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은 환상, 지옥은 현실이었습니다”

마약의 늪에서 헤어나온 4인의 체험告白

참석자
이데보라
천찬영
장상건
함상균

진행·정리
박인영<자유기고가>
'그날밤 나는 머리를 움켜쥐고 거리에 쓰러졌다. 도로의 모든 차들이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고,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는 내 머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나는 황급히 인천의 경비행장으로 달려갔다. 자동차들의 추적을 막기 위해서는 이 길밖에 없는 듯했다. 경비행기를 타고 한참을 날아 낯선 섬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곳도 안전하지 않았다. 경찰차들이 이미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나는 더 이상 숨을 곳이 없다고 느꼈다.

그렇게 나는 다시 한번 쓰러졌고 다음날 아침 스스로 검찰청으로 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경찰차는 온데간데 없고 그 모든 것이 환상이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는 두려웠고 스스로 검찰청에 찾아가 전과 5범이 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을 알지 못했다. 2002년 2월 현재, 나는 마약을 하지 않고 3년째 버티고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날밤 나에게 필요했던 것은 교도소에 수감되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내 몸조차 가누기 힘들었던 환자였고 도움이 필요했다.’


천국과 지옥 동시에 경험

─ 저는 마약에 손대면서 돈도 잃고 가정도 잃고 건강도 잃었습니다. 교도소에도 여러번 들락거렸지만 변한 것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마약중독자들로 한정된 인간관계 속에 묻히게 되었지요. 나중에는 의지할 곳이 한 군데도 없었습니다. 절망스러웠고 그런 처지에 놓이게 만든 제 자신이 싫어 견딜 수 없었습니다.
─ 처음에 왜 마약을 시작했는지 정말 후회스럽습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마약을 몰랐던 처음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마약을 하고 있는 동안에는 스스로 끊을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마약을 살 돈이 떨어졌을 때에서야 비로소 제가 심한 중독자라는 것을 깨달았지요. 마약은 본인의 의지로 끊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켜봐 주는 가족과 전문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것이지요.

─ 저는 마약을 복용하지 않은 지 20년이 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눈 앞에 마약이 있다면 그 유혹을 참을 수 있을지 자신이 없습니다. 몇 십년이 흘러도 바로 어제 경험한 일처럼 생생한 것이 마약의 경험이기 때문이지요. 끊임없는 재활과 치료의 과정이 필요한 사람들이 바로 마약중독자들입니다.

─ 저는 어렸을 적에 부모님을 모두 여의고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생활전선에 뛰어들었습니다. 자동차 정비 일을 시작했는데 함께 일하던 선배의 권유로 대마초를 피우기 시작했습니다. 대마를 경험하고 나니 마약에 대한 두려움이 차츰 사라지더군요. 그래서 필로폰의 유혹이 왔을 때 별 망설임 없이 투약하게 되었습니다. 필로폰은 대마와는 비교할 수 없는 색다른 경험이더군요. 필로폰을 투약하기만 하면 모든 근심걱정이 사라졌습니다. 그 기분을 말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세상에 ‘천국’이 있다면 바로 그곳에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필로폰을 1998년까지 12년간 지속적으로 투약했습니다.

─ 저는 어린 시절을 서울 천호동에서 보냈는데 주위에 야생 대마가 많았습니다. 20세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대마초를 피우게 되었지요. 그러던 중 평소에 친분이 깊었던 선배가 필로폰을 권하더군요. 조금 망설여졌지만 결국 필로폰을 투약하였습니다. 사실 대마를 경험하고 나니 좀더 강도 높은 자극을 원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 저는 중학교 시절 처음 본드를 흡입했습니다. 친구들과 어울려 그저 호기심으로 흡입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그후 정상적인 학교생활을 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몸이 무거워 등교할 수 없었지요. 등교한다고 해도 수업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늘 머리가 멍한 느낌이었고 모든 것이 귀찮아졌습니다. 결국 중학교 3학년 때 학교를 자퇴했습니다. 자퇴하니 갑자기 자유롭고 편해져 마냥 좋더군요. 제재가 없으니 마음대로 약물을 복용할 수도 있었구요. 그러다 자연스럽게 대마초를 피우게 되었고 22세에 필로폰을 투약하는 사람을 알게 되었지요. 또 한번 호기심에 필로폰을 시작했습니다.

─ 필로폰은 대마와는 완전히 다른 경험이었습니다. 대개 음악을 하는 사람이 많이 찾는 것이 대마초이듯 대마는 사람의 ‘필’(feel)을 가라앉힙니다. 갑자기 피곤이 엄습하고 ‘인생사가 모두 부질없다’는 생각을 하게 하지요. 기분이 처지고 쉽게 잠듭니다. 음악 하는 사람들은 대마초를 피우면 평소에 듣지 못하던 음까지 모두 잡아 기억할 수 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대마초를 피운 다음날은 굉장히 피곤한 느낌이 듭니다. 잠을 오래 자도 계속 피곤하고 작은 일에도 불만이 생기지요. 하지만 필로폰을 투약하면 반대로 기분이 하늘까지 올라가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속된 말로 완전히 ‘뿅 간 느낌’이지요.

─ 필로폰은 ‘천국’과 ‘지옥’을 동시에 경험하게 해 주는 것 같습니다. 필로폰을 투약하면 세상에 이것보다 더 좋은 것은 어디에도 없다고 믿게 되지요. 그야말로 투약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기분일 것입니다.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백번 설명해도 모를 거예요. 바로 그런 경험 때문에 필로폰을 끊을 수 없는 것이겠지요. 한 번 투약하면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는 환상적인 기분을 경험하게 되니까요. 하지만 약 기운이 떨어지면 곧바로 ‘지옥’을 경험하게 됩니다. 내 손에 더 이상 투약할 필로폰이 없다면 그야말로 죽고 싶은 기분이지요. 한편으로 죽을 만큼 필로폰을 원하는 자신의 모습과 대면하면서 절망감에 휩싸입니다. 자신이 초라해 보이고 싫어지지요. 당연히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꺼리게 되구요.

─ 필로폰을 맞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처음에 누가 필로폰을 투약해 주며 어떻게 ‘필(feel)을 잡아 주느냐’ 입니다. 처음 ‘필’에 따라 다음 필로폰을 맞은 후의 행동이 결정되기 때문이지요. 말하자면, 처음 필로폰을 맞고 혼자 방에 있었다면 그 후로도 필로폰을 맞을 때마다 혼자 방에 있고 싶어집니다. 또한 처음에 필로폰을 투약한 상태에서 섹스를 했다면 다음에 필로폰을 맞아도 계속 섹스를 해야 하지요. 필로폰은 그 자체로 위험한 약물이기도 하지만 처음에 ‘필’을 잘못 잡아 놓을 경우 큰 범죄를 일으킬 수 있어 더욱 위험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마약 유혹에 가정파탄, 건강 잃고 재산도 날려

─ 저는 기지촌에서 생활하면서 처음 약물을 복용하기 시작했습니다. 23세가 되던 해에 홍콩의 한 나이트 클럽에서 일하기 위해 홍콩으로 건너갔고, 그곳에서 처음 아편을 만났습니다. 1987년, 홍콩을 떠나 영국으로 건너갈 결심을 하던 때에는 이미 필로폰을 비롯해 LSD·코카인에 이르기까지 온갖 마약류를 접한 이후였습니다.

영국·스위스·네덜란드 등 마약을 쉽게 구할 수 있는 곳이라면 가리지 않고 찾아다녔지요. 하루에 두갑 이상의 담배를 피웠고 온갖 마약을 다 복용했습니다. 그러던 중 콜롬비아의 마피아와 손잡고 딜러를 하게 되었지요. 그러다 미국에서 꼬리를 잡혀 교도소에서 2년반 징역을 살기도 했습니다. 마약에 중독되어 20년이 넘는 세월을 살다 보니 몸에 성한 구석이 하나도 없더군요. 언제나 심각한 위염에 시달렸고 식도암에도 걸렸습니다. 운동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고 숨쉬기도 곤란한 지경에까지 이르렀지요.

─ 저는 1997년 마약 전과 5범으로 연행돼 7년 반의 실형을 언도받았지만 2년 수감후 형집행정지를 받았습니다. 건강상태가 악화될 대로 악화돼 더 이상 수감생활을 할 수 없다는 판단이 내려진 것이지요. ‘형집행정지’를 받는다는 것은 일어설 기력조차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2년간 내과 치료를 받고 있지만 아직도 힘든 육체 노동은 고사하고 오랜 시간 이야기하는 것도 힘든 상태입니다. 12년간 필로폰을 투약했으니 몸이 성하기를 기대할 수 없겠지요.

─ 저의 경우 필로폰을 투약하기 전에는 몸무게가 87~8kg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필로폰을 투약하면서 아무 것도 먹지 못해 몸무게가 급속하게 줄었습니다. 1~2주일 동안 밥 한 숟가락 먹지 않은 적이 수도 없이 많아요. 밥 대신, 물 대신 필로폰을 맞았지요. 얼굴을 보면 말 그대로 ‘사람이 아닌 것 같이’ 보입니다. 피부색이 검게 변하고, 영양부족으로 입술이 터지고 이도 시리고 흔들립니다. 위가 아파 소화를 시킬 수가 없고 신장은 그 기능을 거의 상실한 정도이지요. 약 기운이 떨어져 손이 떨려 국을 떠 입까지 가져갈 수조차 없는 지경에까지 이른 적도 많았습니다. 불면증에 시달리게 되고 자면서도 몸에 경련을 일으켜 집사람을 놀라게 한 적도 많았지요.

─ 예전에 저는 참 솔직하고 직선적인 성격이었습니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고 곧잘 호탕하게 웃곤 했어요. 하지만 마약을 하면서 저의 이런 성격은 180도 변했습니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마약 복용 사실을 감추기 위해 저 스스로 거짓말을 하기 시작했으니까요. 또한 신고할 것이 두려워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인간관계가 무너지기 시작한 것도 당연했습니다. 집사람도 사랑은 했지만 100% 믿지는 못했습니다. 언젠가는 내 곁을 떠날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 저는 18세 때부터 여자와 동거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둘 사이에 자식도 한명 있었지만 필로폰을 투약하면서 가정생활에 금이 가기 시작했지요. 오랫동안 집을 비우고 일정한 수입도 없었으니 동거녀가 집을 나간 것도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결국 혼자 아이를 키우게 되었고 여러 가지로 힘든 처지였습니다. 하지만 힘들면 힘들수록 더욱 더 마약에 빠져들게 되는 것이 문제였어요. 필로폰을 투약하면 괴롭고 힘든 일들을 잊을 수 있어 계속 양을 늘려 필로폰을 투약하였습니다.

─ 마약을 복용하면 100% 가정이 파탄에 이른다고 보면 됩니다. 우선, 필로폰을 투약하면 감정이 최고로 고조된 상태에서 상당히 활동적으로 변합니다. 이러한 상태가 결국 도박·여자·섹스 등 유흥에 관심을 쏟게 만들지요. 이런 상황이니 가정을 정상적으로 꾸려나갈 수 있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필로폰을 투약한 사람은 필로폰을 투약하지 않은 사람과는 성관계를 갖지 않습니다. 부부 중 어느 한 사람만 필로폰 중독자라고 할 경우 이들의 성관계는 이루어질 수 없지요. 따라서 다른 한쪽도 중독자로 만들거나 파탄에 이르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 저도 그런 이유로 처와 이혼했습니다. 지금 제 아이는 고아원에 있습니다. 제 자신도 추스를 수 없는 상황이 원망스럽고 자식에게 미안해 고개를 들 수 없습니다.

─ 저도 일찍이 한 여자와 동거생활을 시작했지만 얼마 안가 파경에 이르렀습니다. 제가 대마초에 빠져 있을 당시만 해도 야산에서 쉽게 대마를 구할 수 있었는데 낮이고 밤이고 매일 산으로 야생 대마를 찾아 다녔지요. 특히 야생 대마가 나는 봄이 되면 아예 짐을 싸 집을 나왔습니다. 매일 차를 타고 대마를 찾아 다녔고 대마초를 피우면서 좋은 음악, 경치를 찾아 다니느라 바빴지요. 대마는 그 씨를 말리면 껍데기가 나오는데 이것을 말려 담배처럼 피우는 것이지요. 혹은 대마의 잎도 말려 피우는데 신문지에 싸서 차량 본네트의 흡기장치에 넣어 놓고 1시간만 달리면 바싹 마릅니다. 이렇게 말린 대마초를 좋은 경치 속에서 피우며 즐기느라 한동안 가족을 잊어버리기 일쑤였지요.

─ 대마의 경우 야생이라 많은 돈이 들어가지 않지만 필로폰은 매우 비쌉니다. 초기에는 50~60만원 상당의 필로폰으로 1주일을 투약할 수 있지만 나중에는 면역이 되어 하루만에 다 써버리게 되니까요. 일단 중독되면 처음 생각했던 것의 몇배로 큰 돈이 들 수밖에 없어집니다. 저의 경우, 필로폰을 투약하고 나서는 그 동안 벌어두었던 돈뿐 아니라 집과 차까지 모두 팔아 탕진했습니다. 또한 한창 동거중이던 여자와 결혼 날짜를 주고받을 무렵 필로폰 투약 사실이 발각돼 결국 결혼도 무산됐지요.


마약 투약에서 범죄 가담까지

─ 저 또한 필로폰을 사는 데 드는 돈을 마련하기 위해 나중에는 직접 마약 판매에 나선 경험이 있습니다. 오랫동안 마약을 복용하다 보면 마약 중독자들을 많이 알게 되는데 주위에서 종종 마약을 구해 달라는 부탁을 받게 돼요. 그러면 필로폰을 구해 약간의 마진을 남겨 팔아 넘기곤 하였습니다. 이렇게 마약중독자들 대다수가 처음에는 단순히 필로폰을 투약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나중에는 결국 판매에까지 손을 뻗치게 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처음에는 주변사람들을 알선하고 그 대가로 자신도 필로폰을 얻다가 차츰 판매에 이르게 되는 것이지요. 필로폰의 가격이 매우 높은 것을 감안하면 나중에는 마진이 점점 커져 생활비까지 조달할 수 있게 됩니다.

─ 저도 필로폰 딜러로 2년 동안 활동하였습니다. 마약을 판매하는 판매책들은 믿음직한 딜러를 뽑아 교육시키는 것이 주된 일입니다. 피라미드식으로 새끼를 쳐야 수요자들이 생기는 것이니까요. 이들은 아주 까다로운 방법으로 밑에서 일할 딜러를 뽑습니다. 사람을 잘못 뽑았다가는 ‘아차’하면 모두 쇠고랑 차는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니까요. 일단 필로폰을 맛본 사람들은 죽기살기로 이런 판매책들을 쫓아다닙니다.

─ 이러한 생활을 하면서 한편으로 또 평범한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지요. 필로폰을 투약하면 대개 밤에 활동하게 되는데, 밤새 환각상태에서 유흥에 빠져 즐기다 낮에는 잠을 자는 생활이 연속됩니다. 낮과 밤이 바뀐 생활을 하니 일반사람들과 어울릴 수 없는 것은 당연하지요. 주변 사람들 중에는 제가 무슨 일을 하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가끔 알게 되는 사람들이 생기는 수도 있었는데 그들의 반응은 대개 두가지였어요.

거부반응을 나타내면서 저를 이상하게 보거나, 아니면 호기심을 가지고 저를 대하는 사람들이었지요. 나를 통해 색다른 것을 한번 경험해 볼까 하는 호기심 말이에요. 저는 사람들의 이런 반응이 피곤했고 고의로 중독자가 아닌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꺼렸습니다. 제가 하루 종일 만나는 사람들의 90%가 중독자들이었지요. 그들이 필요할 때는 내가 돈을 가지고 있을 때였고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만날 필요가 없었습니다. 저는 차츰 사회로부터 고립되었고 주위 사람들은 저를 떠났습니다.

─ 마약을 하는 동안에는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건강상태가 좋지 않아 일반적인 일을 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환각상태에서 정상적인 일을 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저 또한 주위에 아는 사람들이라고는 모두 저처럼 마약중독자들뿐이었어요. 마약에 취한 상태에서는 마약에 취해 있는 사람들과만 대화가 통하기 때문이지요.

─ 저의 경우도 돈이 필요해 일수 일을 시작했습니다. 중학교 중퇴의 학력으로 일자리를 얻기란 매우 힘들었고 어렵게 일을 구한다고 해도 급여가 낮아 마약을 사기는커녕 기본적인 생활도 꾸려 나가기 힘들었기 때문에 시작했지요. 하우스 방에서 처음 일을 벌였는데 그곳에서는 마약을 흔히 접할 수 있었습니다. 떳떳한 돈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수입이 많았던 것은 사실입니다. 따라서 원하는 만큼의 필로폰을 구입할 수 있었고 더 강한 자극을 위해 시간이 거듭될수록 더 많은 양의 필로폰을 투약하였지요. 이렇게 과하게 필로폰을 투약하다 보니 금단현상도 심하게 나타났습니다.

1주일씩을 아무 것도 먹지 않고 방 안에 고립되어 있는 적이 많았어요. 점점 사람 만나는 것이 두려워졌고 결국 죽고 싶은 생각이 들어 자살 기도도 하였습니다. 방문을 잠그고 주사기를 갖다 놓고 필로폰을 희석시키면서도 입으로는 계속 ‘이러면 안되는데…’라고 되뇝니다. 하지만 백발백중 필로폰을 투약하면 계속해서 이런 일들을 반복합니다. 그러다 나중에는 마약을 쫓아다니게 되는 것이지요. 일이고 뭣이고 모두 팽개치고 마약을 쫓아 계속 찾아다니게 되는 것입니다.

─ 제가 처음 대마초를 피우기 시작한 20여년 전에는 필로폰이 성행하던 시기가 아니었습니다. ‘필로폰’하면 부자들, 혹은 연예인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대마초 외에 상대적으로 질이 낮은 여러 약물들을 접하다 더욱 더 큰 자극을 원하면서 하게 된 것이 바로 필로폰이었습니다. 필로폰을 한번 투약해 본 사람들은 가격이 아무리 비싸더라도 또 찾게 마련이지요. 건강을 버리면서 가지고 있는 온갖 재산들을 다 탕진하는 줄도 모르고 오직 한가지, ‘필로폰’이 혈관을 타고 내려갈 때의 느낌만 기억하는 것입니다.

─ 맞습니다. 필로폰을 하게 되면 온갖 괴로움을 다 잊을 수 있어 다시 안할 수 없습니다. 마약 기운이 떨어지면 지옥에 있는 느낌이어서 사람도 싫고 만사가 귀찮아져 우울증에 걸리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다 결국 자살하는 수도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무슨 수를 내서라도 다시 마약을 손에 쥐고야 마는 것이지요. 저 또한 미국의 교도소에 수감되었을 당시만 하더라도 그저 억울하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출감하면 ‘크게 한탕 해야지’ 하는 생각만 하고 있었지요.

‘질이 좋은 원액을 가지고 한번 멋있게 즐겨 보자’고 다짐하였습니다. 수감되어 있었을 당시 카운셀러나 많은 의사들을 만나 보았지만 소용없었습니다. 전혀 마음에 와 닿지 않았고 그저 마약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이 지껄이는 말로만 생각되었어요. 그렇게 교도소에서 나와 저는 다시 뉴욕의 거리로 나갔습니다. 뉴욕의 할렘가에서는 마약을 구하기가 쉬웠고 저는 수감되기 이전의 생활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매일 반복되는 저의 생활과 언제나 마약에 찌들어 있는 제 모습에 회의가 느껴지더군요. 지구를 반 바퀴나 돌아 이곳에 와서도 또 이런 ‘벌레같은 인생을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습니다. 물론 제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기까지는 많은 희생이 뒤따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