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박에는 이유가 있다

■ 서울대 우등 졸업

이씨의 본적지는 서울 계동으로 돼 있지만 출생지는 1952년 피난지 부산 동래였다. 아들 셋 중 막내. 대학교수였던 부친(이희재·현재 83·미 LA거주)이 사업에 손을 댔다가 부도나는 바람에 집안이 쫄딱 망했고, 성악가 김자경씨와 이화여대 성악과 동기생이었던 어머니(김경현·82)가 사회시설 등에서 피아노를 쳐주며 생활하던 때였다. 가족이 서울로 올라온 이후에도 계속 생활이 어려워 4대문밖 산촌(山村)이던 서울 종로구 부암동, 그러니까 세검정 쪽에 밀려나가 살아야 했다.

“대학원을 졸업할 때까지 노상 시험의 연속이었어요. 청운초등학교를 들어갈 때도 시험, 경복중·고에 입학할 때도 시험, 대학도 시험, 대학 졸업할 때도 공교롭게 우리 때부터 ‘졸업논문’제도가 생겨 고생했어요. 유학갈 때도 시험, 유학가서 대학원 석사를 마칠 때도 그해부터 ‘졸업자격 영어논술시험’이란 제도가 새로 도입돼 애를 먹었죠.”

경복중을 전교 4등으로 졸업했을 만큼 우수학생이었지만 중3 때 손에 잡기 시작한 기타 때문에 경복고에 진학해서는 내리 3년, 반에서 10등 안팎을 맴도는 성적에 머물렀다. 고교 2학년 때는 친구와 함께 듀엣으로 교내 행사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러 인기를 끄는 등 끼를 발휘하기도 했다. 평생 기계를 만지면서 살고 싶어 대학은 기계학과를 지원했다. (서울대) 공대 기계학과는 성적이 못 미쳐 농기계학과로 시험을 쳤다.

시험 직후 작은형님의 친구이던 백순진씨와 함께 듀엣을 결성, 포크기타를 들고 본격적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활동무대는 명동 YWCA의 청개구리홀. 당대 이름을 날리던 양희은·송창식·윤형주·서유석씨 등 포크가수들이 주로 모였던 곳이다. 노래에 전념하다보니 1학년 성적은 거의 낙제였다.

매일 부암동 집에서 서울대 교양학부(당시 서울대 신입생들은 1년 동안 태릉에 있던 공대 캠퍼스에서 교양학부를 마쳐야 했다)가 있던 태릉까지 버스를 두번씩 갈아타고 통학했다. 그리고는 다시 명동에 나가 노래를 부르는 피곤한 생활이 계속 됐다. 형들이 군대를 막 제대했거나 군복무 중이었기 때문에 집안 생계를 막내인 그가 떠맡았다.

노래를 얼마나 열심히 불렀는지 폐(肺)를 과도하게 쓴 탓에 1학년 겨울방학중 크리스마스날 저녁 시민회관에서 노래하던 이씨는 무대에서 픽 쓰러졌다. 대연각호텔에 불이 난 그날이었다. X레이 촬영 결과 폐 한쪽이 거의 망가진 상태였고 악성 늑막염이 겹쳤다. 지금도 그는 한쪽 폐가 찌그러져 늑막과 붙어 있는 상태다. 격한 운동도 하지 못한다.

2학년 휴학, 그리고 방위병으로 1년 반, 제대한 뒤 다시 2학년에 복학했다. 노래를 계속 하기가 어려웠다. 방위병 시절부터 저녁에 라디오 음악프로 ‘비바팝스’DJ를 맡아 진행했고 이후 제대 및 졸업 할 때까지 주로 MC와 DJ로 활동했다. 미래에 무엇이 돼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노래 말고 공부에 몰두해 당시 대학생들 사이에서 ‘희한한 점수’로 여겨질 만큼 드문 성적으로(2,3,4학년 내리 A+) 졸업할 수 있었다(실제로 그의 졸업장에는 ‘우등졸업’이라는 큼지막한 도장이 찍혀 있다).

졸업 후에도 대학 전공쪽이 아닌 연예활동에 주력했다. 1979년과 80년 그는 방송국의 3개 쇼프로 MC로 바쁘게 뛰어다녔다. 그러나 그런 그를 ‘한국을 탈출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사건이 발생했다. 1980년 신군부의 언론통폐합 조치였다.
“문화쪽 입장에서 보면 민영방송을 더 늘려도 뭣할 판에 있던 것마저 없애버렸으니…. 그것을 보고는 ‘아, 이제 앞으로 우리나라에 문화의 암흑시기가 오겠구나’하고 생각했죠. 그래서 외국으로 나가야 되겠다고 결심하게 됐어요.”

당시만 해도 그 또래 젊은이가 외국에 나갈 수 있는 방법은 유학이 거의 유일했다. 그때까지 연예활동으로 벌어놓은 돈을 달러로 바꾸니 5만달러. 부모님께 절반을 드리고 남은 2만5,000달러를 학자금으로 그는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전공은 ‘기계’에서 좀더 폭이 넓어진 공업경영학. 여전히 훗날에 대해서는 ‘교수가 돼야겠다’는 희뿌연 생각 뿐이었다. 음악, 나아가 대중문화 쪽은 사실상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세계에서 가장 앞선 수준의 기계공학이 필요한 곳이 바로 미 항공우주국(NASA)이다. 기계공학도로서 내심 NASA 진출까지 꿈꾸면서 이씨는 그 자매대학이던 플로리다 기술대학(Florida Institute of Technology)에 지원했다. 그러나 영어가 모국어인 사람에게만 입학자격이 주어지는 까닭에 그는 캘리포니아주립대학원으로 옮겨 지원, 입학허가를 받았다. 전공은 당시 미국 학생들 사이에서 각광받기 시작하던 첨단 분야인 컴퓨터공학.

곧바로 대학원 수업을 받을 수는 없었고 일단 대학원에 적(籍)을 두고 2년 동안은 이 대학 학부(California State University, Northridge, CSUN) 강의를 들었다. 그런 후 대학원 공부를 시작해 이윽고 1984년 겨울 석사과정을 마쳤다.

83년 UCLA(캘리포니아주립대, LA)의 한국학생회가 그에게 노래를 불러달라며 초청해 찾아간 자리에서 지금의 부인 김지혜(39)씨를 만났다. 미국으로 이민을 가 대학에서 컴퓨터 그래픽을 전공하던 2년생이었다. 그때 이씨의 나이는 만31세였고 지혜씨는 만22세, 나이차가 커 ‘양심상’선뜻 접근하기도 어려웠다. 어정쩡한 사이로 1년 동안 이래저래 마주치다 정들어 1984년초, 그러니까 지혜씨가 대학 3학년 때 둘은 결혼에 골인했다.

4년 가운데 마지막 1년은 빚쟁이로 공부해야 했다. 가지고 갔던 돈이 다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함께 노래를 했던 백순진씨로부터 1,000만원, 미국에서 사업하던 친구로부터 1,000만원을 빌렸다. 게다가 결혼까지 했기 때문에 생활은 그만큼 더 어려워졌다.

어느날 갑자기 한국에 있는 줄 알았던 아버지와 어머니가 불쑥 이씨 부부가 생활하던 학교 기숙사 방문을 열고 들어오셨다. 막내아들이 경제적 어려움에 처했을 것을 짐작하고 서울 집을 팔고는 아예 미국으로 건너온 것이었다. 네 식구는 버뱅크의 작은 아파트 하나를 얻어 살았다. 환갑을 훨씬 넘긴 노령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남의 집 잔디깎기 노동으로 품을 팔아가면서 수만씨가 석사과정을 마칠 때까지 네식구의 생계를 맡았다.

그렇게 공부를 계속했으면 우리는 오늘 음반기획자, 또는 대중문화 사업가로서의 이수만 대신 의젓한 ‘컴퓨터공학 교수 이수만’을 만나게 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변 현실은 그의 가슴 속에 줄곧 또아리를 틀고 있던 음악에 대한 미련을 자꾸 되살아나게 했다. 그의 얘기를 들어보면 오늘날 그에게 찾아온 ‘연쇄 대박’은 이미 그때부터 ‘준비’됐던 것임을 짐작케 한다.

“미국에서 M─ TV(음악 전용TV)가 부흥하는 것을 보면서 ‘아, 이제 음악이 오디오시대에서 비주얼시대로 옮겨가는구나’하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뮤직비디오도 한창 확산됐고요. 더욱이 그때 음악을 선호하는 층의 연령대가 점점 낮아지는 현상도 발견했어요. 그래서 ‘돌아가 저런 경향으로 비즈니스를 벌이면 성공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차츰 가수, 음악, 문화라는 것이 하나의 거대한 ‘산업’으로 눈에 들어오는 거예요. 그때만 해도 유학을 갔다온 사람이 음악, 문화산업 쪽으로 뛰어드는 경우는 거의 없었으니 희소성도 보장되고요. 제가 줄곧 몸담아왔던 대중 문화쪽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마음 먹었어요. 귀국후 어떤 방향으로 활동할 것인가도 그림을 그렸고요.”

그러나 마음속 ‘그림’은 좋아도 수중에 돈이 없었다. 당장 귀국해 생계를 꾸릴 일부터 걱정할 판이었으니까. 일이 되려고 그랬을까. 마침 한국의 MBC 방송국에서 FM프로그램의 진행을 맡아달라는 연락이 왔다. 이씨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1985년 5월 대학원 졸업장과 석사학위만 가지고 그는 한국을 떠난 지 4년여만에 귀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