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인척 관리 스타일 전혀 다른 3인의 군 출신 대통령

대통령을 에워싼 처족

노태우 친가쪽이 고만고만한 서민층 집안이라면 처가인 김옥숙 집안은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명문가다. 처가쪽 사람들은 모두가 노태우 대통령의 도움 없이도 각자의 영역에서 터를 닦은 상류층 인사들이었다.김옥숙은 1935년 아버지 김영한(金永漢)과 어머니 홍무경(洪戊庚) 사이에 3남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위로 김진동(27년생)·김익동(31년생)·김복동(33년생) 등 오빠가 셋이고, 아래로 여동생 김정숙(金貞淑·37년생)이 있다.

그중에서도 김복동(金復東)은 본의든 아니든 노태우의 정치적 성장 과정에서 밑거름 역할을 했다. 노태우와 김옥숙을 맺어준 사람이 바로 육사 11기 동기생 김복동이다. 나이는 노태우보다 한살 어리지만 경북고 동기동창이다.

육사 생도 시절 전두환·노태우 등과 함께 칠성회(七星會)를 주도했다.
1952년 육사 생도였던 노태우는 김복동의 집에 자주 놀러다녔고 경북여고 1학년생이던 김옥숙과 자연스럽게 만났다. 처음에는 ‘오빠’ ‘친구 여동생’ 사이로 만났지만 1957년 노태우가 중위로 진급한 뒤로는 연인 사이가 됐고, 김복동이 “태우는 내가 보장한다”며 두 사람의 결합을 뒤에서 도왔다.

김복동은 육사 11기 생도대장을 했다. 생도 시절 김복동은 전두환과 함께 동기 그룹에서 양대산맥을 이룰 정도로 주목받았다. 하지만 전두환 소장이 12·12 거사 동참을 제안했을 때 “정치에 참여하지 말고 군인으로서 국가를 위해 충성하자는 약속을 잊었느냐”며 거절했다. 5공이 들어서고 타의로 군복을 벗었다. 잠시 낭인 생활을 하다 이철희­장영자 사건으로 이규광씨가 자리를 비운 한국광업진흥공사 사장에 취임했다.

그 자리에서 권토중래를 노리다 노태우 집권과 함께 정계에 정치적 영향력을 회복했다. 6공 시절 ‘청와대 가족회의’ 멤버로 권력의 핵심에 진입했고, 그래서 한때 김복동 대망론이 나돌기도 했지만 의 친인척 불가론에 걸려 좌절했다. YS의 등장으로 정치권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또 다시 정치낭인으로 떠돌다 지난해 세상을 떴다.

박철언(朴哲彦)은 ‘6공의 황태자’로 불릴 만큼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5공청산, 북방외교, 3당합당 등 6공화국의 굵직한 ‘기획’이 그의 머리 속에서 나왔고, 그의 손을 거쳐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박철언의 어머니 김당한씨가 김옥숙의 부친 김영한과 남매다.

박철언은 서울대 법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수재다. 1969년 사법시험에 합격해 육군법무관으로 법조인 생활을 시작해 유신 시절에는 공안검사로 이름을 날렸다. 12·12 이후 국보위 법사위원 겸 전두환 장군 법률특보로 5공화국 헌법을 기초하기도 했다. 5공 때는 청와대 정무비서관과 법률비서관, 안기부장 특별보좌관을 역임했다. 1997년 대선때 DJ캠프에 가담했으나 아직까지 뚜렷한 ‘역할’을 받지 못했다.

금진호는 노태우의 손아랫동서다. 대륜고와 서울대 법대를 나와 잠시 은행원 생활을 할 때 중매로 이화여대 약대를 나온 김정숙(金貞淑)과 결혼했다. 금진호는 상공부 국장, 특허청 소장 등을 지내다 1980년 국보위 상공분과위원장을 지냈다. 이후 5공에서 상공부 장관, 한국소비자보호원장을 역임했다. 무리하지 않는 스타일이다. 6공 때는 한국무혁협회 고문 등을 지내며 특별한 직책을 맡지 않았지만 세간에서는 ‘경제대통령’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1992년 경북 영주·영풍에서 민자당 공천으로 14대 국회에 진출했다.

그는 6공 말기에 청와대 가족회의에서 YS를 적극적으로 밀었다. 1991년 간암으로 세상을 뜬 YS의 핵심 측근 김창근(金昌槿) 전 교통부 장관과 동향으로, 각별히 친했는데 그 인연으로 민주계와 가까워졌다고 한다. 1992년 대선에서는 ‘5공의 금융황태자’ 이원조(李源祚) 의원과 함께 대선자금 조달에 혁혁한 공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는 국제무역경영연구원장이다.

친인척 모임 3인방의 운명

김진동은 대구 종로학원장을 지냈다. 영남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한국전력공사에 근무했고, 1980년 요금과장으로 정년퇴직했다. 이후 줄곧 학원을 운영했다. 1987년 당시 경북대 보건대학원장이었던 김익동(金益東)은 정형외과 분야에서는 국내에서 손꼽히는 의학자이자 교육자다. 경북대 의대를 나오고 미국 피츠버그대 정형외과에 근무하기도 했다. 경북대 대학원장과 총장까지 역임하고 현재는 경북대 명예교수로 있다. 부인 김경숙씨도 영남대 의대 교수를 지냈다.

노태우의 청와대 가족회의는 1987년 대선 때부터 시작해 임기말까지 이어졌다. 김복동·금진호·박철언이 주요 멤버였는데, 임기중 사돈 관계를 맺은 최종현 선경그룹 회장과 신명수 신동방그룹 회장이 중간에 합류했다. 가족회의의 연락은 청와대 제1부속실에서 했다. 당시 제1부속실장은 윤석천(尹錫千·현 동아일렉콤 전무)이었는데 대통령 지시사항을 직접 처리했다. 따라서 청와대 친인척 회동은 부속실과 일부 경호 관계자들에게만 노출되었을 뿐 비서실에서도 친인척 회동 사실을 모르는 경우가 허다했다.

노태우 시절 청와대 가족모임은 크게 세가지 형태였다. 명절이나 혼사때 부인과 자녀까지 동반하는 모임, 토요일 오후 테니스 모임, 그리고 정국현안이 발생했을 때 소집하는 3인방(김복동·금진호·박철언), 또는 5인방(최종현·신명수) 가족회의. 테니스 모임에서는 금진호와 김복동이 주로 노대통령을 상대했다. 운동을 끝낸 뒤 식사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정치에 관한 대화가 이뤄졌다고 한다.

핵심은 역시 청와대 가족회의. 회동 내용이 외부에 알려질 때마다 정국은 요동쳤고, 그럴수록 당과 국회 그리고 언론에서는 무슨 얘기가 오갔는지 파악하기 위해 더욱 분주하게 움직였다. 정국운영의 방침과 ‘가장 민감한’ 차기 대권구도가 이 모임에서 결정되었다.

YS는 이 청와대 가족회의를 역으로 활용했다. 정적인 박철언 제거 등 노태우에 대한 압박이 가족회의라는 채널을 통해 은밀하게 작동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이 차기 정권은 ‘친인척 및 군 출신을 배제한다’는 원칙. 민주계 입장을 대통령에게 전달한 인물은 금진호와 신명수 신동방그룹 회장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신명수 회장이 친YS 입장을 취한 것은 부친인 동방유량 창업자 신덕균(申德均)씨가 YS의 부친 김홍조(金洪祚)옹과 가까운 사이였던 데서 비롯됐다고 한다.

YS의 권력 장악 과정에서 가족회의는 그 자체가 힘의 이동을 따라 끊임없이 이합집산하는 권력의 현실을 반영하는 거울이기도 했다. 당시 여권의 분화 과정에서 김복동·금진호·박철언은 민자당 내부의 힘의 구조를 정확하게 대변하고 있었다. 후보는 경선으로 뽑아야 한다는 원칙론을 강조한 김복동, 내각제 합의각서 파동 등 YS와 권력투쟁까지 불사했던 박철언, 그리고 노태우에게 YS 불가피론을 전달한 금진호.

공교롭게도 이들 3인방은 1992년 14대 국회에 나란히 정계에 진입했고, 대권 막바지에 김복동(11월)과 박철언(10월)은 민자당을 탈당해 정주영의 국민당에 합류했다.전두환의 친인척이 권력형 비리와 이권 개입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면, 노태우의 친인척은 정치권력 자체를 차지하고 정국을 운영하는 주체로서 활동했다.

노대통령 퇴임 이후 임기 동안의 일로 곤욕을 치른 케이스는 슬롯머신 사건으로 구속된 박철언 정도가 고작이다. 노태우 비자금 사건의 여파로 지금도 간간이 언론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사람은 신명수 회장과 동생 노재우. 노태우는 자신이 조성한 비자금 중에서 신회장에게 230억원, 노재우에게 129억여원을 주었다.

지금도 법원은 노태우씨의 비자금 사용처를 파악해 남은 재산을 환수하고 있다. 두 사람은 “다 써버렸다”는 입장이지만 신회장 재산에 대해서는 가압류 등을 통해 환수를 추진하고 있고(현재까지 동산 가집행을 통해 1,760만원 환수), 이재우에 대해서는 재판이 진행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