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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 폭동사태’ 러시아 개입했나… 해외에서 여론전 벌인 정황 

 

김태욱 월간중앙 기자
"러 매체 통해 '17세 무슬림 소년 범행' 가짜뉴스 확산"
친 우크라 성향의 영국 정부에 반감 조장할 목적인 듯


▎지난 8월4일(현지시간) 영국 사우스요크셔주에서 경찰과 대치중인 반이민 시위대. [로이터=연합뉴스]
지난 8월 영국 전역으로 확산된 폭력시위의 배후에 러시아 정부가 있다는 정황이 드러나고 있다. 영국 폭력시위를 촉발한 '가짜뉴스' 확산에 러시아 정보기관과 연계된 매체들이 개입했다는 것이다.

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지난 7월 29일(이하 현지시간) 영국 북서부 머지사이드주 사우스포트에서 흉기 난동 사건이 발생해 어린이 3명이 목숨을 잃는 비극이 발생했다. 사건 직후 ´알리-알-샤카티’라는 이름의 만 17세 무슬림 난민이 범인이란 뉴스가 급속도로 퍼졌다. 소년의 이름과 종교, 나이 등 구체적인 신상정보가 공개되자 영국 전역에서 반(反)이민 시위가 급속도로 퍼졌다. 이후 폭력사태로 변질되면서 무려 1000여 명이 체포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영국 당국의 확인 결과 ‘알리-알-샤카티’는 범인이 아니었다. 진범은 ‘악셀 루다쿠바나’라는 이름의 웨일스 카디프시 태생의 영국인이었다. 누군가에 의해 조작된 가짜 뉴스가 영국 전역을 뒤흔든 것이다. 가짜뉴스 최초 유포자는 ‘버나뎃 스포포스(Bernadette Spofforth)’라는 이름의 55세 영국인 여성으로 확인됐다. 사업가인 그녀의 X(구 트위터) 게시글이 폭력사태의 시초였다. 그녀는 사건 직후인 오후 4시 49분 자신의 X 계정에 “범인은 ‘알리-알-샤카티’라는 이름을 가진 난민이다. 그는 지난해 보트를 타고 영국으로 건너왔으며, MI6의 감시대상이었다”라는 허위 정보를 게시했다. 영국 당국은 그녀를 허위 정보 유포 혐의로 기소했다.

주목할 점은 그녀가 지난 8월 7일 “해당 뉴스를 지어내지 않았다”며 “누군가로부터 해당 정보를 받았을 뿐”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또 그녀는 “나의 게시글이 러시아 언론들이 사용한 정보의 출처였을 수도 있음을 인정한다”고 고백했다. 갑자기 ‘러시아’가 등장하는 이유는 러시아 정부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인터넷 매체 〈Channel3Now〉 때문이다. 〈Channel3Now〉는 그녀가 X에 게시글을 올린 지 2분 만에 동일한 내용을 보도했다. 러시아 대형 국영 매체인 〈RT〉도 이를 즉각 인용 보도했다. 이후 영국에서는 폭력시위가 발생했다. 영국 언론인과 전직 정보요원들이 〈Channel3Now〉의 배후에 러시아 정부가 있다고 의심하는 이유다. 〈Channel3Now〉의 가짜뉴스를 인용 보도한 〈RT〉는 관련 내용이 허위 정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삭제 조치 없이 정정보도 형식으로 마무리했다.

〈Channel3Now〉가 제작한 과거 유튜브 영상도 의심을 받고 있다. 영상에 러시아어로 자막을 달았는가 하면 일부 영상에는 러시아 자동차 경주 장면도 담겼다. 영국 〈데일리메일〉은 경주에 참여한 운전자들이 러시아군과 관련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고 보도했다. 이에 대해 〈Channel3Now〉는 러시아어 유튜브 채널을 구매한 것이라는 반론을 펴고 있다. 현재 〈Channel3Now〉의 유튜브 채널과 페이스북 계정은 ‘허위 기사 게재’ 혐의로 모두 정지된 상태다.

자유민주주의 비판 나선 ‘친러’ 언론 매체

〈Channel3Now〉는 본사가 미국에 있다고 주장하지만 지난해 자사 홈페이지를 리투아니아 도메인으로 등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유럽연합(EU)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국인 리투아니아는 대표적인 ‘반러’ 국가로,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러시아와 대대적인 인지전(認知戰, 정보를 왜곡·조작하거나 허위 사실을 유포해 비합리적 결정을 내리게 하거나, 실수를 유도하는 방식의 전쟁)을 벌이고 있는 국가다. 리투아니아는 러시아령인 칼리닌그라드와 대표적인 ‘친러’ 국가인 벨라루스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다는 점에서 러시아 정부 입장에선 전략적으로 중요한 국가다.

이에 대해 영국 정보기관 MI6 전직 요원인 ‘크리스토퍼 스틸’은 지난 8월11일 영국 폭력시위에 대해 “러시아가 관여한 게 명백하다”며 “사건 직후 퍼진 허위 정보는 러시아 정부와 연관된 웹사이트에서 비롯된 것 같다”고 진단했다. 실제 살인 사건 이후인 8월 초부터 다수의 러시아 정보기관 선전매체들은 영국 폭력시위의 배경으로 ‘영국 정부의 실정’과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문제점’이라는 보도를 내놓기 시작했다.

가장 대표적인 언론은 러시아 연방보안국(FSB)과 연계된 러시아 선전매체 〈Southfront〉이다. 해당 매체는 지난 8월 6일 이번 폭력시위 원인을 ‘이민자 범죄에 대한 분노’라고 보도했다. 〈Southfront〉는 미국 재무부가 지난 2021~2022년 2년 연속 미 대선 개입 및 허위정보 유포 혐의로 제재한 매체다. 러시아 대외정보국(SVR) 연계 매체인 〈New Eastern Outlook〉도 이번 폭력시위의 원인으로 “신자유주의 경제모델의 실패와 무분별한 이민정책이 불러온 사회갈등”이라고 보도했다. 또 다른 SVR 연계 러시아 매체인 〈Strategic Culture Foundation〉도 “영국 위기의 원인은 신자유주의 경제모델의 실패와 무분별한 이민정책”이라며 “서구권은 새로운 현실을 인정하고 직면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보도했다.

이들 러시아 언론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영국 정부의 책임론과 자유민주주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분석 기사뿐 아니라 논평의 형식을 빌리기도 했다. 러시아가 영국 정치권과 국민 간 갈등을 조장할 목적으로 ‘해외 여론전’을 전개했을 가능성이 제기되는 이유다. 영국은 특히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발발 이후 대우크라이나 지원에 앞장서고 있다.

“사이버 전쟁 고도화…위장 인플루언서 등장”


▎지난해 7월31일(현지시간) 러시아령 칼리닌그라드에 문을 연 러시아 〈TASS〉통신 지국 입구. [로이터=연합뉴스]
러시아 관영매체도 이번 폭력시위에 깊숙이 관여했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지난 8월 5일 〈TASS〉는 “칼부림 사건 이후 영국에서 폭력적인 반(反)이민 시위가 벌어졌다”며 다른 러시아 언론들과 같은 목소리를 냈다. 하루 뒤 러시아 매체 〈SPUTNIK〉는 한발 더 나아가 “미국의 딥스테이트가 불을 지폈을 가능성도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 기사는 수천 개의 ‘좋아요’와 ‘공유’로 이어졌다. ‘친러’ 성향의 인플루언서와 댓글부대가 뒤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이유다.

이 같은 러시아의 전술은 특히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눈에 띈다. 유튜브와 인스타그램, 텔레그램 등에서 ‘Sasha meets Russia’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인플루언서가 대표적이다. 미국인 아버지와 러시아인 어머니를 뒀다고 주장하는 러시아 국적의 'Sasha'는 러시아 관광청 직원으로 봐도 손색 없을 정도의 콘텐트를 업로드한다. 그녀의 콘텐트를 관통하는 메시지는 “서방의 대러 제재에도 러시아 경제는 성장한다”는 것이다. 물론, Sasha는 러시아 시민들이 제재를 우회하기 위해 카자흐스탄 은행에 계좌를 열기 시작했다는 등의 ‘불편한’ 소식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오늘날 러시아와 깊은 협력을 이어가는 멕시코의 총영사관 개설 소식을 전하는 등 ‘밝은 미래’만을 이야기한다.

사이버 보안업체 〈MIBURO〉에 의하면 러시아 정부는 영향력 공작을 위해 다양한 선전매체를 운영하고 있다. 그간 러시아는 자국 우호 여론 조성, 기밀 입수, 선거 개입 등을 목적으로 선전매체를 활용해 여론전을 전개해 왔다. 최근에는 사이버 해킹 등 다양한 방식으로 대(對)유럽 영향력 공작도 적극적으로 전개해 왔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장기화 되는 가운데 올해 6월 열린 EU 의회 선거를 계기로 대유럽 영향력 공작도 한층 강화한 것으로 파악됐다. 이번 영국 폭력 시위의 확산과 촉발에도 러시아 정부가 개입되어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이유다.

러시아가 해외에서 벌이는 '인지전'은 유럽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확인된다. 미국과 EU가 ‘러시아 선전매체’로 지목한 언론사들은 현재 국내에서도 활발히 운영 중이다. 이들 중 다수는 현재 미국과 EU로부터 허위 정보 유포 등의 이유로 제재를 받는 언론사들이다. 구체적으로 〈TASS〉는 러시아 정부가 인지전(認知戰)을 위해 활용하는 대표적인 선전매체다.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유럽통신사연합(EANA)은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한 편파 보도를 이유로 〈TASS〉에 뉴스 제공을 정지하기도 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영국 정부는 러시아 매체 〈Rossiya Segodnya〉를 지난 2022년 3월 러시아 선전활동 및 허위정보 유포를 이유로 제재했으며, EU는 지난 5월 러시아 매체 〈Rossiyskaya Gazeta〉를 러시아 선전활동과 허위정보 유포로 인한 기존 제재를 한 차례 연장했다. 러시아 언론매체들에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김태욱 월간중앙 기자 kim.taew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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