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통화기금(IMF) 한파가 오히려 훈풍을 몰고 온 이색지대가 있다. 설립 2년만에 미국공인회계사(AICPA) 27명을 배출한 AICPA 양성 전문 한국회계학원(KAIS·02-3471-8587∼8). 서울 서초동 교대정문 사거리 부근의 이 학원엔 요즘 수강생들이 부쩍 몰리고 있다. IMF가 국내 기업들에 경영의 투명성을 요구하며 기업들이 미국의 회계기준(GAP)을 따라가고 있는 데다 GAP에 맞게 재무제표를 작성해야 하는 외국투자기업들의 진출이 늘어남에 따라 AICPA 수요가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강생 두 달 새 31% 늘어
95년 7월 7명으로 시작한 이 학원의 수강생은 꾸준히 늘어 IMF 구제금융이 들어오기 직전인 지난해 11월 1백90명선에 달했다. 한 학기가 2개월이라 홀수 달마다 개강을 하는 이 학원의 올 1월 등록자는 2백50명선. 두 달만에 31.6%가 늘었다. 20% 가량 되는 대학생들 가운데 약 20명은 휴학하고 등록을 했다. 이들 ‘전업’학생으로 이 학원 자습실은 낮에도 빈 자리가 거의 없다.
16명의 강사진은 전원 AICPA 또는 美변호사들로 미국에서 석사 이상의 학위를 받고 3년 이상 회계법인·법무법인에서 실무경험을 쌓은 베테랑들이다. 대부분 회계법인·컨설팅회사·대학 등에 재직하고 있는 이들은 교재는 영문으로 된 것을 사용하지만 강의는 우리말로 한다. 필기로만 치르는 시험문제가 영어로 출제되고 시험을 볼 사람들은 한국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합격하면 1백% 취업
AICPA를 딴 수강생들은 회계법인에 들어가거나, 국내에 진출한 다국적 기업에 취업하고 있다. 취업률은 1백%. 현역 직장인들은 다니는 회사에서 승급 등의 혜택을 누린다. 3번의 시험을 통해 배출한 27명의 AICPA 중 국내 회계법인에 취업한 사람은 삼일회계법인의 3명을 비롯해 모두 6명.
여상을 나와 지난해 명지대 경영정보학과를 졸업하고 그 해 5월 시험에 합격한 강경화씨(27)는 삼일회계법인 기술지원소에서 ERP(전사적 자원관리) 컨설팅을 담당하고 있다. 스스로 자랑스럽다는 그녀는 “어려운 시기에 좋은 직업을 얻은 것보다 자신의 가능성을 확인하고 세상을 보는 시각이 달라진 게 더 큰 수확”이라고 말했다.
수강생들의 합격률은 뜻밖에도 높다. 전체 AICPA 응시자의 평균 합격률이 첫 시험 전과목 합격률 5∼10%, 부분 합격률 25∼30%인 데 비해 KAIS 출신 응시자들의 합격률은 각각 15∼20%, 60∼70%에 달한다. 전체 합격률보다 2배 이상 높은 셈이다.
영문교재와 우리말 강의가 합격 비결
이런 높은 합격률에 대해 이봉인 부원장은 “본래 시험에 강한 민족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미국에서 CPA를 가장 많이 배출했고 KAIS와 제휴관계에 있는 베커 CPA리뷰측 관계자들이 미국 한 번 안 가보고 8개월만에 AICPA 시험에 붙었다고 하면 안 믿습니다.”
좀더 설득력 있는 합격비결은 ‘교재는 영문’이고 ‘강의는 우리말’로 한다는 것이다. 영어로 된 교재로 토플 시험 준비를 하되 특강은 한국인 강사로부터 듣는 게 효율적인 것과 같은 이치다. “여름방학 때 한국 들어가 KAIS 두 달 다니면 다음 학기 회계학 과목은 ‘올 A’”라는 미국 유학생들의 체험적 고백이 이런 추론을 뒷받침한다. 뒤집으면, 한국어 교재로 공부를 하거나 현지인의 강의를 듣는 건 큰 도움이 안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 학원에서 수강을 하고 AICPA에 ‘부분 합격’하기까지 드는 비용은 시험기간중 미국 체재비까지 합해 평균 5백만원선. 기간은 평균 10개월쯤 걸린다. 최창호 원장은 “단순비교지만 AICPA 취득을 목적으로 미국에 유학하는 경우와 비교하면 오른 환율 기준으로 20분의 1쯤 드는 셈”이라고 말했다.
그는 수강생이 늘어 올해는 1백명 정도 합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가능한 일입니다. 제휴관계에 있는 일본 TAC(도쿄회계센터)의 경우 해마다 5백명 가량을 배출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AICPA를 배출할 수 있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기보다 힘들다”는 우리나라 CPA 시험과 달리 AICPA 시험엔 모집정원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KAIS출신으로 제주대 관광경영학과를 나와 지난해 5월 AICPA 시험에 패스한 삼일회계법인의 도정훈씨(29)는 “떨어뜨리는 게 주목적인 우리 CPA 시험은 문제가 난해하고 꼬일 수밖에 없다”고 전제하고, “현역 한국 CPA들도 떨어질 만큼 AICPA시험 역시 만만치는 않지만 CPA가 되는 데 필요한 기본지식을 측정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말했다.
워싱턴 포스트지는 지난 1월2일 KAIS를 ‘어렵기로 악명이 높은’ 미국 CPA 시험 준비과정을 개설하고 있는 사설학원이라고 소개하고 쿠퍼스 앤 라이브랜드 등 서울에 진출한 미국 회사들이 KAIS 출신들을 채용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KAIS는 영화회계법인의 AICPA 위탁교육기관으로 한국공인회계사반을 별도로 개설하고 있기도 하다.
‘국내파’ AICPA에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 ‘완전공개의 원칙’이 뿌리내린 미국의 기업풍토와 기업은 물론 은행·학교 등 모든 경영체에 투명성을 요구하는 미국 회계관행에 대한 이해 없이 취득한 자격증은 활용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글로벌 시대 유망직업 AICPA
자본주의가 활짝 꽃핀 미국에서 CPA는 알아 주는 전문직이다. AICPA(American Institute of Certified Public Accountant)란 미국공인회계사협회의 약자. 이 협회의 회원인 미국공인회계사를 흔히 그냥 AICPA라고 부른다.
AICPA의 활동무대는 그야말로 글로벌하다. 우리나라를 포함해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인정받는 자격증이다. KAIS에 따르면 올해부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간 자격증 교류가 시작돼, 빠르면 연내 AICPA 자격증으로 국내에서 개업도 할 수 있다. KAIS의 한 관계자는 일본의 경우 90년대 들어 AICPA 인기가 치솟아 해마다 몇 백명씩 배출되지만 수요를 따르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AICPA 시험은 1년에 두 번, 5월과 11월 첫째주 수·목 이틀에 걸쳐 미국 50개주에서 일제히 치러 진다. 문제도 똑같고 시험시간도 같다. 응시자격은 주마다 다른데 90% 이상의 주가 ▶전공 불문하고 4년제 대학 졸업자거나 2학년 이상의 재학생으로 ▶30학점 이상의 회계 관련 학점 이수를 요구하고 있다.
우리나라 4년제 대학에서 취득한 경영·회계 관련 학점도 그대로 인정받을 수 있다. KAIS는 AICPA 공식 외국학점 심의기관인 FACS에 등록된 기관이라 여기서 딴 회계 관련 학점도 인정이 된다. 부산에 있는 동명정보대학과 제휴하고 있는 KAIS는 FACS에 등록된 국내 유일의 미국 회계 전문학원이다.
시험과목은 재무회계·특수회계·감사·상법 등 모두 네 과목으로 전 과목 75학점 이상이면 합격이다. 두 과목 이상 75점 이상이고 나머지도 50점(과락) 이상이면 75점 이상인 과목만 ‘부분 합격’ 판정을 받는다. 떨어진 과목은 2년 반(5번) 안에 합격하면 된다. 캘리포니아주엔 과락제도가 없다.
재무회계·감사·상법 등은 70% 이상이 선다형으로 출제되며 특수회계는 1백% 선다형이다. AICPA는 합격 후 실무수습과정이 없다.
[인터뷰]최창호 한국회계학원장
“회계는 개방화시대 우리나라를 지키는 도구”
─시대의 흐름을 잘 탄 건가요.
“IMF 체제를 내다본 건 아니지만 2000∼2002년이면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습니다. 우리도 이제 장식품 같은 학위에 연연해 할 게 아니라 실무능력을 키울 때가 됐어요. 정말 능력있는 실무자들이 필요합니다.”
─공인회계사들이 유명무실화하고 있다는 얘기가 있는데요.
“‘사(士)’자 달면 끝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문인을 대상으로 하는 지속적인 교육 시스템이 필요합니다. AICPA는 2년마다 40학점을 이수해야 자격증을 유지할 수 있어요. 많이 뽑고 자유경쟁에 맡겨야 합니다. 전문인교육은 경영난을 겪고 있는 대학들의 돌파구이기도 합니다.”
─‘재벌의 시녀’ 소리를 듣는 우리나라 회계사들이 AICPA 딴다고 달라지나요.
“우리나라 회계사들 자질은 세계 어느 나라 CPA 못지 않습니다. 문제는 독립성이에요. 재무제표에 오류가 있으면 투자자들이 회계사들을 대상으로 소송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결합재무제표를 만들라는 IMF의 요구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연결재무제표가 맞습니다. 연결재무제표를 만들어 회계의 투명성이 확보되면 금융실명제도 필요없습니다. 우리나라 국민총생산(GNP)의 40%가 버블이라는 주장이 있어요. 내부자거래 때문이죠. 우리나라 회사들은 개인기업이나 다름없습니다. 세계의 기업들이 우리 돈을 노리고 들어오고 있습니다. 우리로서는 인력을 길러 대응하는 길밖엔 없어요. 회계는 우리나라를 지키는 도구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