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4월 어느날, 서울 반포 경남아파트 전기환(全基煥·전두환 전 대통령의 큰형)씨 집. 허름한 옷차림의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이 붐볐다. 전씨의 모친 기일(忌日)이었다. 보안사령관 전두환(全斗煥)의 얼굴도 보였다. 제사에 참석하기 위해 찾아온 전두환의 일가친척들은 어림잡아 200명 안팎이었다.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전씨 모친 기일이 언제인지 알지도 못하던 인척들이 태반이었다.
그즈음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거칠 것이 없었다.
12·12 쿠데타를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이제 대통령 자리에 앉는 일만 남았다. 온 나라가 전두환이라는 ‘꼭지점’을 향해 맹렬하게 생존의 몸부림을 칠 때였다. 그러고 보면 ‘떠오르는 권력’을 향한 전씨 문중의 움직임도 기민한 편이었다. 6촌, 8촌까지 전두환과 촌수를 따질 수 있는 피붙이들은 다 몰려들었다. 참석자들이 “우리 전씨 일가가 이렇게 많았느냐”며 스스로 놀랄 정도였다.
전씨(全氏)의 도시조는 백제 개국공신 섭(攝)으로 전래되고 있다. 여기서 여러 관향이 갈라졌다. 하지만 전씨는 비록 여러 관향으로 분적(分籍)되었으나 뿌리가 같기 때문에 단일혈족으로서 유대를 굳게 하기 위해 “갑자대동보”(甲子大同譜)를 간행했고, 1966년에는 다시 “병오대동보”(丙午大同譜)를 편찬했다. 범전씨(凡全氏)로서의 기틀을 다진 것이다.
그래서 전씨(全氏)는 서로 본관이 달라도 다른 성씨의 분파(分派)쯤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전두환 전 대통령의 본관은 완산(完山)이다. 완산 전씨의 시조 전집(全潗·시호는 충정)은 도시조 전섭의 30세손이다. 한국의 족보를 망라한 사이트 ‘뿌리를 찾아서’(www.rootsclick.com)에 나오는 완산 전씨 개요를 옮겨 보면 이렇다.
“전집은 고려 공민왕때 중랑장으로 두차례에 걸쳐 홍건적을 물리친 공으로 추충정난공신(推忠靖扈亂聖功臣)이 되어 완산백에 봉해졌다. 후손들이 정선(旌善) 전씨(全氏)에서 분관하여 완산을 본관으로 대를 계승하고 있다.
완산 전씨는 조선시대에 여러 관직자를 배출하였다.
명종 때의 전치원(全致遠)은 1606년 사헌부 감찰, 충무위 부사과(忠武衛副司果)를 거쳐 춘추관 기사관으로 “선조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그는 서예와 성리학에 능통했고 저서로는 “임진난이록”(壬癸亂離錄)이 전한다.
전우(全雨)는 1592년 임진왜란때 창의(倡義)하여 공을 세우고 중임도찰방(重林道察訪)에 발탁되었으며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추증되었다.
또 전형은 서예로 일가를 이루었고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636년 통신사 임광을 수행해 일본에 건너가 글씨로 이름을 떨쳤는데, 저서로는 “해사일기”가 전한다.
전준은 1592년 임란이 일어나자 창의하여 각처에서 많은 적을 죽이고 삼학진(三鶴陣)에서 왜병의 기습을 받아 역전하다 순절하였다. 1638년 8읍 사림이 장문(狀文)을 연정하여 호조참판에 추증되었다. 또한 전문도 난이 일어나자 창의하여 의병을 이끌고 각처에서 공을 세우다 순절하였다.”
전통적으로 무관(武官) 집안이다. 중랑장(정5품) 직책으로 완산 전씨 시조인 전집(全潗)부터가 그랬다. 그는 이방실과 이성계의 부하 장수였다. 하지만 전두환의 직계조를 보면 전집으로부터 선대까지 단 1명의 문과 급제자도 배출하지 못했다.
13대 직계조인 전제만이 현감을 지냈을 뿐이다. 조선 명종때 제(霽)는 첨정을 거쳐 영산 현감에 재임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박진·정암 등지에서 공을 세웠으며, 정유재란때 도산에서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하여 호조참판에 추증되었고 도계서원에 제향된 것으로 나온다. 그 흔한 무과 급제자도 없었다. 오랜 기간 ‘춥고 배고픈’ 세월을 보낸 것이다.
1985년 인구센서스에 의하면 완산 전씨는 전국적으로 6,811명에 불과했다. 전씨 문중에서도 세(勢)가 약한 문파다. 그런데도 전두환 모친 기일에 일가친척 200여명이 모였으니 권력자와 밀착하려는 그 순간적인 결집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 있다. 오랜 박씨의 집권을 끝내고 바야흐로 ‘전씨세상’이 열리던 시절이었다.
빈농의 집안
전두환은 부친 전상우(全相禹)와 모친 김점문(金點文) 사이의 3남4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원래 전두환의 형제는 10남매였으나 맏이 열환과 규곤은 일찍 죽었고, 두환과 경환(敬煥) 사이에 남동생 석환이 있었는데 역시 어려서 죽었다. 1929년생인 기환씨 위로 세명의 누나 홍렬(鴻烈·1918년생)·명렬(命烈·1922년생)·선학(善學·1928년생)이 있고, 두환(1931년생)과 경환(1942년생) 사이에 여동생 점학(點學·1935년생)이 있다.
전두환의 형제 가운데 대학을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물론 두환은 대학 학력에 준하는 ‘학비가 들지 않는’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고, 경환은 유도대학을 나왔다. 그만큼 집안 살림이 곤궁했던 것이다. 부친 전상우는 삭풍이 매섭게 몰아치던 1940년 1월 식솔들을 이끌고 경남 합천군 율곡면 내천마을을 떠나 만주로 갔다. 두환의 나이 열살 때였다. 합천군 율곡면은 완산 전씨 집성촌이다. 형제 중에는 기환과 두환이 함께 ‘율곡국교’에 다니고 있었다. 그런데도 친족이 있는 곳을 등지고 만주행 열차에 오른 것은 형편이 절박했기 때문이다.
일가는 만주 지린(吉林)성 반석현에 정착했다. 그러나 거기서도 생활에 쪼들렸는지 1년3개월만에 다시 보따리를 싸 고향으로 돌아왔다. 전상우는 대구에 짐을 풀었고, 만주에서 틈틈이 배운 한방기술로 한의원을 열었다. 하지만 정식으로 한의학을 배운 것이 아니어서 손님들의 발길이 뜸했고, 수입은 식구들이 겨우 끼니를 때울 정도에 불과했다.
전기환의 학력은 분명하지 않다. 중학교를 마쳤다는 얘기가 있으나 고향 사람들은 초등학교 학력이 전부인 것으로 알고 있다. 어쨌든 기환은 6·25때 육군 중사로 참전했고, 1959년 경찰에 지원해 경기도경 소속의 순경이 되었다. 서울 용산경찰서로 옮긴 시점은 1967년 9월. 1공수특전단장으로 있던 동생 두환씨가 장군이 된 뒤 기환씨는 동생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스스로 옷을 벗었다. 그때가 1974년 2월. 주로 용산경찰서 교통계 사고조사반에서 근무했다. 5공 시절 막후에서 이권에 개입하고, 경찰 인사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기환씨가 ‘용산마피아의 대부’로 불리게 된 배경이다.
이후 소규모 사업을 벌이다 실패하자 기환씨는 경기도 과천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논농사를 짓고 돼지를 치는 평범한 농사꾼으로 지냈다. 하지만 동생 두환은 12·12로 권력을 잡자마자 농사꾼 큰형님을 서울 강남의 대형 아파트로 ‘모신다’. 박정희의 큰형님 동희씨가 동생에게 부담을 준다며 대통령 취임식에 불참했던 것과 대조적이다. 5공이 막을 내린 뒤 기환씨는 이른바 ‘노량진수산시장 강탈사건’과 관련해 구속됐다.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 정권이 무너진 뒤에도 어김없이 전(前) 정권의 부정부패 사건은 터졌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은 그 양상이 사뭇 달랐다. 이전에는 대통령의 측근들이 부패 사건에 연루되었다면 5·6공 권력 교체기에 가장 먼저, 가장 집중적으로 터져나온 것은 ‘전두환 일가 비리’였다. 당시 한 정치학과 교수는 “일종의 네포티즘(Nepotism:친척 등용, 족벌주의)인데 아주 원시적인 부패현상”이라고 진단한 바 있다.
집권 초기에는 전두환도 친인척 관리를 엄격히 하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1980년 9월 전두환 대통령은 헬리콥터를 타고 자신의 생가인 경남 합천군 율곡면 내천마을을 방문했다. 전두환은 종씨인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다.
“집안에서 이것저것 들쑤시고 다니면 대통령 못하고 그만두어야 합니다.”
하지만 전두환은 대인관계를 맺거나 사람을 평가할 때 능력보다 인정과 의리를 중시하는 스타일이다. 전씨뿐만 아니라 동생 전경환 등 친족, 그리고 이순자 여사 등 처족들도 혈연과 인연을 중시한다. 그래서 청탁꾼들이 이런 약점을 이용해 전씨 일가 주변에 몰려들었고, 결국 역대 대통령 중에서 퇴임후 최대의 ‘친인척 비리사건’을 겪었다..
전기환과 박동희(박정희의 큰 형)의 차이
전두환의 큰형 전기환과 박정희의 큰형 박동희. 동생이 집권한 뒤 전혀 딴판으로 행동한 두 맏형의 처신은 친인척 문제에서 3공화국과 5공화국이 어떤 차이를 갖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대통령은 내 동생이지 내가 아니며, 그럴수록 형인 나 자신은 근신하는 것이 동생을 돕는 일”이라며 동생의 대통령 취임식에도 참석하지 않고, 전기를 공급해 주겠다는 대통령 동생의 권유를 “신문에 나면 우짤라꼬”하며 손사래를 쳤던 박동희다.
하지만 전기환은 달랐다. 1980년 4월 전씨 일가붙이가 모여 제사를 지낸 서울 반포의 50평짜리 아파트는 불과 3개월전 동생이 마련해 준 것이었다. 시골에서 농사짓던 농부가 동생의 등극과 함께 현기증나는 수직상승을 한 것이다. 그리고 정권이 끝난 뒤 기환은 노량진농수산물시장 강탈사건으로 쇠고랑을 찼다.
6공화국 들어서자마자 터져나오기 시작한 ‘전씨 친인척 비리’는 전씨 집안을 그야말로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제사를 모실 사람조차 찾아보기 힘들 지경이었다. 전두환 집권 기간 전씨 친족들이 어떤 궤적을 그리면서 권력의 단맛에 취해 갔는지는 친인척 비리 사건을 열거하는 편이 이해하기 편하다. 동생 경환은 전씨 일가 중 ‘친인척비리 1호’를 기록했다. 유도대학을 나온 전경환은 ‘형 덕’에 유신 시절 청와대 경호실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친인척 비리 사건에서 전씨 친족들의 죄상을 ‘굵직한’ 것만 열거해 보자.
▷全敬煥(동생):새마을운동본부 중앙회장. 1998년 3월1일 새마을운동본부 기금 73억여원 횡령, 여러 이권에서 알선수재, 10억6,000만원 탈세 등 8개 혐의로 구속. 자신의 동서 황흥식(黃興植)·김승웅(金承雄) 등도 같은 사건으로 구속.
▷全淳煥(숙부 전상기의 2남):대전수산주식회사 대표. 골프장 허가를 미끼로 수뢰한 혐의로 구속.
▷全禹煥(숙부 전상희의 장남):고향에서 정미소 운영하다 일약 양곡가공협회장에 앉음. 새서울용역 감사. 각종 인허가 청탁 개입, 수뢰 혐의로 구속.
▷金永道(누나 전학렬의 아들):대립개발 회장. 청탁 개입, 수뢰 혐의로 구속.
▷李昌錫(처남):주식회사 동일 공금 9억원 횡령. 부친 이규동으로부터 경기도 화성 임야 26만평을 증여받으면서 1억6,000만원 탈세 혐의로 구속.
▷李圭東(장인):대한노인회 회장. 비리 의혹으로 국정감사 출두.
전두환 일가의 비리 사건은 이밖에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든 ‘잔챙이’들이 즐비하다.
범(汎)전씨 종친들의 활약
이런 비리와 별개로 5공 시절 전씨 종친들의 대약진은 눈부신 것이었다. 앞서 언급한대로 전씨(全氏)는 18개의 본관으로 갈라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일혈족 의식이 강하다. 가나다 순으로 열거해 보자.
▷경남 사천이 고향인 전석영(全錫濚)은 대양공업고와 단국대를 나왔고 10여년간 청와대 부속실에 근무했다. 5공이 들어선 1980년 9월 그는 42세의 나이에 일약 청와대 살림을 도맡은 총무수석에 발탁됐다. 꼬박 4년2개월을 근무한 뒤 성업공사 부사장, 대한보증보험 사장을 지냈다. 노태우 정부에서 문민정부에 걸쳐서는 보험개발원 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청와대 비서관 중에서 유일하게 전두환과 같은 완산 전씨.
▷대구 달성 출신으로 경복고와 서울대 법대를 나온 전세봉(全世鳳)은 해군 법무관시험에 합격해 군인의 길로 들어선 드문 케이스. 1986년 해군 법무관(준장)으로 별을 단 뒤 예편하고 이듬해 청와대사정비서관, 6공 들어 민정비서관을 지냈다. 행정부로 나와서는 조달청 차장, 제14대 조달청장(1993∼94년), 감사원 감사위원(94∼97년·차관급)을 지냈다. 현재 법무법인 세종의 변호사로 활약하고 있다.
▷전홍식은 1982년 청와대 민정비서관으로 들어가 5공 임기 말까지 재직했다.
▷전병식(全炳植)은 경복고와 서울대 공대를 졸업하고 육사 교관을 지냈다. 이후 상공부에서 국장으로 근무하다 5공 출범과 함께 청와대 경제비서관을 지냈다. 1982년 청와대를 나온 뒤 1990년까지 국립공업시험원 원장을 지냈다.
▷전재기(全在琪)는 경북대 사범대 부속고와 서울대 법대를 나온 검찰 출신. 역시 5공 출범과 함께 청와대 사정비서관으로 파견근무한 뒤 검찰로 복귀했다. 이후 서울지검 형사5부장, 청주지검장, 대구지검장, 법무연수원장을 거쳤다. 현재는 여의도합동법률사무소 변호사.
▷전달출(全達出)은 천주교 신부로서 국보위 입법회의에 참여한 후 평통 부의장(85년)을 지냈다. 현재는 “매일신문” 명예회장으로 있다.
▷전영우는 충남 예산 출신의 새마을 지도자로 농사일을 하다 영문도 모르고 발탁되어 국보위 농수산위원회를 거쳐 새마을 영농기술자 중앙회에 근무했다.
▷서울대 화학과를 졸업하고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전학제(全學濟)는 한국과학기술원 교수로 지내다 1984년 한국과학기술원장이 되었다. 1986년에는 과학기술처 장관을 역임한 뒤 다시 과기원장으로 복귀했다. 현재는 한국과학기술원 명예교수.
▷전석홍(全錫洪)은 작달막한 체구에 자신의 선조인 전봉준(天安 全氏) 장군을 연상케 할 만큼 다부진 스타일.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행시에 패스해 오랜 관료 생활(충북 부지사, 내무부 지방개발국장) 등을 지내다 5공 들어 내무부 차관보, 전남도지사를 역임했다. 6공 들어 장관급인 국가보훈처장에 발탁된 뒤 15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현재는 한나라당 국책자문위원회 위원장이다.
▷전상석(全尙錫)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사시에 패스한 뒤 여러 지방법원 판사와 부장판사를 지내다1981년 대법원 판사가 되었다. 12·12, 5·18 재판에서 전두환측 변호인으로 활약했다.
▷경북 성주가 고향인 전주식(全珠植)은 육군 제3군단 사령관을 끝으로 군문을 떠난 뒤 1984년 국가안보회의 군사연구위원과 서울시지하철공사 감사를 역임했다.
▷전부일(全富一)은 예비역 소장으로 예편한 뒤 유신 정권에서 제9,10대 유정회 국회의원을 지냈다. 1981년부터 1988년까지 남해화학 사장을 지냈다.
▷전상진(全祥振)은 직업외교관으로서 1979년 유엔대사를 끝으로 외교관 생활을 끝마쳤다. 5공 정권 출범과 함께 대한체육회 부회장 겸 KOC 부위원장이 되었고, 서울올림픽 조직위 제1사무차장을 역임했다. 현재는 외교협회 고문.
▷전병우(全炳宇)는 전주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뒤 내무관료 생활을 오래 했다. 1979년 전북 부지사로 있다 11대에서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발탁됐다. 12대에서는 지역의 거물인 황인성씨를 전국구로 밀어내는 파란을 일으키며 전북 진안·무주·장수 지역구 국회의원이 되었다.
▷전종천(全鍾千)은 전기환을 빼놓고는 얘기할 수 없는 인물이다. 종친에다 경찰 출신이라는 공통점 때문이다. 그는 서울지역 경찰서장을 한번도 지내지 못해 경무관 승진 대상이 아니었으나 전기환의 영향으로 제주경찰국 국장으로 갔다가 2년만에 치안감으로 특진했다. 1985년 12대 총선에서 공천(정읍·고창)받아 여의도에 진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