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 기자의 공개 못한 취재수첩] 경찰서 임대해 신신백화점 설립

고 박흥식 화신그룹 회장⑦
화신 전소된 그날 저녁 총독 만나 술마시며 담판

조선 거상 박흥식은 화제를 몰고 다니는 사람이었다. 화재(火災)가 난 것도 장안의 화젯거리였다. 전혀 화재를 당하지 않을 것 같은 빈틈없는 사람이 백화점을 태워 먹었으니 그럴 만도 했을 것이다. 더구나 경성이 생기고 백화점에 불이 난 것은 화신이 최초였다. 총독이 직접 진화 작업을 지휘했을 정도였다니 상황이 짐작됩니다만 총독도 그런 대형 화재는 처음 경험했을 것 아닙니까? “처음이었다고 그래요. 나도 처음이었고. 산불은 봤지만 대형 건물에서 펑펑 터지는 소리가 막 나고 세찬 겨울바람에 불이 울어대는 소리는 처음 들어봤다고, 무섭더라고 그러더군요. 허허.” 진화를 끝내고 총독이 특별히 한 얘기는 없었습니까? “박흥식이 망하게 됐다고 합디다. 3000만원 대부받은 것도 있는데 장사도 제대로 못해 보고 잿더미 됐으니 끝장났다고. 그래서 다른 얘기는 할 것도 없고 내가 오늘 술 한잔 사갔다고 했지요. 명월관에 예약을 해놓을 테니 술 한잔 하자고. 불이 났는데 술을 사갔다고 했으니 총독이 미쳤느냐고 하지요. 그러기에 내가 그랬습니다. 이건 하늘의 축복이다, 일본에서는 어떤지 몰라도 조선 사람들 사이에서는 불난 집이 더 비싸게 팔린다고, 불같이 일어날 테니 두고 보라고. 그래서 그날 정말 명월관에서 술 마셨습니다.” 명월관에서 기상천외한 제안 기가 찬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박흥식은 명월관을 예약해 놓고서도 그 사이에 선박을 전세내어 연쇄점에 공급할 물건을 일본에서 긴급 이송하고 있었다. 누구도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일을 그는 해내고 있었던 것이다. “상인의 생명은 신용입니다. 그때 내 입장은 신용을 잃으면 내가 쓰러지고 끝나는 게 아니라 조선 상권이 무너지는 상황이었어요. 그런데 무슨 짓을 못 하갔습니까. 마산으로 가게 돼 있는 화물선을 두 배 주고 인천으로 확 돌린 거야요. 마진을 계산할 상황입니까 어디? 비상사태였어요.” 박흥식은 일어날 자신이 있었다고 했다. 불이 난 건물을 이천승 설계사에게 개·보수를 맡기고 그는 명월관에서 기상천외한 제안을 하는 것이다. 그것이 또 하나의 새로운 백화점을 만들어내는 시작이었다. “불이 난 그날 기생을 옆에 끼고 술을 마시자 했으니 박흥식이가 미친놈이 아닌데 이상하다고 했을 거야요. 솔직히 술잔이 몇 번 돌 때까지도 나는 총독한테 던질 승부수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요청을 한 셈인데, 아마 조선이 건국되고 그런 일은 처음일 겁니다. 내가 화신을 개·보수할 때까지 종로경찰서 구관을 빌려달라고 했습니다. 거긴 중요 서류들과 무기들을 보관하고 있었지만 경찰관이 근무하고 있지는 않았어요. 하여간 경찰서를 백화점으로 쓸 생각이니 내놓으라고 했어요. 총독이 경악을 해요.” 아니, 그것도 국가 건물인데 경찰서 건물을 개인이 백화점으로 사용하도록 허가해 달라는 게 타당한 얘깁니까? “논리적으로 되는 소리를 한 것이지요. 화신백화점이 전소에 가까운 화재를 입은 이유가 총독 휘하에 있는 소방서 때문이라고 주장했으니까요. 왜냐, 경성 인구가 40만 명인데 소방차가 30대밖에 안 된다는 것도 문제요, 30대 중에 사다리차가 한 대도 없었다는 것은 더 문제 아닙니까? 그걸 물고 늘어졌어요. 총독도 현장에서 지휘를 했지만 화신이 몇 층 건물입니까? 불길은 위로 치솟지 아래로 치닫는 게 아닙니다. 눈앞에서 3, 4층으로 막 치솟는데도 소방호스는 1층에서만 맴돌고 있었으니 결과적으로 전소된 거 아닙니까? 그건 정부의 절대적인 책임이고 총독의 무관심이라고 강하게 지적한 거지요.” 총독이 말문을 닫더라고 했다. 논리가 틀리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결국 총독은 승인을 했다. 언론들이 있을 수 없는 일이 있을 수 있는 일로 나타났다면서 대서특필했지만 총독부가 오히려 명분이 된다며 수습을 했다. 미완의 구상 ‘경성 남부 개발’ “물론 화신백화점 개·보수가 끝날 때까지라는 시한부 조건으로 허가를 해줬습니다. 그래도 좋다고. 그래 놓고 화신 보수를 느릿느릿하면서 종로경찰서 구관을 완전히 뜯어 신축에 가깝게 고쳤지요. 그것도 조선인으로서는 최고 실력가인 이천승씨가 설계를 했습니다. 그런데 구관을 대대적으로 개축을 하니까 총독이 거기에 화신연쇄점 간판을 걸려고 하는 거 아니냐고 그래요. 그래서 왜 화신이냐고, 새로 하니까 신신이라고 했지요. 허허허. 그게 신신백화점 시작입니다.” 박흥식을 누가 감당할 수 있겠느냐고 했던 것이 이런 일에서 기인한다. 바로 이것이 화신 옆에 세워졌던 신신백화점의 태동 배경이었다. 물론 신신은 해방이 되면서 즉각 적산을 불하받아 새로 건축하게 되지만 경찰서 건물이 임대되는 순간에 사실상 실질적인 소유주는 박흥식이 된 셈이다. 여기서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신신백화점을 화신백화점 못지않게 꾸미면서 박흥식은 이천승 설계사에게 한 층 전부를 비빔밥집을 차릴 수 있도록 설계하라고 주문했다. 이천승이 백화점에 난데없이 비빔밥집이 웬 말이냐 싶어 말을 못하고 쳐다보자 박흥식은 전통적인 조선 음식을 최고로 발전시켜 일본인들이 혀를 내두르게 하겠다는 것이다.

▶화신백화점에 화재가 나자 박흥식은 우에노 총독을 설득해 옛 종로경찰서 건물을 임대해 ‘신신백화점’을 개장한다. 화신백화점의 2호점인 셈이다. 사진은 철거 중인 신신백화점.

그러자 이천승이 비빔밥보다 차라리 특수 목욕탕, 요즘으로 보면 사우나를 차리라고 건의했다. 박흥식은 한마디로 거부하면서 “불이 난 팔자에 물장사가 뭐야!”라고 소리쳤다. 불같이 일어나는데 상극인 물을 왜 가까이하느냐는 얘기였다. 실제로 박흥식은 비빔밥집을 열었고 평생 물장사는 하지 않았다. 세월이 흐른다. 박흥식으로서는 미완의 작품으로 남겼지만 일생을 통해 최대의 사업이 될 수 있는 구상을 내놓은 것이 있었다. 1935년 제의한 ‘경성 남부 개발’, 즉 남서울 개발 구상이었다. 이것은 우에노 총독이 조선 노동력을 활용해 일본으로 가져갈 수 있는 인견사 공장 건설을 박흥식에게 제의하자 박 회장이 반대급부로 요구하면서 내놓은 제안이었다. 1970년 1월 23일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내각에 지시함으로써 남서울 개발 구상이 처음 부상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이때 이미 제안됐다가 42년에 재검토되고, 해방으로 좌절됐다가 비로소 박 대통령에 의해 실현된다. 물론 박흥식의 구상은 남서울 전체를 아파트와 단독주택으로만 건설해 세계 최대의 주택도시를 만들고 문화시설을 포함한 유행의 거리는 배후에 별도의 도시를 꾸미는 것이었다. 그러나 남서울 구상을 추진해 보기도 전에 세월은 박흥식을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시킨다. 헌법 제101조. ‘이 헌법을 제정한 국회는 단기 4278년(1945년) 8월 15일 이전의 악질적 반민족행위자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라는 규정에 따라 1949년 1월 8일 반민법을 발효하고 제4조 7항, 비행기·병기·탄약 등 군수공장을 책임 경영한 자로서 박흥식을 1차로 구속시킨 것이다. 형벌도 무거웠다. 제4조 7항에 해당하는 자는 10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거나 15년 이하의 공민권을 정지하고 재산의 전부 혹은 일부를 몰수한다고 되어 있었다. 하지만 반민법은 엉성했다. 재판부도 일부 의견을 냈지만 제4조 1항 해당자들부터 구속시키지 않고 7항 해당자인 박흥식부터 구속한 것은 잘못이며, 특히 미국 사법성(당시)이 ‘일정하(日政下)에서 비행기 공장을 건설하고 경영한 것은 전범(戰犯)에 해당되지 아니한다’라는 정식 의견서를 보내와 검찰부가 당황하기도 했다. 결국 구속 103일만인 4월 21일 김병로 재판부장은 박흥식의 보석을 결정했고 9월 26일 대법정에서 열린 결심공판에서는 뜻밖에 검찰관의 논고가 국회를 흥분시켰다. 당시 동아일보 보도를 옮기면, 정광호 검찰관이 오히려 논고를 통해 ‘피고인은 일제하에서도 조선의 상권 수호와 진흥을 위하여 고군분투하며 민족자본 육성의 기수로서 한민족의 긍지와 명예를 떨쳤으며 많은 사재를 희사하여 육영사업에 기울인 공 또한 지대하여 본 검찰관은 피고인이 반민법의 입법정신에 반하는 어떠한 행위도 근거를 찾을 수 없어 구형의 조건이 없음을 고백한다. 다만 이미 기소된 것이니만큼 부득이 공민권 정지 2년을 구형한다’고 논고한 것이다. 당연히 반민법을 허술하게 제정한 국회가 망신을 당하고 결심 판결은 박흥식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당시 법정을 나설 때 소감을 기억하십니까? “그 당시는 검찰부장이 국회의장에게 사표를 내던 시절입니다. 재판부장이 나를 보석으로 석방한다고 했을 때 검찰부에서 항의 파동도 있었습니다. 그런 일들이 있었기 때문에 결심공판 때는 많은 기자들이 몰려왔고, 내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흥미있게 쳐다봤습니다. 그래서 딱 한마디 했습니다. 친일(親日)과 위일(爲日)은 다르다, 나는 일본과 친하게 지냈을지언정 일본을 위해서 노력한 일은 없다, 그 말만 했습니다.” 인견사 공장은 섬유공장 못지않게 입을 것이 부족하던 시절에 꼭 필요했던 산업 아니었습니까? 겨울이 되면 장병들의 의복 문제부터 심각했으니까요. 인견사 공장 건설은 어떻게 됐습니까? “그건 군사정부가 들어선 후에 본격적으로 추진이 됐지요. 그 전에 인촌 김성수 선생이 설립한 경성방직이라고 있었어요. 내가 거기 사장을 맡기도 했었지만 거기서 나오는 태극성 광목은 인기가 아주 좋았습니다. 비록 광목이지만 딸을 시집보낼 때 어느 집이나 태극성 광목 한 필씩 꼭 준비했으니까요. 나는 그보다 화신을 더 육성해야겠다 해서 그동안의 백화점·무역·연쇄점 등 모든 사업을 합병해 화신산업주식회사로 변경시켰단 말입니다. 그게 1950년 1월 1일이야요. 그랬기 때문에 나로서는 변화된 모습을 보여줘야 된다는 생각이 꽉 차 있어서 엄청난 일을 구상하고 있었지요. 그게 남서울 개발하고 원자력발전소 건설입니다.” 1958년 원자력 발전소 구상 원자력발전소 건설을 정부에 건의한 것이 1958년도였다. 경천동지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 소련에서도 57년 6월에 모스크바 근교에 원전을 건설해놓고 실용화하지 못해 극히 조심스러운 실험을 계속하고 있는 판국에 한국에서 원전 건설을 하겠다고 했으니 조선전업(한전 전신)은 말할 것도 없고 정부조차 냉소적인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정부로서는 하고 있는 백화점이나 잘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지나고 보니 한국에 박정희씨가 나타나지 않았으면 거지로 살기에 딱 좋은 공무원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진취성이 없고 개척정신이 아주 없습니다. 68년에 박 대통령을 설득해 추진을 하게 됐습니다만 그거 얘기 다 하면 날 샙니다. 백화점은 그냥 둬도 잘 굴러갈 정도가 됐는데 백화점이나 잘하라는 말은 나를 무시하는 발언이지요. 박용학씨가 시작한 미도파백화점이나 신세계, 그리고 79년 말에 문을 연 롯데, 감히 어떻게 화신에 비교합니까? 롯데는 일본 니혼바시에 본점이 있는 다카시마야 백화점과 제휴를 하고 그 백화점을 흉내 낸 거 아니야요? 거긴 본점도 외제품이 판을 칩니다. 그러니 조선 상권이나 민족자본 얘기는 입 밖에도 꺼낼 수 없지요. 호텔 지을 때도 박 대통령을 업고 이후락씨가 뒷바라지를 했으니 정치적인 산물이고. 결국 내가 막 벌여 나가니까 시기하는 사람들이 백화점이나 잘하라 한 거지요.”<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