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소리없이 주요 직책에 포진한 친인척들
친인척 ‘정치금지’ 대원칙 차남(현철)으로 빛바래YS

歷代 대한민국 대통령의 宗親 그리고 친인척 관리스타일(2부)


●정계 진입 희망하던 정치학 교수 매제(妹弟)를 끝까지 만류하고…
●차남 현철씨만 유일한 예외, 결국 거대한 덫이 되어 정권 발목잡아
●야당 시절부터 YS 주변에 포진한 금녕 김씨 종친들의 동반 성장


金泳三·金寧 金氏, 신라의 적통을 잇는 자부심
김대중 대통령의 가락 김씨가 거족임에도 불구하고 망국의 한을 삭여온 ‘정치적 변방’의 후예라면, 김영삼 전 대통령은 통일신라의 ‘적통’을 잇는 신라계 김씨의 후손이다. 본관이 금녕(金寧) 김씨(金氏)다. 신라 경순왕의 8세손인 김시흥(金時興)을 시조로 모신다. 따라서 김시흥은 신라 김씨의 원조 김알지(金閼智)의 35세손이 된다.

김시흥은 의성(義城)에서 출생해 고려 인종때 묘청의 난을 평정해 금녕군(金寧君)에 봉해졌으며, 명종 때는 조위총(趙位寵)의 난을 토평하는 데 공을 세워 식읍을 하사받고 상락군(上洛君)에 봉해졌다. 후손들이 그 지명을 따 본관을 금녕으로 하다 고려말에 지명이 김해(金海)로 개칭되자 김해로 본관을 삼게 되었다.

그래서 한때는 수로왕 계통의 김해 김씨와의 구분을 위해 김해 김씨를 선김(先金)으로, 금녕 김씨는 후김(後金)으로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조선시대 사육신의 한 사람인 김문기의 명성이 크게 알려진 뒤 여러 사람이 그 후손임을 자처하고 나서는 등 종통(宗統)을 어지럽히자 1865년(고종 2년)에 다시 금녕으로 확정하였다.금녕 김씨가 배출한 인물로는 조선 개국공신 김인찬, 사육신의 한 사람인 김문기를 꼽을 수 있다. 하지만 김문기 이후 이렇다할 인물을 배출하지 못하다 해방 이후 문중에서 김홍일 장군,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등이 나왔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문중에서는 시조 이래 처음으로 등장한 ‘임금’이 되는 셈이다.


친인척 정치권 진입 불가

YS는 금녕 김씨 문정공파(文正公派) 28대손으로 경남 거제군 장목면 외포리 1371번지에서 태어났다. 1928년 12월4일 생이지만 호적에는 1927년 12월20일 생으로 기록되었다. 실제 나이보다 한 살 더 많게 되어 있다. 멸치잡이 어장을 소유한 부친 김홍조(金洪祚)와 모친 박부연(朴富連, 작고)씨 사이에서 태어난 1남5녀 중 첫째. 이름 ‘영삼’(泳三)은 ‘물을 세번 헤엄쳐야 금빛을 만난다’는 뜻으로 조부 김동옥(金東玉)씨가 지었다. 집안에서는 금빛이 대권을 암시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가 많았다고 한다. YS의 모친 박부연씨는 1960년 여름 무장간첩에 의해 피살됐다.


대통령 제임 시절 부인 손명순 여사, 차남 현철씨 가족 등과 함께 서울 강남구 역삼동 충현교회 성탄예배에 참석한 YS.
야당 시절부터 친인척 정계 입문 고집스럽게 말려

YS는 집안 식구들이 정치에 나서는 것을 극구 말렸다. 그래서인지 여동생 다섯은 비교적 평범한 삶을 살았다. 큰동생 호금(好今)씨는 김상기씨와 결혼해 슬하에 3남1녀를 두었다. 김상기씨는 장인 김홍조옹과 함께 마산에서 수산업에 종사했는데 일찍 작고했다. 둘째동생 호아(好兒)씨의 남편 김영모(작고)씨는 생전에 도로공사 차장을 지냈다. 슬하에 1남3녀가 있다.

셋째동생 호임(好任)씨의 남편 김상한(金庠漢)씨는 YS와 인연이 깊다. 부산에서 멸치어장과 배 5척을 갖고 있었던 사업가 상한씨는 YS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아 비공식 지역구 관리자로 불릴 정도였다. 슬하에 1남4녀를 두었고 사업도 탄탄했다. 넷째동생 두선(斗善)씨의 남편 안양성결교 신학교 정치학과 교수를 지냈는데 평소 정치에 뜻을 두었으나 YS가 만류하는 바람에 뜻을 접었다.

막내동생 두아(斗岳)씨는 숙명여대를 졸업하고 남편 김창원(金昌源)씨와 함께 도미, 워싱턴에서 무역업을 했다. 김창원씨는 중앙고를 나와 조지워싱턴대학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YS 재임 기간 귀국해 한국경영경제연구소 소장, 한일경제연구소 소장 등을 지냈다. 1남1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의사, 장녀는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김창원씨의 형이 현재 세종대학교 국제교류원 원장으로 있는 김정원(金正源)씨. 김정원씨는 경기고를 졸업한 뒤 미국 하버드대로 유학, 존스홉킨스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고 미 브루킹스연구소 연구원을 지낸 수재다. 미국유학을 떠날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YS가 직접 공항으로 가서 배웅할 정도로 재능을 아끼는 인물이었다. 1987년 대선때 YS의 외교안보특보를 지냈고, 문민 정부에서 안기부 2차장을 맡아 주목받았다. 그러나 국적 시비로 곧 낙마했고 이후 한국국제교류재단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YS는 부인 손명순 여사와의 사이에 혜영(惠英)·혜경(惠京)·은철(恩哲)·현철(賢哲)·혜숙(惠淑)씨 등 2남3녀를 두었다.

큰딸 혜영씨는 YS의 자식들 중에서 차남 현철씨와 함께 성격이 활달하고 정치적 성향이 강한 편이었다. 맏사위 이창해(李昌海)씨는 혜영씨의 연세대 선배로, 정치외교학을 전공했는데, 이 때문에 YS가 결혼을 반대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창해씨는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에서 정치학 석사 과정에 등록했지만, 야당 시절 YS가 극구 말려 뜻을 접고 LA에서 무역업을 했다.

차녀 혜경씨는 경기여고·이화여대 음대 성악과 출신. 경기여고 재학 시절 박정희 대통령의 둘째딸 서영씨와 동급생이어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서영씨는 내성적인 성격으로 조용하게 지낸 반면, 혜경씨는 활달하게 학교생활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재미교포 송영석(宋英錫)씨와 결혼해 미국에서 살고 있다. 하와이대 건축학과를 졸업한 송영석씨의 원래 이름은 송영삼(宋永三).

장인 이름과 발음이 똑같아 결혼 뒤 영석으로 개명했다.
장남 은철씨는 한양대 공대를 졸업하고 황경미씨와 결혼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오퍼상을 했다. YS 임기말 귀국, 할아버지의 멸치어장을 이어받았다. 상도동에서는 집안 장남으로서 가업을 잇는 것이라고 설명해 왔지만, 문민정권 시절 동생 현철이 소통령이라고 불릴 정도로 인사에 개입하고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유일한 예외(현철)가 거대한 덫으로

문민정부의 ‘황태자’ 차남 현철씨에 대해서는 따로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다. 경복고와 고려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대에서 국제금융을 전공했다. 1987년 쌍용투자증권에 입사했지만 대권 주자를 아버지로 둔 덕에 곧 그만두었다. 그해 대선때 막후에서 활동하며 여론조사 등 과학적인 선거운동 기법을 도입해 YS로부터 신임을 받았다. 당시까지만 해도 선거에 여론조사를 도입한 것은 혁신적인 것이었다. 현철씨는 대학 진학 때 정치학 전공을 희망했지만 역시 부친의 만류로 사학으로 바꿨다. 집안 식구를 정치판에 끌어들이지 않으려는 YS의 고집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현철씨는 성심여대 의상학과를 나온 김정현(金姃炫)씨와 결혼했다. 김정현씨는 현철씨의 여동생 혜숙씨의 초등학교·중학교·대학교 동기동창으로, 현철씨는 동생의 중매로 결혼에 골인한 셈이다. 장인이 남광토건·우창건설·동양고속 사장을 역임한 전문경영인 김웅세(金雄世)씨다. 김웅세씨는 경복고와 서울대 상대를 나와 철도청에서 국장을 지낸 뒤 경영인으로 변신한 케이스. 사돈인 YS가 민자당 대표최고위원일 때인 1991년 롯데월드 대표를 맡았다. YS의 술친구이자 정치 조언자 역할을 했다.

그러나 YS는 1987년 대선 때부터 자신을 도운, 성격마저 자신을 쏙 빼닮은 차남 현철씨에 대해서는 ‘친인척 정치개입 불가’라는 고집을 꺾었고, 그로 인해 문민 권력이 무너지는 화를 불렀다. 지금도 상도동 주변에서 ‘땅을 치며’ 아쉬워하는 일화가 있다. 문민정권 초기 실세 중 한명이었던 김덕룡 의원은 YS에게 차남 현철씨를 해외로 유학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처음에는 YS도 그런 진언에 귀를 귀울였다. 그러나 현철씨는 아버지에게 강력 반발했고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YS는 아들의 뜻을 받아들였다. 이 때문에 현철씨와 김덕룡 의원은 아직까지 서먹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한보사건이 터지기 전까지 김현철씨가 국정에 개입한다는 사실은 단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소문으로만 존재했다. 언론에 김현철은 성역이었다. 1996년 그가 유엔청년협회 회장으로 공식 직함을 갖게 되면서 겨우 동정기사가 언론을 장식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한보사건이 터지면서 YS의 국정장악력은 급속히 와해됐고, 현철씨가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한 ‘모든 것’이 신문 지면을 장식했다. 사실상 김현철씨는 한보사건과 아무런 연관이 없었지만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는 국정 농단 혐의들에 묻혀 현직 대통령의 아들로는 처음으로 쇠고랑을 찼다. 정국은 이미 ‘한보게이트’에서 ‘소산(김현철의 별명)게이트’로 바뀌었던 것이다.

아버지를 대신해 정국 운영의 컨트롤타워 노릇을 했던 김현철 세력은 붕괴됐고, 덩달아 문민 권력의 사령탑은 쑥대밭이 되었다. YS는 사실상 정치적 식물인간 상태로 임기말을 맞았고, 정치권력은 진공상태였다. 한보사건이 민주계의 정치적 무덤이라면, 천하의 승부사 YS가 쓰러진 곳은 포연 자욱한 ‘소산게이트’라는 전쟁터였다. 집안 식구가 정치판에 발을 들여놓는 것을 체질적으로 싫어했던 YS는 자신이 ‘유일한 예외’로 인정했던 차남 현철씨 때문에 실패한 대통령이 되었다. 대통령이 친인척 문제를 다룰 때 어떠한 예외도 있어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남긴 사례라고 아니할 수 없다.

막내딸 혜숙씨는 성심여대와 이화여대 성악과를 나왔다. 미국 뉴욕에서 치과의사를 하면서 한인회 활동에 열성을 보인 이춘근(李春根)씨의 아들 이병로(李炳魯)씨와 결혼했다. YS의 막내사위 이병로씨는 미국 코넬대와 뉴욕대 법대를 졸업한 변호사. 두사람의 혼인을 주선한 인물이 1980년대 뉴욕에서 YS후원회를 조직했던 임정규씨다. 임씨는 YS의 비서 출신으로 미국유학을 떠났다가 뉴욕에 눌러앉았다. YS 재임 기간 민자당 부대변인, 수자원공사 사장 등을 역임했다. 막내사위 이병로(미국명 부르스 리)씨는 문민정부때 한국전력·LG 등 국내 공기업과 대기업들이 미국의 PCS 업체인 넥스트웨이브사에 2억여달러를 투자했다 사업 실패로 투자대금을 날린 이른바 ‘넥스트웨이브사건’에 연루돼 현 정부에서 도마 위에 오르기도 했다.

손명순 여사는 ‘마산 재벌’ 손상호(孫相鎬)씨의 딸이다. 손상호씨는 마산에서 ‘경향고무’라는 기업을 경영했는데, 당시 영남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공장이었다. 전쟁 직후 ‘하얀고무신’을 찍어낸 공장으로 유명했다. 손상호씨는 슬하에 2남7녀를 두었는데, 손여사가 맏딸이다. 그 아래로 은배(恩培)·태자(泰子)·태강(泰江) 영식(英植)·태희(泰熙)·귀희(貴嬉)·은혜(恩惠)·은주(恩珠) 등이 있다. 둘째 은배씨와 넷째 영식씨가 남자 형제다.


처사촌 손주환은 ‘노태우 사람’

YS의 처가 쪽도 정치적으로 표난 인물은 없다. 문민 정부에서 약간의 잡음을 일으킨 사례가 손여사 바로 밑 동생 은배씨인데,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한국교사협의회 회장에 추대되어 항간에 친인척 시비가 일기도 했다. 당시 은배씨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친인척이니 아무 일도 하지 말고 잠자코 있으라는 것은 엄청난 모욕이다.

대통령 친인척은 자기 능력을 실현할 기회도 가질 수 없다는 말인가”라며 강하게 반발하기도 했다. YS의 오른팔이었던 김동영 전 의원과 동국대 동창이다.YS의 첫째동서 도재영(태자씨의 남편)씨는 한양대 공대, 연세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YS 재임 시절 기아서비스 전무이사, 기아자동차 사업부문 사장과 기아그룹 부회장을 역임했다. 현재는 민주국민당 당무위원으로 있다.

손주환(孫柱煥)씨는 손명순 여사의 사촌동생이다. “경향신문”·“중앙일보” 등을 거친 언론인 출신으로 노태우 정부에서 정무수석과 공보처 장관, 전국구 의원 등을 역임했다. YS쪽보다 노태우 사람으로 통했다. 그래서 한때 상도동에서는 ‘남보다 못한 사람’으로 평하기도 했으나 1992년 대선 때는 YS 캠프에 합류했다. 문민정부에서 “서울신문” 사장을 지냈다. 현재는 경남대 북한대학원 초빙교수.

전 청와대 총무수석 홍인길씨는 YS의 6촌동생이다. YS의 조부와 홍인길씨의 조모가 남매지간이다. 고향도 YS와 같은 거제도이다. ‘상도동 집사’가 그의 별명이듯 야당 시절 상도동의 대소사를 챙긴 살림꾼이다. 문민정권에서 청와대 총무수석으로 발탁됐고, YS의 지원을 받아 15대 총선에서 금배지를 달았다. 그러나 YS정권을 몰락시킨 한보 사건때 정태수 총회장으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아 권노갑 현 민주당 고문과 함께 옥살이를 했다. 당시 ‘깃털론’을 제기해 한보게이트의 불길이 소산게이트로 옮겨붙는 데 일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