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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운의 역사로 본 부동산 이야기(2)] 조선 최대 상업타운 ‘중촌(中村)’은 어떻게 성장했을까 

“상인과 역관·의관 등 전문직 집결지, 큰 돈 벌었지만 사대부에 멸시받기도” 

유성운 중앙일보 기자
청계천·종로 아우르는 지역, 큰 돈 만지는 기업·기관 즐비해
예나 지금이나… 조선시대도 리모델링·재건축으로 차익 남겨


▎서울 중구의 청계천 광교가 퇴근길을 서두르는 시민들로 분주하다. 이 일대는 SK 본사를 비롯해 KEB하나은행 본점, 한국무역보험공사, 예금보험공사, 미래에셋증권 등 각종 큰 돈을 만지는 기업 및 기관들이 즐비하다. / 사진:연합뉴스
도시의 유산계급을 가리키는 ‘부르주아(Bourgeois)’는 성을 의미하는 프랑크어 부르그(Burg)에서 유래했다. 중세 유럽에서 영주가 사는 성 주변에 마을이 들어서자, 영주는 성벽을 쌓고 세금을 거두며 이들을 보호했는데, ‘성 안에 사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부르주아라는 명칭이 붙었다는 것이다. 주로 상공업자 계급이 해당됐고, 나중에는 변호사나 의사 같은 전문직으로 확대됐다.

비록 훗날 세계사의 흐름에서 다소 뒤처지긴 했지만, 조선의 한양에도 이와 유사한 계급이 형성됐으니 그들이 사는 공간이 바로 중촌(中村)이었다.

무역으로 부자된 희빈 장씨 집안


▎과거 역관들이 모여 살았던 서울 종로구 관철동 일대에는 파고다어학원을 비롯해 많은 어학원의 본점이 자리하고 있다. / 사진:파고다어학원 홈페이지 캡처
중촌은 청계천과 종로를 아우르는 지역이다. 의관(의사), 율관(법률가), 역관(통역관), 도화원 소속 화원(화가) 등의 전문직 관리, 관청의 실무를 담당하는 하급 관료, 종로에 시전을 차린 상인, 그리고 북촌의 저택으로 출근하는 집사 등이 거주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잘 알려진 허준이나 신윤복 같은 이들이 이곳에 살았을 것이다. 지금이야 고소득이 보장된 선망의 직업이지만 조선시대만 해도 중인 계층에 속했으며, 사회적 대우가 그다지 높진 않았다.

조선 정조 때 이가환은 [옥계청유권서(玉溪淸遊卷序)]에서 중촌에 대해 “청계천의 남북은 모두 역관과 의관들이 사는데, 높은 벼슬이 허락되지 않아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익을 챙기고 문학을 가벼이 여긴다”고 남겼다. 사대부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경멸의 느낌이 없지 않다.

얼마 전 부모의 경제적 형편이 가장 영향을 끼치는 과목이 영어라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외국어가 사회적 기반을 업그레이드하는 데 좋은 도구가 된 것은 과거에도 다르지 않았다.

세계 제국을 건설한 원나라의 부마국이 된 고려에서도 몽골어를 할 줄 아는 역관들은 권력을 누렸고, 한국도 해방 직후 ‘통역 정치’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통역관들의 위세가 대단했다.

신분제도가 엄격했던 조선에서는 고려만큼의 권력을 누릴 순 없었지만, 큰 돈을 벌었다. 독특한 무역 시스템 때문이었다. 조선은 오랜 기간 무역을 엄격하게 통제했기 때문에 조공이나 중국으로 가는 사신단을 통해 이뤄지는 무역이 제한적으로 허용돼 있었다. 그것은 조선 성종 때 “임사홍이 한어(漢語)를 배움이 어찌 국가를 위함이겠습니까? 임사홍의 이번 행차는 아들 임숭재가 공주(公主)에게 장가들었기 때문에 사라능단(紗羅綾段)을 무역하려는 것뿐이니, 사신으로 보낼 수 없습니다”라는 기록에서도 엿볼 수 있는데, 사신으로 간다는 것은 무역으로 한몫을 땡길 기회를 의미했다. 그리고 사신단의 주요 일원이었던 역관에게는 큰 몫을 챙길 기회가 열려있었다.

예를 들어 조선은 중국에서 백사(白絲)를 수입해 일본 상인에게 은화를 받고 수출하는 중개 무역이었다. 백사의 수입가는 100근당 은 60냥, 일본으로의 수출가는 은 160냥이었다. 실 100근 당 투자금의 2.7배의 이익을 거뒀으니 굉장히 짭짤한 거래였다. 역관들은 이 돈을 다시 인삼 매매나 고리대금업에 투자해 몇 배로 불렸다.

박지원이 쓴 [열하일기]를 보면, 역관 변승업 일가가 은 50만냥으로 한양에서 고리대금업의 ‘큰 손’으로 활동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는 일본어전문 역관이었다. [허생전]에서 허생에게 거금 10만냥을 선뜻 빌려주는 조선 제일의 부자 변씨가 바로 이 사람이다.

‘장희빈’으로 더 잘 알려진 희빈 장씨 집안도 마찬가지. 희빈 장씨는 조상 대대로 역관을 배출한 중인 집안 출신이다. 그녀의 집안은 무역으로 상당한 부를 축적한 갑부였고, 이런 경제력 덕분에 종실 및 남인 세력과 결탁할 수 있었다. 남인은 이들의 뒤를 봐주고, 이들은 남인에게 정치자금을 대는 관계였던 것이다.

그래서 중촌에 오랜 기간 거주한 역관 집안이 많았다. 수진방(청진동 주변)의 천녕 현씨, 장통방(관철동 주변)의 무안 박씨가 유명했다고 한다. 특히 무안 박씨는 선조 때 장원으로 역관이 된 박대근 이래 20세기 초까지 역관 집안으로 명성을 떨쳤는데 천녕 현씨, 영양 남씨 등 역관 집안과 결혼해 패밀리 비즈니스를 공고히 했다.

1983년 관철동에 들어선 파고다어학원을 비롯해 많은 어학원의 본점이 이 근방에 있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이지만, 지역의 기운을 아주 무시할 수만은 없겠다는 생각도 든다.

양반 상류층 모방하기도


▎서울 종로구 청계천로에 있는 세운상가. 예로부터 이곳에는 시전을 차린 상인, 북촌의 저택으로 출근하는 집사 등이 거주했다.
중촌에는 지금 SK 본사를 비롯해 KEB하나은행 본점, 한국무역보험공사, 예금보험공사, 미래에셋증권 등 각종 큰 돈을 만지는 기업 및 기관들이 즐비하다. 또 종로 상권이 있는데 과거에도 분위기가 비슷했다. 일단 이곳에는 조선시대 최대 상업지구인 종로 시전(市廛)이 있었기 때문에 돈이 많이 돌았다. 시전을 운영하는 상인들은 다방골(현재의 다동과 서린동)과 상사동(현재의 청진동과 종로1가 일대)에 많이 거주했다. 시전은 18세기까지 한양에서 독점적으로 물건을 파는 소매상이었기 때문에 경쟁 없이 큰 돈을 벌었다.

이들 역시 노론 등 조선의 주요 권력층과 결탁한 이권 공동체였다. 정치권은 이들의 독점적 상업권을 보장해주고, 상인들은 이들에게 정치자금을 대는 관계였다. 그래서 정조가 금난전권(禁亂廛權)이라는 시전 상인들의 특권을 폐지한 것은 정치자금을 겨냥한 조치이기도 했다.

조선 철종 때 유재건은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에서 중촌에 대해 “상인과 부자들이 많이 살아 털끝만한 이익을 다투고 인색하게 굴며 거마(車馬·수레와 말)와 제택(第宅·살림집과 정자를 통틀어 이르는 말)으로 서로 호사를 다툰다”고 남겼다. 오늘날로 치면 강남 압구정동의 아파트단지나 성북동 고급 주택가에 마이바흐나 레인지로버 같은 차들이 늘어서 있었던 것 같다. 말투에 대해서는 “한편으론 공경(恭敬)에 가깝고, 다른 한편으로는 거만했다”고 하는데 양반 상류층을 모방하고자 하는 ‘졸부’의 모습을 꼬집은 것 같다.

어쨌든 중촌이라는 구역은 고려와 조선의 가장 큰 차이를 보여준다. 고려의 양반들은 상업지구를 선호했지만, 조선 양반들은 번화가를 꺼렸다. 그래서 개경의 권력자들은 도리어 번화가에 바짝 붙어살았지만, 한양의 양반들은 시전(市廛·한양의 상설시장)이 모여 있는 종로에서 조금 거리를 두고 북촌이나 남촌에 살았다.

고려 시대 유명한 학자 이제현은 조정 중신들이 매일 쌀, 소금의 가격을 따지면서 시장 돌아가는 사정으로 날을 새운다고 비판했는데, 요즘으로 말하면 금, 구리, 밀, 커피 등의 현물 시장 가격을 확인하느라 바빴던 셈이다. 하지만 조선 양반들은 이런 이야기를 꺼내면 큰일 나는 줄 알았다.

돈에 민감한 사람들이 살아서였을까. 이 지역은 조선시대 주택 매매기록이 다수 남아있는데, 그중에는 리모델링과 재건축을 통해 주택의 가치를 올린 흔적도 보인다.

예를 들어 장통방(서울 남대문로와 서린동 일대)에 살던 전만배는 1764년 집 19칸짜리 기와집(빈터 30칸)을 200냥 주고 매입했다. 그는 5년 뒤 이 집을 부수고 16칸짜리 기와집(빈터 33칸)을 새로 짓고는 김두규에게 300냥을 받고 팔았다. 기와집 규모는 19칸에서 16칸으로 줄었는데, 100냥 더 받은 것이다. 신축 주택이었기 때문이다. 1783년엔 김경서가 이 집을 300냥에 산 뒤 1년 만에 3칸을 더 늘려 350냥에 팔았다. 재건축으로 평수를 늘려 1년 만에 16%의 차익을 낸 셈이다.

영조, 강력한 주택 규제안 시행


▎조선시대 종로 시전거리에 있었던 잡화점 모습. 이들은 청계천과 종로를 아우르는 중촌에 주로 살았다. / 사진:국립민속박물관
비슷한 기록이 정선방(종로구 낙원동, 익선동 일대)의 매매 기록에도 나오는데, 18칸짜리 기와집을 750냥 주고 사서 21칸짜리로 확장한 뒤 1년 만에 1000냥을 주고 판 기록이 있다. 역시 재건축을 해서 집값을 30%가량 높여 되판 셈이다.

또한 노른자 땅에는 프리미엄을 붙이는 관행도 있었다. 세조 때는 원각사를 짓기 위해 시전, 그러니까 조선시대 상가가 밀집해 있던 종로 일대 민가를 철거했는데, 이때는 시세의 3배를 더 얹어줬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나온다. 그 이유를 당시 신숙주는 이렇게 설명했다.

“저자 사람들이 아침저녁으로 이권(利權)을 노리는 땅이니, 세 갑절로 하여 주는 것이 편하겠습니다.”([세조실록] 10년 6월 15일)

한양의 주택시장을 교란한 것은 공직자들도 한몫했다. 그래서 영조는 공직자가 다주택을 보유하는 것을 막았고, 그래도 해결되지 않자 도성 안 집 매매와 전세를 모두 금지하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이를 어기면 관리는 벼슬길을 2년 동안 막고, 유생들은 6년간 과거시험 응시자격도 박탈했다. 또 일반인의 집을 사들인 공직자에겐 1년 안에 모두 집을 내놓도록 했다.

“어영대장 홍봉한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이번에(주택을) 팔고 사는 것을 모두 금지하신 하교는 성의(聖意)를 우러러 알 수 있습니다마는, 이보다 앞서 매입한 것을 하루 이틀 안에 모두 도로 물리게 하면 매우 소요스러울 것이며… 사대부도 전하의 백성이니, 마땅히 진념(軫念)하는 방도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적간(摘奸·부정한 일에 대한 조사)에 들지 않은 자는 탕척(蕩滌·사면)하고 그 나머지는 올해 안으로 도로 물리게 하라.’”([영조실록] 30년 7월 16일)

하지만 영조도 자녀 문제에선 자유롭지 못했다. 영조 10년, 부제학 이종성의 상소 중 일부다.

“옹주(翁主)가 사여(賜與)받은 저택 옆에는 여염집을 많이 사서 장차 개척(開拓)하여 집을 지으려 한다고 합니다. 모르긴 하지만 전하께서 과연 이런 일이 있으십니까, 없으십니까?”([영조실록] 10년 8월 15일)

이렇듯 영조의 강력한 주택 규제안은 자녀와 측근들에 의해 안에서부터 무너지고 있었다. 한양의 주택 가격은 계속 올랐고, 집값을 올리는 다양한 방법이 이어졌다. 장통방에 살던 전만배가 리모델링으로 집값을 50%나 높여 되판 것은 영조 45년의 일이다. 영조의 주택 매매금지 법안이 나오고 15년 뒤였다.

- 유성운 중앙일보 기자 pirate@joongang.co.kr

202410호 (2024.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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