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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정신의 미학(102)] 실학의 문을 연 반계(磻溪) 유형원 

새로운 조선, 경세치용(經世致用)으로 제시하다 

전라도 부안에서 20년간 피폐한 농촌 현실 체험하며 [반계수록] 저술
토지·국방 개혁 등 국가개조론 설파, 이익·정약용 등의 실학으로 만개


▎유형원의 부안 시기 제자인 김서경의 후손 김종일 부안중앙농협 이사가 반계서당의 내력을 설명하고 있다. / 사진:송의호
"당(唐)의 관내(關內)·하남(河南)과 명(明)의 산서(山西)·섬서(陝西) 같은 지명은 반드시 산천으로 이름을 삼았다. 우리나라 각 도는 고을로 이름을 지어 자주 변경됐다. 마땅히 산천과 지형을 위주로 삼아야 할 것이다. 황해도는 관내(關內), 충청도는 한남(漢南), 전라도는 호남(湖南), 경상도는 영남(嶺南), 강원도는 영동(嶺東), 함경도는 영북(嶺北), 평안도는 관서(關西)라 할 것이다.”

1670년(현종 11) 조선 개혁 지침서 [반계수록(磻溪隨錄)]에 나오는 내용이다. 임진·병자 양란 뒤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 1622~1673) 선생은 근거지 서울을 떠나 전북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우반동)로 옮겨 19년에 걸쳐 제도 개혁 등 이른바 경세치용(經世致用, 세상을 다스리는데 실질적인 이익을 줄 수 있는 학문)을 담은 13권짜리 책을 저술했다. 행정구역 명칭 관련은 [반계수록] 권1 ‘군현제(郡縣制)’에 나온다. 반계의 사상은 이후 성호 이익, 순암 안정복, 다산 정약용 등으로 이어지며 실학으로 꽃을 피운다.

7월 12일 반계가 51년 생애 중 마지막 20년을 보낸 우반동 등 부안 일대를 답사했다. 선생의 부안 시절 제자인 담계 김서경의 후손인 김종일 부안중앙농협 이사가 길을 안내했다. 문화관광해설사도 동행했다. 먼저 찾은 곳은 선생이 후학을 가르친 반계서당이었다.

변산의 가파른 해발 130m 닭이봉 중턱에 서당이 모습을 드러냈다. 선생이 팠다는 오른쪽 우물에는 물이 가득했다. 이 우물은 지금까지 마른 적이 없다고 한다. 선생은 “지경이 고요해 샘은 늘 살아 있다”고 노래했다. 서당 돌담 위에 올라서자 산 아래로 우반동 너른 들판과 바다가 어렴풋하다.

“들판 뒤로 냇물이 보이지요. 반계입니다. 선생의 아호도 여기서 붙여졌다고 하죠.” 한때 번성했다는 줄포만도 눈에 들어왔다. 서당 앞에는 반계정(磻溪亭)을 새로 지었다.

외침(外侵) 설욕 위해 준마 기르고 훈련


서당에서 내려왔다. 주차장에서 200m쯤 떨어진 풀밭에 ‘반계유형원선생유적비’가 세워져 있다. 이곳은 반계가 우반동으로 들어와 가족들과 거처하던 집이 있던 자리다. [반계유고] ‘반계선생언행록’에는 정착 당시가 묘사돼 있다. “가솔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내려가 마침내 봉래산(변산) 반곡으로 들어갔다. 계곡 중간에 평평한 땅이 펼쳐져 있고 냇물 하나가 흐르고 있었으며, 복사꽃이 길 가득히 피어 있고 소나무와 회나무가 하늘을 덮었다. 공은 이곳에 몇 칸 남짓 초가를 짓고 집 뒤에는 큰 대나무 천 그루를 가꿨다. 시렁에는 (고금의 전적) 만여 권을 비치해뒀다. 산이 깊고 땅은 외져 산 밖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선생은 이 초당에서 [반계수록]을 집필했다. 1991년 겨울까지 초가 담장 일부와 주춧돌, 대나무숲 등이 남아 있었는데 이듬해 경지정리 때 논으로 변했고, 고택 뒤 대나무 숲은 개간돼 사라졌다고 한다. 유적비도 마을 입구에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유적비 가까운 곳에 반계가 팠다는 큰 우물이 남아 있었다. 동행한 최기철 문화관광해설사는 “이런 규모 우물이면 120명 안팎이 거주할 수 있을 것”으로 추정했다. 반계는 우반동에 우물 5곳을 팠다고 전해진다.

이곳 우반동에는 2m 높이 훈련장 돌기둥이 남아 있다. 마을 논두렁길 한쪽이다. 김승대 전북도 학예 연구관은 이 입석을 국방을 중시한 반계가 마을에서 군사훈련을 시킬 때 쓰던 유물 중 하나로 보고 있다. ‘반계 선생 연보’ 1662년(현종 3)에 관련 내용이 나온다. “항상 (외침을) 설욕할 계책을 강구한 바 집에는 하루 300리를 달리는 준마를 길렀으며, 활과 조총을 집안의 노복과 마을 사람들에게 가르쳐 한가로운 날을 택해 연습하곤 했다. 다들 솜씨가 볼만했는데 200여 명은 활의 묘와 수였다. 또 험한 요새 및 육지와 해로의 역참 거리를 하나하나 기록했다. 이 무렵 [중흥위략(中興偉略)]을 쓰기 시작했으나 책이 완성되기 전 돌아가셨다.”

“토지 개혁이 국가 개조의 출발점”


▎반계 유형원 초상화. / 사진:문화 유씨 하정공파 종중
1654년 이사 직후다. 남방은 풍속이 귀신을 좋아해 음사(淫祠)가 많았다. 유형원이 거처하는 마을에도 음사가 세 곳이나 있어 원근 남녀가 모여들어 굿을 하고 빌었다. 그는 사람을 시켜 음사를 헐고 나무를 베어 버렸다. 반계가 집에 있을 때 안팎이 소란스러웠으나 무당은 감히 문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지방 풍속을 바로잡은 것이다.

또 그는 변산의 높은 봉우리 작은 절에 들러 독서했는데, 한 도승(道僧)이 유불도(儒佛道)에 대해 묻자 “유가의 도가 큰길이라면, 불교와 도교는 작은 샛길”이라고 답했다.

반계가 [수록]을 처음 쓴 것은 31세인 1652년. 부안으로 내려가기 1년 전이다. 연보와 묘비 등에 집필 동기가 나온다. 반계는 당대를 이렇게 진단했다. “고인은 법을 만들 때 도리로 일을 헤아렸기에 근본이간이해 행하기 쉬웠으나, 후세엔 혼탁해 사리를 염두에 두고 법을 만들면서 백방으로 교묘해져 더욱 어지러워졌다.”

이에 대해 [수록]에서 해법을 제시한다. “천하를 다스림에 공전(公田, 토지를 국유화한 다음 농민 등 백성에게 공평하게 재분배)과 공거(貢擧, 인재 천거)로 하지 않으면 구차할 따름이다. 공전이 시행되면 빈부가 저절로 고르게 되고 호구가 밝혀지며 군오가 정돈되는 것”이라며 “백성의 재산을 조절하는 것은 토지의 경계를 바르게 하는 데 있다”고 했다. 부지런히 농사짓는 농민이 굶주리지 않는 토지 개혁이다. 그는 이 길을 자기 임무라 여기고 저술을 결심한다. 세상을 구하려는 선비의 비분강개 마음이다.

이듬해 선생은 부안현으로 들어가 빈곤에 허덕이고 과중한 세금에 시달리는 비참한 농촌 현실을 몸소 체험한다. [반계유고]에 ‘동진농장에서 벼 베는 일을 감독하며’ 등의 시가 전한다. 귀촌을 통해 많은 폐단이 근본적으로 법과 제도의 잘못에서 비롯됐음을 깊이 깨닫고 개혁안을 구상한 것이다.

반계는 책 이름을 ‘수록’이라 붙였다. 세상에 주장을 내세우기보다 사사로이 생각한 바를 기록함으로써 고찰하려는 것이라며 겸손해했다. 그러나 [수록]은 규모와 항목이 전례가 없을 만큼 광대하면서 또 섬세했다.

유형원은 부안에서 저술로 밤낮을 잊었다. 그는 마음에 묘하게 부합되는 것이 떠오르면 밤중에도 일어나 기록했다. 그러나 매일 해가 질 때 그는 “오늘도 헛되게 보냈구나. 의리는 무궁한데 세월은 유한하니 옛사람은 무슨 정력으로 저렇게 성취했단 말인가”하며 한계를 느꼈다. 반계는 그렇게 정밀하고 독실했다. 매일 먼동이 트면 깨끗이 씻고 의관을 바로 한 뒤 가묘(家廟)에 나아갔다. 물러나면 바로 서재에 앉았다. 대나무 사립문은 닫혀 있고 사슴은 낮에도 다녔다. 선생은 그런 것을 돌보고 즐기며 “옛사람이 이르기를 고요한 후에 편안할 수 있고 능히 생각할 수 있다고 했으니, 그 말이 참 훌륭하다”고 했다.

[수록]은 당면과제로 선생이 가장 정력을 쏟았던 전제(田制, 토지제도)를 비롯해 교선(敎選, 교육과 고시), 임관(任官, 관리임명), 직관(職官, 직위와 관등), 녹제(祿制, 봉급), 병제(兵制, 군사제도) 등 크게 여섯 분야로 나누었다고 최영성은 분석한다. 그리고 분야마다 현행 제도의 모순과 불합리성을 지적하고 개혁의 당위성과 대안을 개진했다. 방법은 분야마다 자기 생각을 붙이되 해당 제도의 중국과 우리나라 변천 과정을 고찰함으로써 개혁안이 근거와 타당성이 있음을 입증하려 했다. 또 ‘속편’에서는 의례와 풍속·언어·도량형·도로·용거(用車) 등을 다루었다.

선생은 사회개혁에 대한 열의와 함께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남달랐다. 1655년(효종 6) 겨울 서울에 갔다가 돌아올 때다. 신창진 인근에 이르렀다. 배 한 척이 사람과 말을 가득 싣고 건너다가 중간쯤에서 부서지며 모두 물에 빠졌다. 선생이 급히 상류의 배 두 척을 불러 건져 구하도록 독려했으나 이미 죽은 이가 5, 6명이고, 아직 가슴에 온기가 남은 이가 9명이었다. 그는 하인들을 불러 목숨이 붙은 이를 업고 가까운 마을로 들어가 젖은 옷을 벗기고 다른 옷을 입히도록 했다. 죽을 끓여 먹이고 밤새 치료하니 다음 날 모두 살아났다.

반계 배향했던 동림서원엔 터만 남아


▎유형원이 [반계수록]을 집필한 전북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 집터 인근에 남은 큰 우물. / 사진:송의호
[반계수록]의 산실 우반동을 나와 북동쪽으로 20㎞를 이동했다. 김종일 이사는 다시 부안군 상서면 가오리 원촌마을 한쪽에 남은 동림서원(東林書院) 자리로 안내했다. 동림서원은 반계 사후 20년 선생을 배향한 유일한 서원이었다. 안내판에는 1694년(숙종 20) 창건된 서원으로 기록돼 있다. 반계의 제자로 11세에 입문한 김서경도 배향됐다고 한다. 서원 터에는 가운데 유허비와 사방 11개 주춧돌이 차례로 놓여 있었다. 동림서원은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됐다. 김 이사는 “유림이 동림서원 복원을 추진 중”이라며 서원 자리 뒤편 김서경 재실을 설명했다.

유형원은 외가인 서울 정릉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유흠은 예문관 검열을 지냈으나 1623년(인조 1) 유몽인 옥사에 연좌되어 광해군 복위를 꾀했다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서 28세 나이로 죽었다. 연구자들은 반계가 두 살에 겪은 이 아픈 역사가 평생 벼슬을 멀리하고 부안 땅에 은거하며 학문에 매진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반계 집안은 본래 북인(北人)이었으나 인조반정 이후 남인 계열로 흡수된 것으로 추정한다.

유형원은 어려서 외삼촌인 감사 이원진과 고모부인 판서 김세렴에게서 배웠다. 이원진은 하멜 일행이 표류해 왔을 때 제주 목사를 지냈으며, 실학자 성호 이익의 5촌 당숙이기도 하다. 김세렴은 함경도와 평안도 관찰사를 지냈는데 유형원은 당시 관북과 관서를 유람했다. 반계는 그렇게 틈만 나면 전국을 여행하며 나라의 실상을 관찰했다.

유형원은 일찍이 조부의 명으로 감시와 정시에 응시했으나 모두 실패하고 벼슬길을 단념한다. 이후 33세에 진사시에 급제했다. 반계는 학문적 스승으로 미수 허목을 존경했다. 그는 44세에 외삼촌 장례를 마치고 경기도 연천으로 미수를 찾아가 배알했다. 형조 정랑을 지낸 조부는 1612년(광해군 4) 조상의 사패지인 부안 우반동으로 내려가 농장을 일군다. 그리고 40년이 지나 반계는 조부상을 마치고 폐병을 얻은 뒤 우반동에 내려와 요양과 저술을 시작했다. 일대는 명승지 변산을 뒤로하고 아름다운 줄포만 바다를 마주하고 있었다. 반계는 시간이 나면 변산과 바다를 유람하며 시를 지었다.

'반계수록' 등 70여 상자 저술 남겨


▎국립전주박물관이 보관하고 있는 전체 13권으로 이루어진 [반계수록]. / 사진:국립전주박물관
유형원은 사후 [반계수록] 등 70여 상자에 이르는 저술 20여 종을 남겼다. 성리학을 다룬 [이기총론(理氣總論)] 역사 분야 [동국사강목조례(東國史綱目條例)] 지리서 [여지지(輿地志)] 병법 [무경사서초(武經四書抄)] 음운서 [정음지남(正音指南)] 등이다. 그러나 [반계수록]을 제외한 저술은 책 이름만 남아 있다.

1741년(영조 17) 승지 양득중은 [반계수록]의 가치를 영조에게 상소해 나라에서 간행하고 관료들에게 읽혀 국가 경영에 반영할 것을 처음으로 제기한다. 이에 영조는 5년 뒤 홍계희에게 명해 선생의 본전(本傳)을 지어 올리게 했다. 홍계희는 [수록] 간행을 다시 청했다. 1770년 마침내 대구에서 최흥원이 교정을 거친 [반계수록]이 경상감영에서 출간돼 사고(史庫)와 홍문관이 보관하게 된다. 유형원은 이렇게 사후 100년이 지나서야 알려졌고 [반계수록]도 평가를 받았다.

유형원은 서울에서 전라도 부안으로 들어가 피폐한 농민 현실을 체험하며 그것을 학문에 접목했다. 방법은 경전과 선현의 글을 깊이 연구한 뒤 이를 실제 현상과 연결지어 이해하는 새로운 길이었다. 여기서 임진·병자 전란 이후 사회현실을 직시하고 잘못된 법제를 전면 개혁하자는 국가개조론 [반계수록]이 나왔다. 그가 생각한 선비의 진정한 책무였다. 그 정신은 면면히 이어져 이후 실학사상의 뿌리가 됐다.

[박스기사] “조세 덜어주는 것이 백성 구휼 상책”

농민이 처한 현실에 입각한 반계의 ‘구황책’

반계 유형원은 농민들과 함께한 체험을 바탕으로 흉년을 극복하는 구황책(救荒策)을 제시한다. 그는 관찰사 민유중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답한다. “구황은 예로부터 만족할 만한 방책이 없었다. 통상 재물을 나누어 주거나 조세를 가볍게 하거나 부역을 덜어 주는 방법이 전부였다. 이 가운데 굳이 고른다면 조세를 가볍게 하고 부역을 덜어 주는 일이 더 효과적이다. 대체로 백성에게 쌀 한 말을 구휼미로 주는 것이 납부해야 할 쌀 한 되를 덜어 주는 것보다 못하다.”

이어 그는 새로운 계책을 제시한다. “호남에는 제방이 유독 많다. 그중 벽골제·눌지·황등제 등은 한동안 크게 유익했는데 이미 폐기된 지 오래다. 이들 제방을 수리해 복구하면 노령 이북 7, 8개 고을은 흉년이 드는 걱정거리가 없어지고 곡식을 나눠주면서 생기는 폐단도 사라질 수 있다. 그뿐이 아니다. 이처럼 백성에게 이로운 것은 물론 나라의 조세까지 거둘 수 있게 된다. 어찌 만세의 원대한 계책이 아니겠는가. 흉년이 들 때 백성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어 구황하고, 제방을 보수하는 작업을 일으키면 일거양득이 될 것이다.”

- 송의호 언론중재위원 yeeho1219@naver.com

202409호 (2024.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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