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성사 100년의 스크린 戀歌

변사들의 전성시대

특히 운영자가 한국인 박승필이었다는 사실은 당시 대부분 극장의 소유나 운영이 일본인에 의해 주도됐다는 점에 비춰볼 때 주목할 만하다. 이는 점차 확대되던 영화흥행 분야에서 입지를 구축하는 것이었고, 영화 제작에 손댈 수 있는 자본 축적의 가능성이 생긴 셈이었다.
박승필은 단성사와 광무대 운영을 통해 얻은 수익을 연쇄극 제작에 투입했고 결과적으로 연쇄극 제작은 본격적인 한국영화의 제작으로 전이되는 중요한 바탕이 된다. “의리적 구토”를 비롯하여 “시우정”(是友情) “형사고심”(刑事苦心) 등 신극좌가 제작한 일련의 연쇄극은 물론 혁신단의 “학생절의”(學生節義) “보은”(報恩) 등의 작품도 그의 제작지원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연쇄극은 연극에 무대에서 표현하기 힘든 배경 장면 등을 촬영해 비추는 것으로, 연극과 영화를 혼합한 형식이라 할 수 있다. 엄밀하게는 연극의 한 갈래이지만 어쨌든 영화 장면이 들어갔다는 점에서 미숙하나마 본격적인 영화 제작 전단계로서의 경험과 기술을 축적하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극장이 늘어나고 영화의 인기가 높아지자 변사들이 대중의 스타로 떠올랐다. 당시 한국에 소개되는 영화는 대부분 외국의 무성영화였기 때문에 관객들의 입장에서는 영화의 내용이나 장면에 대한 설명을 필요로 했다. 특히 1915년을 지나면서 초기에 수입된 영화들과 달리 상영시간도 길어지고 내용도 간단치 않았다. 물론 자막이야 있었지만 외국어로 된 내용을 제대로 소화해낼 사람은 거의 없었고 설혹 읽을 수 있다 하더라도 소리 없이 입만 벙긋거리는 단순함을 견디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변사는 그런 시절 영화와 관객을 이어준 해설자이면서 흥행의 스타였다. 발성영화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극장에서 상영되는 영화보다 변사가 누구인가에 따라 영화의 인기가 달라질 정도였다.

변사는 일본에서 나타난 독특한 형식이다. 영화의 대중적 보급 과정에서 변사가 존재했던 나라는 일본과 한국·태국·중국(대만) 등 극소수다. 미국에서도 1910년까지 변사의 역할과 유사한 영화 해설자가 존재했다지만 이들을 고용하는 데 따른 비용 증가가 오히려 해설자의 급속한 쇠퇴를 촉진하는 요인이 되었다. 일본에서 변사가 자연스럽게 등장하고 독특한 양식으로까지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분라쿠’(文樂)나 ‘가부키’(歌舞伎) 등에 등장하는 극 해설 방식이 대중적으로 친숙한 양식으로 보편화돼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변사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06년 무렵이었으나 전문 직업화하기 시작한 것은 1910년 경성고등연예관이 개관한 이후부터다. 이때 전속 변사로 등장한 서상호는 능숙한 일본어 실력과 유창한 화술로 관람객들의 인기를 모았다. 이때부터 변사는 영화의 흥행을 쥐고 흔드는 스타 중의 스타가 됐다. 극장 주인들은 변사의 환심을 사기 위해 파격적인 대우를 경쟁적으로 내세웠고, 바람난 기생들은 서로 변사들을 끌어가기 위해 부산을 떨었다. 우정식(禹正植)·김덕경(金悳經)·서상호(徐相昊)·김영환(金永煥)·최종대(崔鍾大)·성동호(成東鎬)·김조성(金肇盛)·최병룡(崔炳龍)·이병조(李炳祚)·안광익(安光翊)·조월해(趙月海) 등은 오히려 배우들보다 이름이 높았다. 김덕경은 사극에서, 서상호와 우정식은 문예극에서 두각을 보였으며 이병조는 활극, 최병룡은 희극, 김영환은 연애극에서 각각 특성을 보였다.

초기의 변사는 일정한 자격을 필요로 하지 않았으나 영화의 대중적 보급이 확산되고 한국영화의 제작이 이루어지기 시작하는 1921년 무렵에 이르러서는 조선총독부가 흥행물취체규칙(興行物取締規則)을 만들어 일정한 자격시험에 합격한 사람에 한하여 변사의 자격을 부여하기도 했다. ‘언사를 삼가하지 않고’ ‘음담패설을 남발해 풍기를 문란하게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밝혔으나 흥행물취체규칙 자체가 영화에 대한 경찰의 통제를 위한 것이며 3·1독립운동 이후 총독부의 한국통치 정책이 보다 강화되고 있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실제 목적은 변사의 사회적 영향력을 제한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변사들의 처지가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어서 설명하는 내용이 영화의 내용과 다르다거나 말이 분명치 않아 영화를 관람하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때는 관객들의 야유를 받아야 했다. 우미관에서는 관객이 변사에게 숯불덩이를 던져 소동을 일으킨 경우까지 있었다.

무성영화시대에 화려한 대중의 스타로 각광받던 변사들은 토키영화의 보급이 일반화되자 급속한 몰락을 맞는다. 당대 최고의 변사로 불리던 서상호는 약물중독자가 되어 1938년 8월12일 우미관 안에서 49세를 일기로 객사했으며 우미관의 주임변사로 활동했던 김조성과 조선극장의 주임변사 김영환은 ‘성좌’(星座)라는 신파극단을 조직, 전국을 순회하며 이른바 변사극(辯士劇)을 공연하며 명맥을 이어나갔다.
전성기의 단성사는 화려했다. 한국영화 역사에서 획을 그을 만한 일들이 대부분 단성사를 거쳤다. 연쇄극 “의리적 구토”나 한국인들만의 노력으로 완성한 “장화홍련전”(1924), 무성영화 시대의 전설을 그대로 지닌 “아리랑”의 상영은 그 중에서도 손꼽을 만한 일이다.

연쇄극 “의리적 구토”는 단성사 사장 박승필이 제작비를 대고 신파극단 신극좌를 이끌던 김도산이 배우들을 동원해 만든 작품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만든 연쇄극이었다. 그러나 박승필은 이 작품을 ‘최초의 활동사진’ 즉 처음 만든 영화라고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관객들도 그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김도산이 주연과 연출을 겸한 이 작품은 의협심 강한 청년이 집안의 재산을 차지하고 형제들을 위험 속으로 몰아넣으려는 계모의 간악한 흉계를 물리치고 행복을 되찾는 과정을 그린 활극조의 멜로드라마다. 내용이야 틀에 박힌 신파극의 한가닥이었지만 한국사람들의 손으로 만든 영화 장면이 등장한다는 것은 올림픽에서 처음으로 한국 선수들이 메달을 딴 것만큼이나 흥분거리였다. 당시 매일신보(1919.10.29)가 전하는 공연 분위기를 보면 그 감격이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신파 신극좌 김도산 일행이 경성에서 촬영한 신파 활동사진이 조선에 처음으로 지나간 27일부터 단성사 무대에 상장된다고 하자 초저녁부터 조수같이 밀려든 관객 남녀는 삽시간에 아래 위층은 물론하고 빽빽이 차서 만원의 패를 달고 표까지 팔지 못하는 대성황이었더라. 그런데 제일 번화한 것은 각 권번에서 기생온 것이 무려 200명이나 되어 더욱 이채를 내였더라. 영사된 것이 시작하는데 우선 실사로 남대문에서 경성 전시의 모양을 비추자 관객은 노상 갈채에 박수가 야단이었고 그 뒤는 정말 신파사진과 배우의 실연 등이 있어서 처음 보는 조선 활동사진이므로 모두 취한 듯이 흥미있게 보아 전에 없는 성황을 이루었다더라.

이만한 성공을 경험하고도 덤덤하게 넘길 제작자가 어디 있을까. 박승필은 자신의 계획이 제대로 맞아떨어진 데 쾌재를 부르며 연쇄극 제작에 더욱 힘을 쏟았다. 신극좌뿐 아니라 임성구가 이끌던 혁신단과도 손잡고 연쇄극을 제작했다. “학생절의” “보은” 등에 이르러서는 연극 부분을 줄이고 영화 장면의 비중을 더욱 높임으로써 연쇄극은 영화의 모습에 근접해 나갔다. 박승필로서는 영화 제작에 자신감을 얻는 바탕이었다.
영화 제작의 가능성을 검증한 그는 단성사 안에 촬영부(撮影部)를 설치하고 영화 제작을 본격화함으로써 초창기 한국영화계의 제작분야에서 두드러진 활동을 보이게 된다. 단성사 촬영부가 만든 첫 작품은 “장화홍련전”. 제작과 연기 등 모든 부문을 한국인만의 작업으로 완성했다. 당시 조선극장을 운영하던 일본인 하야가와(早川孤舟)가 고대소설 “춘향전”을 각색한 “춘향전”을 만든 것도 큰 자극이었다. 일본인이 우리 이야기를 바탕으로 영화를 만드는데 정작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라는 자괴감도 작용했던 것이다.

단성사의 화려한 전설의 시작은 1926년 “아리랑”을 상영하면서부터였다. 10월1일부터 상영한 “아리랑”은 온 장안을 술렁거리게 만들었다. 어느 시골마을에 사는 광인 청년 영진이 마을 사람들을 괴롭히는 부잣집 집사 오기호를 처단하는 모습을 그린 이 영화는 돈을 앞세워 마을사람들을 숨죽이게 만드는 부자, 그의 권세를 믿고 마을사람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집사 그리고 그들에게 시달리는 순박한 시골사람들의 모습이 일제의 식민통치에 시달리던 조선 민중들의 처지와 어딘가 닮은 느낌이었다. 그에 저항이라도 하듯 미친 청년 영진이 부잣집 집사를 응징하는 장면에서는 10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후련함을 느꼈고, 일본 순사의 포승에 묶여 아리랑 고개를 넘어가는 모습에서는 식민지 백성의 비애를 절절하게 느껴야 했다.

경영난 못이겨 간판 내리기도

한편의 영화가 세상에 충격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는 생생한 경험이었다. “아리랑”은 관객과 함께 시대를 공유하는 영화로 떠올랐고 주연을 맡은 나운규는 일약 민중의 영웅이 되었다. “아리랑”은 이전의 영화가 경험하지 못했던 선풍과 화제를 불러일으켰고, 단성사는 그 흥분을 공유하고 확인하는 세례의 장소가 된 것이다.

그러나 돌아보면 “아리랑”의 충격파는 미묘한 여운을 남긴다. 이 영화를 제작한 영화사는 요도 도라조(淀虎藏)라는 일본인이 설립한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이었고 영화를 감독한 인물은 스모리 히데이치(津守秀一)라는 일본인이었기 때문이다. 영화계에서는 “아리랑”의 감독이 누구인가를 두고 오랫동안 논쟁을 벌이고 있지만 당시의 신문이나 잡지에서 확인할 수 있는 기록 어디에도 나운규가 이 영화를 감독했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찾기 어렵다.

일본인이 제작, 감독한 영화를 통해 당시의 관객들이 시대의 암울함과 그것을 거침없이 두들기는 카타르시스를 동시에 느꼈다는 것은 시대의 모순이며 하나의 아이러니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태생적 혈통의 진실이 어떠하든 “아리랑”은 영화가 동시대의 현실에 접근할 수 있다는 가능성과 그에 반응하는 관객의 엄청난 열광을 확인하며 무성영화 시대를 찬란하게 빛냈다. 단성사는 당당하게 한국영화의 중심에서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성공과 실패, 번창과 몰락이 교차하는 영화계에서 영원한 승자란 존재하기 어려운 법.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단성사는 몰락의 과정에 접어든다. 단성사를 흥행의 중심에 세워 놓았던 명제작자 박승필은 나운규가 제작하는 영화에 돈을 대고, ‘신무대’라는 신극단을 만들어 흥행을 시도하는 등 연극과 영화에서 주도권을 지키려 했지만 뜻과 달리 실패의 연속이었다.

나운규가 조선키네마프로덕션에서 벗어나 ‘나운규프로덕션’이라는 영화사를 세우고 제작에 나설 수 있었던 것도 박승필의 후원 때문이지만 나운규의 영화들은 조선총독부의 검열에 만신창이가 되거나 나운규의 과욕으로 인해 흥행에 실패하는 경우가 잦았다. ‘신무대’의 공연도 기대에 어긋나기는 마찬가지였다. 박승필의 사정은 점점 어려워졌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 박승필은 1932년 1월4일 5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떠난 단성사는 선장을 잃은 범선이나 다름없었다.

오랫동안 단성사의 지배인이자 사원의 대표격인 박정현이 정상화를 모색했으나 이미 기울기 시작한 현실을 막기에는 벅찼다. 명치좌나 약초극장처럼 새로운 설비와 서비스를 갖춘 새 극장들이 속속 들어서고, 미국이나 유럽에서 들어오는 영화들은 토키(발성) 제작이 일반화하는 추세여서 극장들은 괜찮은 영화를 상영하려면 토키설비를 갖추어야 했다. 시설을 그대로 둔 채 음향설비만 바꾼다는 것은 허름한 옷을 그대로 입은 채 얼굴에 물칠만 하는 격이었다. 배급회사들 또한 설비가 부족한 극장에 좋은 영화를 공급할 이유가 없었다. 단성사는 이래저래 흥행의 중심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단성사는 새로운 각오 아래 건물을 새로 짓기로 작정하고 1934년 5월11일부터 공사를 시작했다. 5개월 일정으로 9월말 재개관하기로 했던 일정은 예정보다 길어져 같은해 12월 들어서야 겨우 흥행을 재개했다. 그러나 한번 기울기 시작한 사세는 쉽게 되돌아서지 않았다. 영화 대신 연극 공연을 하는 등으로 2∼3년을 겨우 버티던 단성사는 결국 쌓이는 적자를 견디다 못해 1937년 하반기에 들어 대대적인 구조조정에 들어가 직원 대부분을 해고하는 사태와 직면했다. 생존을 위한 마지막 몸부림이나 다름없었다.
그후 단성사의 소유권은 여러 사람을 거치며 파란을 겪다 1939년 2월 명치좌의 소유주인 이시바시(石橋)에게 넘어갔고, 1939년 7월 마침내 ‘단성사’라는 간판을 내리고 말았다. 그 충격 때문이었는지 박승필의 뒤를 이어 극장을 운영했던 박정현도 병석에 들더니 그해 8월22일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단성사가 간판을 내리던 시기는 일제 식민통치가 절정을 향해 치달을 때였다. 만주를 침략하고 미국과 전쟁을 시작한 일본은 전시비상체제로 돌입했고 사회 각 분야는 전쟁 수행을 위한 후방기지 역할을 해야 했다. 영화는 전쟁 수행을 독려하기 위한 선전의 수단으로만 허용될 뿐이었고 이를 제외한 일체의 역할은 유보되거나 금지되었다. 한국영화는 그야말로 암흑의 시대로 빠져들었다. 단성사의 몰락은 한국영화의 암울한 자화상이나 다름없었다. 일제시대의 암울함은 그렇게 단성사와 한국영화를 짓눌렀다.

단성사가 활기를 되찾은 것은 6·25 전쟁이 끝나고 한국영화가 새롭게 부흥하는 것과 함께다. 해방이 되자 영화계는 “자유만세” “해방된 내고향” “윤봉길 의사” “삼일혁명기”같은 영화들을 통해 그 감격을 담았다. 하지만 그 감격은 남북의 분단과 이념의 대립이라는 또 다른 비극 앞에서 숨을 멈추어야 했다. 가난이 사라지지 않은 현실에서 살벌하게 예각을 세운 이념갈등은 영화계를 구호 속에 묻어버렸다. 수입되는 영화도 별로 없었고 제작되는 영화는 더 빈약한 현실에서 극장은 영화 흥행보다 악극단의 공연무대로 이용되거나 머리띠를 두르고 피켓을 흔드는 궐기대회의 행사장으로 쓰이는 경우가 더 많았다. 해방과 함께 이름을 되찾은 단성사였지만 온전하게 꿈과 희망을 나누는 영화공간으로 되돌아가기는 어려웠다. 그 사정은 단성사뿐만 아니라 그 시대를 지나야 했던 극장들은 어디나 마찬가지였다.

서울의 극장들이 호황을 맞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중반부터. 가뜩이나 빈약한 영화계 살림은 전쟁을 거치는 동안 더욱 형편없이 산산조각났지만 전쟁에 상처받은 마음들은 어딘가 기댈 언덕을 찾고 있었다. 영화는 그런 시대와 사람들을 위로하며 꿈같은 희망을 보여주는 창문이었고 극장은 잠시의 위안이나마 찾을 수 있는 배급소였다. 이규환 감독의 “춘향전”이나 한형모 감독의 “자유부인”같은 영화들이 이끈 1950년대의 부흥은 널리 퍼져나갔고, 57∼58년 무렵에는 한국영화 제작편수가 연간 100편을 넘어설 정도로 열기가 뜨거웠다. 이어 신상옥 감독의 “로맨스 빠빠” “성춘향”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연산군”같은 영화들이 선풍을 일으키며 타오르는 불에 기름을 부었다. 미국이나 프랑스·독일에서 수입된 영화들도 관객들의 눈길을 잡았다.

서울의 극장가는 새 영화를 상영하는 개봉관과 한물 뺀 영화들을 이어 상영하는 변두리 재개봉관, 개봉관 입장료조차 감당하기 어려운 관객들이 하루종일 버티며 두편짜리 영화를 번갈아 볼 수 있는 동시상영관(3번관)으로 위치를 정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서울의 개봉관은 종로3가의 단성사와 맞은편의 피카디리를 한쪽 끝으로 하고 퇴계로의 대한극장이 또 다른 끝을 이루며 남북을 연결하는 ‘극장벨트’로 자리잡았다. 그 사이에 스카라·명보·국도·세기극장이 자리잡았고 국제·아카데미·파라마운트·을지·중앙극장 등이 광화문과 을지로·명동 주변에 포진했다.

단성사는 어찌됐든 개봉관 중 하나로 굳건하게 자리를 지켰다. 어느 극장에도 뒤지지 않는 역사와 관록이 한몫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영화 흥행이 호황을 누리고, 새로운 설비를 갖춘 극장이 하나둘 늘어가는 상황에서는 관록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열쇠가 되지 못했다. ‘70mm 대형 화면’이니 ‘6본트랙 음향’이니 하며 새로운 설비를 자랑하는 극장들이 생기고, 하다못해 ‘시네마스코프 총천연색’이라도 내세우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뒤로 밀리게 마련이었다. 단성사는 개봉관으로서의 위상을 지키기는 했지만 전성기 때의 명성과 비교하면 어딘가 허전한 모습이었다.

“벤허” “아라비아의 로렌스”처럼 스케일이 큰 스펙터클 영화는 대한극장이 보란 듯이 과시하고, 한국영화는 국도나 명보같은 극장들이 전문으로 삼고, “007 위기일발” 등 ‘007시리즈’같은 화제작들은 마주보던 피카디리 극장에서 개봉하는 일이 벌어지면서 단성사의 위상은 조금씩 줄어드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겨울여자”(1977) “장군의 아들”(1990) “서편제”(1993)같은 영화들이 차례로 한국영화의 신기록을 세우는 기염을 토하면서 단성사의 위상은 새삼스럽게 영화계의 관심을 모았다. 김호선 감독, 장미희·신성일 주연의 “겨울여자”는 1970년대 유신 시절의 암울한 정서를 영화로 그려 당시로서는 경이적인 기록인 67만명의 관객을 불러모았고 임권택 감독이 연출한 ‘젊은 김두한’ 이야기 “장군의 아들”은 누구도 쉽게 깨지 못할 것이라던 “겨울여자”의 기록을 넘어 68만여명의 관객을 끌어들였다. ‘국민영화’로까지 불린 “서편제”는 “장군의 아들” 제작팀에 의해 스스로 기록을 바꿔버린 놀라운 이벤트였다. 한국영화로는 영원히 불가능할 것이라는 ‘100만 관객’의 장벽을 넘은 대기록의 주인공이 돼 영화계의 흥분과 설레임은 긴 여운을 남겼다.

영화 흥행에는 묘한 징크스 같은 것이 있어서 손님이 드는 극장은 어떤 영화를 붙여도 흥행이 되고, 반대로 손님이 안드는 극장은 어떤 영화를 붙여도 흥행이 시원찮다는 낯가림이 심하다. 요즘은 복합관이 일반화하면서 여러 편의 영화를 한꺼번에 거는 일이 당연한 것으로 통하지만 특정한 영화를 독점으로 상영하며 흥행하던 시절에는 어느 극장을 개봉관으로 잡는가가 민감한 사안이었다. 흥행사들 사이에 이른바 ‘손님빨’로 통하는 ‘아시바’가 좋은 극장과 그렇지 않은 극장의 위세는 예민하게 갈렸다.

비 UIP덕분에 누린 반짝 흥행

그런 시절에 한국영화 신기록이 잇따라 단성사에서 터져나온 것은 영화 관계자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그 사이에도 “어우동” “무릎과 무릎 사이”처럼 최고기록은 아니더라도 3루타는 될 만한 영화들이 받쳐주었다. 외국영화로는 “007 죽느냐 사느냐” “다이하드”같은 것들이 분위기를 띄웠다.
1988년 이후 미국영화의 직배가 시작될 무렵 20세기폭스나 워너브러더스사처럼 미국 메이저의 중요 멤버이면서 UIP(유니버설·파라마운트·MGM) 배급망과는 별도로 배급망을 찾던 영화사들의 배급창구 역할을 맡기도 했던 단성사였고, 덕분에 한때는 반짝흥행을 누리기도 했지만 더 좋은 시설, 더 좋은 서비스를 따라 발길을 돌리는 관객을 붙잡아 두기에는 역부족인 지경에 직면하고 말았다.

단성사가 지나온 과정에는 한국영화사의 변천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 개화기의 풍물에서부터 일제의 강점기에 겪었던 파란의 세월과 사연, 해방과 6·25로 이어지는 해방공간의 이념적 혼란과 갈등, 전쟁이 끝난 후 가난과 절망에 지친 사람들에게 간절한 희망처럼 다가선 영화들, 외국영화의 공세 앞에서 위태롭게 흔들리며 주저앉아 버릴 것 같은 상황에서도 오뚝이처럼 일어나 새로운 디딤돌을 만들어온 한국영화, 그러면서도 쉬지 않고 다가오는 변화의 물결 앞에서 어쩔 수 없이 변해야 하는 현실까지 모든 것이 한국영화가 마주한 현실 그 자체였다. 뒤에서 오는 물결이 앞의 물결을 밀어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하더라도 지난날의 기억과 역사까지 허물어 버리는 것은 참으로 허전한 일이다. 단성사마저 모습을 바꿔 버리면 지난날은 어떻게 기억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