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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전문기자 박정호가 만난 세상] 등장인물만 2200명, ‘태평성시도’ 25년간 파고든 이수미 학예관 

“조선 후기에 꿈꾼 이상도시 21세기 우리를 비추는 거울” 

박정호 월간중앙 기획위원
중국의 첨단문물 받아들이고 조선의 문화적 자부심 드러낸 8폭 병풍 그림
정조·순조 등 왕들의 ‘국정 참고서’… 지금 정치인들은 대체 무엇을 꿈꾸나


▎디지털 실감 영상으로 재현한 ‘태평성시도’ 앞에 선 이수미 학예관. 국립중앙박물관 2층에 있다.
"저고리만 입고 있었다면 정말 최고였을 텐데요.” 이수미(59)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이 못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대형 병풍 그림 한 점을 두고서다. 조선 후기의 작품이 맞건만 등장인물의 복식이 중국풍이기 때문이다.

한데 아이러니가 있다. 역시 평가·해석하기 나름이다. “만약 한복 차림이었다면 조선시대 꿈꿨던 이상이 실현된 것으로 착각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복장은 중국식인데 인물은 분명 조선 사람이거든요. 18세기 후반~19세기 초반의 작품인데, 당대 중국 청나라 변발(辮髮)은 하나도 없어요. 명나라로 이어진 유교 사회의 이상향을 형상화한 그림입니다. 조선의 소중화(小中華) 의식이 발현된 것이죠.”

여기서 그림은 이름하여 ‘태평성시도(太平城市圖)’다. 가로, 세로 각각 49.1㎝, 113.6㎝의 그림 8개를 이어 붙인 8폭 병풍이다. 얼추 가로 4m, 세로 1m 크기다. 그런데 이 그림, 볼수록 매력 있다. 무엇보다 화면을 가득 채운 사람들이 눈을 사로잡는다. 키 3㎝ 남짓한 인물 2200여 명이 왁자지껄 거대한 이야기를 만든다. “우리가 살고 싶은 세상은 바로 이런 곳”이라고 합창하는 듯하다.

또 하나 재밌는 사실, 이수미 학예관은 20년 넘게 이 그림을 파고들었다. 틈만 나면 이리 보고, 저리 보며 그 안에 담긴 세상을 궁리했다. 왜 200년 전 조선 사람들은 이 그림을 그렸을까. 이 질문은 바로 지금 우리가 서 있는 21세기를 향한 물음이기도 하다. 이 학예관이 그간의 의문과 공부를 정리한 책 [태평성시도 연구]를 냈다. 그는 “2000년 가을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서 이 그림을 처음 접하며 느꼈던 전율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올해로 25년째 탐구, 대단한 집념이다.

“대학원에서 한국 회화를 전공하고 1995년 박물관에 처음 들어왔다. 2000년 당시 유물관리 업무를 맡고 있었는데, 지금껏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그림과 마주쳤다. 유물 카드에 그냥 ‘풍속도’라고만 적혀 있었다. 그때까지 전혀 공개되지 않은, 논문 한 편 없는 미지의 작품이었다. 그때 인연이 시작됐다.”

1㎝ 크기 얼굴에 담긴 각종 희로애락


뭐가 그리 매력적이었나?

“무엇보다 1㎝도 안 되는 사람들의 얼굴이 같은 게 하나도 없었다. 이목구비가 다 달랐다. 그 섬세한 표정 속에 인간사 희로애락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 해학에 흠뻑 빠졌다. 지금도 보면 볼수록 새롭다. 오래 들여다봐도 전혀 지겹지 않다. 전에 발견하지 못했던 것을 만나는 기쁨이 크다.”

등장인물이 무려 2200여 명이다.

“2002년 중앙박물관에서 개최한 ‘풍속화전’에서 해당 작품을 처음 공개했다. 그때 고해상도 디지털 사진을 찍었다. 디지털 이미지를 이리저리 확대해가며 그 속의 사람들을 일일이 셌다. 지금껏 2234명을 확인했는데, 앞으로 더 늘어날 수도 있다. 아직 못 찾은 사람도 있을 수 있으니까….”

왜 그리 많은 사람을 한 곳에 넣었을까?

“그림 자체가 커다란 도시를 형상화했다. 중국 북송시대(960~1127) 수도였던 개봉의 번화한 풍경을 그린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 형식을 따랐다. 중국에서 ‘청명상하도’는 이후 끊이지 않고 변주됐는데, 조선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반면 ‘태평성시도’는 ‘청명상하도’와 많은 부분에서 다르다. 중국식 복장과 건물이 등장하지만 세부 장면은 철저히 조선화한 것이다. 지난 20여 년은 그 미스터리를 푸는 시간이었다.”

가장 다른 지점이 어디인가? 여성과 어린이가 많이 나온다는 점을 특색으로 꼽았는데….

“등장인물 가운데 여성이 285명(13%), 어린이가 581명(26%)이다. 중국 ‘청명상하도’보다 여성과 어린이의 비중이 훨씬 높다. 조선시대 회화 가운데 여성과 어린이가 이만큼 많이 나오는 것도 없다. ‘태평성시도’의 여성들은 거리를 활보하며, 상업활동에도 적극적이다. 중국 그림 속 여성들이 주로 집 안에 머무는 것과 대조적이다. 책을 읽거나, 제기를 차거나, 연을 날리는 등 아이들의 표정도 생동감 넘친다.”

조선에서 여성의 지위는 낮지 않았나?

“조선시대에 여성들이 그만큼 많은 노동을 했고, 여성의 노동력이 사회를 떠받쳤다고 볼 수 있다. 남성들의 생활력이 강하지 않았던 셈이다. 역으로 해석할 여지도 있다. 이 그림은 이상사회에 대한 염원을 표출했다. 경제주체로서의 여성, 활기차게 노는 아이들에 대한 바람일 수도 있다.”

‘태평성시도’라는 이름을 새로 붙였다.

“1792년 국왕 정조가 규장각 문신들에게 한양의 모습을 그린 ‘성시전도’를 소재로 한 장편 한시(漢詩)를 지으라고 하명한 적이 있다. 그 결과물인 ‘성시전도시(城市全圖詩)’가 총 13편 전해온다. 아쉽게도 해당 그림은 한 점도 남아 있지 않다. 그때 문신들이 본 게 이 그림은 아닐 테지만 시의 내용과 그림 사이에 비슷한 구석이 많다. 또 이 그림에 ‘태(太)’와 ‘평(平)’ 글자를 각각 딴 문자등(文字燈)이 나온다. 태평은 평화로운 세상, 의식주를 걱정하지 않는 세상이다. 그 태평에 ‘성시전도’를 이어서 ‘태평성시도’라고 명명했고, 학계에서도 수용했다.”

디지털 실감영상으로 재탄생


▎‘태평성시도’에 나오는 낙타(왼쪽)와 원숭이 곡예. 조선시대에선 매우 낯선 풍경이다.
‘태평성시도’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꽤 인기가 높다. 원작은 박물관 수장고에 있지만 이를 디지털로 재연한 ‘태평한 하루 속으로’를 박물관 2층 동쪽 끝 ‘디지털 실감영상관’에서 만날 수 있다. 새벽 종소리와 함께 성문이 열리면서 도시의 활기찬 하루가 시작된다. 화려하게 재탄생한 디지털 스크린을 누비며 200년 전 이상사회를 체험할 수 있다. 이 학예관과 함께 디지털 영상관을 방문했다. 남녀노소 관객들이 스크린 곳곳을 손가락으로 눌러보며 ‘백 투 더 조선시대’를 즐기고 있었다.

기자도 군데군데 몇 곳을 눌러보았다. 주요 장면마다 한국어·영어·중국어·일본어로 간략한 설명이 흘러나온다. 360도 돌아가는 추천(鞦韆·그네)을 구경하는 사람들을 누르니 ‘빙글빙글 돌아가는 서양식 그네 곡예에 박수가 절로 나오네요’라는 문구가 나온다. 해당 장면은 당대 조선에서 볼 수 없던 풍경이다. 당시 청나라 연경(燕京·북경)을 다녀온 선비들의 여행기에 기록된 모습이다. 이른바 당대 최첨단 문물인 셈이다. 물감 접시를 늘어놓고 붓을 휘두르는 화가들이 모인 작업실도 보인다. 혹시 이들이 ‘태평성시도’를 남긴 주인공들은 아니었을까, 잠깐 유쾌한 상상을 해본다.

사람들 한 명 한 명이 정겹다.

“그렇다. 작가가 매우 욕심이 많은 것 같다. 거의 빈틈이 없이 사람들을 그려 넣었다. 하고 싶은 얘기가 많았나 보다. 여러 화가의 공동창작일 가능성이 크다. 당시 첨단도시였던 연경을 다녀온 화가도 동참했을 것이다. 중국을 세 번이나 다녀온 이인문과 당시 왕성하게 활동했던 김득신 등을 생각해본다.”

김홍도의 풍속화를 닮은 곳도 많다.

“김홍도의 영향을 받은 화가군이 그렸을 것이다. 건강한 해학성이 넘친다. 우물가, 서당, 주막 풍경 등이 제법 닮았다. 정조 임금은 문인들에게 ‘성시전도시’를 지어 바치게 하는 동시에 다시 엘리트 궁중화가들에게도 상을 내렸는데, 이때 ‘성시전도’도 함께 제작됐을 것이다.”

조선의 어느 도시를 그렸을까?

“한양이 가장 먼저 떠오르지만 특정 도시는 아닌 것 같다. 관념화한 도시다. 현실에는 없는 유토피아에 가깝다. 등장인물들도 고대 그리스나 로마의 신화처럼 이상화했다. 그러면서도 조선의 문화를, 조선의 전통을 빠뜨리지 않았다.”

어떤 장면에서 그렇다는 뜻인가?

“조선에는 없던 낙타와 코끼리가 등장하고, 당시 주요 교통수단이었던 가마 대신 바퀴가 달린 수레가 다수 등장한다. 서양식 문물이 먼저 들어온 중국의 풍경과 가깝다. 그런데 중국에는 없던 조선의 지게가 나오고, 각자 소반(小盤)에 음식을 받아 앉아서 밥 먹는 조선의 식문화도 등장한다. 곳곳에 한국의 풍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예컨대 아이들이 날리는 연(鳶)의 경우 가운데에 구멍이 뚫린 조선식 연만 볼 수 있다. 중국의 연에는 가운데 구멍이 없다. 외국의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면서도 기존의 전통을 간직한 것이다.”

조선 후기의 왕성했던 경제활동


▎‘태평성시도’의 주막(왼쪽)과 서당 모습. 김홍도의 풍속화(아래쪽)가 연상된다.
가게·시장 등 상업적 활동이 부각된다.

“이 그림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다. 예전 조선시대 그림에는 농사짓는 장면이 주로 나타났다. 조선 후기에 달라진 모습이다. 실제로 정조 임금은 ‘성시전도시’ 제작을 명령하기 한 해 전인 1791년에 시전 상인의 특권을 없애고 자유로운 상업활동을 보장하는 신해통공(辛亥通共)을 시행했다. 물자유통이 왕성해진 당대의 경제 활기가 ‘태평성시도’에 잘 표현돼 있다.”

퍼즐 맞추기, 수수께끼 풀기처럼 보인다.

“흥미로운 비유다. 정말 그렇다. ‘태평성시도’는 매우 다층적인 그림이다. 중화적 세계관, 북경의 첨단 문물, 조선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고루 들어 있다. 중국 문화를 선별적으로 수용하며 이상적인 도시를 표현하려는 당대 집권층과 지식인의 주체적 자각을 엿볼 수 있다.”

18세기 말에 대한 총체적 조감도다. 요즘으로 치면 국정 다큐멘터리를 보는 느낌이다.

“단순한 풍속화로 제한할 수 없는 이유다. ‘태평성시도’는 무엇보다 왕들이 나라를 다스리는 교본 비슷하게 삼은 작품이다. 실제로 정조의 뒤를 이은 순조가 열네 살 어린 나이에 ‘성시화’ 그림을 보고 쓴 ‘성시화기’라는 글이 있다. 다양한 일에 종사하는 인물 1717명뿐 아니라 각종 동물, 기물(器物)의 숫자를 일일이 적어 놓았다. 궁궐 안에서는 알 수 없는 일반 백성의 생활을 느끼려고 했다. 그림을 통해 민간세상을 간접 체험한 것이다. ‘태평성시도’도 비슷한 목적에서 왕의 명령에 따라 제작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후 조선은 쇠락의 길로 빠졌다. 이상은 이상에 그쳤다. 지배층의 자각이 무색할 뿐이다.

“역사에서 가정은 무의미하다. 그림 속 이상 세계가 실현되지 않았다고 과거를 탓할 일만은 아니다. 그나마 그런 열정이, 또 그런 그림이 있었다는 것 자체가 고마운 일이다. 현실을 개선하려는 욕망을, 미래에 대한 비전을 엿볼 수 있지 않은가. 그것은 지금 우리에게도 부여된 과제이기도 하다.”

조선의 ‘소중화’ 의식은 시대착오적 아닌가?

“일부 인정한다. 하지만 북학파 등 당대 진보적 지식인은 청의 문화를 배격하지 않았다. ‘태평성시도’도 과거를 회고하는 그림이 아니다. 소중화는 ‘멸망한 명나라를 조선이 잇는다’는 편협한 시각을 넘어 유교사회의 이상을 구현한다는 보편적 측면도 있었다. ‘아! 옛날이여’를 복창하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것도 받아들이는 적극적 태도의 발로였다.”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

“‘태평성시도’ 작가들은 당대 사회가 지향하는 최고의 가치, 최고의 문화, 최고의 과학을 표현했다. 예컨대 정약용이 화성 건설에 사용한 녹로(轆轤·도르래 원리를 이용해 돌을 높이 들어 올리던 장비)도 포함시켰다. 요즘 같았다면 우주여행, 인공지능, 자율주행차 등을 그려 넣고 환경파괴·이상기후 등을 걱정하지 않았을까 한다.”

국회 회의장에 걸린 ‘태평성시도’ 뜻


▎각종 물건이 가득한 ‘태평성시도’의 상점들. 18세기 후반 조선의 경제활동을 보여준다.
태평한 세상은 인류 공통의 소망이다.

“정조는 궁중화가들에게 화제(畫題)를 출제하며 ‘모두가 보자마자 껄껄 웃을 만한 그림을 그리라’고 지시했다. 18세기 후반에도 삶을 적나라하게 그릴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순조 또한 ‘성시화’를 보면서 세상사를 공부하려고 했다. 왕의 명령을 받은 화가들도 ‘중화’라는 보편 문화를 자기화하며 새로운 가치를 제시하려고 했다. 그런 여유와 열정은 시대와 지역을 넘어서는 것임이 분명하다.”

이 그림이 오늘에 주는 메시지라면?

“실학자 이덕무는 정조가 내린 시제(詩題)에 대해 ‘원컨대 이 그림으로 무일(無逸)을 대신하여/ 승평(昇平)을 항상 믿지 못할 것같이 하소서’라는 구절을 남겼다. 옛날 중국 주나라 주공이 백성들의 생업을 그린 ‘무일도(無逸圖)’를 보며 나라의 안녕을 살폈듯이 민심의 아픈 곳을 파악하는 것이 통치자의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권고했다.”

이덕무의 충언은 시대·국가를 초월한다. 그런데도 정치도, 경제도, 사회도 극도로 혼란스러운 2024년 한국의 가을이 유난히 더 스산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뭘까. 200년 전 조선의 그림이 지금보다 더 풍요롭게 보이는 이유는 뭘까. 이 학예관이 “그거 아세요. ‘태평성시도’ 프린트본이 지금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전체회의장에 걸려 있어요. 저도 최근에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라며 말을 맺었다.

회사에 돌아와 관련 사진을 검색해 보았다. 그의 말이 틀림이 없었다. 국회의원의 질문에 답하는 문화부 장·차관 뒤쪽으로 ‘태평성시도’가 눈에 띄었다. 뭐 하나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요즘 당장 머릿속이 깜깜해졌다. 우리 정책 결정자들은, 그리고 국회의원들은 어떤 세상을 그려가고 있을까. 그들이 꿈꾸는 세상은 과연 어떤 것일까. 회의감부터 들었다.

‘태평성시도’에 등장하는 곡물상 가게 앞에 적혀 있는 문구에서 난국을 풀어가는 실마리를 찾았다. ‘널리 삼만의 곡식을 거두어/ 항상 만호(萬戶)의 식사를 공급한다’이다. 백성의 기본생활을 보장하는 안정된 재정구조를 뜻한다. 국회를 출입하는 위정자들이 이 한마디만 기억했으면 한다.

이수미 학예관은 국립중앙박물관 토박이다. 교육과장·미술부장, 국립광주박물관장을 거쳐 중앙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을 지냈다. 내년 6월 정년을 앞두고 있다. “그림처럼 다양한 사람들이 갈등 없이 즐겁게 지내는 세상은 없겠죠. 저도 한 작품을 20년 넘게 뜯어볼 줄은 몰랐습니다. 미래는 역시 꿈을 꾸는 사람들이 열어가겠죠. 행복한 박물관 인생이었습니다.”

[박스기사] ‘태평성시도’에서 가장 돋보이는 ‘귀부인’은 누구?


‘태평성시도’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귀부인(사진)’이다. 8폭 병풍 그림의 3, 4면 경계에 귀부인의 행렬 장면이 있다. 그림 속 행렬 가운데 규모가 가장 커서 신분이 대단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귀부인은 네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에 타고 있는데, ‘태평성시도’에 나오는 수레 중 역시 가장 많은 말을 대동했다. 이 행렬의 위세에 놀라 뒤돌아 달아나는 행인까지 보여 슬며시 웃음마저 나온다.

그림 속 귀부인은 거침이 없다. 마차에 가리개를 치지 않아 얼굴이 그대로 드러난다. 다른 여인들도 행동에 제약이 없어 보인다. 이수미 학예관은 “미국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있는 중국 ‘청명상하도’에도 왕과 왕비의 행렬이 나온다. 중국 그림 속 행렬이 삼엄한 경계 속에서 진행되는 반면 ‘태평성시도’ 속 행렬은 공공장소에서 전혀 막힘 없이 공개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 당당한 귀부인은 대체 누구일까? 유교국가 조선에서 자신을 만천하에 드러낼 만큼 힘이 셌던 여인은 누구였을까? 물론 그림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반면 상상의 나래를 펼쳐볼 수 있다. 이 학예관은 “그림을 처음 보는 순간부터 귀부인의 정체가 궁금했다”며 “그림이 제작된 것으로 판단되는 1794년(정조 18년)~1812(순조 12년) 사이에 조선 왕실에서 가장 위상이 높았던 정순왕후(1745~1805)가 아닐까 싶다”고 추정했다.

정순왕후는 1800년 정조가 타계하고 순조가 즉위하면서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며 국정을 지휘했다. 순조가 열네 살이 된 1803년까지 국가의 최고 정점에 있었다. 정순왕후는 조선시대를 다룬 사극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논란의 인물이다. 1759년 영조의 계비가 되고, 이후 왕대비·대왕대비를 거쳐 무려 46년간 국모(國母) 지위에 있었다. 이 학예관은 “수렴청정은 여자인 대비에게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다. 이 시기에 가장 강력했던 여성은 정순왕후였다”고 설명했다. ‘태평성시도’를 감상하는 또 하나의 재미난 포인트다.

- 글 박정호 월간중앙 기획위원 park.jungho@joongng.co.kr / 사진 박종근 비주얼실장 park.jongkeun@joongang.co.kr

202410호 (2024.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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