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영익 등 보빙사 큰절로 禮 갖춰

“조선의 청년 실세, 아서 대통령 만나 독자외교 초석 다졌다”
조선 개화기 100가지 경제풍경 ⑭ - 코리안 프린스, 미국 대통령을 방문하다
전봉관의 근대사 가로보고 세로읽기

한국이 서양으로 파견한 최초의 외교사절 보빙사. 앞줄 왼쪽부터 로웰, 홍영식, 민영익, 서광범, 우리탕, 뒷줄 왼쪽부터 현흥택, 미야오카, 유길준, 최경석, 고영철, 변수.

민영익은 1860년 민태호의 독자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7대조 민유중의 딸이 숙종 계비로 책봉되면서 중앙 정계의 핵심 세력으로 떠올랐지만, 고조부가 예조판서를 지낸 이후로는 권력에서 점차 소외되었다. 민영익이 태어났을 때, 민태호는 동생 집에 얹혀살면서 콩죽으로 간신히 연명하는 처지였다.

부친의 초상 때 관을 살 돈이 없어 시신을 짚자리로 말아 출상했을 정도로 가난했다. 간구했던 민영익의 집안에 서광이 비치기 시작한 것은 그가 7세 되던 해인 1866년 민치록의 딸이 왕비로 책봉되면서부터였다. 민비 책봉 이전 몇 안 되는 과거 합격자였던 그의 숙부 민규호는 일약 권력의 핵심으로 떠올랐고, 1870년 그의 부친도 과거에 합격해 벼슬길에 올라 승승장구했다.

유년기를 몰락한 양반집안의 후예로 보냈던 민영익도 10대에 접어들면서 권문세가의 후예로 신분이 상승했다. 민영익이 15세 되던 해, 민비의 오빠 민승호가 집으로 배달된 의문의 소포가 폭발해 사망했다. 민승호는 민치구의 아들로 태어나 민치록에게 입양된 민비의 유일한 혈육이었다.

민씨 척족의 수장으로 세도를 부리던 민승호가 폭사하자, 민씨 일족들은 자신의 아들을 민승호의 사후 양자로 세우기 위해 각축을 벌였다. 하지만 민비는 오빠의 사후 양자로 민영익을 일찌감치 점지해둔 상태였다. 민태호는 아무리 일가라지만 하나뿐인 아들을 양자로 줄 수 없다고 버텼지만, 동생과 민비의 거듭된 설득으로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민태호는 품에서 아들을 잃은 대신 권세를 손아귀에 움켜쥐었다. 민비는 친정아버지의 제사를 받드는 유일한 혈육인 민영익을 끔찍이 아꼈다. 촌수로는 조카였지만, 나이 차이가 9세밖에 나지 않았기 때문에 친동생처럼 대했다.

민영익은 민비의 후광을 업고 18세에 과거에 급제해 이듬해 이조참의(정3품)에 제수되는 등 파격적으로 승진했다. 불과 약관의 나이에 병권, 재정권, 외교권을 장악해 명실상부한 민씨 척족의 수장이자 조정의 최고 실력자로 등극했다.

샌프란시스코에 상륙한 코리안 프린스

민영익의 집은 그를 만나고자 하는 방문객들로 항상 들끓었다. 조동희, 홍영식, 심상훈, 김옥균, 어윤중 등 ‘팔학사(八學士)’라 불리는 명문가 자제들이 민영익의 집을 자주 찾아 어울렸다. 조동희는 영의정 조두순의 양손자였고, 홍영식은 영의정 홍순목의 아들이었으며, 심상훈은 고종과 이종사촌이었다.

팔학사는 내로라하는 명문가 자제인 데다 민영익보다 연배도 5~10세 이상 높았지만, 약관의 최고 실력자의 신임을 얻으려 애썼다. 민영익은 동년배의 개화파 청년들과 어울리며 개화의 필요성을 인식했고, 실제로 개화파의 든든한 후견자 역할을 했다. 그와 동시에 민영익은 기득권 유지에 혈안이 된 민씨 척족의 수장 역할도 맡았다.

몸은 수구파에 있으면서 마음은 개화파에 있는 모순된 정치적 입지 덕분에 민영익은 두 세력 모두의 지지를 받았다. 민영익은 1882년 9월 임오군란 이후 일본에 사과사절이 파견될 때 김옥균과 함께 특별수행원 자격으로 동행했고, 같은 해 12월에는 묄렌도르프와 함께 청국으로 건너가 차관 도입 문제를 협의했다.

1883년 7월, 고종이 미국으로 보빙사를 파견하기로 결정하자, 민씨 척족과 개화파가 한목소리로 민영익을 전권대신으로 추천했다. 민영익은 외교의 실질적 수반이었던 데다 일본과 청국에 다녀온 경험이 있었다. 부대신에는 현직 영의정의 아들 홍영식, 종사관에 서광범, 수원(隨員:수행원)에 유길준, 최경석, 변수, 고영철, 현흥택, 통역으로 우리탕(吳禮堂)이 임명되었다.


1. 보빙사 일행의 신임장 제정식을 묘사한 삽화. ‘뉴스페이퍼’ 1883. 9. 24. 2. 뉴욕헤럴드 1883년 9월 29일자에 실린 민영익의 부임사.

중국인 우리탕을 제외하면 모두 개화파 인사들이었다. 서광범은 보빙사 일행의 행정 실무를 맡았고, 유길준과 변수는 일본어 통역, 고영철은 중국어 통역, 무관 출신 최경석과 현흥택은 경호 역할을 맡았다.

중국인 우리탕은 미국 유학을 다녀온 후 묄렌도르프에게 발탁돼 조선해관 총세무사에 근무하고 있었다. 우리탕이 영어를 중국어로 옮기면 고영철이 중국어를 한국어로 옮기는 식으로 이중 통역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우리탕의 영어 실력이 신통치 않아 중국어를 매개로 한 이중 통역은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았다. 제물포항을 출발한 보빙사 일행은 일본에 들러 한 달간 머물렀다.

그동안 일본 주재 미국공사관의 주선으로 미국인 로웰(P. Lowell)을 참찬관 및 고문으로 고용했다. 보빙사 내 서열은 서광범과 유길준 사이인 네 번째였다. 로웰은 조선정부에 고용된 최초의 미국인이었다.

보스턴 명문가 출신인 로웰은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고, 1880년부터 일본에 머물면서 여행과 저술에 전념하고 있었다. 그의 형은 하버드 대학 총장이었고, 동생은 저명한 여류시인이었다.

로웰은 일본어를 조금 구사할 줄 알았고, 개인비서 미야오카(宮岡恒次郞)가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해 보빙사 일행의 통역은 주로 일본어를 매개로 한 이중 통역으로 이루어졌다. 1883년 9월 2일, 4개 국적 11명으로 구성된 보빙사 일행을 태운 태평양 횡단 여객선 아라빅(Arabic)호가 샌프란시스코항에 도착했다.

푸트 공사가 미국 국무부와 사전에 조율해둔 덕분에 보빙사 일행은 도착 직후부터 미국의 국빈으로 환대 받았다. 미국 언론은 ‘은둔국’ 조선에서 최초로 외교사절이 방문한 것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미국이 최고 등급의 외교관을 조선에 파견해준 것을 고종이 고마워했듯, 조선이 ‘왕자(Prince)’와 ‘총리의 아들’을 미국에 파견해준 것에 대해 미국 언론들은 앞다투어 경의를 표했다.

보빙사 일행이 묵은 팰리스호텔에는 샌프란시스코 시장, 상공회의소 부회장, 무역협회 부회장, 육군 장군, 해군 제독 등 정·재계 인사들의 방문이 줄을 이었다. 샌프란시스코 상공회의소는 보빙사 일행을 위한 환영 연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연회에는 300여 명의 상인이 참가해 조선과 교역 가능성을 타진했다.

9월 7일, 보빙사 일행은 샌프란시스코 시청을 예방해 환영해준 바틀렛(W. Bartlett) 시장에게 사의를 표하고, 대륙횡단열차를 타고 시카고를 향해 출발했다. 열차는 5일 밤낮을 달려 시카고에 도착했다. 역에는 남북전쟁의 전쟁영웅 셰리던(P. H. Sheridan) 중장이 영접을 나왔다. 보빙사 일행은 마차 2대에 나눠 타고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파머하우스로 안내되었다.

보빙사 일행은 시카고에서 1박하고 이튿날 저녁 워싱턴을 향해 출발했다. 미국 국무부는 조미조약을 체결한 슈펠트(R. W. Shufeldt) 제독에게 보빙사 일행의 영접을 맡길 계획이었다. 하지만 슈펠트 제독이 해군부 자문위원장 직무와 병행하기 어렵다고 고사하는 바람에 영접 책임자로 해군 소위 포크(G. C. Foulk)가 임명되었다.

전권대신의 영접을 위관급 장교가 맡는다는 것은 심각한 의전상 결례였지만, 보빙사 일행 중 외교 의전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미국인 로웰뿐이어서 크게 문제되지는 않았다. 9월 15일 오전 보빙사 일행은 국무부 차관보 데이비스(J. Davis)와 해군 소위 포크의 영접을 받으며 워싱턴역에 도착해 알링턴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국무부는 보빙사 일행을 위해 각국 외교사절을 초청한 연회를 열어주었지만, 또 하나의 심각한 의전상 결례를 범했다. 아서(C. A. Arthur) 대통령이 뉴욕을 방문하느라 백악관을 비운 것이었다.

큰절로 시작된 신임장 제정식


보빙사 일행이 1883년 9월 2일부터 7일까지 머무른 팰리스호텔. 1906년 대지진과 화재로 소실되었지만, 1909년 그 자리에 원형을 살려 재건되었다.
국무부는 보빙사 일행을 마냥 기다리게 할 수 없어 뉴욕 피프스애비뉴(Fifth Avenue)호텔에서 신임장을 제정하도록 했다. 워싱턴에서 이틀을 지닌 보빙사 일행은 9월 17일 또다시 뉴욕행 밤차에 올라야 했다.

신임장 제정식은 9월 18일 오전 11시 피프스애비뉴호텔 1층 대접견실에서 거행되었다. 아서 대통령을 중심으로 국무부 장관과 국무부 차관보가 접견실 중앙에 서고, 국무부 관리와 장교들이 그 뒤에 도열했다.

보빙사 일행은 민영익을 선두로 서열에 따라 일렬로 대기실에 들어왔다. 대접견실에 서 있는 아서 대통령을 발견하자 보빙사 일행은 민영익의 지시에 따라 대통령에게 큰절을 했다.

23년 전 주미 일본 공사가 신임장을 제정할 때는 큰절을 하지 않고 목례와 악수로 예의를 표했다. 미국인 눈에 우스꽝스러워 보였지만, 큰절은 조선 관리가 외국 국가원수에게 표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의전이었다. 상호 간에 간단한 소개가 끝난 다음, 민영익이 아서 대통령 앞에서 정중하고 낭랑한 목소리로 부임사를 읽었다.

“사신 민영익, 홍영식 등은 대아미리가(大亞美里加) 합중국 대백리새천덕(大伯理璽天德)께 아뢰옵니다. 사신 등이 대조선국 대군주 명을 받자와 대신으로 대백리새천덕과 미합중국 모든 인민이 한 가지로 안녕을 누리시기 청하오며, 두 나라 인민이 서로 사귀고 우의를 돈독히 하기를 바라노이다.”

국서 제정식은 불과 15분 만에 막을 내렸지만, 조선도 서양 국가를 상대로 독자적인 외교를 펼칠 수 있는 독립국임을 전 세계에 알린 뜻 깊은 행사였다. 하지만 청국의 내정 간섭으로 조선이 미국에 상주 공관을 파견하기까지는 그로부터 4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홍영식·유길준·변수·서광범 등 각계 맹활약
보빙사 수행원 누구였나?
1883년 미국으로 파견된 보빙사 일행은 귀국 후 각계에서 맹활약했다. 홍영식은 미국에서 우편제도를 도입해 우정국을 설립했고, 최경석은 농업기계와 종자를 도입해 농무목축시험장을 건설했다. 유길준은 일행이 돌아간 이후에도 미국에 남아 유학했고, 유럽을 거쳐 귀국한 이후에는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서유견문』(1895)을 집필했다.

변수와 서광범은 갑신정변의 주체 세력으로 참가했다가 역적으로 몰려 미국으로 망명했다. 변수는 메릴랜드 농과대학을 졸업해 한국인 최초의 미국 대학 졸업자로 기록되었지만, 졸업한 지 불과 4개월 만에 교통사고로 사망해 큰 업적을 남기지는 못했다. 서광범은 막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다가 미국 시민권을 획득해 미국 하급공무원으로 취직했다.

1894년 갑신정변 세력에 대한 사면령이 내려지자, 귀국 후 법부대신에 취임해 한국에서 최고위직에 오른 외국인으로 기록되었다. 서광범은 미국인이면서 주미 조선 공사로 부임하는 이색적인 경력도 지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