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물건 팔려면 문 닫겠다”

양념 350년 시치미야(七味家)
15대째 가업 잇는 최고 양념가게 … 품질 위해 직영 농장 운영
일본 교토의 천년商人 ④

▶① 시치미야 내부 ② 시치미야 외부

교토에는 해마다 1200만 명의 관광객이 들이닥친다. 관광객이 반드시 가는 명소 중 한 곳이 기요미즈데라(淸水寺)다. 기요미즈데라는 서기 778년에 창건한 유서 깊은 절로, 이 절에 오르면 교토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기요미즈데라에 오르는 언덕에는 한국인도 잘 아는 니넨판(二年坂), 산넹판(産寧坂) 등 작은 언덕길이 있다. 이 언덕길 주변에는 수백 년 된 부채가게, 떡가게, 반찬가게 등이 모여 노포 거리를 형성하고 있다. 바로 이 언덕길의 중심 모퉁이에 ‘시치미야’(七味家)라는 양념가게가 있다. 서기 1655년에 개업한 노포다. ‘시치미야’라는 이름 그대로 일곱 가지의 양념을 파는 가게인데, 오늘날 일본에서 양념을 파는 가게 중 바로 이 시치미야를 최고로 친다. 시치미야에 들어서니 관광 비수기인 2월인데도 손님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가게 한쪽에 앉으니 여종업원이 차를 한 잔 내왔다. 교토는 예부터 녹차가 유명하므로 당연히 녹차를 내온 걸로 생각했다. 한 모금 마셔보니 녹차가 아니었다. 고춧가루와 간 참깨 등 일곱 가지 양념으로 만든 양념 차였다. 약간 매콤했으나, 그런대로 맛있었고 그 발상이 일본의 관록 있는 노포다웠다. 잠시 후 이 가게의 점장이자 시치미야의 부사장인 후쿠시마 요시노리(福島良典·36)씨가 나왔다. 자신은 시치미야의 부사장으로 15대째이며, 아버지가 사장으로 있다고 했다. 시치미의 기원은 한약재
‘시치미야’의 특징 □ 아시아 곳곳의 관광객 넘쳐나 □ 양념 차 만들다 양념 만들어 새로운 수요 창출 □ 원료는 무조건 최상의 품질 □ 나쁜 물건을 파느니 가게 문 닫는다 □ 100년 거래 목표로 손님 상대
손님이 많다고 했더니 2월의 경우 하루에 1000명 정도의 관광객이 오는데 고객은 일본인뿐만 아니라 중국인, 대만인, 홍콩인 외에 한국 사람도 많다고 한다. 아닌 게 아니라 손님들 중 한국 아줌마들의 시끌벅적한 목소리도 들린다. 일본인도 음식 맛을 내기 위해 양념을 쓴다. 고춧가루, 참깨, 흑깨, 후추, 산초, 차조기잎, 생강, 고추냉이(와사비), 겨자 등이 그것이다. 본래 칠미, 즉 일곱 가지 양념은 빨간 고추, 생강, 진피, 산초, 검은 깨, 차조기, 대마 열매 등이었다. 요즘은 몇 가지 더 늘었지만, 그래도 시치미가 일본 양념의 기본이 된다. 그중에서 으뜸은 고춧가루다. 일본인은 고춧가루를 안 먹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일본에서도 우동이나 메밀국수 등을 먹을 때 고춧가루를 뿌려 먹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일본의 고춧가루와 한국의 고춧가루는 맛이 다르다. 본래 고추는 한국이나 일본의 토종 음식 재료가 아니었다. 일본에서는 고춧가루를 도가라시(唐辛子)라고 부른다. 즉 당나라에서 전래된 매운 씨앗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고추는 당나라에서 전래된 것이 아니라 원산지인 멕시코에서 유럽을 경유, 다시 동남아를 거쳐 일본에 들어온 것이다. 이렇게 일본에 들어온 고추는 임진왜란 때 조선으로 건너온다. 일본군 병사들이 가지고 들어온 고추 씨앗을 한국에서 재배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고춧가루가 한국의 음식재료로 사용된 것이다.

▶“우리 가게를 한 번 찾아주신 소님과는 앞으로 100년간 거래하겠다.”

임진왜란 이전, 한국의 김치는 지금처럼 고춧가루가 듬뿍 들어간 시뻘건 게 아니었다. 임진왜란 이전에는 고춧가루가 없었으므로 백김치를 만들어 먹었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일본에는 우리가 먹는 것과 같은 고춧가루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지만 대신 일본식 고춧가루가 있다. 칠미당신자(七味唐辛子)가 처음 탄생한 것은 교토가 아니라 도쿄였다. 1626년 도쿄 아사쿠사 야겐보리에 있는 가게에서 처음 고춧가루를 비롯한 일곱 가지의 매운 양념을 팔기 시작한 것이다. 야겐보리라는 가게 이름은 ‘약연굴(藥硏堀)’이라는 동네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에도시대 도쿄 아사쿠사에는 약연굴이라는 지역에서 만든 한방약을 판매하는 가게가 많이 있었다. 그 한방약은 한약이 아니라 일곱 가지의 양념이었다. 일곱 가지 양념이 처음에는 음식이 아니라 한방약의 일종으로 판매되고 있었던 것이다. 고추가 함유한 캡사이신은 고열이 났을 때 오한을 치유하는 효과가 있다. 즉, 땀을 냄으로써 열을 해소시키는 작용을 하는 것이다. 에도시대에는 이러한 과학적 근거를 잘 몰랐지만 그래도 사람들 사이에는 감기를 쫓는 효과가 있어 고추를 먹는 풍습이 있었다.

▶① 상품 모습 ② 시치미야가 들어선 언덕길 ③ 기요미즈데라

한마디로 고추는 의식동원(醫食同源), 즉 약과 음식은 한 가지 뿌리인 것이다. 도쿄에서 야겐보리가 한창 그 명성을 날릴 때인 1655년, 교토의 기요미즈데라 앞에 시치미야가 들어섰다. 처음 시치미야는 가와치야(河內屋)라는 이름으로 가게 문을 열어 차 가게를 운영하다가 그 이름을 시치미야로 바꿨다. 당시 시치미야가 팔던 차는 녹차를 파는 가게가 아니라 고춧가루 차였다. 기요미즈데라의 참배객들은 먼 거리에서부터 걸어왔으므로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그들에게 일곱 가지 양념을 넣은 신자탕(辛子湯)이라는 차를 만들어 팔았던 것이다. 몸이 피곤할 때 녹차에 고춧가루를 풀어 마시자 땀이 나고 힘이 불끈 솟는 기분을 느꼈던 것이다. 그러다 도쿄의 야겐보리는 칠미 양념을 한약재로 바꿔 약재상이 되어 오늘날까지 영업하게 되고 교토의 시치미야는 오사카와 교토를 대표하는 관서지방의 요리에 들어가는 양념을 만드는 쪽으로 길을 바꾼다. 시치미야의 양념이 차가 아닌 음식에 쓰이게 된 것은 그걸 넣으면 음식이 더욱 맛있어진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시치미야의 양념 수요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이것이 유래가 되어 가와치야는 시치미야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그리고 무려 1655년 이후 360년간 시치미야는 일본인의 사랑을 받는다. 그 비결은 특별하기보단 기본을 지키는 쪽이다. 시치미야는 교토 인근에 직영 농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작은 농장만을 가지고는 일곱 가지 양념의 공급이 어려워졌다. 더구나 몇 년 전부터 교토 지방의 땅값이 상승하면서 양념 재배농가들이 속속 문을 닫자 새로운 공급선을 찾아야 했다. 고추의 경우는 일본 중북부 내륙지방인 후쿠이현의 농가와 계약재배를 하고 있고, 후추와 검은 깨의 경우는 아예 그 원산지인 브라질과 계약을 맺어 공급 받고 있다. 시치미야의 계약원칙은 단 하나다. “최상의 품질이 아니면 받지 않는다.” 그러나 시치미야가 일방적으로 재배농가에 기대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도 끊임없이 좋은 종자를 찾아내 그걸 개량해 농가에 보급한다. 또 양념 본래의 맛을 내기 위해 첨가물은 일절 사용하지 않는다. 1970년 태풍으로 직영 농장의 양념 작황이 좋지 않자 고객에게 나쁜 물건을 팔 수 없다고 하여 4개월간 문을 닫은 적도 있다. “나쁜 물건을 팔려면, 가게 문을 닫겠다.” “우리 가게를 한 번 찾아주신 손님과는 앞으로 100년간 거래하겠다.” 시치미야는 고객에게 최고의 양념을 파는 것뿐 아니라 최고의 신용을 팔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