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펌이야기(16)]김·장·리법률사무소 40년 전통…외국기업 확보에 두각

70년대까지 미국 5백대 회사 휩쓸었지만 93년 분열 아픔

김흥한 변호사
김의재 변호사
윤영철 전 대법관
최경준 변호사
서울 인사동의 대일빌딩에 자리잡고 있는 ‘김·장·리’법률사무소는 무엇보다도 국내 최초의 로펌이라는 사실을 빼놓을 수 없다. 비록 지금은 국내변호사 10명에 외국인변호사 2명의 가족회사(Family Firm)로 축소된 측면이 없지 않으나 ‘김·장·리’는 4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창업에 이은 비약적인 성장이 있었는가 하면 영입과 탈퇴·분열의 우여곡절도 겪었다.외국고객의 섭외사건에 관한한 어느 로펌에도 뒤지지 않는 저력과 노하우를 갖추었다는 업계의 평가를 받고 있다. 한국 최초의 국제변호사인 김흥한변호사에 의해 국내 로펌업계가 그 터를 닦기 시작한 것은 잘 알려진 대로 58년 후반의 일. 5년간의 미국유학에서 돌아온 김변호사가 이태영변호사와 함께 서울 광화문에 ‘김·장·리’의 전신인 ‘이&김’을 열면서부터다. 한국 최초의 여성 사법시험 합격자이면서 한국가정법률상담소를 창설, 여성들에 대한 법률상담과 구조활동을 펴온 이태영변호사는 나중에 김흥한변호사의 장모가 되기도 했지만 국제변호사 사무실 설립에도 함께 관여했다. 하긴 김변호사의 미국유학을 주선한 사람도 다름 아닌 이변호사의 부군인 정일형박사이고 보면 한국 로펌업계의 태동에는 정일형·이태영 두 원로의 역할이 알게 모르게 스며 있다고 할 수 있다. 장모-사위 합작 ‘이&김’이 효시 김변호사에 따르면 판사로 있으면서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정일형박사의 비서격으로 심부름을 적지 않게 해 왔는데 정박사가 장학금을 주선해 주며 미국유학을 권해 6.25가 끝나기 얼마 전인 53년 여름 미국행 화물선에 몸을 싣게 되었다고 한다. 김변호사는 “이때만 해도 국제변호사가 돼 로펌을 세워야겠다는 구체적인 계획 같은 것은 없었고 단지 국제법을 공부하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뿐이었다”며 “보다 더 넓은 세계에 가서 견문을 넓혀야겠다는 당시 미국 유학파들의 경우와 크게 다를 게 없었다”고 회고했다. 이후 ‘이&김’은 5·16이 난 후 장대영변호사가 합류하자 고시합격 순서대로 성을 따‘김·장·리’가 되었는데 이때부터 외국기업의 섭외사건 의뢰가 쏟아지기 시작했고 ‘김·장·리’는 본격적인 국제변호사사무실로 탈바꿈한다. 걸프 오일사를 첫고객으로 웨스팅 하우스,코카콜라, IBM 등 내로라하는 다국적기업이 줄을 이었고 은행들도 체이스 맨해튼, 시카고은행(FNBC), BTC 등 세계금융시장을 좌지우지하는 큰 손들이 김변호사의 손을 거쳐 국내에 상륙했다. 김변호사의 동서이면서 71년11월 합류한 김의재변호사는 “7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의 ‘포춘(Fortune)500’에 드는 거의 모든 기업들을 고객으로 확보하고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말했다. 재미있는 것은‘김·장·리’가 한창 잘 나가던 이 무렵 ‘김·장·리’와 72년 설립돼 발전을 거듭하던 ‘김&장’이 매우 적극적으로 합병을 꾀했다는 사실이다. 업계 사정에 밝은 한 변호사는 이와관련,“당시 ‘김·장·리’는 좋은 고객이 많은 반면 일손이 달리는 형편이었고‘김&장’은 우수한 인력에 비해 일감이 모자라 서로 부족한 점을 보강할 수 있는 입장에 있었다”고 합병추진의 동기를 설명했다. 그러나 합병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두 로펌은 이후 치열한 선두 경쟁을 벌이게 된다. 김흥한변호사는 나중에 세종을 세운 신영무변호사의 영입에 나서기도 했으나 이마저 불발로 그치고 ‘김·장·리’의 세확장은 81년4월 황주명변호사가 합류하는 것으로 일단락됐다. 이어 80년대는 선두로 올라서는 ‘김&장’과 선발펌인 ‘김·장·리’‘김·신·유’가 3각 체제를 이루며 치열한 경쟁을 주고 받은 시기. 황변호사의 합류로 송무팀을 강화한 ‘김·장·리’는 93년1월 김흥한변호사의 사위인 최경준변호사가 가세하며 또한번 세를 키우려 했으나 오히려 최변호사의 합류로 사무실이 깨지는 비운을 맛봐야 했다. 93년5월 변호사 대거 이탈 인척관계로 이어진 김흥한-김의재-최경준변호사 등 주류측과의 갈등이 깊어진 황변호사등 다른 변호사들이 93년5월 ‘김·장·리’를 탈퇴, 충정합동을 새로 차리며 독립했다. 황변호사 등의 탈퇴는 특히 사무실과 뜻이 맞지 않는 한 두명이 로펌을 옮기거나 단독개업하는 게 아니라 10여명의 변호사가 집단적으로 나와 아예 새 펌을 설립했다는 점에서 ‘김·장·리’는 물론 업계에 미치는 파장이 컸다. 로펌의 한 변호사는 “로펌은 물적 기초가 거의 없는 조직이기 때문에 변호사들이 떠나면 그만”이라며 “‘김·장·리’의 분열은 로펌의 경영이 얼마나 어려운 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 사건 후 ‘김·장·리’는 소규모 가족회사로 위축된 측면이 없지 않으나 최경준변호사를 중심으로 어소시엣변호사를 충원해가며 체제를 정비, 섭외사건에 관한한 여전히 명성을 얻고 있다. ‘김·장·리’가 공개하는 주요 고객만 보더라도 코카콜라·크라프트 푸드·포드자동차·록히드마틴·벨 헬리콥터·IBM·레브론·홍콩 텔레콤·마스타카드·캘러웨이 골프 등 업종별로 외국고객들이 두텁게 형성돼 있다. 또 지난해 9월부턴 윤영철 전대법관을 고문으로 영입, 송무분야를 강화하고 있으며 올해 3명의 신규변호사를 새로 충원하기로 하는 등 규모도 꾸준히 키워가고 있다. 코카콜라와 ‘김 장 리’ 93년 다른 회사로 갔다가 96년 ‘재결합’ ‘김·장·리’의 변호사들은 40년에 걸친 수많은 고객 중에서도 코카콜라를 가장 대표적인 고객으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70년대 초 국내시장에 진출할 때부터 96년봄 국내 보틀러들과의 인수합병(M&A) 추진에 이르기까지 코카콜라 뒤엔 으레 ‘김·장·리’가 있었다. 그만큼 ‘김·장·리’와 코카콜라 사이에는 사연도 많았다. 국내 진출부터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당시는 코카콜라와 같은 소비성제품을 생산하는 미국회사가 1백% 지분을 소유하는 자회사를 국내에 설립한다는 게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라 여간해선 투자인가를 받기가 어려웠던 게 사실. 코카콜라도 김흥한변호사가 ‘코카콜라’상호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조건부로 외국인투자인가를 받아내 한국코카콜라(주)가 아닌 한국음료(주)로 자회사를 설립해야 했다. 이후 코카콜라는 ‘김·장·리’와 고문관계를 유지하며 어려울 때마다 자문을 받아왔으나 93년5월 ‘김·장·리’가 분열되면서 뜻하지 않게 ‘김·장·리’와 결별하게 된다. 코카콜라 담당변호사였던 황주명변호사가 ‘김·장·리’를 나와 충정으로 독립하자 코카콜라는 ‘김·장·리’와 충정 중 어디를 선택해야 하느냐의 기로에 놓이게 됐고 몇 개월의 고민끝에 어느 쪽도 아닌 ‘김·신·유’법률사무소를 찾아갔다. 그러나 코카콜라는 3년 후 ‘김·장·리’로 되돌아왔다. 국내에 한국코카콜라보틀링(주)을 설립,그동안 국내보틀러로 활동해 온 두산식품(97.10.1 OB맥주에 합병)·우성식품·범양식품·호남식품 등 4개 상장사를 인수하고 나서면서 ‘김·신·유’가 아닌 ‘김·장·리’에 이 일을 맡겼던 것. ‘김·장·리’는 코카콜라를 고객으로 다시 확보하기도 했지만 다른 로펌들을 제치고 국내에서 이루어진 M&A 사상 최대 규모라는 빅딜을 따내는 행운까지 거머쥐게 된 것이다. 거래규모가 5천억원 이상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약 10년간 코카콜라 담당변호사로 활약한 적이 있는 황주명변호사가 코카콜라의 인수에 반대한 범양식품을 대리하고 나섬으로써 얼마 전까지 자신의 의뢰인이었던 코카콜라의 상대편에 서게 된 것. 황변호사는 코카콜라측을 상대로 공정거래위원회 제소와 함께 원액공급이행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내 코카콜라를 대리한 ‘김·장·리’의 최경준변호사와 치열한 법정공방을 펼쳤으나 2심에서 화해가 성립돼 원만하게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