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영화제는 국제 영화제가 아니다. 흔히 칸·베를린·베니스영화제에 맞먹는 또는 그 이상의 어마어마한 영화제로 알고 있지만, 사실 우리나라의 대종상이나 청룡영화제처럼 미국 국내 영화제에 불과할 뿐이다. 미국, 그중에서도 할리우드의 ‘그들만의 잔치’인 아카데미영화제에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올해도 어김없이 지난 3월26일(미국시간) 발표된 아카데미영화제 수상작들의 극장 흥행성적이 2배씩 뛰었다고 한다. 이는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기현상이 아니다. 평균적으로 아카데미 트로피를 거머쥔 영화는 전세계적으로 그 주말 관객이 2∼4배 급증한다. 그런 상업적인 파장의 예는 부지기수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에게 소원이던 감독상과 작품상을 선사한 “쉰들러 리스트”는 후보에 지명된 것만으로도 관객이 3배 늘었고, 수상 이후 또다시 3배가 올랐다. 1999년 감독상 수상작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국내에서 6개월만에 재개봉돼 수만명의 관객을 끌어모았다.
1992년 외국어영화상 수상작 “지중해”는 시상식 전 수익이 4만달러에 불과했으나 수상 이후에는 무려 450만달러를 벌기도 했다. 이와 같은 금전적 계산 외에도 아카데미영화제는 올해로 72회를 맞은 연륜 있는 행사답게 족히 책 한권 분량은 될 듯한 흥미로운 뉴스거리가 많다.
도둑맞은 오스카 트로피
올 아카데미는 그 어느 해보다 우여곡절이 많았다. 회원들에게 보낸 투표용지 수천장이 분실되고, 트로피 55개가 3월10일 로스앤젤레스 벨에서 하역 도중 분실됐다가 10일후 한 슈퍼마켓 쓰레기장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그런데 왜 아카데미상을 ‘오스카’(Oscar)라고 부를까? 여러 가지 가설 중 하나는 아카데미협회 도서관의 한 직원이 책상 위의 황금상을 보고 “우리 오스카 아저씨랑 꼭 닮았네”라고 외치는 것을 신문기자가 다음날 칼럼에 썼다는 것이 가장 지배적이다. 다른 하나는 두차례나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이브의 모든 것”의 베티 데이비스가 트로피를 보고 자신의 전남편 오스카 넬슨과 닮았다고 ‘오스카’라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다.
필름 릴 위에 검을 짚고 서 있는 기사의 모습을 한 높이 34.5㎝,무게 3.4㎏, 24K 도금의 자그마한 트로피. 영화에 관계된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갖고 싶어하는 오스카 트로피를 경매에 부쳐 팔아버린 사람이 있다.
1947년 제19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감독상·남우주연상 등 7개부문을 휩쓴 “우리 생애 최고의 해”의 해럴드 러셀이 그 주인공. 2차대전 참전 용사들이 사회에 적응하는 과정을 그린 이 영화에서 항공모함 화재로 두 손을 잃고 불구가 된 호머 역으로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러셀은 그 자신이 실제로 상이용사다. 그가 아내의 눈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오스카상을 경매에 부쳤는데, 절대로 트로피를 팔거나 대여해서는 안된다는 규정을 들먹이며 깐깐하게 굴던 아카데미협회도 그의 사연을 듣고는 이례적으로 이를 허용했다고 한다.
아카데미상을 거부한 사람들
‘평양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라고, 선망의 대상인 아카데미상 수상을 거부한 사람들도 있다. 괴짜 감독 우디 앨런은 1978년 제50회 시상식장에 아예 나타나지도 않았다. 그는 그 시간 자신의 단골 바에서 색소폰을 연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다이안 키튼과 우디 앨런이 주연한 코미디 “애니 홀”은 작품상·감독상·여우주연상을 수상한 행운의 영화였다.
또한 1971년 작품상·감독상 등 7개의 트로피를 거머쥔 “패튼 대전차군단”에서 2차대전의 실존인물 패튼 장군을 열연한 조지 C. 스콧도 남우주연상 수상을 거부했다. “대부”로 1973년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수상자로 선정된 말론 브랜도는 할리우드가 인디언에 대한 인종차별에 앞장선 것에 항의해 시상식장에 인디언 차림의 여배우를 대신 보내 사회성 강한 메시지를 전달하며 트로피를 사양했다.
빈익빈 부익부 누리는 수상자들
아카데미 트로피를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은 누구일까? 정답은 여전히 어린이들의 꿈과 희망인 월트 디즈니. 그는 사후에 받은 것과 명예상을 포함해 무려 31개의 오스카 트로피를 가져갔다. 최다 주연상 수상자는 캐서린 헵번으로 “모닝 글로리”를 비롯해 흑백간의 사랑 때문에 당사자와 양가 부모가 겪는 하루 동안의 갈등의 드라마 “초대받지 않은 손님”, 1968년 “겨울의 사자”, 헨리 폰다와 함께 남녀주연상을 휩쓴 감동의 드라마 “황금연못”까지 모두 네번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다작으로 유명한 존 포드 감독은 “정보원” “분노의 포도”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 “아일랜드 연풍”으로 감독상을 네번 수상했다. 최다 수상작은 1997년 “타이타닉”이 11개의 오스카 트로피를 거머쥐어 지금까지 최고를 자랑하던 “벤허”와 나란히 1등으로 거명된다. 가장 많은 후보에 오른 영화는 “이브의 모든 것”과 “타이타닉”으로, 무려 14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었다.
아카데미에서도 피는 못속여
“처음 만나는 자유”에서 리사 역으로 2000년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안젤리나 졸리는 수상소감에서도 밝혔듯 개성파 배우 존 보이트의 딸이다. 우리에게는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의 악당으로 익숙한 존 보이트 또한 1979년 “귀향”으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같은 영화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제인 폰다의 아버지 헨리 폰다는 자신의 유작 “황금 연못”에서의 열연으로 1982년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이들 부전여전보다 더 유명한 것은 휴스턴 가족으로, 존 휴스턴은 1949년 제21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시에라 마드레의 황금”으로 감독상을 수상했고 그의 아버지 월터 휴스턴은 같은 작품으로 남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이들이 대단한 가문인 것은 존 휴스턴이 1986년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도 마피아를 소재로 한 코미디 “프리지스 오너”로 감독상에 노미네이트되고, 딸 안젤리카는 여우조연상을 수상했기 때문이다. 1959년 “지지”로 감독상을 수상한 빈센트 미넬리의 딸 라이자 미넬리도 1973년 “캬바레”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보수주의자들의 점잔빼기
아카데미상은 미국 영화 제작에 직접 관여하는 약 4,800명의 회원 중 현역으로 활약하는 400여명의 투표에 의해 수상자와 수상작이 결정된다. 거의 매년 시상식이 끝나면 “역시 아카데미는 보수적”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올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허리케인 카터”의 덴젤 워싱턴이 1964년 “들백합”으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시드니 포이티어 이후 두번째 흑인 수상자가 될 것인지 관심이 집중되었지만 오스카는 작품상과 감독상 등 5개 부문을 석권한 “아메리칸 뷰티”의 케빈 스페이시에게 안겼다. 역시 아카데미 회원들은 흑인배우에게 인색했다.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는 주제가상 후보에 오른 전곡을 라이브로 공연하는 전통이 있다. 올해는 주제가상 후보에 오른 발칙한 성인 애니메이션 “사우스 파크”의 주제곡 ‘Blame Canada’가 과연 위성을 통해 생중계될까가 관건이었는데 아카데미의 보수성을 희화한 결과가 나왔다. 코미디의 황제 로빈 윌리엄스가 입에 검정 테이프를 붙이고 등장해 육두문자가 넘치는 노래의 시작부분을 넘긴 후 나머지 가사를 그대로 불렀다. 당연히 주제가상은 점잖은 “타잔”의 ‘You’ll be in My Heart’에게 돌아갔다.
무대 뒤의 에피소드들
아카데미의 축제 분위기를 돋구기 위해 기자·평론가·제작자, 심지어 라스베이거스의 도박사들이 수상작을 점치며 도박을 벌이기도 한다. 반면 오스카 시상식 전날 발표하는, 할리우드의 ‘가장 황당한 업적’의 영화와 감독에게 주는 ‘골든 라즈베리’상 이라는 것도 있다.
아무도 수상하러 오지 않아 시상식이 제대로 이루어진 적은 없지만 매년 꾸준히 수상자를 언론에 발표해 전세계 신문 외신란을 채운다. 2000년 Y2K 최악의 영화상 수상작은 “와일드 와일드 웨스트”로 최악의 각본상까지 함께 받았고, 감독 배리 소넨필드는 최악의 감독상을, 두 주연배우 윌 스미스와 케빈 클라인은 최악의 커플상을 수상했다.
심지어 빌보드 상위에 랭크된 주제곡까지 최악으로 분류되었다. 현재 할리우드 최고의 개런티를 자랑하는 애덤 샌들러는 “빅 대디”의 말도 안되는 아빠 연기로 최악의 배우에 선정되는 영광(?)을 안았다.
올해는 20세기의 마지막 해인 만큼 특별히 20세기 최악의 배우도 선정했는데, 실베스터 스텔론과 마돈나가 그 주인공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