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생. 서울대 건축공학과 졸업. 당대 최고의 대가 김수근 밑에서 근무. 서른한 살에 도미해 1986년 미국 건축사 자격증 취득. 이력만 보면 엘리트 코스 자체다.
하지만 그가 ‘제대로’ 건축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95년 밀알학교를 설계하면서부터다. 그의 나이 쉰여섯 때였다. 그리고 예순세 살에 교수가 돼 3년 학생을 가르친 뒤 정년퇴임했다.
고희를 바라보는 나이에 그 동안 쌓아두었던 에너지를 폭발시키듯, 창의성을 발휘하며 작품을 쏟아내던 그는 지난해 2월 서울시 신청사 현상설계에 당선되면서 건축 인생의 화룡점정(畵龍點睛)을 이뤘다.
봄날처럼 따뜻했던 지난 2월 초 노(老) 건축가 유걸이 일하는 서울 서초구 양재동 아이아크 사무실을 찾아갔다. 아이아크 3인 공동대표 중에서도 최고령자인 유걸은 신입사원과 기다란 책상에 나란히 앉아 일하고 있었다.
파티션 하나 없이 휑하게 전체가 트인 아이아크 사무실에는 대표 집무실이 따로 없기 때문이다. 신입사원과 대표가 똑같은 크기의 책상을 나란히 놓고 일하는 곳. 그곳이 바로 아이아크이고, 유걸의 건축철학이 녹아든 사무실이었다.
서양화가였던 아버지(유형목)의 영향으로 경기고에 다니던 시절 조각을 시작했던 그는 아버지의 넉넉하지 못한 생활을 경험한 터여서 건축과로 진로를 바꿨다. “조각을 하고 싶었지만, 미대에 가면 꼭 굶어 죽을 것 같아 그 타협점을 찾은 것”이 건축학과였다. 건축학과를 나와 집을 지어 팔면 큰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서른까지 큰돈을 벌어 서른부터는 조각을 해야지 하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건축학과에 입학한 뒤 건축하는 것이 재미있어 조각하려고 돈 번다는 생각은 싹 잊었죠.”
어쩔 수 없는 개인주의자
서울대 건축학과 졸업 후 이광로 선생이 운영하던 무애건축에서 일하던 그는 “김수근건축사무소에 가면 건축을 공학이 아닌 예술로 할 수 있다”는 한 선배의 말을 듣고 곧장 김수근건축사무소로 옮겼다. 김수근건축사무소에서라면 조각을 하던 시절에 꿈꿨던 조형적 미를 건축으로 승화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당시 김수근건축사무실에는 김원 광장 대표, 김석철 아키반건축도시연구원 대표, 민현식 건축사사무소 기오헌의 고문 등이 일하고 있었다. 김수근건축사무소에서 처음으로 맡은 프로젝트를 그는 강렬한 조형적 미를 살려 흙으로 빚었다. 김수근도 지나가다 얼핏 보고는 “이게 뭐지? 재미있겠는데?”라며 맞장구를 쳤다.
신이 나서 꼬박 2주 동안 작업했다. 그런데 완성된 프로젝트에 대한 김수근의 반응은 “나중에 자네 사무실 하면 이런 거 해. 나는 이런 것은 못 팔아”였다. 피가 솟구치는 창피함을 느낀 그는 그 뒤 다시는 김수근에게 작품 스케치를 보여주지 않았다. 대신, 개념을 잡아 다이어그램 등을 활용해 논리적으로 분석한 보고서를 만들었다.
‘열린 사회, 열린 공간’을 지향하는 유걸의 건축세계가 잘 드러난 서울시 신청사 모형. |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기보다 객관성을 통해 설계를 진행하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김수근 선생은 젊은 건축가들이 프로젝트 안을 가져가면 집어 던지기 일쑤였는데, 내 안은 한 번도 안 집어 던졌죠. 첫 프로젝트에서 호되게 당한 뒤 이 양반한테 ‘노(No)’라는 말이 나올 설계안은 아예 안 만들었으니까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 시절에 건축을 분석적으로 보는 법을 배웠던 것 같아요. 또 그것이 나중에 미국 설계사무실에서 일할 때 큰 도움이 됐고요.”
김수근건축사무소에서 3년을 일한 그는 28세 되던 해 독립하기로 결심한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단지 내 시간을 더 쓰고 싶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지금처럼 건축사무소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독립한다는 것은 곧 개인사무실을 차리는 것밖에 다른 진로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건축사무소를 차린다는 것은 전혀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광로 선생님 사무실에서 3년, 김수근건축사무소에서 3년 있었으니 다른 건축가에 비해 경력이 짧지는 않았죠. 그럼에도 저는 내가 돈을 받고 건축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어요. 나는 마흔이 될 때까지도 누가 건축가라고 부르면 쑥스러웠어요. 늘 건축을 공부하는 학생 같은 마음이었죠.”
김수근건축사무소에서 프리랜서로 일하던 그는 결국 미국 이민을 결심했다. 마땅히 취직할 곳이 없었던 것도 이유였지만, 답답한 한국사회로부터 도피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저는 싫어하는 것이 많아요. 누가 제게 일을 시키는 것을 싫어하고, 잘못 알려지는 것을 싫어하고, 무엇보다 제약받는 것을 매우 싫어하죠. 저는 자유롭기를 원해요. 한국이 제게는 매우 좁게 느껴졌어요. 당시만 해도 출국이 엄격히 제한됐죠. 그런 답답하고 협소한 공간적 환경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미국 행을 선택했던 것 같아요. 또 집단주의적인 한국사회도 힘들었습니다. 한국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원하든 원하지 않든 맺어야만 하는 관계들이 형식적이고 표면적으로 생각됐거든요. 나는 태어나기를 개인주의자로 태어났거든요. 나는 타인보다 내 자신에 대한 관심이 훨씬 많아요. 그래서 누군가를 가르치는 것도 매우 싫어했고, 대학시절에는 가정교사 아르바이트를 혐오했죠. 강단에 서는 것도 젊어서는 싫어했어요.”
1970년 12월 그는 서울대 건축과 동기로 만난 부인 박혜란 씨와 4살·3살 연년생 두 아이를 데리고 처남이 살고 있던 미국 콜로라도주 덴버로 이민을 떠났다. 4인 가족의 짐은 절반이 채 차지 않은 옷가방 한 개와 현금 700달러가 전부였다.
“LA를 경유해 덴버에 정착했는데 한 달이 지나자 가져간 700달러가 딱 떨어졌죠. 마침 셋째를 임신했던 안사람의 산달도 가까워 왔고요. 그래서 서울에서 작업했던 포트폴리오를 들고 덴버에서 가장 개성이 뛰어난 건축사무소로 알려져 있던 사무실로 찾아갔죠. 마침 그 건축사무소 수석건축가가 진해에서 1년간 해군으로 주둔했던 사람이어서 내가 한국에서 왔다니까 내 포트폴리오를 정성껏 봐줬어요. 그러고는 친구 사무실에 일거리가 많다며 그 사무실을 소개해 줬죠.”
그렇게 소개받아 간 곳이 ‘R.N.L 건축 & 엔지니어링’이다. 애초 2주짜리 계약직으로 취직한 그는 불과 1주일 만에 정식 직원으로 일할 의향이 있느냐는 제의를 받았다.
“후배들과의 경쟁 신경 안 써”
“한국에서 일할 때 김수근 선생은 건축가는 돈 이야기를 하면 안 된다고 늘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월급을 받을 때도 묻거나 따지지 않고 주는 대로 받았어요. 내가 김수근 선생님 사무소에서 받던 월급이 2,000~3,000원이었는데, 당시 이화여대 강당에서 열린 루빈슈타인의 공연 입장료가 6,000원이었으니 거의 굶으면서 일했다고 봐야죠. 그래도 아무도 불평 안하고 일했어요. 그런데 미국에서는 입사가 결정된 첫날 파트너들이 점심식사를 하러 가자고 해서 나갔더니 월급을 얼마 주면 되겠느냐고 대놓고 돈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내가 받은 첫 번째 문화적 충격이었죠.”
LA에서 만난 선배한테 미국에서 취직하면 월급을 어느 정도 받으면 되느냐고 물어봤던 터여서 그는 그 선배가 말해준 대로 800달러를 달라고 말했다. 그의 대답에 파트너들은 700달러를 주겠다고 했다. 그가 800달러를 고집하자 파트너들은 다시 725달러를 제안했다. 결국 연봉협상은 750달러에서 종결됐다.
서울 한남동에 지어질 빌라 모형을 바라보고 있는 유걸. |
“나중에 알고 보니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학사 출신의 초봉이 400달러 정도였어요. 콜로라도 같은 시골에서 800달러면 굉장히 잘 받는 축에 속했죠.”
보조디자이너로 시작한 그는 3개월 만에 정식 디자이너로 승진했다. 6개월 뒤 올려주겠다던 월급도 3개월 만에 800달러로 올라갔다. 그리고 불과 2년 만에 회사에서 이익을 배분받는 파트너 급으로 올라갔다.
“한국도 그렇지만 미국에서도 건축가들이 대부분 말로 건축을 해요. 건축은 논리싸움이거든요. 논리로 건축주를 설득해야 하니까요. 그런데 저는 영어가 미국 건축가들만큼 안 되잖아요. 그러니 무조건 그림으로 승부를 걸었죠. 미국에 있는 동안 정말 스케치를 많이 했어요. 옐로 페이퍼라고 해서 롤로 된 설계할 때 쓰는 종이가 있는데, 그것을 하루에 한 통씩 썼습니다. 그때 정말 스케치는 혹독하게 훈련해서 지금도 스케치만큼은 자신 있어요.”
서서히 미국생활이 안정되면서 무료함이 찾아올 때쯤 석유파동이 터지며 미국의 건설경기도 내려앉았다. 그가 일하던 건축사무실도 구조조정을 시작했다. 마침 좀 쉬고 싶었던 그는 퇴직을 신청했다.
“두 달쯤 뒤 사무실에서 다시 일하자는 연락이 왔는데 안 가겠다고 했어요. 감정적으로 그게 허락되지 않더라고요. 대신 처남과 가구 만드는 사업을 시작했죠. 가구를 1~2년 만들다 아는 친구가 집을 지어 파는 사업을 같이 하자고 해서 그것을 또 같이 했어요. 집을 지어 팔면 돈을 벌 수 있을 것 같아 했는데 결과적으로 돈은 못 벌었지만 건축적으로는 큰 도움이 됐어요. 한국에서부터 쭉 설계를 했지만, 한번도 실제로 집을 지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 내가 그린 스케치에 대한 ‘스케일 감’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현장에서 내가 그린 도면을 직접 시각적으로 보면서 판단하는 일을 3~4년 하고 나자 ‘스케일 감’이 생겼죠.”
1986년 올림픽선수촌아파트 수석디자이너를 맡으며 국내 프로젝트를 시작한 그는 KBS 선정 한국 10대 건축물에 포함된 밀알학교를 비롯해 배재대 국제교류관 및 기숙사, 밀레니엄 커뮤니티센터, 명동성당 100주년기념관, 경부고속철도 천안 역사 등을 잇달아 맡으면서 건축계를 긴장시켰다.
그런 그가 홈런을 친 것은 2008년. 노(老) 건축가는 공모에 출품하지 않겠다던 자신만의 틀을 깨고 서울시 신청사 공모에 참가해 당당히 당선됐다. 그는 “당선 당시 사람들이 내 나이에 주목하는 것이 어색했다”고 말한다. 60세가 넘으면 공모에 응하지 않는다는 국내 건축업계 분위기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상공모에 응모할 때 다른 사람과 경쟁한다는 생각을 안 해요. 내가 만족하는 결과를 내느냐가 중요하죠. 이번에 서울시 신청사 공모에 당선되면서 유명해져서 그렇지 사실 제가 현상설계와 인연이 없어요. 현상설계에 참여해서 붙은 적이 거의 없죠.(웃음) 교만한 생각일 수 있지만 저는 떨어져도 크게 신경 쓰지 않거든요. 내 안이 다른 사람의 안보다 열등해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심사위원들이 내 안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하죠.”
그는 서울시 신청사 건설 과정에서 태평홀 철거 문제를 둘러싸고 논란이 이는 것에 대해서도 입장을 분명히 했다.
“모든 문화유산에는 고유의 가치가 있습니다. 단지 오래됐기 때문에 가치가 있을 수도 있고, 그 건축이 갖는 본질적 아름다움 때문에 가치가 있을 수도 있죠. 또는 그 시대, 그 모양으로 지은 집으로는 유일하기 때문에 가치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여러 가치의 우선순위를 매기는 일이죠. 서울시 본청의 가치를 말하자면, 그것은 단지 오래됐기 때문에 가치가 있을 뿐, 건축적으로 가치가 있는 건축물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 건축물을 어떻게 보존하고 활용할 것이냐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결정할 일이죠.”
서울시 신청사 저작권, 턴키계약한 삼성에 있어
그는 “제가 제안한 안은 지붕을 유리로 뚫고, 현재의 정문을 크게 넓혀 신청사로 이어지도록 한 것”이라며 “양 날개도 바꾸고 싶었지만 참았다”고 말했다. 그는 “이 정도면 본청 건물을 잘 대접했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그는 “현상공모에 당선되기는 했지만, 이후 구체적인 설계 과정에는 참여하지 않아 최종안이 어떻게 정해질지 모르겠다”며 안타까워했다.
그가 설계한 한옥 처마 모양의 독특한 디자인이 현상설계에 당선된 요인이지만, 정작 그가 작품의 주인으로 공식 명기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서울시는 이번 현상설계를 진행하기 2년 전인 2006년 이미 삼성컨소시엄과 ‘턴키’ 방식으로 계약했다. 턴키 계약은 시공사로 선정된 회사가 설계·시공 일체를 한꺼번에 책임지는 계약으로, 이 계약에 따라 서울시 신청사의 설계권 및 저작권은 삼성 컨소시엄의 계열사인 삼우건축이 갖고 있다.
현상공모 당시 서울시 신청사 건설이 삼성 컨소시엄과 이미 ‘턴키’로 계약돼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그는 당선 후 삼성 측에 구체적 설계를 삼성 컨소시엄과 계약하고 싶다는 뜻을 전달했다. 하지만 삼성 측은 계열사인 삼우와 계약돼 있어 유걸의 아이아크와는 계약이 불가능하다고 통보했다. 삼성 측은 대신 자문역으로 참여해 달라는 제안을 해왔다.
이에 대해 유걸은 “자문역은 내가 거절했다”고 말한다. 디자인 개념이 실제 건축물로 옮겨지는 설계 과정에서 숱하게 많은 선택안이 있는데, 자문은 선택 과정에는 참여할 수 없고 단지 선택된 안에 대해서만 의견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앞으로 설계안을 시공하면 건설회사 쪽에서 숱하게 변형시킬 것이므로 내 구상대로 건물이 완성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며 안타까워했다.
건축가 유걸의 건축세계는 독특하다. 대단한 것과 평범한 것을 쉽게 오가며, 실용주의와 그에 반하는 조형의식 사이 또한 편안하게 오간다.
“어떤 모양을 만들든 균형을 깨지 않으려고 하죠. 균형을 깸으로써 나타나는 보기 흉한 것을 만든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새로운 것을 만들려는 생각은 있어요. 생각의 한계를 깨고 싶다는 생각은 많이 하죠. 벽은 벽인데 벽 같지 않은 벽이라든지, 바닥은 바닥인데 바닥 같지 않은 바닥이라든지 하는 것을 만들고 싶죠. 그래서 제 건축은 한국의 건축법규와 참 안 맞아요.(웃음) 설계해 가져가면 1층인지 2층인지 잘 판단이 안 서니 허가당국이 싫어하죠. 벽인지 천장인지 구분이 안 되니 황당하게 생각하기도 하고요.”
“첨단 재료·기술 안 쓰는 것은 미련한 일”
그는 김수근 선생이 “나중에 너 사무실 생기면 그때 이런 건물 만들어 팔라”고 했던 건물을 요즘 짓고 있다며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는 그 건물을 짓고자 해도 지을 수 없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지금은 컴퓨터로 자유곡면을 얼마든지 구현해낼 수 있지만, 그 시절만 해도 그것이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건물을 지을 때마다 매번 새로운 것을 하고 싶어요. 이전에 없었던 것을 해보고 싶은 본능이 있죠. 인간의 창의성을 본래적 속성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새로운 재료가 나오면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죠. 환경을 이야기하는 건축가 가운데 새로 나온 첨단 재료와 기술을 안 쓰고 흙집으로 돌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굉장히 잘못된 생각이라고 봐요. 미련한 생각이죠.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 나올 다양한 재료와 기술을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을 오늘의 젊은 건축가들을 보면 부럽죠. 야, 내가 조금만 더 젊었으면 나도 그런 재료를 마음껏 써볼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는 자신의 작업 중 가장 큰 의미를 부여하는 건축으로 서울 성북동 서세옥 선생의 양옥을 꼽았다. 이 프로젝트에서 그는 연경당을 본뜬 멋진 한옥 바로 옆에 잘 지은 양옥을 지어 올렸다.
“처음에는 연경당과 관계를 고민했죠. 한옥의 공간구조를 재해석해 받아들일 수 있는 대안을 고민했습니다. 하지만 단지 한옥의 배경이 되는 건물을 짓기는 싫었고, 조화를 이루는 디자인도 썩 내키지 않았죠. 그래서 내린 결론이 한옥은 한옥이고, 새 건물은 완전히 다른 집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다행히 서세옥 선생님께서도 이런 제 생각을 잘 받아주셨죠. 전적으로 저의 판단을 신뢰하셨고요.”
그는 서세옥 선생의 집을 지으며 “한국이라는 콘텍스트에서 건축가로서 어떻게 일할 것인지 명확하게 깨닫게 됐다”고 말한다. ‘건축은 건축이고, 자연은 자연이고, 건물은 건물이고, 주변은 주변’이라는 생각을 그 전부터 하고는 있었지만 서세옥 선생 집을 작업하며 확신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는 “건축은 건축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건축가와 건축주, 나아가 시공사가 함께하는 공동작업”이라고 말한다. 건축가란 건축주의 꿈을 현실로 구현하는 사람이지 건축가 스스로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다. 때문에 그는 결국 좋은 건물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건축주가 어떤 꿈과 소망을 갖고 있는지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한국에서는 건축에 대한 인식이 너무 부족한 것 같아요. 신문에 건축 섹션이 없을 뿐 아니라, 가끔 건축 이야기를 다룰 때도 문화면이 아니라 부동산면에서 다루잖아요? 이는 건축을 문화가 아닌 재화가치로만 인식하는 뜻이잖아요? 안타까운 일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