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감히 ‘영토 확장’ 택한 도전 정신이 삼양사 원동력인촌 김성수 친형… 민족기업의 육성에 매진한 선각자
▎김연수 창업주는 27세이던 1922년 4월 친형 김성수의 권고로 경성직뉴 전무 및 경성방직 상무로 사업과 인연을 맺었다. 1921년 만주 시찰 당시 김연수 창업주. / 사진:삼양홀딩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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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양그룹 창업자 김연수(金秊洙)는 1896년에 전북 고부군 부안면 봉암리 인촌마을에서 본관이 울산인 부 김경중(金暻中), 모 장흥고씨 사이 2남으로 출생했다. 김경중은 부친이 물려준 200석의 땅을 1만5000석으로 불리는 등 이재에도 뛰어난 선비였다. 김연수의 친형인 김성수(金性洙)는 일본 와세다대 유학 이후 경성방직과 동아일보를 설립하고 고려대와 중앙중고를 운영하는 등 활발한 정치·사회운동을 한 인물이었다.7세 때부터 서당을 다닌 수당(秀堂) 김연수는 12세가 되던 1907년 백부 김기중과 부 김경중이 세운 영신학교(줄포초등학교)에서 수학했다. 1911년에는 일본 마포중학교에 진학, 26세이던 1921년에는 경도(京都)제대 경제학부를 졸업했다. 27세이던 1922년 4월 그는 친형 김성수의 권고로 경성직뉴 전무 및 경성방직 상무로 사업과 인연을 맺었다.경성직뉴는 1911년 광희문 일대의 수공업자들이 댕기, 분합, 주머니 염낭끈 등을 생산할 목적으로 경성부 병목정(쌍림동) 276에 설립한 자본금 10만원(圓)의 주식회사였다. 직뉴기 67대, 발동기 1대, 직공 60여 명 규모의 회사로 성장했으나, 경영난을 피하지 못했다. 경영난에 빠진 경성직뉴를 김성수는 1917년 인수했다. 과거 일본 유학 시절 인연을 맺은 일본 장전고공(藏前高工) 방직과 출신 이강현(李康賢)의 권유가 결정적이었다.경성직뉴 대표에 취임한 김성수는 댕기, 염낭끈 등의 생산을 중단했다. 대신 일본 풍전직기(豊田織機, 토요타 자동차 전신)에서 수입한 소폭(小幅) 역직기 40대를 설치해 방직공장으로 전환했다. 그렇게 국내 최초의 근대 방직공장이 탄생했다.
고창김씨가의 가산(家産)적 지배체제
▎삼양사는 1937년 12월 만주 길림에 반석농장을 개설, 700여 정보의 황무지 개간사업에 착수했다. 1930년대 만주 봉천사무소 전경. / 사진:삼양홀딩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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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는 3·1운동 직후인 1919년 10월 5일 공칭자본 100만원(圓), 납입자본 25만원(圓)의 경성방직주식회사를 설립했다. 경방은 당시 조선인이 설립한 민간 기업 중 최대 규모였다. 김성수는 ‘1인 1주(株)’의 ‘한민족의 기업’을 만들고자 전국 13도를 순회하며 조선인을 대상으로 주식 모집에 나섰다. 초대 사장에는 철종의 사위이자 개화파 인사인 박영효(朴泳孝)를, 전무취체역에는 마포 서강(西江) 객주 출신 박용희(朴容喜)를, 취체역 겸 지배인에는 이강현(李康賢)을 임명했다.본사는 당시 포목상들의 집결지인 서울 남대문통 5정목에 세웠다. 공장용지는 노량진에 1만5000평 규모로 마련했다. 이후 박용희와 이강현을 일본 나고야(名古屋)로 출장 보내 풍전(豊田)직기에서 직기 100대를 구매했다. 1920년에는 새로 영등포에 공장용지 5000여 평을 매입, 공장을 건설했다. 동시에 면사는 대일본방적명석(明石) 공장에서 조달했다.김연수는 경영을 맡은 1922년 4월 영등포공장에 직기 100대를 설치했다. 1923년 10월부터는 월산(月産) 5000필(疋)의 ‘태극성’ 표광목을 시중에 공급했으나, 소비자로부터 외면받았다. 품질이 우수한 일본 동양방직의 ‘3A’표와 조선방직의 ‘계룡’, ‘장고’표 광목이 한국 시장을 장악한 탓이다. 조선방직은 일본 미쓰이가 1917년 부산 범일동에서 설립, 1922년부터 제품을 생산했다.1924년에는 김성수 일가가 경방의 지배권을 확보했다. 실권주 경매 처분 과정에서 이를 떠안아 고창 김씨가의 지분율은 1921년 20%대에서 1925년 2월 말에는 60%대로 급증했다. 이후 경방은 고창김씨가의 가산(家産)적 지배체제로 변모했다. 김연수는 동양방직과 조선방직이 장악한 남한에서 시장을 개척하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했다. 이에 1924년부터는 경쟁이 덜한 북한 지역을 공략했다. 일제에 대한 거부감이 심한 이 지역을 개척한 뒤 장차 만주까지 시장을 확대할 예정이었다. 동시에 “조선 사람은 조선 것으로”라는 ‘물산장려운동’에 편승하기 위해 국산품 애용을 호소하는 내용의 경방 광고를 동아일보에 집중적으로 실었다.그 와중에 경방은 위기를 맞았다. 1925년 7월 을축년 대홍수가 영등포공장을 물바다로 만든 것이다. 7월 17일 아침에는 기계와 원사, 제품 및 반제품 1만4000필이 완전히 물에 잠겼다. 300여 종업원들의 철야 사투도 허사였다. 침수된 기계설비 수리에 무려 2개월이 걸렸다. 다행히 김연수의 북진정책이 적중한 덕분에 경방은 위기를 극복, 일본 기업들과 버금갈 정도의 회사로 성장했다.김연수는 1924년 10월 1일 전라남도 장성군 남면의 장성농장 정미소에 ‘삼수사(三水社)’ 현판을 내걸고 순수 민족자본으로 설립된 근대기업 삼양의 공식적인 출범을 알렸다. 김연수의 집안은 전라도에 논 900여 정보와 밭 380여 정보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를 발판 삼아 1923년에는 장성군 남면 일대의 농토 측량에 착수, 장성농장을 세웠다. 이 지역은 소유 농토가 비교적 밀집돼 농장화 작업을 하기에 수월했다. 1926년 수확을 개시한 장성농장은 개설 10년 만인 1934년에는 1만 석 추수가 가능한 410정보(122만5866평)의 대규모 농장으로 급성장했다.
민족자본으로 설립된 근대기업 삼양
▎경방·삼양그룹은 중일전쟁을 계기로 급성장했다. 지난 1930년대 삼양사 본사 사옥 전경. / 사진:삼양홀딩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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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김연수는 1925년에는 줄포농장(158정보)과 줄포정미소를, 1926년에는 신태인농장(연산 5000석), 명고농장(연산 1500석), 고창농장(270정보)을 개설했다. 1927년 10월에는 영광군 법성포 인근에 법성농장(논 56정보)을, 1931년에는 영광면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122정보의 농토를 묶어 영광농장을 개설하는 등 곡창지대인 호남 곳곳에 농장을 개설했다.1926년에는 경성직뉴를 중앙상공㈜으로 변경했다. 고무신이 점차 매출이 늘면서 최전성기에는 중국에도 대량 보급했다. 중앙상공 상업부는 삼수사의 곡물과 경성방직 제품을 취급하는 등 호황을 누렸으나, 1929년 세계 대공황 여파로 매출이 곤두박질해 중앙상공은 경영난에 직면했다. 김연수는 1930년 5월 28세의 매제 김용완을 지배인에 앉혔다. 일본 광도고사(廣島高師) 수리과를 졸업한 김용완은 1929년부터 삼수사에 근무하고 있었다. 김용완은 ‘고무신 품질 6개월 보증판매제’를 추진했다. 새로 산 고무신이 6개월 안에 해지면 새 신으로 교환해 주는 내용이었다. 덕분에 1년 만에 매출이 3배 이상 증가했다. 업계 1위에도 등극하는 성과를 냈다. 1931년 4월 김연수는 사명을 삼수사에서 삼양사(三養社)로 변경했다. ‘물’ 또는 ‘흐르다’는 뜻을 지닌 ‘수(水)’ 대신 ‘기른다’, ‘심어 가꾼다’는 의미의 ‘양(養)’으로 바꿔 더욱 번영하고자 하는 의지를 담았다. 새 사명 ‘삼양(三養)’은 분수를 지켜 복을 기르고(養福), 마음을 너그럽게 하여 기를 기르며(養氣), 낭비를 삼가며 재산을 기른다(養財)는 뜻이다.당시 중앙상공은 1939년 쌍림동공장을 피복공장으로 전용, 경방의 광목을 염색 가공해서 학생복을 생산했다. 학생복은 주로 중앙중고 학생들에게 공급됐다. 당시 국내 최초 기성복이었다. 최신설비를 갖춘 고무공장에는 당시 종업원 500여 명이 고무신과 운동화, 방한화, 고무호스 등을 생산했다. 학생복이 인기를 끌던 1942년 쌍림동공장이 군수공장으로 지정돼 학생복 생산은 중단됐다. 이후 1944년 중앙상공은 경방에 합병됐다.
경방, 일본 경쟁업체와 대등한 조건 확보
▎국내 민영 염전의 효시인 해리염전은 삼양사의 자금난 해소에 크게 기여했다. 삼양사 해리염전 모습. / 사진:삼양홀딩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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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방은 품질 향상과 가격경쟁력 제고를 위해 일관생산체제 구축에 나섰다. 당시 외국산 면화의 수입은 면세인 반면, 해외에서 1차 가공한 면사의 수입에는 관세가 부과됐다. 심지어 면사 수입도 어려웠다. 방적시설이 없는 경방은 방적시설을 갖춘 조선방직, 동양방적 등에 비해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만주사변(1931년) 무렵 국내에서는 일본 독점자본에 의한 방적공장의 신·증설이 진행 중이었다. 1933년에는 동양방적 인천공장이, 1935년에는 종연(鐘淵) 방적 광주공장이, 1936년에는 종연방적 경성공장이 신축되는 등 방적시설이 대폭 확충됐다. 일본 내 과잉설비 해소와 더불어 일본의 중국 침략을 위한 사전포석이었다.경방은 1936년 2월 경기도 시흥에 방적공장을 건설한 이후 토요타 직기 224대와 방기(紡機) 2만 1600추를 설치했다. 그 결과, 그해 가을부터는 10·14·20수 등 3종의 실(絲)을 생산했다. 1937년 7월에는 중일전쟁에 따른 일본 정부의 수입 제한 조치로 경방은 원면(原綿) 조달에 차질을 빚었다. 당시 원면은 미국과 인도에서 수입했는데, 수입 제한으로 가격이 치솟은 것이다. 조선방직은 면화 생산량이 가장 많은 전라도와 경기도, 황해도 일대 면화를 사실상 독점했다. 경방은 1937년 12월에는 황해도 평산, 서흥, 신계, 남천 등지를 배정받아 남천에 공장 300여 평, 창고 700여 평의 조면공장을 신설하고 연 500만 근의 실면(實綿)을 생산했다. 이후 1938년에는 황해도 은율에 조면공장을 지어 연 300만 근의 실면을 생산했다. 1943년에는 삼성면업을 인수해 실면 연산 350만 근의 평양조면공장으로 전환했다. 일관생산시설을 갖춘 경방은 일본 경쟁업체들과 대등한 조건을 확보했다.경방·삼양그룹은 중일전쟁을 계기로 급성장했다. 일본 기업들이 경쟁적으로 중국에 진출할 당시 경방·삼양도 이에 편승한 것이다. 삼양사는 1937년 12월 만주 길림에 반석농장을 개설, 700여 정보의 황무지 개간사업에 착수했다. 같은 해 만주 서쪽의 영구(營口)에 천일농장도 개설했다. 이 농장은 1941년 총면적 1782정보에 소작농 600여 호의 대규모 농장으로 발전했다. 1938년에는 반석농장 인근의 380정보를 매입, 매화농장을 개설했다. 봉천 교하농장도 개설했다.경방은 1931년 만주국 때부터 만주에 진출했다. ‘태극성’보다 올이 굵고 저렴한 ‘불로초’ 광목이 만주인들의 기호에 부합했던 것이다. 그 결과 1934년 매출액 44만9000원, 순이익 4만7000원 수준이던 경방은 1935년에는 매출액 53만7000원, 순이익 13만2000원의 기업으로 성장했다. 당시 일본이 한국발 만주 수출을 제한하자, 경방은 1939년에는 만주 봉천 근교의 소가둔(蘇家屯)에 공칭자본 1000만원, 납입자본 500만원의 남만주방적주식회사를 설립했다. 1939년 12월부터 건설에 착수해 공장과 기숙사, 식당 등 총 1만7800평의 대규모 공장을 건립했다. 이후 방기 3만5000추와 직기 1000대를 도입해 1942년부터 생산을 개시했다.
8·15 광복으로 경방·삼양그룹 최대 위기
▎김연수는 1956년 1월부터는 쿠바산 사탕수수를 원료로 한 ‘삼양설탕’ 생산도 개시했다. 1957년 삼양사에서 출시한 삼양설탕 제품. / 사진:삼양홀딩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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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12월에는 삼림개간 업체인 삼척(三拓)기업과 북간도 화룡현 고성리(대마록구)의 원시림 9000만 평을 만주국 화폐 100만원에 사들였다. 1944년 겨울부터는 벌목에도 착수, 벌목한 통나무를 두만강을 통해 국내에 반입하려 했으나, 1945년 8·15 광복으로 사업을 접었다. 1940년 3월에는 하얼빈 마가구(馬家溝)에 위치한 건평 300평의 오리엔탈비어를 만주국 화폐 15만원에 매입했다. 당시 한 교포가 러시아인으로부터 인수해 운영했으나 경영난으로 삼양사에 넘긴 것이다. 이후 4홉들이 맥주를 월 15만 병씩 생산해 하얼빈에 판매했다.한편 삼양사는 1938년 자본금 200만원의 해동금융을 인수했다. 1941년에는 삼양상사를, 1943년에는 합자회사 삼양상회를 자회사로 설립했다. 경방도 1941년에 자본금 19만원의 삼성면업(三盛棉業)을 설립하고 1944년에는 경기도 시흥에 표백·염색공장을 증설했다. 1940년대 경방·삼양그룹은 민족계기업 중 최초이자 최대의 복합기업집단을 형성했다.1945년 8·15 광복 당시 경방·삼양그룹은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북한에서는 1948년 9월에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이, 중국에서는 1949년 10월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것이다. 북한 곳곳에 있는 생산시설과 중국의 남만주방적, 삼척기업, 오리엔탈비어, 천일농장, 매하농장과 교하농장, 반석농장, 구대농장 등을 한꺼번에 잃었다. 국내 사업장에도 광풍이 몰아쳤다. 경방의 좌익 근로자들은 회사를 종업원들에게 넘길 것을 요구하며 파업에 돌입했다. 삼양사의 여러 농장에서도 오너 배척운동이 전개됐다.위기가 고조되던 1945년 12월, 김연수는 경방 대표취체역에서 사임했다. 이후 김연수는 경방 경영에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김연수는 1958년 경방 소유 주식(총발행 주식의 30%)을 전부 경방의 유공사원들에게 액면가로 매각함으로써 경방과의 마지막 연결고리마저 없앴다. 1950년 3월부터 실시된 농지개혁으로 삼양사는 장성농장, 줄포농장, 고창농장, 영광농장, 법성농장, 손불농장 등 총 수확 15만 석의 농경지 소유권도 잃었다. 사실상 모든 자산을 상실한 것이다.1946년 6월 12일, 삼양사는 해방 이후 첫 사업으로 고창 해리농장의 제염업 허가를 얻었다. 1947년부터는 미간척지에 염전 조성공사에도 착수했다. 1954년 말 해리염전은 총면적 300여 정보에 식염(食鹽)을 연간 2만5000m/T를 생산하는 대염전업체로 성장했다. 이후 1956년 6월 삼양염업사로 분사했다. 국내 민영 염전의 효시인 해리염전은 이 무렵 삼양사의 자금난 해소에 크게 기여한 것은 물론, 국내 소금 부족 사태 해결에도 기여했다.1953년 3월에는 삼양통상과 서남수산(전남 목포)을 설립했다. 한편 김연수는 6·25전쟁 당시 피란지 부산에서 신규사업으로 제당과 한천(우뭇가사리)의 인공생산에 도전했다. 홍조류인 한천은 오늘날 양갱, 잼, 빵, 비스킷, 통조림, 요구르트 등의 원료 및 화장품, 양조용 청징제(淸澄劑) 제조에 사용된다. 그러나 한천은 겨울에만 생산이 가능해 일본에서는 일찍부터 인공으로 생산했다. 당시 전 세계 수요량은 연 3000t 정도였다. 이 중 90%는 일본 제품이었다.
염전 조성해 소금 부족 사태 해결 기여
▎삼양모방은 폴리에스터 사업에도 진출, 국내 화섬공업의 신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69년 삼양사 전주공장 화섬공장 준공식. / 사진:삼양홀딩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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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는 이후 한천 및 제당공장 허가를 신청했다. 그 결과, 1954년 3월 울산 대현면 매암리 해안의 7만 평 매립허가를 얻었다. 나아가 농지개혁 때 받은 지가증권을 헐값에 팔아 1954년 6월에는 부지 1만3200여 평에 2162평의 공장과 창고·기관실을 준공했다. 1955년 12월에는 서독 BMA사에서 도입한 일산 50M/T의 기계를 설치했다. 이후 1956년 1월부터는 쿠바산 사탕수수를 원료로 한 ‘삼양설탕’ 생산도 개시했다. 제당업체 난립에 따른 과당경쟁으로 동양제당, 금성제당, 한국제당, 해태제과 제당부가 폐업해 국내 제당산업은 제일제당과 삼양사, 대동제당 등 3사 체제로 정리됐다. 동시에 김연수는 1957년 5월에는 제빙공장을 완성하기에 이르렀다.성장을 이어가던 김연수는 1964년 삼양사 여수공장을 건설했다. 삼양수산을 흡수합병해 마련한 수산물 냉동냉장 및 제빙공장이었다. 국내운반선 삼양 51호와 일본 선어수출선 삼양52호를 구입한 이후 1965년 12월부터 5척의 저인망어선을 도입해 원근해 어로에 투입했다. 1967년에는 운반선 삼양59호(80t)를 자체 건조해 총 21척의 선박도 확보했다.김연수는 1963년 2월 전주방직을 인수한 이후 삼양모방㈜으로 변경했다. 전주방직은 일제강점기 말에 조선마방(朝鮮麻紡) 전주공장으로 출발했으나, 1946년에는 민간에 불하돼 고려방직으로 상호를 변경했다. 군납용 모방(毛紡) 복지를 생산하던 전주방직은 6·25전쟁 때 폐허가 됐다. 이후 학교법인 중앙학원이 불하받아 전주방직으로 변경하고 운크라(UNKRA) 원조자금 30만 달러로 시설을 보완해 1954년부터 견방(絹紡)과 소모방 생산에 착수했지만, 자금난으로 삼양에 넘겨진 것이다.삼양모방은 폴리에스터 사업에도 진출, 국내 화섬공업의 신지평을 열었다. 김연수는 1966년 7월 일본 미쓰비시상사로부터 차관 789만 달러 도입계약을 체결했다. 1968년부터는 내자 11억478만원과 외자 789만 달러로 전주시 팔복동 공단 지역에 공장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후 1970년에는 국내 최초로 중합시설을 준공했다. 삼양폴리에스텔 ‘트리론’이 탄생하게 된 배경이다. 삼양모방은 1977년 6월에 삼양사에 합병됐다.1972년 8월에는 적자 상태의 선일포도당을 삼양사, 제일제당, 대한제당 등 제당 3사가 공동으로 인수했다. 1976년에 인천에 새 공장을 준공했으며, 1984년 12월에는 제일제당과 대한제당의 소유지분을 넘겨받아 삼양제넥스로 상호를 변경했다. 1975년 12월에는 목포의 삼화(三和)배합사료를 인수해 1976년 1월 삼양사 목포 분공장으로 재발족했다. 정밀화학분야의 이온교환수지 생산은 삼양이 일본의 미쓰비시와 기술제휴를 통해 1976년 12월 울산 제당공장 옆에 양(陽)이온교환수지 후처리공장을 건설했다. 이듬해 4월부터는 SK-1B와 PK-212L의 제품 생산에 착수했다.
전경련의 전신 한국경제협의회 회장 역임1977년 8월에는 경기도 부천의 이천중기 경영권을 확보, 1979년 2월 삼양중기(삼양엔텍)로 변경했다. 각종 주물과 산업기계 제작 및 삼양사의 폴리에스터공장과 배합사료공장, 제당공장 생산설비 수리를 담당했다. 1978년 5월에는 전남 영광에 대규모 양돈단지를 조성, 26만 평의 영광농장을 세우는 등 삼양그룹을 재구축했다.김연수는 1975년 2월 21일에 은퇴와 함께 명예회장에 추대됐다. 삼양사를 설립한 지 51년 만에 그의 3남 김상홍(金相鴻) 사장이 삼양그룹 회장에, 5남 김상하(金相厦)가 삼양사 사장에 선임됐다. 김연수는 1979년 12월 향년 84세로 영면했다. 당시 언론에선 김연수의 타계 소식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재계의 큰 별이 지다’, ‘근대 한국 경제의 산파역’, ‘민족기업의 육성에 매진한 선각자’ 등 추모기사가 이어졌다. 최규하 당시 대통령 권한대행 등 300여 명이 조의를 표했으며, 윤보선 전 대통령, 고병익 서울대학교 총장,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 등 정·재계 및 학계 인사 1500여 명이 직접 찾아와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정부는 수당이 타계한 다음날인 12월 5일 고인에게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했다. 삼양사를 설립해 50년 이상 경제발전에 이바지하고 전경련의 전신인 한국경제협의회 회장을 맡아 국가를 위해 봉사한 점을 기리기 위한 것이었다.김연수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인 최초로 민족계 대기업집단을 형성했을 뿐 아니라 8·15 광복 직후에는 절체절명의 위기도 극복했다. 그 결과 오늘날 삼양사는 100년 기업이 됐다. 한국기업 역사상 매우 드문 사례다. 일제강점기에 두각을 나타냈던 업체들은 광복 이후 6·25전쟁, 이승만 정부, 군사 정권을 거치면서 대부분 사라진 것이다.
※ 이한구 - 고려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경제학 석사를, 한양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를 취득했다. 수원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강의하며 경상대학장, 금융공학대학원장을 지낸 뒤 현재 명예교수로 있다. 국내기업사 연구의 권위자로 (사)한국경영사학회 부회장을 지냈다. 저서로 [일제하 한국기업설립운동사]와 [한국재벌형성사], [대한민국기업사], [한국의 기업가정신]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