을 널리 알리기 위해 조선독립신문을 등사기로 밀어 배포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돼 모진 고문을 당했다. 석방된 후에는 요주의 인물로 찍혀 일거수일투족이 감시당했다.

역경 속에서도 소파는 나라를 되찾는 데 긴요한 일을 찾았다. 아이들이 눈에 밟혔다. 만세 시위를 벌이거나 총칼 들고 싸우는 것만 독립운동이 아니다. ‘독립(獨立)’은 본질적으로 우리 민족 스스로 일어나는 것이다. 그 씨앗을 뿌리고 싹을 키우는 노력 또한 꼭 필요하다. 방정환은 소년운동을 펼치기로 마음먹었다. 아동의 처우를 개선하고 동심을 회복하며 민족혼을 일깨우는 일이었다.

소년운동이 소파의 신박한 아이디어로 갑자기 등장한 것은 아니었다. 천도교의 전신인 동학은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시천(人是天)’ 사상에 따라 “아이도 하늘처럼 섬겨야 한다”고 가르쳤다. 제2세 교조 최시형은 “아이를 때리는 것은 하느님을 때리는 것”이라는 지침을 교도들에게 내리기도 했다. 1905년 천도교로 개칭한 후에도 이러한 관점을 견지하며 아이를 인격적으로 대우했다.

방정환은 천도교의 가르침에 서구의 학문을 접목했다. 1920년 일본 도쿄의 동양대학에 입학해 아동문예와 아동심리를 공부한 것이다. 소파는 경성과 도쿄를 오가면서 학업과 활동을 병행했다. 1921년에는 천도교소년회를 세워 동화 구연, 운동회, 소풍같은 아동 프로그램들을 제공했다. 이듬해엔 직접 세계명작동화를 번안해 동화집을 출간하기도 했다. ‘신데렐라’, ‘잠자는 숲 속의 공주’ 등이 실려 있었다.

“학대받고 짓밟히고, 차갑고 어두운 가운데 자라는 불쌍한 어린 영혼을 위해 그윽이 동정하고 아끼는 사랑의 첫 선물로 나는 이 책을 짰습니다.”

동화집 머리말에 밝힌 출간의 변이다. 제목도 [사랑의 선물]이라고 지었다. 개벽사에서 펴낸 이 번안 동화집은 1920년대 내내 인기를 끌었다. 아이들 눈높이에 맞춰 쉽고 재미나게 쓴 덕분이다. 방정환은 동화 구연에도 능했다. 천도교 교당에서 동화구연회를 열면 청중이 구름떼처럼 몰려왔다. 입장 인원 초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도 그의 동화 구연에 매료됐다.

“어린이가 부를 노래를 만들어라”


▎1924년 소파 방정환(1899~1931)이 펴낸 잡지 [어린이] 11월호에 작곡가 윤극영이 발표한 동요 ‘반달’의 노랫말과 악보가 실렸다. / 사진:나무위키 캡처
방정환은 젊은 나이에도 어엿한 조선의 명사였다. 네 살 위인 소파를 윤극영은 언덕 위에 자리한 자신의 하숙집에서 만나기로 했다. 지인의 연락을 받고 약속을 잡은 것이다. 1923년 어느 날 체격이 건장한 청년이 씩씩하게 언덕을 올라왔다. 윤극영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고 한다. 두 사람은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방정환은 우리 어린이들이 일본 동요를 따라 부르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했다.

“윤극영, 장차 나라를 이끌어 갈 어린이들이 부를 노래를 만들어라. 자신만을 위한 음악 공부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어린이를 위하는 그의 헌신적인 자세에 윤극영은 깊은 감명을 받았다. 아동에게 ‘어린이’라는 이름을 붙여준 사람도 방정환이었다. 1920년에 발표한 동시 ‘어린이 노래: 불 켜는 이’에서 이 용어를 썼다. ‘어리지만 엄연한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아이들을 ‘애놈’, ‘새끼’라고 부르며 무시하지 말고 인격체로 대우하자는 것이었다.

윤극영은 소파의 권고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동요창작을 결심한 것이다. 우리말로 된 우리 노래로 어린이들에게 고유의 아름다운 마음씨를 일깨워주는 일이었다. 방정환이 추진하고 있던 아동문예 연구회 ‘색동회’에도 참여하기로 했다. 색동회는 1923년 3월 도쿄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준비 모임을 갖고 5월 1일에 발대식을 가질 예정이었다. 손진태, 정순철, 고한승, 진장섭, 정병기 등이 함께할 멤버였다.

5월 1일은 천도교소년회에서 정한 ‘어린이날’이었다. 방정환은 그날 제1회 어린이날 기념식과 잔치를 열고자 했다. 어린이 인권을 널리 알리자는 취지였다. 이 행사는 각계각층의 호응을 얻으면서 동참 열기가 달아올랐다. 방정환은 천도교소년회, 불교소년회, 조선소년군 등 40여 개 소년단체와 협의해 1923년 4월 ‘조선소년운동협회’를 조직했다. 어린이날 행사를 주관할 단체였다.

어린이날이 되자 서울 종로 천도교 교당으로 아이들과 그 부모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교당은 어느새 발 디딜 틈 없이 꽉 찼다. 방정환이 개구쟁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무대에 올라갔다. 아이들의 환호성이 터져 나오며 교당 안에 웃음꽃이 해맑게 피어났다. 단상에 오른 소파는 기뻐하며 외쳤다.

“어린이를 내려다보지 말고 쳐다봐 주시오. 어린이에게 존댓말을 쓰고 늘 부드럽게 대해 주시오. 어린이를 꾸짖을 때는 성만 내지 말고 자세히 타일러 주시오.”

그는 어른들에게 간절히 호소했다. 이 나라가 불행한 운명을 극복하려면 어린이를 ‘내일의 희망’으로 길러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어린이를 인격적으로 대우하고, 어린이의 부당노동을 철폐하며, 어린이가 마음껏 놀고 배울 여건을 조성하자고 역설했다. 방정환의 호 소파(小波)는 ‘작은 물결’을 의미한다. 1923년 그가 일으킨 작은 물결은 파문을 그리며 사방으로 퍼졌다. 한국인의 마음에 ‘어린이’가 저장되는 시간이었다.

‘반달’에 담긴 민족의 설움과 희망


▎1925년 어린이날 기념 포스터. 그해 기념식은 전국에서 30만여 명이 참석해 대성황을 이루었다. / 사진:독립기념관
한편 색동회 동인이 된 윤극영은 도쿄에서 학업에 매진하며 동요 창작의 꿈을 키워나갔다. 얼마 후 그의 유학 생활을 뒤흔드는 참혹한 재앙이 닥쳤다. 9월 1일 진도 7.9의 강진이 도쿄, 요코하마 등 대도시를 덮치며 10만여 명의 사망자를 비롯해 엄청난 인명·재산 피해가 발생한 것이다. 간토대지진이었다.

이튿날 출범한 야마모토 곤베에 군벌 정권은 계엄령을 선포해 민심을 수습하려고 했다. 계엄령에는 국민의 위기의식을 불러일으킬 명분이 필요했다. 이에 당국에서 조직적으로 조선인 폭동설을 유포했다.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데 그치지 않고 불을 지르거나 폭탄을 터뜨리거나 우물에 독을 풀어 국민을 흥분의 도가니에 빠뜨렸다.

일본인들은 자경단을 만들어 조선인 학살에 나섰다. 계엄령에 따라 군경도 합세했다. 재일한국인을 중심으로 3000~6000여 명이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윤극영은 무차별 대학살을 피해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다. 참담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20대 초반 젊은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잔인하고 아픈 기억이다. 트라우마가 남을 수밖에 없다.


▎‘반달 할아버지’로 불리는 작곡가 윤극영은 동요 ‘반달’을 지어 한국 창작동요 100년의 주춧돌을 놓았다. / 사진:나무위키 캡처
부친은 힘겨워했을 아들을 위해 집 뒤뜰에 작은 별채를 지어주었다. 이름하여 일성당(一聲堂). 그곳에서 마음을 달래고 음악을 계속하라는 배려였다. 윤극영은 어린이들에게 노래를 가르치기로 했다. 색동회 동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다. 소문을 듣고 재능 있는 아이들이 모여들었다. 순수한 동심은 윤극영의 상처를 치유하고 열정에 불을 붙였다. 1924년 그는 ‘다리아회’를 결성해 동요 창작과 보급에 앞장섰다.

잡지 [어린이]에 실린 동요 ‘설날’은 한국 최대 명절인 설날에도 일본 노래를 따라불러야 하는 아이들을 위해 윤극영이 지었다.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 곱고 고운 댕기도 내가 들이고 / 새로 사 온 신발도 내가 신어요.” 뒤이어 그가 곡을 쓰고 유지영이 노랫말을 붙인 ‘고드름’이 나왔다. “고드름 고드름 수정고드름 / 고드름 따다가 발을 엮어서 / 각시방 영창에 달아놓아요.”

불후의 명곡 ‘반달’은 1924년 9월 가평으로 출가한 맏누이의 부고를 받고 깊은 슬픔에 잠겼을 때 문득 낮에 뜬 반달을 보고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푸른 하늘에 비스듬히 걸린 반달이 누이를 태우고 외로이 은하수를 건너는 하얀 쪽배로 보였을 것이다.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헤매다가 객지에서 봉변을 당하는 우리 민족의 설움도 어른거렸을 것이다. 하지만 희망의 끈을 놓을 수는 없다.

“은하수를 건너서 구름나라로 / 구름나라 지나선 어디로 가나 / 멀리서 반짝 반짝 비추이는 건 / 샛별 등대란다 길을 찾아라.”(2절)

윤극영은 우리 민족이 샛별 등대가 비춰주는 길을 따라 언젠가 독립을 이룰 것이라는 믿음을 동요에 담았다. 그는 ‘반달’을 비롯해 ‘설날’, ‘고드름’, ‘귀뚜라미’, ‘따오기’, ‘할미꽃’, ‘소금쟁이’ 등을 지어내며 창작에 몰두했다. 보급에도 정성을 쏟았다. 등사판으로 노랫말과 악보를 찍어 보통학교(초등학교) 교사들에게 보냈다. 동요는 금세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당시 학교 당국은 우리말 노래를 금지했지만, 이미 입에 오른 곡을 뱉어내게 할 순 없었다.

1920년대 후반 '어린이' 독자만 10만 명


▎소파 방정환이 만든 보드게임 ‘세계발명’ 말판. 잡지 [어린이] 1931년 1월호의 부록이었다. 방정환은 건강이 나빠져 그해 7월 23일 세상을 떠났다. / 사진:국립민속박물관
동요가 힘을 보태면서 어린이 운동은 절정으로 치달았다. 1925년 5월 1일 제3회 어린이날 행사는 학교에서 단체로 참여해 대성황을 이뤘다. 전국에서 30만여 명이 참석했다고 한다. 동참한 소년단체 숫자도 220개에 이르렀다.

행사를 마치고 방정환은 아이들과 함께 거리행진을 하며 전단 12만 장을 나눠줬다. “내일의 주인인 어린이를 인격적으로 키워야 나라와 민족이 잘 살게 된다”는 호소문이었다. 행인과 구경꾼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응원의 박수를 보냈다.

그 해에 윤극영은 다리아회를 이끌고 아동 창가극 [파랑새를 찾아서] 공연에 나섰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모리스 마테를링크의 희곡 [파랑새]를 각색한 것이다. 그는 이 창가극에 곡을 붙이고 순회공연을 벌여 성공을 거뒀다. 이듬해에는 자신의 작품들을 모아 창작동요집 [반달]을 출간하고 유성기 음반도 내놓았다.

1920~30년대 조선에서는 윤극영, 홍난파, 박태준, 정순철을 4대 동요 작곡가로 꼽았다. 홍난파의 ‘고향의 봄’(이원수 작사)과 ‘퐁당퐁당’(윤석중 작사), 박태준의 ‘오빠 생각’(최순애 작사), 정순철의 ‘짝짜꿍’(윤석중 작사) 등이 1920년대 중반부터 큰 사랑을 받았다. 이들의 동요 창작을 뒷받침하고 보급로가 되어준 매체가 바로 소파 방정환이 펴내던 아동 잡지 [어린이]였다.

방정환은 1923년 제1회 어린이날 기념식을 앞두고 [어린이] 창간호를 펴냈다. 당시 천도교에서는 종합 월간지 [개벽]을 발행하고 있었다.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바 있는 보성사도 천도교에서 운영했다. [어린이]는 천도교의 출판·인쇄·조직 역량을 활용해 어린이 운동과 아동문예의 후원자로 자리매김했다. 이원수, 최순애, 윤석중, 마해송 등 시대를 대표하는 아동문학가들도 [어린이]가 발굴하고 키워냈다.

소파는 아동 잡지 [어린이]에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편집에 심혈을 기울였고, 인쇄소에서 살다시피했다. 독자 한 명이라도 더 늘리려고 거리에 나가 광고지까지 뿌렸다. 총독부 검열에 걸려 붙잡혀가기도 했다. 1920년대 후반에 [어린이] 독자는 10만 명에 이르렀다. 당시 경성 인구가 30만 명 내외였으니 기적에 가까운 성과라고 볼 수 있다. 발행인 방정환이 불철주야 고생하고 헌신한 덕분이다.

민족의 열망과 독립 의지 일으켜 세우다


▎어린이날 100주년을 맞아 2022년 5월 1일 오전 서울 종로구 당주동 소파 방정환 선생 생가터 인근에서 어린이들이 행진을 하고 있다. 이번 행진은 어린이날 제정 당시 풍경을 재현한 것이다. 배우가 검정색 두루마기를 입고 방정환 선생의 모습을 재현했다.
그는 어린이 운동에 삶의 열정을 남김없이 불태웠다. 1928년에는 20여 개국에서 동요, 동화, 아동극 등을 모아 ‘세계아동예술전람회’를 개최했다. [어린이]의 편집과 발행을 도맡는 와중에 무려 4년간 준비한 행사였다. 몸을 지나치게 혹사해서일까? 소파의 건강은 점점 나빠졌다. 신장염과 고혈압으로 얼굴이 붓고 코피가 자주 났다. 1931년 7월 23일 방정환은 아쉽게도 3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엄마 앞에서 짝짜꿍 / 아빠 앞에서 짝짜꿍 / 엄마 한숨은 잠자고 / 아빠 주름살 펴져라.”

작곡가 정순철이 아동문학가 윤석중의 노랫말을 받아 1929년에 발표한 동요 ‘짝짜꿍’(원제 우리 애기 행진곡)이다. 어른이 아이를 달래는 노래 같지만, 실상은 그 반대다. 귀여운 아이가 짝짜꿍하면서 엄마와 아빠를 위로하고 있다. 다른 동요들도, 그리고 어린이 운동도 실은 이런 관점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1919년 3·1운동의 열풍이 휩쓸고 간 뒤에 조선은 허탈하고 무기력한 분위기에 빠졌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으려 했지만, 끝내 이뤄내지 못한 아쉬움에 한숨 쉬고 주름살이 깊어졌다. 1920년대 어린이 운동은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웃음으로 상심한 어른들을 위로하고 응원하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샛별 등대란다, 길을 찾아라.” 어린이들의 노래가 민족의 열망과 독립 의지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이다.

※ 권경률 - 역사 칼럼니스트이자 작가. 서강대에서 역사를 공부했다. 새로운 해석과 기발한 상상력으로 한국사에 숨결을 불어넣는다. 유튜브·페이스북에 ‘역사채널권경률’을 열어 독자들과 역사 하는 재미를 나누고 있다. [모함의 나라](2022), [조선을 새롭게 하라](2017), [사랑은 어떻게 역사를 움직이는가](2023) 등을 썼다.

202409호 (2024.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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