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 뒷받침 없는 상상력의 産物

일본의 국가권력은 6∼7세기에야 대두

20세 초에 풍미했던 ‘문화전파론’은 서로 다른 두 문화 사이에 나타나는 유사성은 곧바로 주민의 대규모 이동이나 정복의 결과로 보았다. 이 이론은 유럽 자본주의 세력이 아시아·아프리카 지역에 발전된 문명을 세례했다는 제국주의 시대의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일 뿐 실제로는 주민의 이동이나 정복보다 상호 교류를 통한 경우가 허다하다. 문화교류를 통해 문화의 유사성이 나타나는 경우가 훨씬 많기 때문이다. 유물·유적의 유사성만 근거로 기마민족의 이동과 정복설을 주장하는 것은 논리상 문제가 있다.

한 사회가 발전하는 데 주변 지역의 다양한 문화와의 교류는 필연적이며 더구나 선진적 위치에 있는 문화가 후진 지역으로 전파되는 것 역시 일반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 전파는 토착문화 기반 위에서 점진적으로 형성되어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가령 고대 한반도 삼국의 문화도 삼한사회라는 기층문화 위에 형성된 것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에가미는 일본 고고학계의 고분문화의 편년(編年)이나 고분의 출토 유물을 기마민족설을 입증하는 결정적 근거로 삼았다. 그러나 최근 일본 고고학계의 연구 결과는 오히려 일본의 기마 풍습이 5세기 이전까지는 올라가지 않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연구 성과로 인해 3∼4세기 경에 기마민족이 일본을 정복하였다는 에가미의 기마민족설은 상상력이 구축한 허구임이 드러나고 있다.

에가미의 기마민족설의 또 다른 핵심 내용으로 꼽히는 대화정권의 오우진 천황이 한·왜 연합왕국의 주도자로서 남한 지역에 군대를 보내 신라를 제외한 남한 여러 나라와 연합해 고구려의 남하에 맞서는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는 대목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주장도 현재 일본 역사학계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사실무근으로 나타나고 있다. 일본학계는 일본에 통일된 국가권력이 나타난 시기, 즉 야마토정권의 수립 시기를 6세기 말로 보는 것이 통설이었지만 최근에는 7세기 말이라는 주장이 오히려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부언하자면 6세기 말에서 7세기말 이전에는 한반도에 대규모 병력을 파견할만한 정치세력이 일본열도 내에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오우진 천황의 한반도 출병설은 그 근거가 희박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광개토대왕비문에 기록된 광개토대왕 10년(400)에 신라를 공격해 5만명의 병력을 보내 퇴각시켰다는 ‘왜’의 실체 또한 오늘날의 일본열도 안에 존재하는 세력이 결코 아니다.

실제로 6세기 때의 것으로 추정되는 일본의 토용(土俑)과 고분 그림에 나오는 배는 노를 이용하는 소규모 배일뿐인 것이다. 이는 그들이 주장하는 4세기의 일본열도에는 많은 병력을 싣고 대한해협을 건널 만한 배를 축조할 만한 기술이 없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따라서 4세기 일본에는 가야를 점령하여 지배할 만한 어떠한 세력도 없었고, 더구나 백제와 신라를 압도하며 이들 국가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세력은 더욱 존재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광개토대왕 비문에 등장하는 왜의 정체는 무엇인가?
비문에 따르면 서기 400년 광개토대왕이 신라에 침입한 왜를 물리치기 위해 보낸 병력은 보병과 기병을 합쳐 무려 5만명이나 된다. 이는 이런 정도의 대병력을 보내야만 왜를 물리칠 수 있었음을 뜻하는데, 앞서 설명했듯 당시 일본열도 내에는 이런 정도의 대규모 병력을 운용할 만한 어떤 국가권력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신라를 침략했던 왜의 실체는 허구에 불과하다는 말인가?

비문의 왜는 바로 한반도 안에 있었던 왜였다. 당시에는 왜가 일본열도뿐만 아니라 한반도 남부에도 존재하였다. 비문에 따르면 한반도의 왜는 가야지역에서 광개토대왕의 고구려군과 전쟁을 벌였다가 패배한 4년 후인 404년에 고구려의 대방지역을 공격하지만 실패하고 만다.
왜의 고구려 본토 침략도 광개토왕이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나가 싸울 정도로 고구려에 대단히 위협적이었던 것이다. 이때 광개토왕이 몸소 군대를 지휘했는데 이는 광개토왕이 직접 군사작전에 나서야 했을 정도로 왜가 동원한 병력이 대규모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렇게 한반도의 왜세력은 고구려 광개토왕의 남하정책에 맞서 두차례에 걸친 대규모 전쟁에서 패배해 결정적 타격을 입고, 5세기 어느 시점에 그 주도세력이 일본열도로 옮겨간다. 한반도 왜의 중심지는 나주 일대였다(이 부분에 대해서는 “월간중앙” 1999년 3월에 실린 ‘나주 반남고분의 주인공은 누구인가’에서 자세히 밝힌 바 있다). 결국 기마민족설의 또 다른 핵심 내용인 야마토정권의 오우진 천황이 한·왜 연합왕국의 주도자였다는 것도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명백하다.

에가미의 기마민족설은 용어에도 문제가 있다. 기마민족이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말을 타는 민족’이라는 뜻이지만 말을 교통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은 상당히 오래 전부터 있어 온 여러 민족의 공통적인 습속이었기 때문에 단순히 말을 타는 민족을 기마민족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가 말하는 기마민족이란 유라시아 초원지대에 살았던 유목민족을 연상하게 하지만 결코 이것을 3세기 중엽 한반도 남부에 존재했던 기마 습속과 동일시할 수는 없다. 우리나라나 중국측 문헌에 따르면 삼국시대 초기부터 나타나는 기마 관계 기사는 국가의 군사조직을 의미하는 것이지, 유목민족 그 자체를 지칭하는 말은 아니기 때문이다.

천관우의 지적처럼 3세기 중엽 한반도 남부에 ‘기마민족’적인 것이 있었다고 할 경우에는 그것은 구체적으로 ‘기병단(騎兵團)을 보유한 농경민족단’ 혹은 ‘농경민사회를 토대로 하여 조직된 기병단’을 가리키는 것이 된다. 그 연장선상에서 에가미가 말하는 일본열도를 정복한 민족도 유라시아 유목민 계통의 기마민족이 결코 될 수 없다.

요컨대 에가미의 기마민족설은 어떠한 문헌적·고고학적 근거도 지니지 못한 역사적 상상력을 발휘해 만들어낸 허구적 산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일찍이 우리 학계의 일각에서도 일제 하에서 강요되었던 황국사관을 부정하는 경향에 편승하여 천황가의 뿌리가 백제 혹은 가야 등에서 기원했다는 변형된 기마민족설이 간헐적으로 제기되어 왔다. 그러다 1990년대 들어 에가미설의 아류인 한국판 기마민족설을 본격적으로 제기하고 있는데, 이른바 ‘부여족 남하설’이 그 중 하나다.

부여족 남하설이란 3세기 말경 북방의 부여족이 김해 지역을 점령하여 금관가야를 건국하였다는 것이다. 그 논자들이 주목한 것은 대성동고분군과 동래 복천동고분군 가운데 3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걸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구릉 정상부의 목곽묘(木槨墓·덧널무덤)다. 그 요지는 이렇다.


한국판 기마민족설의 대두

대성동고분군과 복천동고분군 성립 이전 이곳은 각각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변진조에 보이는 구야국(狗邪國)과 독로국(瀆盧國)의 중심부였다. 이곳에서는 3세기말 도질토기의 출현을 계기로 이전 시기와 커다란 획을 그을 만한 일대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도질(陶質)토기는 한반도 남부의 독특한 토기문화인데 낙동강 하구 김해와 동래에서 가장 먼저 출토되고 있다. 더불어 철제 갑주류·마구류 및 오르도스형(Ordos) 동복(청동솥)과 함께 사람과 말을 희생시키는 행위, 칼과 창 등 무기를 구부려 무덤 속에 부장하는 등의 북방 유목민족 특유의 습속이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부여족 남하설 논자들은 철제 갑주류 중 몽고발형주(蒙古鉢形胄)와 찰갑(札甲)은 북방 유목민족이 말을 탈 때 쓰는 투구와 갑옷으로 전형적인 북방문화를 대표하는 것이며, 마구류 중 재갈과 고삐는 중국 동북지역의 동호계(선비계)에서 사용하던 것으로 대표적인 북방문물로 보고 있다. 도질토기의 출현을 계기로 나타나는 이런 철제 갑주류와 마구류는 이때부터 낙동강 하류역 중심의 사회가 역동적, 무장적 분위기로 돌변하였음을 웅변해 준다는 것이다.

이들 북방계 문물은 주로 부여의 주된 묘제인 목곽묘에 묻혀 있는데, 이 묘제가 3세기말 김해에 돌연히 나타나면서 의도적으로 먼저 조성된 분묘를 파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선행분묘의 파괴는 김해를 중심으로 한 낙동강 하류 지역에서만 한정된 특이한 현상으로 외부문화의 유입이나 충격에 의한 것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특정 민족, 즉 부여족의 이동에 의해서만 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특히 그들은 북방민족이 도래한 결정적 자료로 대성동 유적과 양동리 유적에서 출토된 3점의 오르도스형 동복을 드는데, 그 세부 형태나 기법상에서 부여의 중심지였던 중국 지린(吉林)성 북부 지역 출토품과 유사하다고 주장해왔다. 이 동복은 북방민족들이 사용하던 취사도구의 일종인데, 북방민족은 목축을 하면서 물과 풀을 따라 옮겨 다녔기 때문에 양 귀에 끈을 꿰어 말 안장에 매달 수 있는 이동식 솥인 이 동복을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북방 유목민족적 문물·습속·묘제를 특징으로 하는 고분들이 김해 대성동고분군에 나타나는 현상을 놓고 볼 때 김해 지역에서 금관가야를 건국한 세력은 부여계 기마민족이 이동한 결과라는 것이다. 부여계 기마민족의 가야 진출은 “통전”(通典) 부여전의 태강 6년(285) 기사와 연결짓기도 했다.

285년 모용선비(慕容鮮卑)의 공격을 받은 부여는 파국에 빠지고 그 일파는 장백산맥을 넘어 북옥저가 있던 지금의 두만강 하류 지역까지 이동해 왔는데, 그들이 다시금 동해안 해로를 이용하여 김해 지역에 정착하였다는 것이다. 이 해로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 변진조의 철관계 기사에서 보듯 예와 구야국간의 교역로일 것이라고 본다.

한편 경주분지에는 4세기 전반기부터 기존의 토광목곽묘(土壙木槨墓)와는 완전히 다른 적석목곽묘(積石木槨墓 : 돌무지덧널무덤)라는 새로운 묘제가 출현하면서, 이를 근거로 한 기마민족 신라 정복설도 제기되었다. 이 적석목곽묘는 한반도 안에는 경주분지에만 유일하게 존재하고 4세기 전반기에 들어와 갑자기 나타나 6세기 초엽까지 축조되었다. 그 대표적 고분들은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금관총·천마총·금령총·황남대총 등이다. 물론 이 무덤들의 주인공은 당시 신라의 왕족과 귀족들이다.

그런데 그 기본구조가 같은 고분들이 중앙아시아 지방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데, 이 중앙아시아의 적석목곽묘는 기마민족의 문화유산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신라 적석목곽묘의 부장품으로는 금관을 비롯한 귀금속공예품, 풍부한 각종 기마구(騎馬具)와 찰갑이 대표적인 존재이다. 이들 부장품은 그 계통이 북방아시아에서 유래된 유물이고 이전의 토광목곽묘에서는 전혀 출토되지 않았던 것이다.
신라의 적석목곽묘는 그 구조나 부장 유물로 보아 그 이전 시기의 토광목곽묘와는 판이한 단절적 성격을 가지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토광목곽묘는 농경문화적·보병적인 데 반해 적석목곽묘는 기본적으로 북방아시아적·기마문화적인 것이다. 이것을 바로 문화교류나 접촉이 아니라 기마민족이 신라에 직접 도래했다는 결정적 근거로 본 것이다. 말하자면 이들은 신라에서 적석목곽분의 출현은 3세기말~4세기 초에 일어난 동아시아 기미민족의 대이동의 와중에서 한 분파가 밀려온 증거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것을 토대로 기마민족에 의한 신라정복설이 등장하게 되었다.

덧붙이자면 신라에서 적석목곽묘가 축조된 시기는 신라 역사상 최고지배자가 마립간(麻立干)으로 불린 마립간시대였지만 이 시기는 바로 석씨 왕계가 끝나고 김씨 세습왕조가 등장했던 시기였고 더불어 신라가 낙랑강 동쪽지방으로 급속히 팽창했던 때로 연결되었다. 결국 이러한 신라의 영토 확장도 적석목곽묘로 대변되는 기마민족의 등장에 의해 가능했다는 것이다.


개정판 기마민족설의 문제점

그 표현이 부여족 남하설이든, 기마민족 신라정복설이든 이른바 한국판 기마민족설의 근복적인 한계는 무덤 형태의 변화나 그 유물을 가지고 지배세력이 교체되었다고 보는 데 있다. 에가미가 4세기 말부터 5세기 초에 걸쳐 조성된 일본의 고분문화가 그 이전에 비해 내용상 급격한 변화를 겪은 것을 기마민족의 정복 결과로 파악한 것처럼 부여족 남하설 논자들은 북방 유목민족적 문물·습속·묘제를 특징으로 하는 무덤이 김해에 나타나 선행분묘를 파괴하는 것이 특정 민족의 이동에 의해서만 가능한 일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선행묘를 파괴하고 그곳에 새로운 묘를 조성하는 행위가 고고학적으로 특정 민족의 도래와 정복으로 해석해야 할지는 반드시 재고해야 할 일이다. 경주분지 적석목곽묘의 출현을 근거로 기마민족 신라정복설을 제기한 논리도 예외가 아니다.

가령 지난 1970년대 초반에 발굴된 백제 무녕왕릉이나 그 능 옆에 있는 송산리 6호분은 전 시기와 완전히 다른 전축분(塼築墳·벽돌무덤)이다. 전축분은 현재 서울 석촌동에 남아 있는 적석총(積石塚·돌무지무덤)과는 전혀 다른 형식의 무덤이다.

이런 현상을 부여족 남하설 논자들의 견해대로 해석한다면 어떻게 봐야 할까. 그 시기에 중국 남조의 어느 한 세력이 기존의 백제세력을 정복하고 새로운 왕조를 세웠다고 봐야 한다는 말인가.
5세기 후반 백제 지배층은 공주 천도후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아 한동안 전축분을 사용했다는 것은 국내 고고학계에서도 반론이 전혀 없는 정설로 굳어져 있다.

뿐만 아니라 이들 기마민족설을 주장하는 논자들의 논리대로라면 신라에도 문무왕의 죽음과 함께 새로운 왕조가 등장해야 한다. 신라 왕실은 문무왕의 유언대로 그 유해를 화장해 버렸고 왕릉조차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결론적으로 목곽묘나 적석목곽묘의 출현이 바로 한국판 기마민족설의 정당성을 뒷받침해 주는 근거는 결코 될 수 없다.

대성동고분군에 대한 1, 2차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유물은 토기류·무기류·장신구 등 1,000 수백점이나 된다. 그 가운데 일부가 부여 계통과 유사하다고 해서 부여족 남하설을 주장하는 것은 지나친 논리의 비약이라는 것이다. 대성동고분군에서 출토된 왜계 유물인 파형동기(巴形銅器)·통형동기(筒形銅器)와 벽옥제품류(碧玉製品類) 등은 일본 고분시대 전기 수장들의 특수물품으로, 왜의 수장이 가야의 철을 수입하기 위한 교역품 가운데 하나로 가져갔다고 보는 것이 훨씬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기마민족 정복설을 내놓은 이들의 주장대로라면 가야 지역에서 출토된 왜계 유물도 왜에 의한 가야 정복과 관련지어 생각해야 한다는 함정에 빠지게 된다.

결국 한국판 기마민족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문화 양상의 변화를 어떤 경우에는 정복으로, 어떤 경우에는 교류 현상으로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근본적 한계점을 지니고 있다. 또한 경주의 적석목곽묘에서도 다른 종류의 묘제보다 상대적으로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그 종류도 다양하여 금·금동·은 등의 귀금속 공예품을 비롯한 각종 장신구, 환두대도를 위시한 도검류, 무구류, 토기류, 농구류, 식기류 등 당시 일상생활에 필요한 거의 모든 도구와 용품을 망라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 유물은 고구려·백제·가야 등 당시의 주변 나라와 양식이나 재료면에서 거의 유사한 것으로, 이것은 오히려 기마민족의 도래설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하는 증거물들이다.

이렇듯 우리 학계 일각에서 새롭게 제기되는 한국판 기마민족설은 지나치게 고고학적 유물과 유적의 유사성에서 그 근거를 찾으려는 데 함정이 있고, 문제의 심각성도 내포하고 있다. 물론 고고학적 자료를 토대로 고대사를 이해하려는 방법론은 문헌자료의 결핍에서 오는 역사의 공백을 메우는 순기능적 측면도 있지만, 지나치게 집착할 때는 오히려 역사적 사실과 동떨어진 왜곡된 역사상을 창출하고 만다. 결국 유물·유적의 유사성만을 근거로 기마민족의 이동과 정복설을 주장하는 것은 논리상 숱한 문제점들을 양산하게 된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에가미의 기마민족설과, 그 표현이 부여족 남하설이든 기마민족 신라정복설이든 한국판 기마민족설은 어떠한 문헌적·고고학적 근거도 지니지 못한 상상력을 발휘한 허구적 산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