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문디자인플라자는 미래에 서울 역사의 일부 될 것”

“30년 전 아이디어 현실화하는 것 흥미로워”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설계한 자하 하디드


이라크 출신 여성건축가로 독창적이고 환상적 공간 연출가로 세계적 주목을 받는 자하 하디드(Zaha Hadid·59). 2007년 ‘동대문디자인플라자&파크’ 국제 지명설계 공모에서 당선되면서 한국에 이름을 알린 그는 렘 쿨하스(Rem Koolhaas)·렌조 피아노(Renzo Piano)·노먼 포스터(Norman Foster)와 함께 현존하는 최고의 건축가 중 한 명으로 꼽힌다.

2004년에는 여성건축가로는 최초로 ‘건축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받았다. 하디드는 실험적 건축이론가로 먼저 이름을 알렸다. 하지만 난해한 설계 때문에 ‘페이퍼 아키텍트’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좀처럼 실제 건축 기회를 잡지 못하던 그에게 세계적 명성을 안겨준 건물은 1994년 독일에 세워진 비트라소방서다.

비트라소방서는 칼처럼 날카로운 예각이 두드러진 건축물로, 정사각형을 찾아보기 힘든 건물이다. 이는 과거 건축에서 규정하던 룰을 깨는 것으로, 현대의 불안과 부조리를 나타내는 작품으로 평가받았다.

이후 하디드는 독일 라이프치히 BMW센트럴빌딩과 이탈리아 뉴라지크현대미술관 등 수많은 건축물 설계를 맡으며 건축계의 스타로 떠올랐다. 뿐만 아니라 하디드는 스와로브스키·뒤퐁·사와야&모로니·알레시·이스태블리드&선즈사의 제품을 디자인했으며, 뉴욕 구겐하임미술관, 빈 예술관, 런던 헤이워드갤러리 등의 인테리어 작업도 담당했다.

하버드대 디자인대학원, 일리노이대 건축학부, 컬럼비아대 다스터스 스튜디오 등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현재는 빈응용예술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DDP 착공식 참석차 서울에 들른 그를 지난 5월1일 신라호텔에서 만났다. 자하 하디드는 시차 때문에 피곤해 하면서도 2시간 가까이 시간을 내주었다.

특히 이라크 바그다드에서의 어린 시절을 회고할 때는 그 어느 때보다 흥겨워하며 한참을 이야기했다. 또 전날 저녁에는 삼성리움미술관에 다녀왔다며 한국문화에도 강한 호기심을 보였다.

- 선생님의 건축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독특합니다. DDP 프로젝트 역시 한눈에 자하 하디드의 건축임이 드러날 정도로 인상적입니다. 어떤 개념 하에 작업한 것입니까?

“기본적으로 건물과 주변 경관이 긴밀하게 어우러지는 것을 개념으로 잡았습니다. 작업하면서 한강 위성사진을 활용했는데, 한강 위성사진을 보면서 DDP 프로젝트의 핵심은 공원과 건물이 어우러지도록 조화롭게 배치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그 부분을 출발점으로 삼았습니다.

또 이를 표현하기 위해 두 액체가 서로 경쟁하면서 흐르는 이미지를 기본 개념으로 잡았죠. 또 이를 실현하기 위한 기술이 매우 중요했는데, ‘유동성(fluid) 시뮬레이션’이라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DDP, 한강 위성사진에서 아이디어 얻어


자하 하디드가 1994년 설계한 독일 바일암라인의 비트라 소방서. 이 작품으로 자하 하디드는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 국내에서는 DDP가 서울의 역사와 주변환경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비판이 있습니다.

“그런 비판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시겠지만 운동장을 철거하는 과정에서 이간수문이 발굴됐습니다. 이간수문은 역사적 건축물이라고 생각하지만, 현재의 동대문 주변, 그러니까 철거된 동대문운동장 등 지금 DDP를 짓는 곳이 역사적 장소는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이 과거가 중요하기 때문에 과거의 모습을 닮은 건축물을 만들어 과거를 기려야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우리가 지금 만드는 것 역시 미래에 보면 도시 역사의 일부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런 생각으로 이번 프로젝트에 임했습니다. 또, 내가 아시아에 대해 독특하다고 느낀 점은 정원이나 녹지경관에서 돌을 많이 사용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아시아의 전통을 강조한 부분을 이번 프로젝트에 많이 반영했습니다.”

- DDP는 디자인 측면에서도 실험적이지만, 실제 건축 시공에서도 매우 실험적인 것으로 압니다. 과연 개념대로 지어질 수 있을지 우려하는 사람도 적지 않은데요.

“아이디어를 실제로 시공하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 변화가 가해지는 것은 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현재의 컴퓨터 기술 발전을 고려했을 때 개념대로 시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합니다. 이미 다른 나라에서는 이와 비슷한 개념의 건물이 지어졌습니다. 한국에서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봅니다.”

자하 하디드의 대표작 중 하나인 독일 라이프치히 BMW 빌딩 내부(2006).

1950년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태어난 그는 베이루트의 아메리칸대에서 수학을 전공하고, 영국 런던의 명문 건축학교인 AA스쿨(Architectural Association School)에서 건축을 공부했다. 하디드는 “1960년대는 중동에서 한창 근대화운동이 일고 있었고, 이에 맞물려 이라크에서는 건축 붐이 일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건축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말한다.

AA스쿨 졸업 후 메트로폴리탄건축사무소(OMA, Office of Metropolitan Architecture)에 입사한 그는 1980년 직접 자하 하디드 오피스를 설립해 오늘날 300명 이상의 건축가가 일하는 건축사무소로 키웠다. 현재 그의 사무소에서 진행 중인 프로젝트는 DDP 프로젝트를 비롯해 전 세계적으로 50여 건에 달한다.

- 건축 외에 가구·인테리어 디자인 등 다양한 일을 하십니다. 최근에는 신발도 디자인한 것으로 아는데, 어떤 일에 가장 흥미를 느끼시나요?

“전체적인 것의 일부로서 가구나 신발을 디자인하죠. 물론 중심은 건축입니다. 다른 일은 이에 따른 부수적인 것으로 보시면 됩니다. 사무실 차원에서 보자면 전체 인력의 80%가 건축을 설계하며, 10% 정도가 가구 등 제품 디자인을, 10% 정도가 도시설계를 합니다.”

- 선생님의 건물을 보면 실험적인 것이 많습니다. 자신의 건축 스타일을 설명한다면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제가 건축을 공부하던 1970년대 후반에 유행했던 것이 ‘모더너티’였습니다. 과장된 형태의 모더니티가 굉장히 유행했는데, 저를 포함한 일부 학생은 그것이 완결된 형태가 아니라고 봤죠. 좀더 발전시켜야 할 필요성을 많이 느꼈습니다. 당시 모더니티라는 것은 기존의 것을 깨 부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개념이 많았는데, 저희는 그보다 기존의 맥락 속에서 그 맥락을 중요시하면서 발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 고민 속에서 형태를 일그러뜨린다거나 하는 것을 시도하기 시작했죠. 지형학을 응용해 도입하기도 했고요. 굉장히 오랜 세월에 걸쳐 다양한 실험을 해본 결과가 오늘날 제가 짓는 부정형의 다자인입니다.”

자하 하디드는 자신의 디자인 철학에 대해 “현대인은 연속적이고 반복적이던 근대와 완전히 다른 시대를 살고 있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고 설명했다.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의 노드파크 케이블 철도역사(2007).
“근대에는 모든 사람이 똑같이 생긴 집에 살고 똑같이 생긴 차를 타고 비슷한 옷을 입었지만, 현대인들은 특화한 사회에 살고, 개개인이 특수성을 갖게 됐습니다. 때문에 저는 제품이나 빌딩을 디자인할 때도 그때 그때의 환경에 적응하는 디자인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고정된 틀이 아니라 유동적이고 개방적이고 연결이 잘 되는 제품이나 빌딩을 디자인하고자 고민하죠.

이런 고민 속에서 전혀 다른, 저만의 새로운 디자인 언어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이것은 복잡하고 다양하다는 특성을 갖습니다. 즉, 과거에는 제품을 생산할 때 먼저 형틀을 만들어 계속 똑같은 제품을 만들어 냈다면, 이제는 우리가 어떤 문제에 부닥칠 때마다 그 상황에 맞는 해결책을 찾아내야 하는 것이죠. DDP만 해도 굉장히 특이한 구성이 자연스럽게 통합된 모습인데, 이는 근대의 건물과 완전히 다른 모양이라고 할 수 있죠.”

- 프로젝트의 영감은 주로 어디서 얻으시나요?

“워낙 여러 가지로부터 영감을 얻어 뭐라고 꼭 집어 말하기는 어렵네요. 초기에는 모더니즘이나 건축 안에서의 예술에서 영감을 많이 얻었는데 지금은 지금까지 제가 해온 작품들에서 영감을 얻는 경우도 많은 것 같아요. 딱 하나를 지정해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여러 가지에서 영감을 얻습니다.”

- 지금까지 해오신 다양한 프로젝트 중에서 스스로 가장 만족하는 프로젝트를 꼽는다면 어떤 것입니까?

“역시 대답하기가 참 어려운 질문이네요. 프로젝트마다 밤을 새워가며 열정을 바쳐 열심히 일하기 때문에 프로젝트마다 느끼는 바가 모두 다릅니다. 홍콩의 피크클럽이나 독일 라이프치히의 BMW빌딩 등 지금까지 여러 프로젝트를 해왔는데, 앞의 작품이 다음 작품에 영감이나 영향을 주는 경우가 굉장히 많아 어느 한 작품을 딱 찍어 말하기 힘든 측면도 있습니다. 또, 건축이란 표준화된 작업이 아니라 프로젝트마다 굉장히 다른 작업이어서 어떤 것이 내 마음에 가장 든다고 하기도 어렵고요.”

자하 하디드의 디자인이 점차 직선에서 곡선으로 변하는 것 같다는 질문에 하디드의 홍보담당 비서 로저 하위는 “컴퓨터 기술의 발전 덕분”이라고 말했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2차원 곡선까지만 가능했지만, 지금은 소프트웨어의 발전으로 3차원 곡선까지 설계가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좀더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곡선 활용이 가능해졌고, 이를 적용한 것이 DDP라는 설명이었다.

하지만, 정작 자하 하디드는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 직접 스케치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사무실에 워낙 컴퓨터를 잘 다루는 건축가가 많아 나까지 컴퓨터를 배울 필요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조감도.

“아무래도 저는 나이도 있고, 컴퓨터를 익숙하게 다루는 세대가 아니기 때문에 계속 손으로 작업합니다.(웃음) 1970년대 후반 학생이었을 때는 머리 속으로 생각하는 것을 도면에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배운 것이 그래픽 테크닉이었어요. 입체 드로잉 기법 등을 배웠죠. 단지 드로잉에 국한한 것이 아니라 건축적 측면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드로잉을 배운 것이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렸죠. 그래서 초기 디자인에서는 입체적 측면이 많이 부족했습니다.”

- 첫 프로젝트부터 최근의 작품까지 작업을 되돌아보면 어떻게 변해왔다고 생각하시나요?

“초창기 작품의 경우에 매우 유사한 지점들이 있는데, 드로잉이나 추상적이고 파편화한 표현에 초점을 둔 것이죠. 그 이후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나가는 단계로 옮겨갔죠. 근래에는 건축이 지향해야 할 방향, 즉 좀 더 유동적 공간 구성에 주안을 둡니다.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발전’한 셈이죠.”

- 자하 하디드 디자인의 특징을 스스로 설명한다면 어떤 점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드로잉이나 조형에서 형태를 약간 뒤트는 왜곡(distortion)을 특징으로 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드로잉이나 그래픽 프레젠테이션에 관심이 많습니다.”

- 왜 사람들이 자하 하디드의 디자인을 좋아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에 대한 대답은 사실 제 입장에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한참 생각하다) 제 생각에는 사람들이 공원이나 자연경치를 보면 좋아하는 것처럼 제 작품을 좋아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하지만 초기에는 사람들이 제 작품에 대해 굉장히 회의적이었어요. 냉소적 반응도 있었죠. 재미있는 것은 항상 제게 가장 큰 지지를 보내주는 사람들은 학생들이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30년 전 제가 전혀 인정받지 못하던 건축가였던 시절에도 학생들은 저를 따르고 많은 지지를 보내줬어요. 또 저의 낙관주의적 사고를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 이라크 출신입니다. 이슬람의 뿌리가 오늘의 건축세계를 형성하는 데 영향을 주었습니까?

“당연히 제 뿌리가 그곳이니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제 어린 시절 중동은 지금과 달리 분위기가 좋았습니다. 한창 근대화가 이뤄지던 시절이어서 굉장히 멋진 건물이 많이 지어졌고, 새로운 아이디어와 특히 진보적 아이디어가 팽배했죠. 또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나 바빌론 문명 같은 역사적 문명의 흔적도 남아있었고요. 이런 것들이 분명 제게 영향을 미쳤겠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는 설명하기 힘듭니다.”

이 부분에서 자하 하디드는 자신의 가족과 이라크에서의 어린 시절에 대해 한참 동안 이야기했다.

“제 세대와 제 아버지 세대까지만 해도 이라크에는 외국에서 공부한 사람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제 아버지께서는 1920년대 영국의 명문인 LES를 나오셨고, 외삼촌은 스탠퍼드대를, 오빠는 버클리대를 졸업했죠. 이 분들은 이라크의 개혁과 근대화에 관심이 많았죠. 실제로 할아버지께서는 당시 바그다드에 최초로 영화관을 지으실 만큼 진보적 생각을 가진 분이었어요.

또 이라크가 왕국이던 당시 현재의 이라크민주당의 모태가 된 정치그룹인 아할리그룹을 결성해 이라크 개혁운동을 일으켰죠. 뿐만 아니라 교육열도 무척 높으셔서 학교도 많이 열었고요. 저 역시 이라크에서 기독교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학교에 다녔는데, 수녀님들의 열성이 높아 매우 힘들게 공부했던 기억이 납니다.

전체적으로 제가 살던 당시의 이라크는 굉장히 활기찬 분위기였어요. 지오 폰티·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등 유명 건축가의 건물도 많이 지어졌죠. 지금의 일본이나 한국처럼 전통적인 것과 현대적인 것이 공존하는 분위기였습니다.”

- 최근 이라크를 방문하신 적이 있습니까? 마지막으로 이라크를 방문한 것은 언제입니까?

“마지막으로 방문한 것이 거의 30년 전입니다. 방문하지 않은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라크 침공 이후 이라크에 남아계신 분들이 없기 때문에 안 갔어요. 지금은 기회가 있으면 위험하지 않기 때문에 한 번쯤 가봐도 좋을 것 같아요. 또 예전에는 비자를 얻기 힘들어 못 갔어요.”

“유동적 공간 구성에 관심 많아”


자하 하디드가 1983년에 그린 홍콩의 ‘The Peak Blue Slabs Painting’.
- 궁극적으로 어떤 건축물을 짓고 싶나요?

“사람들은 항상 제가 내놓는 아이디어에 대해 너무 이론적 디자인이다, 실제 시공은 어렵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이론적으로 생각했던 것들이 실제로 실현되는 것에 대단히 흥미를 느낍니다. 또 마스터플랜 같은 것을 통해 도시계획 같은 큰 스케일의 프로젝트도 재미있고요.

방금 이라크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는데, 이라크의 도시계획에 참여할 수 있다면 상당히 흥미로울 것 같습니다. 지금 제가 운영하는 사무실은 대규모 도시계획에서 스푼 디자인까지 다양한 스케일의 디자인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조금 전 이라크에서의 어린 시절에 대해 말씀 드렸는데, 중동에서 자랐다는 것은 사실 서구에서 자라는 것과는 상당히 다른 일상생활에 노출됐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그다드는 도시화가 많이 돼 서구의 다른 도시와 크게 차이가 없지만, 중동 유목민들의 생활은 상당히 다릅니다. 유목민사회에서는 시간과 장소 등 모든 것이 유동적이고 경계라는 것이 딱히 존재하지 않습니다.

큰 의미도 없고요. 이런 영향 때문인지 요즘 제가 골똘히 생각하는 개념이 마치 두 가지 액체가 유동적으로 흐르면서 서로 유기적으로 얽혀있는 이미지에 대한 것들입니다.”

- 현재 세계무대에서 활동 중인 건축가들 가운데 여성건축가는 매우 드문 편입니다. 건축가의 세계가 여전히 남성들의 세계라는 데 동의하시나요?

“제가 성장할 당시 이라크에는 여성건축가가 많았습니다. 때문에 영국으로 유학하기 전까지만 해도 여성건축가에 대한 편견이 있을 것이라거나 내가 여자여서 힘들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죠. 그런데 나중에 보니 확실히 여성에 대한 편견도 있고, 또 외국인에 대한 편견도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됐죠.

하지만 제가 다녔던 학교의 학장님이나 동료 건축가들이 굉장히 많이 성원해주고 격려해줬기 때문에 그러한 편견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건축가로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건축에 100% 헌신을 해야 합니다. 문제는 여성은 출산과 육아 때문에 경력이 단절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들의 경우 다시 대규모 스케일의 설계를 맡게 되기가 매우 힘듭니다. 때문에 저는 건축이 여전히 남성들의 세계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하겠습니다.”

- 과거의 디자이너나 건축가 중 당신에게 영향을 미친 사람이나 특별히 높게 평가하는 이가 있다면요?

“많은 분이 있죠. 예를 들어 에리히 멘델존(Erich Mendelso
hn)·미스 반 데어 로에(Mies Van der Rohe)·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 그리고 구성주의 건축가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 특별히 친하게 지내는 건축가가 있으시나요?

“모두 친구이자 경쟁자여서 말씀 드리기가 조금 어렵습니다. 그 중에서 꼽는다면 우선 제 스승이었던 렘 쿨하스와 친분이 깊고, 스티븐 홀·프랭크 게리 등과도 가깝게 지냅니다. 건축가들의 세계는 매우 거칠고, 이런 점들이 우리를 매우 경쟁적으로 만듭니다. 때문에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지난 30년간 건축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사람에는 거의 변화가 없었다는 점입니다. 때문에 이들은 모두 매우 명민할 뿐 아니라 놀랍도록 끈기 있는 분들입니다.”

- 마지막으로 후배 건축학도들에게 조언한다면?

“열심히 일해라. 재능도 물론 중요하고, 비전도 중요하지만, 저는 가장 중요한 것은 열심히 일하고 끊임없이 노력하고, 연습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젊은 세대에게 하고 싶은 말은 ‘열심히 일해라’입니다.”